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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182화 (182/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82화>

12월 31일의 종각역 근처.

곧 타종을 할 보신각 앞에 많은 인파가 몰려 있다.

"형님, 사람이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남조선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노는 걸 좋아합니까?"

크리스마스 때도 느낀 거지만, 서울 인구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이런 행사가 있으면 전국민이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종혁은 눈을 휘둥그레 뜬 순철의 머리를 헤집었다.

"남조선이 아니고 한국, 인마."

"아직 입에 안 붙습네다."

"난 안 보입네다! 나 좀 올려 주시라요!"

피식 웃은 종혁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마를 태웠다.

"와아! 다 보입네…… 히익! 철이 오빠! 종이 엄청 큽네다! 저 종을 만들기 위해 남조선 인민의 철이 많이 들었겠구나야!"

"푸핫!"

"호호호호호!"

이 자리엔 종혁과 고정숙, 순철 순희 남매뿐만 아니라 소영 등 친구들까지 있다. 수호는 아쉽게도 휴가를 나오지 못했다.

발랄하게 버둥거리는 발을 쓰다듬던 종혁은 갑자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가 의아해했다.

흐뭇해하면서도 뭔가 마냥 흐뭇해할 수 없다는 복잡 미묘한 눈빛.

"왜? 엄마도 해 줘?"

"그러기만 해 봐. 혀 깨물고 죽어 버릴 거니까."

"거 아니면 말지 협박은……."

종혁은 다른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가 정면을 바라봤다. 이리나가 난 해 줘라는 눈빛을 강렬하게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시작한다."

-아아, 그럼 지금부터 2004년…….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행사가 막 시작되었다.

"3! 2! 1!"

데엥! 데엥!

"해피 뉴 이어!"

"와아아아아아!"

하늘을 향해 뻥뻥 터지는 폭죽과 종소리.

사람들은 올 한 해도 수고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2005년 새해는 더 달라지자고 함께 온 지인들과 약속을 했다.

종혁도 사람들을 향해 덕담을 던졌다.

"해피 뉴이어.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형님도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 순희는 내년엔 키 좀 크고."

"걱정 마시라요! 곧 철이 오빠보다 클 겁네다!"

"뭐? 지금 뭐라 했네?!"

"응? 내가 뭐라고 했습네까?"

"내려오라! 얼른 내려오라!"

"큭큭큭. 자, 이제 그럼 차 막히기 전에 돌아갑시다! 너희들도 우리집 와서 한잔할 거지?"

"당연하지!"

"가자! 고고! 고고!"

그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종혁의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200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 * *

부우우웅!

종혁과 최기룡 청장을 태운 차가 새벽녘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전에 함께 종가에 가자는 약속 때문에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종가로 향하는 거다.

"김덕술 그놈 종신형을 받았다고?"

살인 및 시체 유기다.

제아무리 김덕술이 우발적이었다고 주장한다고 한들, 시체 유기까지 한 순간 양형에 선처를 구할 수는 없었다.

"사형을 받았어야 했는데 아쉽게 됐죠."

"사형이 어디 그리 쉽나. 그래도 보험사에서 보험 계약 무효 확인 소송을 걸었다며?"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감당할 수 없는 사채 빚까지 끌어안게 됐으니 전부 다 잃게 된 셈이죠."

뒤늦게 밝혀진 것에 의하면, 김덕술은 놈들에게 받는 돈 말고도 거액의 사채를 쓴 걸로 판명이 났다.

김덕술은 이제 노환이나 병환으로 죽을 때까지 사식 한 번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고통과 괴로움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될 거다.

그것이 김덕술이 감당할 죄의 무게였다.

"그럼 그…… 피해자 유족은 어떻게 되는 거냐?"

유일한 가족인 누나를 잃으며 희망도 잃었을 경조.

"잘 아는 변호사를 연결해서 최대한 피해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헤어지던 날 경조는 ‘공부를 할 거다’라며 삶의 의지를 피력했다.

‘자신이 좋은 대학이나 번듯한 직장을 가졌으면 사람들이나 경찰이 이렇게 무시하지 않았을 거라고 했지.’

그런 목표와 눈을 한 사람은 쉽게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기에 종혁은 안심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행복의 재단에서 경조 같은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후원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라서 최소한 돈 걱정은 하지 않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경조의 신고를 무시한 형사는 뒷돈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서 옷을 벗게 됐다.

최기룡은 그제야 안심한 듯 푸근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 영감이 정말 회개하는구만. 이거 표창장을 줘야 하는 거 아냐?"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이사장님 의외로 그런 욕심 많으시거든요."

"그래? 오직 돈만이 진리던 돈 귀신도 많이 변했네."

참 기꺼운 변화였다.

"그보다 성묘는 다녀왔고?"

"어제 다녀왔습니다. 청장님은요?"

"나도 다녀왔지. 어휴, 그놈의 잡초는 매년 뽑아도 뽑아도 왜 그리 자라는지."

"하하. 아직까지 벌초를 하세요? 차라리 맡기시죠?"

"안 그래도 이젠 화장할 생각이야. 나 죽으면 관리나 제대로 되겠어? 그럴 바엔 차라리 가족묘를 쓰는 게 낫지."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둘은 종가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고풍스런 한옥 담장이 둘러진 한옥.

마치 영화 세트장을 연상케 하는 한옥을 보는 종혁의 눈빛이 오묘하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회귀 전, 경찰대 엘리트들과의 진급 경쟁에서 계속 밀리다가 결국 눈 딱 감고 한 번 찾아와 봤던 충렬공파의 종가.

‘그땐 외부인 취급을 받았지.’

같은 최씨가 아니라 다른 성씨인 것처럼 외면을 받았다. 누구 한 명 말을 걸어 주지 않았고, 경계 어린 눈초리만 많이 받았다.

억울했지만 이해한다. 일평생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놈이 갑자기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니 누가 좋아할까.

‘솔직히 실망도 했고.’

꽤 알아주는 성씨인 경주 최씨.

그래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명절에 와 본 충렬공파 종가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최기룡 청장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눈칫밥이나 얻어먹다가 돌아 나와야 했다.

이후론 다시 찾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도 자존심만 높은 곳.

종혁에게 경주 최씨 충렬공파 종가는 그런 장소였다.

"다 챙겼냐?"

종혁은 대답 대신 종이백 두 개를 들어 올렸다.

피식 웃은 최기룡이 앞장섰다.

"들어가자."

"예."

그렇게 대문을 넘자 옛 전통한복과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눈 속을 파고든다.

갑자기 현재에서 개화기 시대로 돌아간 느낌.

‘어라?’

사람이 많다. 회귀 전과 비교하면 거의 20배 정도 많다.

이 넓은 종가가 꽉 찬 느낌.

‘왜 많지? 거기다…….’

"어이구, 최 청장 왔어?"

"오셨어요, 아저씨?"

최기룡을 반갑게 맞이하던 사람들.

‘왜 이렇게 살가워?’

회귀 전, 이들은 결코 이렇게 살갑지 않았다. 서로에게도 말이다.

당황하던 종혁은 의아해하는 시선들이 꽂히자 얼른 자세를 바로했고, 최기룡이 타박하듯 말했다.

"아니, 우리 충렬공파의 자랑을 몰라보면 어떡해?"

"엇?! 유, 유도 금메달리스트 최종혁?!"

"지, 진짜다!"

"우와!"

"아이고, 유도 영웅이 우리 충렬공파라는 소린 들었는데……. 잘 왔어요, 잘 왔어."

회귀 전과는 너무 다른 반응들.

종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종부님은?"

"안쪽에 계세요."

고개를 끄덕인 최기룡은 종혁을 이끌고 저택의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작은 한옥 앞에 서서 공손히 양손을 모았다.

"종부님, 저 기룡입니다."

"……오셨으면 들어오시게."

안으로 들어가니 족히 여든은 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다.

종혁은 다시 묘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엔 뵙지 못한 분이다.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가장 큰 어른.

종혁과 최기룡은 그녀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종부님."

"종부 내려놓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종부이신가?"

"제겐 영원히 그러시죠."

"하여튼 그놈의 넉살은.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종혁아, 인사드려라. 이분이……."

"처음 뵙겠습니다, 할머님. 최종혁입니다. 종자 돌림입니다."

종혁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할머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난다.

"귀한 분께서 오셨습니다. 이 나라와 최가의 허명을 빛내 줘서 매일 고맙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그 사건도 참 통쾌하다 싶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들의 한을 잘 달래 줬어요."

아무래도 충렬공파의 최고 큰 어른은 뉴스와 신문을 자주 보는 것 같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아, 이건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 가져와 봤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어이구, 화장품을 사 오셨어요? 이 늙은 사람이 이런 귀한 걸 발라서 어디다 쓴다고."

"아직도 한참 고우신데요. 그리고 제 어머니가 말하시길 여자는 눈을 감을 때까지 꾸며도 모자란다고 하시더라고요."

"호호호! 그래요?"

"그리고……."

종혁은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어이구, 종가의 큰 어른이 무슨 돈 걱정을 한다고……."

"어머니가 말하시길 뭐든 내 주머니에서 나와야 어깨가 펴지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손자가 준 용돈이다 하고 필요한 거 마음껏 쓰세요. 다른 손자들 찾아오면 조금씩 들려 주시고요."

"호호호호호!"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그녀는 푸근히 웃었다.

"최 청장이 자신과 꼭 닮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칭찬이시죠?"

"이 자식이?"

"호호호! 그럼요. 아, 편히 앉아요. 게 밖에 누구 있니?"

"네, 할머님!"

"가서 상 좀 봐 오너라!"

"네-!"

상이란 말에 최기룡은 화들짝 놀라 종혁을 봤고, 종혁은 그 뜻을 몰라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윽고 간단한 다과상이 들어오자 할머니가 슬그머니 입을 연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유씨 남매 사건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요. 재판도 모두 끝난 상황인걸요. 그게……."

종혁이 운을 떼자 할머니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어이구! 어이구, 그런 때려죽일!"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이구야…… 최 청장은 그 자리에 앉아 뭐하는 겁니까!"

"예?"

"이런 사람 나오지 않게 해 달라고 이 나라 국민들이 그 자리에 앉힌 거잖아요!"

"아, 아니?!"

"너무 화내지 마세요. 청장님도 청장님 나름 고충이 많으세요."

"그래요. 그래. 속이 참 깊습니다."

종혁은 그녀의 흐뭇해하는 눈빛에 가슴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내게 할머니가 계셨다면 이랬을까.’

종혁의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었던 할머니란 존재.

마냥 생각만 했던, 어머니의 그것과는 다른 포근한 향기에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최기룡은 좀 억울한 담소가 이어졌다.

"할머님, 곧 차례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끄음.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어서 가 보세요. 여기까지 왔는데 조상님께 인사는 드려야죠."

"예, 그럼 곧 다시 올게요."

"그래요, 그래."

어느새 할머니는 종혁의 손을 꼭 잡고 턱턱 쓸어내렸다.

애정이 듬뿍 어린 손길엔 꼭 다시 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최기룡이 허탈하게 웃는다.

"정말 그놈의 넉살은……."

그 어떤 어른이라도 절절 매는 경주 최씨 충렬공파의 호랑이를 이렇게 녹인 사람이 또 있을까.

지금의 종부에게 곳간 열쇠를 주고 물러나면서 더 대하기가 어려워진 분인데, 그 얼굴에서 웃음꽃을 피우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다과상을 받은 사람은 종혁이 처음이었다.

일평생 종부란 굴레에 얽혀 함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체통을 지켜야 했던 분에게서 말이다.

"음?"

"잘했다고, 이놈아. 가자. 종손과 종부도 봬야지."

"아, 예!"

종혁은 종손에게는 뒷주머니 용돈과 종부에겐 화장품 및 뒷주머니 용돈으로 점수를 크게 따며 오늘 종가를 찾은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하지만 어딜 가나 꼭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은 있었다.

"종자 돌림이라고? 양친은 모두 살아 계시는가?"

"부친께선 오래전에 타계하셔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런. 그럼 결혼은 했고? 애인은?"

"하하. 아직 없습니다."

말로만 들은 레퍼토리에 종혁의 속이 좀 흐려졌다.

하지만.

"쯧쯧. 사지 멀쩡하고 이렇게 잘생겨서 아직까지도 애인도 없으면 어떡해? 자."

"예?"

"이거 가지고 나가서 아무 여자나 마음에 든다 싶으면 꽃 한 다발 사줘. 다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아니……."

종혁은 손에 쥐어진 20만 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취직은 하셨는가?"

"예. 경찰입니다. 경위예요."

"어이구. 최 청장과 같이 나랏일을 하시는구만. 잘됐군. 그럼 이거 가지고 상사들 수발하시게. 어디 진급하는 게 능력만 가지고 되남?"

"아, 아니……."

이번엔 30만 원이 쥐어진다.

이분들뿐만이 아니다.

갓을 쓴 어르신들 모두 덕담과 함께 거액의 용돈을 흔쾌히 투척한다. 레퍼토리가 맞긴 한데, 예상을 벗어난 레퍼토리.

‘이, 이런 오지랖이라면 얼마든지 들을 수 있긴 한데…….’

종혁은 원래 이런 건가 싶어 최기룡을 찾았는데, 그는 다른 아래 항렬들에게 덕담과 함께 용돈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이후로도 덕담이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는 사인을 부탁했고, 또 어떤 분은 최씨가 현대에 들어서 자랑할 수 있는 위인이 나왔다며 좋아했다.

"휴우. 대체 뭐가 뭔지."

대문을 나와 담배를 문 종혁은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정말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흔들린 정신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진짜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용돈과 덕담이 뭔가.

종혁은 아직까지도 그 냉담한 시선들이 잊히질 않는다. 아무리 최기룡 청장과 함께 왔다지만 회귀 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종혁의 눈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여기 있었어?"

종혁은 다가오는 최기룡을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원래 종가 분위기가 이럽니까?"

"……그럼?"

종혁의 질문을 이해 못하던 최기룡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무슨 말인지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인사드리며 느꼈겠지만, 우리 문중엔 콧방귀 뀌는 양반들이 제법 많아."

원래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다.

"왜? 당황했어?"

"카메라만 찾았다면 몰래카메라로 생각했을 겁니다."

"으하하하핫!"

종혁도 피식 웃었다.

"다들 좋은 분들인 것 같네요. 부담되는 이야기도 안 하시고."

부담될 이야기에 금융치료가 따라붙으니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

"내가 괜히 널 데려왔을까. 그보다 어르신들에게 명함은 많이 받았냐?"

"몇 장 받았어요."

"흠. 역시 아직 초면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잘 보관해. 언제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글쎄요."

‘쓸 일이 있을까?’

최기룡은 회의적인 반응 보이는 종혁의 모습에 씁쓸히 웃었다.

‘하긴, 익숙하지 않겠지.’

듣자 하니 친가 외가와 모두 연을 끊고 살았다고 한 종혁이다.

양가에서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힘들게 자라다 못해 크게 성공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

오직 같은 성씨라고 무턱대고 잘 대해 주는데 믿을 리가 없었다.

"푸후우. 종혁아."

걱정이 가득 담긴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진다.

"사람이 아무리 잘나도 살아가다 보면 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더라. 그게 나보다 한참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말이야."

사람을 결코 혼자 살 수가 없다.

서로 돕고 살 수밖에 없으며, 이런 관계를 통해 인맥이 넓어지는 거다. 이제 내년이면 경감으로 진급하면서 경찰 간부로서의 진짜 커리어를 쌓아 갈 종혁.

이런 인맥 형성은 간부로서의 필수 함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

‘이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나.’

왜 갑자기 종가에 가자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종혁은 최기룡 청장의 이런 호의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넌 참 영특해서 좋아. 다 피면 들어와라. 형님들 술 상대할 사람이 없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곧 들어가겠습니다."

종혁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흐릿한 하늘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런데 없네."

솔직히 종가에 오면 친가 친척들을 볼 거라 생각했다.

"뭐, 와 봤자 내 입에서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겠지만."

무슨 사정인지 모른다. 궁금하지도 않다.

피붙이 갓난아이를 외면한 그들이기에 종혁도 버리는 것뿐이다.

담배를 툭 던진 종혁은 다시 술판이 벌어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번에 좋은 사업 아이템을……."

"그래서 손녀가 반에서 몇 등이라고?"

"으하하핫!"

대낮부터 술이 거하게 들어가니 이제야 평범한 모습을 보이는 어른들.

"어서 와! 어서 와!"

얼른 오라는 그 손짓에 종혁은 일순 푸근함마저 느낀다.

‘이게 핏줄인가.’

엄연히 따지자면 참 먼 관계이건만 이 순간만큼은 이들이 이날 이때까지 일평생 곁에 없었던 친척처럼 느껴진다.

종혁은 난생처음 느끼는 핏줄의 따스함에 얼른 발을 놀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죠?"

"그럼! 우리 종혁이가 없으니까 술맛이 안나!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하하. 그게요……."

종혁은 다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고,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어르신들은 무릎을 탁탁 치며 흥분했다.

"아, 그렇다니까요?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원자재 붐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걸 누가 사냐? 중국이 삽니다! 저 인구수 많은 중국! 지금 저 중국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고요!"

"오호?"

누군가는 관심 어린 표정을 짓고, 또 누군가는 여기까지 와서 사업 이야기를 하는 그를 못마땅한 듯 쳐다본다.

"지금이 바로 아르헨티나에 투자할 시기입니다! 날 믿어 보십시오! 바닥에서 골골거리던 제가 이런 걸 입고 다니는 거 보면 모르겠습니까?"

온갖 유명 명품으로 몸을 치장한 오십대 장년인.

후덕한 몸매가 그의 재력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본 종혁으로선 웃음만 나왔다.

"으으음."

종혁은 혹하는 얼굴의 최기룡을 바라봤다.

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앉은 이들 중 많이 이들의 귀가 그쪽으로 향해 있었다.

종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아르헨티나의 원자재 붐.

당연히 알고 있다.

그 결말도.

분명히 단타로 치고 나오면 꽤 쏠쏠하게 벌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이 사업 권유와 미래의 삭막했던 종가의 모습이 연관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건.

‘너 때문이었구나, 최종철.’

2008년, 총 피해액이 무려 378억에 달하는 투자 사기의 주범. 최종철.

종혁의 눈이 사납게 빛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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