<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84화>
쿵쿵쿵쿵!
격렬한 비트와 화려하게 번쩍이는 사이킥 조명 아래, 비키니를 입은 남미의 육감적인 미녀들이 돌아다니는 호텔의 풀 파티.
"꺄르르."
"호호호."
빨간색, 하얀색 비키니를 입은 미녀가 앞을 지나가자 한 손에 맥주를 든 최재수가 정신을 못 차린다.
이미 인중이 저 쪼 아래까지 늘어진 최재수.
"저 모지리."
하얀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은 종혁은 피식 웃는다.
"경위님도 일단 즐기세요."
본격적인 수사는 내일부터 해도 된다.
체류 기간이 곧 휴가 기간으로 연결되는 이번 수사.
시간은 많았다.
"시끄러워. 내가 이런 거 즐길 나이냐?"
"그런 말을 하려면 목은 좀 어떻게 하든지."
"……죽이네, 진짜!"
비트에 맞춰 목을 까딱이던 오택수가 결국 일어나 몸을 흔든다.
"이예에!"
최재수도 결국 정신을 놓는다.
"야! 이거 경비 처리는 되는 거냐?!"
"되겠습니까?"
고개를 저은 종혁은 조시가 왜 이런 숙소를 잡은 건지 의문이 들었다.
‘권 이사가 시켰을 리는 없을 텐데…….’
수사에 들어갔을 때 종혁 본인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를 아는 권아영이기에 일순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설마 권&박에서 출장 오는 직원들이 이런 걸 선호하는 건가?’
하지만 그 의문은 곧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조시를 보곤 잊어버렸다.
‘옷을 입으면 말라 보이는 타입이구나.’
여신처럼 보이는 하얀 비키니를 입은 그녀.
반팔 셔츠 안에는 흉기가 감춰져 있었다.
"즐기고 있어요?"
종혁은 대답 대신 주황빛 칵테일을 들어 올렸다.
섹스 온 더 비치. 그 뜻은 해변의 정사.
이름부터가 즐기고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피력한다.
그에 조시가 배시시 웃었다.
"여기요. 아이언 루카 직원 명단."
눈을 빛낸 종혁이 받아 들고, 몸을 멈춘 오택수가 정신줄마저 놓으려는 최재수의 오금을 걷어찼다.
"악?"
"정신 안 차리지? 어휴, 이걸 진짜 어떡하지?"
"죄, 죄송합니다."
종혁의 주위에 둘러앉은 그들은 직원 명단을 훑었다.
내부의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건 바로 직원이다.
이들의 수사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흠. 간단한 프로필밖에 없네."
"이것만 해도 어디예요. 나머진 저희가 보강해야죠."
궁핍한 사람이어도 좋고, 범죄를 저질렀어도 좋다.
그런 약점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내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게 수사의 기본이다.
‘그리고…….’
직원들 사진을 모두 훑던 종혁은 한 사람을 발견하곤 눈을 빛냈다.
‘이 사람이군.’
훗날, 최종철이 중국으로 도주했다는 걸 알려 준 직원.
종혁은 그 얼굴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일단 오 경위님과 최 순경이 한 조로 움직여 주세요. 통역과 차량 붙여 줄 테니까."
"오케이. 일단 싹 다 미행해 보고 동선 짜서 다시 분배하자."
"전 내일 최종철이 붙여 준 놈을 따라 시내 한 바퀴를 돈 후에 항구를 뒤져 볼게요."
"시내 한 바퀴 돈 후에 찢어지잔 소리지? 오케이."
무역 회사인 아이언 루카의 제품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을 항구.
일단 수출 내역이 진짜인지를 확인해야 됐다.
오택수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최재수는 둘이 나누는 대화를 어느새 꺼낸 수첩에 기록하며 수사에 대해 배우려 노력했다.
조시는 그런 셋의 모습을 기이하다는 듯 봤다.
"대체 당신들은 누구예요?"
"한국 경찰."
"……그 몸에? 그 외모로? 와우."
종혁은 슬그머니 가슴을 펴며 콧대를 세웠다.
‘역시 난 해외에서도 먹히는 얼굴인가?’
참 뿌듯했다.
‘아, 이게 아니지 참.’
"장비는 모레까지 확보할 테니까……."
다시 셋은 수사에 대한 토론을 시작했고, 조시는 그런 종혁을 빤히 응시했다.
불타오르던 분위기도 밤이 더 깊어지자 수그러들었다.
방금까지 미녀들과 남자들이 한바탕 어울리던 욕망의 풀은 쓰레기만 남았고, 종혁과 일행들도 내일을 위해 잠잘 준비를 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내일도 부탁하고요."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조시의 온몸이 빨갛다.
악수를 받은 그녀는 종혁의 맑은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짓궂게 웃었다.
"여자가 필요하면 말해요. 돈 많은 사람 좋아하는 애들 많으니까. 그리고……."
"음?"
쵹!
볼에 닿았다가 떨어진 뜨겁고도 부드러운 입술.
"그런 애들이 싫다면 나도 있어요. 참고로 난 오늘 이곳에 방을 잡았고, 앞으로 2시간 동안 안 잘 거예요."
윙크를 한 그녀는 엉덩이를 씰룩이며 멀어졌고, 종혁은 휘유 혀를 내둘렀다.
"뭐야. 뭔데? 방금 뭐야?"
최재수는 ‘난?’ 하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방 안으로 들어간 종혁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방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흐응."
그의 눈빛은 제법 의미심장했다.
* * *
아침부터 달라붙는 음흉한 시선들을 무시한 종혁은 최종철이 연결해 준 사십대 남성과 만났다.
팔목 위부터 턱까지 온갖 문신이 가득한 스킨헤드 택시기사.
전신에 문신을 했음에도 캐쥬얼하게 입어서인지 외향이 그리 거슬리진 않는다.
"너희가 브루노 최가 말한 짭새야?"
껄렁한 외모처럼 껄렁거리며 말하는 그.
"최종혁입니다. 최라고 불러 주세요. 그리고……."
맞잡는 손에서 굳은살이 느껴진다.
종혁은 싱긋 웃었다.
"당신의 물주지."
"와우, 아주 듣기 좋은 말인걸? 난 가르시아! 편할 대로 불러 줘!"
종혁이 50달러 뭉치 한 다발을 하나 꺼내자 가르시아의 눈이 휙 돌아간다.
"내가 부탁할 건 딱 세 가지야. 놈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알려 줄 것, 적극 협조해 줄 것, 그리고 식사는 맛있는 곳에서. 그럼 돌아가기 전에 네 다발을 더 주지."
눈이 동그래진 가르시아는 재빨리 택시의 뒷문을 열며 허리를 숙였다.
"가시는 길이 지구 끝이라도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손님."
오택수는 돈의 위력에 박수를 치며 택시에 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알리바이 확보를 위한 거짓 수사를 시작했다.
부우웅!
"그런데 누굴 잡으려는 거야?"
종혁은 가슴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이놈 본 적 있어?"
가르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하지만 이런 나라로 도망친 놈들이 숨는 곳은 알지!"
"그래? 어딘데?"
"보카."
가르시아는 씩 웃었다.
겨우 도로 하나 차이다.
위로는 깨끗한 순환고가도로에 차들이 쌩쌩 다니고, 아래쪽 더러운 도로엔 차들이 별로 안 다닌다.
4차선 도로, 그 십 몇 미터 차이로 거리의 분위기, 아니 색채의 톤이 바뀐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요! 거긴 우리 보나에렌세도 안 가는 곳이란 말이에요!
보나에렌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고 사는 이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다.
즉, 이곳 보카 지구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로를 경원시하는 곳이란 소리다. 한 도시 내에 있으면서도.
"여기로 안내하던데요? 그렇게 위험한가요?"
보카 지구란 곳에 대해 알기 위해 전화를 했던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걸 말이라고!
"알았어요. 일단 끊어요. 오니까."
-최! 최-!
종혁은 모자를 들고 오는 가르시아를 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물주님들."
가르시아가 사 가지고 온 모자를 나눠 주며 낯빛을 굳힌다.
"지갑, 시계 귀중품은 여기에 넣고,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핸드폰은 절대 꺼내지 마. 돈은 조금씩 나눠서 셔츠주머니와 뒷주머니에. 시비 건다고 함부로 주먹 휘두르지 마. 총 맞으니까."
방금까지 경박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문신에 걸맞게 험악하고 조심스런 눈빛을 짓는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의 위험이 더 확 느껴진다.
하지만 종혁은 피식 웃었다.
‘얘들이 무서울까, 아님 연변 애들이 무서울까?’
흑룡강성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종혁은 군말 없이 지시를 따르기로 했다. 알리바이를 만들러 온 건지, 정말 누군가를 찾으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타이밍에 할 말은 해야 됐다.
"왜 하필 이런 곳에서 온 거지?"
"범죄자가 숨으면 어디겠어?"
할 말이 없다.
그의 말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수작을 부리는 게 뻔히 보여서다.
외국 영화에선 단골 레퍼토리지만, 그거야 배우들이 죄다 백인, 흑인, 라틴이라서 그렇다.
동양인이 이런 빈민가에 숨는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인지 오택수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귓속말을 했다.
"야, 차라리 저놈만 보낼 걸 그랬다."
마치 사건 개요를 살피는 척 수첩에 붙여 놓은 직원들의 사진을 살피는 최재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걸 보니 아직도 형사가 되기에 멀었단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도 최 순경만 보낼까요?"
"우린 최종철 직원들 쫓고?"
이런저런 경험을 해 봐야 완성되는 게 한 명의 형사다. 최재수에겐 지금부터 겪을 일이 참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푸후. 살아만 오라고 말하기엔……."
"좀 믿음직스럽지 못하죠."
이래서 최재수만 보내지 않은 거다. 정말 살아만 돌아올 확률이 있기에.
혀를 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보카 지구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4차선 도로를 지나 보도에 발을 딛는 그 순간, 종혁은 꿈틀거리는 미소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
시선이 모인다.
갑작스레 나타난 외지인에 슈퍼 아줌마도, 거리에서 페트병 따위를 차던 아이들도, 주저앉아 담배를 나눠 피던 소년들도 모두 그들을 응시한다.
섬뜩!
그 무기질적인 눈동자에 공포를 느낀 최재수가 오택수에게 달라붙는다.
"붙지 마, 이 새끼야. 더워!"
"하, 하지만……."
"거기서 팔짱 끼면 게이 커플로 오해받는다, 최 순경."
그제야 후다닥 떨어지는 최재수의 모습에 낄낄 웃은 종혁은 느긋이 앞장서는 가르시아에게 따라붙었다.
그가 다가오자 가르시아는 얼른 입을 열었다.
"아깐 말하지 않았는데, 여기선 애들이 다가와서 뭘 팔면 꼭 사야……."
"됐고. 여기 맛집이 어딥니까?"
"……어?"
"맛집. 식당. 배고파."
이 순간 가르시아는 종혁이 미친놈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데려가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알아서 들어가자고 하다니…….’
웃음만 나왔다.
"따라와요."
돌아선 가르시아는 입술을 비틀었다.
‘곧 나가자고 애원하게 될 거야, 애송이들.’
이런 입구 따위가 아닌 진짜 보카.
소매치기나 폭력 따윈 어린애 장난으로 치부되는 지옥. 보카 출신인 그조차도 함부로 다니기가 힘든 곳인 보카 지구.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가르시아는 주위를 살피며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겁을 잔뜩 먹은 최재수가 주위를 경계하며 뒤를 따랐다.
가르시아가 안내한 곳은 보카 입구에서부터 약 300미터 정도 안쪽에 있는 한 식당이었다.
딱히 밖과 안의 경계가 없는 작은 식당.
"오, 가르시아! 돌아온 거니?"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후덕하게 생긴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한다.
"이딴 동네에 왜 돌아오겠어. 난 입구가 제일 좋아, 후엔토 아줌마."
"그럼?"
"일단 밥부터 줘. 배고파."
할머니는 푸근히 웃었다.
"아무거나 시키렴."
가르시아는 종혁을 봤다.
"최……."
"여기 있는 메뉴 다 주세요, 후엔토 할머니."
완벽한 에스파뇰, 보나에렌세라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한 스페인어에 놀랐던 할머니가 이내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니? 우리 집 음식은 양이 좀 많단다."
"제 몸을 보세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호호호! 재밌는 청년이 왔는걸? 알았어. 아무 데나 앉아 있으렴."
"음료수부터 주세요!"
"호호호!"
그녀가 몸을 돌려 칼을 잡자, 종혁은 긴장을 놓으면 죽을 것처럼 사주경계를 하는 최재수를 툭 치곤 빈자리에 앉았다.
곧 할머니가 자몽 음료 네 잔을 들고 왔다.
"일단 목을 좀 축이고 있으렴."
"감사합니다. 아, 혹시 이런 사람 본 적 있을까요?"
후엔토 할머니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피아니?"
"제 옷차림을 보세요. 그렇게 보여요?"
확실히 그렇게 안 보인다. 밑바닥을 구르는 놈들 특유의 빈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후엔토 할머니는 쓰고 있던 안경을 코에 걸치며 사진을 살폈다.
"이 사람은 누군데?"
"살인범이요. 돈도 엄청 훔쳐서 이 나라로 도망쳤어요."
"얼마나?"
"한 2천만 달러?"
흠칫!
후엔토 할머니뿐만 아니라 외지인을 신경 쓰던 다른 손님들마저도 사진을 노려본다.
"미안하구나. 이런 동양인이 우리 동네에 들어왔으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런가요?"
일부러 아쉬움을 드러낸 종혁은 사진에 전화번호를 적어 할머니에게 쥐여 줬다.
"혹시 보게 되면 그 번호로 연락 주세요. 사례는 두둑하게 할 테니까."
종혁은 그러며 주위 손님들에게도 사진을 나눠 줬고, 후엔토 할머니는 한순간에 벌어진 일에 이마를 잡았다.
"얼른 음식 내올 테니까 그거 먹으면 곧바로 보카를 떠나렴."
"예?"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대체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한숨을 내쉰 그녀는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고, 종혁은 의아해하며 가르시아를 봤다.
"내가 뭘 잘못한 겁니까?"
가르시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멍청한 한국 놈! 보카에서 돈이 있다는 걸 자랑하다니!’
일이 생각보다 더 잘 풀리게 됐다.
"아줌마가 괜히 한 말이겠지."
"그렇지?"
‘지랄 염병하네.’
뒷골목에선 돈 자랑을 하지 마라.
관할서 형사도 아니고, 광수대 지능범죄수사대 등 여차하면 해외까지 수사 범위를 넓혀야 했던 부서에서 형사 생활을 한 종혁이 이런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건 가르시아의 의도에 어울려 주기 위해서다.
‘어지간히 찔리나 봐, 최종철. 날 이렇게 아르헨티나에서 내쫓으려고 들고.’
가르시아가 이 위험한 빈민가에 왜 데려왔겠는가. 자신들로 하여금 위험한 상황을 겪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학을 떼고 한국으로 돌려보내려는 거다. 아마 가르시아는 몇 번 더 이처럼 위험한 곳을 데려갈 터.
‘고맙네. 정말 고마워. 우리가 움직일 시간을 만들어 줘서!’
이제 가르시아가 의도한 대로 위험한 상황을 겪은 후, 잔뜩 겁을 먹은 척 숙소에 처박히고는 이틀 후에나 다시 가르시아에게 연락을 할 거다.
그 이틀은 종혁이 최종철의 의심을 받지 않고 최종철의 직원들을 살필 시간이었다.
종혁은 어느새 나온 아르헨티나식 샌드위치 초리판을 씹으며 오택수와 눈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에 멀뚱해진 최재수는 속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씨발. 좀 알려 주면 어디 덧나나? 만날 자기들끼리만 쿵짝이…… 어?’
"저 여자는?"
최재수는 재빨리 바지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역시였다. 최종철 회사의 직원이었다.
"오 경위님, 저기……."
스윽!
"꽃 좀 사 주세요."
꾀죄죄한 옷차림의 9살 정도 되는 소녀가 꽃을 내민다.
갑작스런 상황에 최재수는 당황했다.
"쉭쉭! 어서 나가렴! 이곳에 들어오면 안……."
후엔토 할머니가 화난 얼굴로 걸어 나왔지만, 그보다 종혁이 빨랐다.
"얼마니?"
"이십 페소요!"
"오, 안 돼……."
보카에선 ‘함부로 꽃을 사지 마라, 잠깐의 동정이 큰 재앙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꽃 따위를 살 돈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적선을 하라며 지갑을 뺏어 가는, 저 밖을 돌아다니며 해맑게 웃는 소년들도 언제든 강도로 돌변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보카 지구인 탓이다.
할머니는 다시 이마를 잡았고, 돈과 꽃 한 송이를 교환한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식당을 달려 나갔다.
종혁은 의아해하며 할머니를 봤다.
"무슨 문제 있나요? 여기 가르시아 씨가 어린아이가 뭘 권유하면 꼭 사라고 하던데요."
"가르시아, 너 지금……!"
"왜요? 맞잖아요?"
뭐가 문제냐는 듯한 가르시아의 모습에 후엔토 할머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르시아와 종혁들을 번갈아 본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됐어! 당신들한테는 안 팔아! 내 가게에서 썩 꺼져!"
"예?"
"썩 꺼지라고! 안 꺼져?!"
그녀가 빗자루를 들며 위협하자, 종혁은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가게를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뭐, 뭐예요? 대체 왜 이러는데요?"
현재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최재수를 일견한 종혁은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 가르시아를 봤다.
가르시아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이 동네 사람들 모두 변덕이 심해. 그래도 음료수값 굳어서 다행이네."
마치 일상이라는 듯 킬킬 웃는 가르시아의 모습에 종혁은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흠. 다른 식당은 없습니까? 배가 너무 고픈데요."
"없긴 왜 없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있어. 올라가자고."
가르시아는 손을 까딱였고, 셋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따라갔을까.
툭툭.
갑자기 낯빛이 굳은 오택수가 종혁의 허리를 친다.
"종혁아."
"알아요."
이렇게 노골적인데 모를 리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어이, 가르시아!"
"헉! 다, 다른 길로 가지. 여긴 아니야."
아르헨티나 국대 유니폼을 입은 삼십대 남성이 껄렁거리며 다가오자, 가르시아는 얼른 돌아서려고 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더 움직여 보든가."
멈칫!
"아하하. 애, 앤디, 오랜만이야?"
"오랜만? 푸흐흐. 어이, 가르시아. 내가 이 동네에 다시 얼굴 비추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아하하, 그게……."
"그보다 이 동양인들은 뭐야? 돈 많아 보이는데?"
"이, 이 사람들은 안 돼! 내 소중한 고객……."
"닥쳐."
앤디라 불린 중년인은 권총을 빼 들어 종혁의 가슴을 쿡쿡 눌렀다.
"이봐, 내가 무척이나 가난하거든? 그러니 적선 좀……."
"내 상의 주머니와 바지 뒷주머니. 저 남자는 바지 앞주머니. 뒤에 키만 큰 놈은 뒷주머니."
"응?"
"돈 뺏으려는 거 아니었어?"
"어, 그렇기는 한데……."
‘이 새끼는 뭐하는 놈이지?’
보통 이 동네에서 돈을 뺏기는 놈은 겁을 잔뜩 먹거나 짜증을 삼킨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종혁은 다르다.
무심하다 못해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
앤디는 난생처음 보는 타입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