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76화>
순철과 순희는 이후 빠르게 집에 녹아들었다.
새벽녘부터 일어나 고정숙의 아침 식사 준비를 도우려던 순희는 몇 번 혼이 나더니 깨워야 일어나게 됐고, 편입을 시켰더니 학교를 평정하고 돌아왔다.
순철은 종혁의 아침 운동을 따라나서더니, 근처 고정숙 소유의 빌딩 내에 있는 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검정고시와 외국어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이에 종혁도 안심하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좋은 아침입니다."
"최 경위도 좋은 아침!"
언제나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본청의 1층.
엘리베이터에 오른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평소보다 더 어수선하네요?"
뭔가 평소와 공기가 다르다.
"그렇지? 최 경위도 그렇게 느끼지? 오늘 높은 양반이 오나?"
"홍보, 뭐 들은 거 없어?"
"몰라요. 묻지 마세요……."
"……응, 그래. 자라. 그러다 관 짜겠다."
본청에서 힘들지 않은 부서가 어디 있을까.
홍보부도 매일이 야근이다.
띵!
"그럼 전 먼저 내리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세요!"
"그래! 파이팅!"
닫히는 문을 뒤로한 종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특수범죄수사과 안으로 들어갔다.
"야, 이 개새끼야! 빨리 안 불어?!"
"밥? 아침바압? 아나, 주먹밥이나 처먹어라!"
"켁! 겨, 경찰이 사람 친다!"
"성훈아, 이 새끼 진실의 방으로."
"예, 진실의 방으로."
오늘도 평소와 같은 풍경에 종혁은 탕비실에서 모닝커피 두 잔을 가져와 하나는 퀭한 얼굴의 김종두 과장에게 내밀었다.
"어제 한잔하셨어요?"
"12월이라서 망년회 겸 동창회 했어. 어우, 죽겠네."
나이가 들긴 들었는지 소주 2병만 마셔도 다음 날이 힘들다.
"꿀 탔으니까 쭉 들이켜세요."
"땡큐. 어으, 좀 살겠다."
컴퓨터 전원을 켠 종혁은 김종두를 봤다.
"그런데 이제 슬슬 약발도 떨어지는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내일 마약대에서 터트린다더라."
연예인 마약 사건.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기다리는 이번 달은 꽤 시끄러울 듯싶었다.
"내일 시끌시끌하겠네요. 그런데 오늘 뭔 일 있어요? 어수선하던데?"
종혁의 물음에 특수범죄수사과의 2인자인 박대철이 입을 열었다.
"오늘 방송국에서 촬영 온다던데?"
"방송국에서요? 경찰청사람들? 공개수배 25시?"
본청에 방송국이 온다면 그것밖에 없다.
"이야, 오랜만에 TV 볼 맛 나겠다. 걔들 종영하면서 볼 게 없었는데."
박대철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TV를 봤다.
종혁도 눈을 빛냈다.
"그러네요. 저걸로 보면서 치킨 뜯으면 죽이겠네요."
"첫방 때 치킨 콜?"
"콜입니……."
-꺄아아악!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모두의 몸이 굳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들은 귀를 기울였다.
-꺄아아악! 와아아!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뭐, 뭐지? 나가 볼까?"
형사들의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때였다. 특수범죄수사과 사무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거의 종혁과 비슷한 체구의 안경 낀 사내.
"아, 안녕하세요. 아하하."
그에 형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어? 어어어?!"
아는 얼굴이다.
그들로서는 정혁빌딩 오픈식 때 딱 한 번 실제로 본 얼굴.
"쟤, 쟤 세민이 삼촌 아니야?"
"맞아, 김재우!"
"하하, 네. 안녕하세요."
종혁과는 깊은 인연이 있는 준형이 형들의 막내 멤버 김재우. 그런 그가 방송국 카메라 등과 함께 들어온다.
그에 종혁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종혁아!"
카메라와 조명이 이쪽으로 향하자 눈을 껌뻑인 종혁은 이내 자리로 돌아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마우스를 잡았다.
"엇?! 야! 최종혁! 왜 무시하는데!"
종혁은 더 무시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예. 특수의 최종혁 경위입니다. 지금 본청에 잡상인이 들어온 것 같습니다. 내쫓아 주세요."
"끄응…… 형. 종혁이 형."
"아, 죄송합니다. 제 지인이네요. 예,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종혁은 뚱하게 쳐다봤다.
"왜 왔냐? 남자 새끼가."
"풉……!"
"푸하하하핫!"
방송국 사람들은 빵 터졌지만, 종혁은 여전히 뚱했다.
* * *
"쳇. 오랜만에 봤으면서 이러기야?"
"시끄러워. 남자 새끼 따위 살아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거지."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형?"
"너무한 건 너 새끼지. 아무런 말도 없이 형 직장에, 어?"
PD와 작가는 김재우를 하찮게 보는 종혁의 모습에 신기해했다.
그 김재우다. 대한민국 국민 중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국민 남자아이돌 그룹의 멤버.
"그래서 진짜 왜 왔는데. 나 바쁘다고."
"음…… 만원의 행복이라고 알아?"
"아, 이게 그거야?"
안다. 회귀 전엔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은 순철과 순희가 매번 본방 시청을 하기에 알게 됐다.
"그런데 네가 그걸 찍을 급이…… 아, 되는구나 참. 네가 이따위로 생겨도 국민 아이돌이었지."
"진짜 너무하네! 내가 어? 지금 밖에 나가면 어? 수십만 팬들이 비명을 지르는 그런 사람이야!"
"나도 밖에 나가면 수십만 범죄자들이 비명을 질러."
"그러고 도망가니까 문제잖아."
"정답. 오올, 과장님."
김종두 과장은 콧대를 세웠다가 이쪽을 향한 카메라를 인식하곤 다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라이.’
"그래서 천원의 만찬 뭐 그런 거 해 주려고 왔냐? 네가 이제 사람이 됐구……."
"아니, 그건 우리 사장님 해 드렸는데."
"그럼 전 손님 배웅하고 오겠습니다."
"아, 형!"
"진짜 왜 왔는데. 나 벌써 세 번 물었다."
재우는 침을 삼켰다.
결코 다시 묻는 법이 없는 종혁.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아, 알바하려고! 알바 좀 시켜 줘!"
"굳이? 여기서? ……왜?"
일단 이번 촬영은 최기룡 청장의 승인이 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 설마?’
종혁의 머릿속에 내일 마약대가 터트릴 연예인 마약 사건이 떠오른다.
‘전국이 들썩거릴 테니까 이런 유명 연예인을 방송에 출연시켜 시청률 방어를 하겠다는 건가?’
방송국 사장이 공개 사과를 한 지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연예인 마약 사건이 터진다면 방송국 모든 프로그램에 엄청난 타격이 올 거다. 모든 연예인의 도덕성이 의심을 받을 테고, 그런 연예인들을 쓰는 방송국도 다 한통속 아니냐며 믿지 못할 거다.
그래서 이런 수를 내민 거다.
방송국 나름의 호구지책.
아무래도 최기룡 청장이 방송국에 빚을 지운 것 같았다.
‘에고, 이런 거라면 귀띔이라도 해 주지.’
최기룡 청장의 장난기 가득한 성격을 떠올린 종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 양반도 참 나이를 헛먹었다니까.’
"형?"
"돈을 벌고 싶으면 대학로 가서 길거리 공연을 해, 시키야."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그렇게 쉽게 돈을 벌수가 없다. 결코 출연자가 편한 꼴을 못 보는 프로그램이었다.
"형, 진짜 살려 줘! 나 이제 4천 원밖에 안 남았다고!"
"에휴. 그때도 지지리 궁상이더니, 지금은…… 밥은 먹고 다니냐?"
정말 불쌍하게 쳐다보는 눈빛에 재우는 발끈했다.
"나도 돈 많거든!"
"네가? 나보다?"
종혁은 같잖다는 듯 웃었고, 재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뇨. 제가 어떻게 형한테 비비겠어요."
코웃음을 친 종혁은 볼을 긁었다.
"흠…… 알바라. 네가 할 만한 일은 없는데."
"나 복사 같은 거 잘해! 짐도 잘 옮겨!"
"대외비라서 문제지."
범인을 취조하는 모습이 찍혀도 안 된다. 종혁이야 당당하지만, 좀 많이 그렇다.
"으음…… 아!"
"왜? 있어?"
"어, 잠깐만. 과장님, 저 얘 생안과에 떨구고 올게요."
"생안과? 아핫! 오케이. 다녀와."
"옙! 김재우, 따라와."
"응!"
그들은 사무실을 나섰다.
사람들로, 특히 여경들로 가득한 복도.
어떡해, 어떡해 발을 동동 구르는 여경들의 모습에 종혁은 PD를 봤다.
"얘 사인이랑 사진 합쳐서 한 명당 10원 어때요?"
"헛!"
김재우와 여경들이 다급히 PD를 봤고, 어색하게 웃은 PD는 고민에 빠졌다.
"으음……."
그런 그의 머릿속에 잘 부탁한다는 최기룡 청장과 예능 국장의 당부가 스쳐 지나간다. 슬그머니 여기 모인 사람들의 숫자를 헤아린 PD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5원이면……."
"오케이! 이 경장님, 다 불러요!"
"라져-! 애들아, 콜 때려!"
"네!"
"아니, 자, 잠깐?!"
그렇게 간이 사인회가 열렸고, 김재우는 종혁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다시 생안과, 생활안전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이 엄청 친하시네요? 재우 씨 데뷔 전부터 아시던 사이라고요?"
"예, 뭐……."
종혁이 대답하려고 할 때, 팔목을 돌리던 김재우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죠. 저희가 데뷔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종혁이 형이거든요. 저야 좀 나중에 합류해서 좀 덜한 감이 있긴 한데, 쭌이 형들에게 이 형은 진짜 은인이나 다름없어요."
"그거 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익명의 독지가라니까?"
"응, 뭐 그렇다 치자. 그보다 형 그 사무실? 강력반? 엄청 좋더라. 원래 경찰서는 이래?"
"……우리 수사과가 생긴 지 얼마 안 돼서 그래. 우리 경찰도 언제까지 그런 보편적인 이미지를 놔둘 순 없으니까."
거칠고 더럽고 무섭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찰서란 그런 이미지다.
"아아."
‘구라치지 마라, 구라쟁이야!’라는 전국 형사들의 성토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종혁은 가볍게 무시했다.
"아, 여기다."
문을 연 종혁은 거수경례를 했다.
"충성. 경위 최종혁. 일꾼 한 명 데리고 왔습니다!"
"오, 최 경위! 어서 와!"
본청 경찰 중 종혁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일꾼…… 어? 어어어?"
방금 전 재우와 사진을 찍었던 생안과의 여경들은 자신들 과로 왔다며 비명 같은 함성을 지른다.
그에 과장이 눈을 빛내며 달려왔다.
"저, 정말 일꾼이야? 유명한 연예인인데,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거야?"
"만원의 행복입니다. 마음껏 부리십쇼. 무보수니까."
"……오호라? 그런 거였어?"
생안과 과장의 눈이 번뜩인다.
그동안 쓰고 싶어도 예산 문제로 쓰지 못했던 연예인이 제 발로 굴러 들어왔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생활안전과의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형, 나 왠지 느낌이 이상……."
"그럼 수고해. 난 바빠서 이만."
"형! 혀엉!"
종혁은 재우의 애탄 부름을 무시하며 다시 복귀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최 경위! 청장님이 최 경위도 함께하래!
"에라이."
혀를 찬 종혁은 어쩔 수 없이 경찰 마스코트 인형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삐이익! 삐익!
"우와! 우와아! 김재우다!"
"와아악!"
"응. 재우 형이야. 모두 신호를 잘 지켜야지?"
경찰청 근처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
경찰 점퍼와 조끼를 입은 김재우가 추위와 싸워 가며 하교하는 아이들의 보행을 돕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청 홍보과에서 찍고 있다.
‘쟤가 저기서 저런 일을 할 애가 아닌데…… 어휴. 그놈의 돈이 뭔지.’
시급 몇 백 원 푼돈에 저러는 걸 보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하지만…….
"와아아아아!"
"이야아아압!"
"죽어라! 죽어!"
퍽! 퍼억!
종혁 본인의 꼴보다는 낫다.
종혁은 몸에 닿는 고사리 주먹과 발을 보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놈의 명령이 뭔지. 인사 고과가 뭔지.’
종혁은 확 쥐어박아 버렸으면 좋겠다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억지로 참으며 애써 몸을 흔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종혁의 모습은 며칠 후 방송을 타면서 빵 터지게 됐다.
* * *
"오. 미남 경찰 출근했어?"
김재우의 외모와 너무 비견되는 나머지 그런 별명이 붙었다.
"경찰다운 경찰! 좋은 아침이야?"
수사과 형사임에도 서슴없이 인형탈을 쓰는 걸 보며 그런 별명이 붙었다. 현재 종혁은 좀 유명해진 상태였다.
‘뭐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테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이돌 활동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재우를 돈으로 찍어 눌렀던 그 발언이 편집됐다는 점이다.
아마 그 발언까지 전파를 탔다면 지금보다 더 유명해졌을 것이다. 잠복이나 잠입 등을 해야 하는 형사로서 사양해야 될 일이었다.
‘진짜 청장님만 아니었으면…….’
정말 그놈의 인사 고과가 뭔지.
"에휴. 좋은 아침입니다."
"오, 미남 경찰! 이야, 인기가 대단하던데? 벌써 팬레터까지 왔더라?"
"……팬레터요?"
김종두 과장은 짓궂게 웃으며 편지 하나를 종혁에게 건넸다.
장난인 줄 알았으나 정말 수신인에 종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원도에서 온 편지였다.
특수범죄수사과의 모든 형사가 종혁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빨리 뜯어 봐!"
"큼큼."
종혁은 헛기침을 하며 애써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썼다.
그리고 개봉한 편지 속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직후, 종혁의 낯빛이 급격하게 굳었다.
"……과장님, 저희 마무리 못한 사건 없죠?"
"급한 일은 딱히 없지?"
검사가 자료 부족하다고 리턴을 시키지만 않는다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그럼 사건 하나만 더 진행해도 괜찮을까요?"
편지에 시선을 고정시킨 종혁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