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165화 (165/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65화>

    이른 새벽의 리조트.

    이방 저방에서 흘러나오는 코 고는 소리만이 새벽의 적막을 깬다.

    스윽! 스윽!

    슬리퍼를 끌고 나온 종혁은 비치 체어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푸후우."

    어스름히 번져 가며 어둠을 쫓는 햇빛.

    수평선 끝에 걸려 있는 잿빛 구름이 어깨에 들어찬 긴장을 잠시 덜어 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먼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는 종혁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있다.

    스윽! 스윽!

    "그만 좀 펴."

    복숭아 향기를 풍기며 다가온 라차논이 담배를 뺏는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멍하니 본 종혁이 새 담배를 꺼내 든다.

    그리고 다시 뺏긴다.

    "폐암 걸려서 고생하려고?"

    "네가 내 와이프냐."

    "친구로서 걱정하는 거야."

    정말이라는 듯 화가 은은히 스며 있는 눈을 본 종혁은 어쩔 수 없이 모닝 담배를 포기하기로 했다.

    "어제 그 소년, 소녀 때문이야?"

    "……뭐 그런 것도 있고."

    그저 이런 적막이 좋을 뿐이다.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려다가도 사라져 버리니까.

    하지만 라차논의 방해로 다시 온갖 생각이 떠오른다.

    몸을 일으킨 종혁은 상의를 벗으며 수영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풍더엉!

    수영장을 가로지른 종혁은 몸을 뒤집으며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물에 잠긴 귀 안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

    다시 찾아온 적막에 종혁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흐음."

    라차논은 그런 종혁을 가만히 응시했다.

    전에도 여실히 느꼈지만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운 신체.

    방심을 해 버리면 또 이렇게 넋이 팔려 버리고 만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예전의 종혁은 이렇지 않았다.

    조금 더 여유로웠고, 다정했다.

    하지만 지금의 종혁은 뭔가에 쫓기듯 날이 서 있다.

    어제 일을 비추어 보면 여전히 다정하지만…….

    "사건 때문일까?"

    ‘아니면…… 그 러시아 때문일까.’

    러시아 정보국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종혁.

    지이잉! 지이잉!

    핸드폰 발신 번호를 본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응. 나야. 아, 그래? 타깃이 움직였다고? ……그 호텔로?"

    라차논의 눈이 빛났다.

    "알았어. 계속 주시해."

    전화를 끊은 그녀는 여전히 수영장 위에 떠 있는 종혁을 보며 금방이라도 불이 꺼질 듯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여유를 찾기를 바랄게, 친구.’

    "후우우."

    두 사람의 숨결이 담긴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   *   *

    3일 차 스케줄은 그렇게 빡빡하지 않았다.

    래프팅을 하고 내려와 마사지.

    여성들은 쇼핑을 위해 움직였고, 남성들은 12살 미만 아이들과 동물원 투어에 나섰다.

    술을 마시지 못하게 된 남성들의 불만만 빼면 모두가 만족스런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삼촌 형님들. 얘들 좀 데려가실래요?"

    종혁의 양다리와 옆구리에 찰싹 달아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아이들.

    동물원 구경 중 허리가 아픈 형사들을 대신해 목마를 몇 번 태워 줬더니 그 이후로 껌딱지가 되어 버렸다.

    "웃지만 말고요!"

    "왜? 보기 좋구만."

    "아니……."

    "삼촌, 혜진이 싫어요?"

    고개를 들어 촉촉이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애들아, 이제 아홉 시인데 안 자니……."

    "싫어요?"

    "……목마 태워 줄까?"

    "응!"

    "나도, 나도!"

    한숨을 푹 내쉰 종혁은 네 명을 한꺼번에 어깨 위에 올렸고, 아이들은 꺄르르 웃었다.

    "어휴. 종혁이가 애들을 좋아하네. 애들도 잘 따르고."

    "그러게. 좋은 아빠 되겠어!"

    주위에 줄 선물을 모두 사서 기분이 좋던 여성들이 은근한 눈으로 고정숙을 본다.

    경찰대학교를 졸업해 사고만 안 치면 승승장구할 종혁. 거기에 몸도 좋고, 돈도 많다.

    ‘형사 사위는 절대 안 되지만, 종혁이 정도라면…….’

    고정숙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꿈 깨세요. 후보만 셋이랍니다.’

    소영이, 현희, 이리나.

    엄마로서의 촉이 외치길 한 명 더 있는 것 같지만, 누군지는 모른다. 또 내일 보자며 돌아간 라차논도 있다.

    종혁은 관심 없는 듯하지만 라차논은 아니었다.

    ‘잘난 아들을 데리고 사는 것도 피곤하네…… 응?’

    지이잉! 지이잉!

    "아들! 전화!"

    "예!"

    살았다 아이들을 내려놓고 달려온 종혁은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최종혁……."

    -아주바이!

    다급한 부름에 종혁의 몸이 굳었다.

    북한 말투의 여자아이.

    종혁의 머릿속에 어제 봤던 순희란 아이가 번뜩 떠오른다.

    "지금 어디야!"

    모두가 종혁을 쳐다봤다.

    *   *   *

    푸켓에서 꽤 유명한 호텔의 복도.

    1404호 앞에 선 유니폼을 입은 태국 남성이 제법 멀끔한 차림의 소년, 순철을 본다.

    "텐 미닛. 오케이?"

    "땡큐. 땡큐."

    주위를 두리번거린 태국 남성은 마스터키로 1404호의 문을 열었고, 순철은 어제 받은 돈 중 3분의 1을 그에게 넘긴 후 얼른 순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은 태국 남성은 그때부터 손목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안으로 들어온 순철은 재빨리 침대 근처부터 뒤졌다.

    "어디네. 대체 어디에 있는 기야."

    주 태국 북한대사관의 직원이었던 큰누나 순영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화소에 끌려갔고, 순철과 순희는 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막아 준 덕분에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때 그의 가족들을 잡으러 왔던 보위부 대원이 말하길, 큰누나 순영이 외국 남자와 도망을 친 반동분자라 했지만 순철은 믿지 않았다.

    큰누나 순영이 가족들에게 말도 없이 사라질 사람이 결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순철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탈출했다. 큰누나를 찾기 위해.

    의인의 도움덕분에 어렵사리 태국에 도착했고,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자주 간다는 카페에서 누나 순영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 봐라, 철아.

    -이게 뭐네?

    -이 누나가 너무 예뻐서 이놈, 저놈 다 나만 보지 않네? 그동안 우리 철이, 누나가 못 놀아 줘서 많이 섭섭했지? 이제 누나랑 놀자야.

    -돌았네?

    국가에서 해외로 유학을 보낼 만큼 천재였던 누나.

    그래서 천재성을 드러낸 어릴 적부터 보위부의 감시가 따랐고, 그들 가족은 정말 사소한 이야기조차도 맘 편히 나누지 못했다.

    누나가 유학을 갔을 땐 편지마저 검열을 당했다.

    그래서 누나 순영은 가족끼리 맘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암호를 만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통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순철은 곧잘 써먹었다.

    이후 이 암호는 둘만의 대화 체계가 되었다.

    그걸 본 순간 확신하게 됐다. 누나 순영은 남자랑 도망친 게 아니란 걸.

    누나 순영은 미행을 당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쫓겼고, 이를 상부에 보고했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를 통해 순철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누나가 알지 말아야 할 무언가를 알게 됐고, 북한이 누나를 팔아넘긴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일에 태국까지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에 순철은 직접 태국 전역을 뒤지기로 결심했고, 2년이라는 시간 끝에 치앙마이란 도시에서 누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를 쫓아 도착한 푸켓의 호텔.

    분명 이 안에 있을 거다.

    누나가 남긴 암호가.

    ‘찾았다.’

    역시 있었다.

    화장대 서랍장 안쪽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그것을 얼른 펼쳐 확인한 순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나가 여기까지 도망친 이유가 적힌 쪽지.

    섬뜩!

    ‘마,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순철은 다급히 커튼을 걷어 창밖을 봤다.

    빠르게 호텔 아래를 살핀 순철은 침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순희의 손을 잡았다.

    "오라바니, 이제 가는 겁니까? 이제 언니 보는 겁니까?"

    "그래, 가자! 얼른 오라!"

    ‘여기서 도망쳐야 해!’

    다급히 방을 빠져나간 순철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태국 남성에게 입을 열었다.

    "오, 이제 일 다……."

    "이 호텔을 몰래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 그건…… 응? 너?!"

    태국 남성은 경악했다. 순철이 너무도 능숙한 태국어로 말해서였다.

    방금 전까지 허접한 영어로만 대화를 나눈 순철.

    "몰래 빠져나가게만 해 준다면 이것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혼란스러웠던 태국 남성은 천 바트 열 장과 순철을 번갈아 보곤 낯빛을 굳혔다. 귀신을 본 듯 하얗게 질려 있는 얼굴.

    "……따라와."

    그들은 호텔 지하의 세탁물 집하장으로 향했다.

    부우웅!

    침대보 따위를 가득 실은 밴이 도로를 달리다 멈춰 선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온 태국 남성은 담배를 물며 주위를 둘러봤다.

    허름한 상점 따위만 몇 개 늘어서 있는 도로.

    텅텅!

    그는 밴을 두드렸다.

    그러자 산처럼 쌓인 세탁물이 들썩이더니 순철과 순희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고맙습니다."

    "됐어. 그걸로 동생 맛있는 거 사 줘."

    지킬 것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꾸벅.

    허리를 깊이 숙인 순철은 순희의 손을 잡았다.

    "가자, 순희야."

    곧바로 도심지로 돌아와 쪽지에서 말하는 장소에 도착한 순철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게 이런 걸까.

    당장 어젯밤까지 구걸을 했던 그 길이다.

    선셋 로드.

    관광객들이 모이는 유흥가.

    순철은 밤이 되면서 다시 시끄러워진 거리의 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헤이, 키드……."

    "순영 누나를 찾으러 왔습니다."

    너무도 어린 순철과 순희가 들어오려고 하자 만류하려던 바텐더가 입을 다문다.

    그러며 신기해한다.

    "정말 왔네?"

    "어디 있습니까, 제 누나는."

    "모르지."

    "무슨……."

    "그녀가 남긴 건 이것뿐이거든.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이걸 주라면서."

    툭!

    바텐더가 바 아래서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 한 권을 꺼낸다.

    "무슨……."

    수첩 안에 적혀 있는 시처럼 보이는 글귀.

    그 시에는 누군가의 인상착의와 이름 등을 의미하는 암호가 담겨 있었다.

    여태껏 다음 행선지에 관한 암호가 적혀 있었는데, 느닷없이 누군가의 인상착의만 적혀 있다니?

    어떤 불길한 생각이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순철은 내색하지 않은 채 침착한 모습으로 바텐더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그래. 잘 가고."

    해맑게 손을 흔드는 바텐더를 뒤로한 순철은 입술을 깨물며 술집을 나섰다.

    그때였다.

    "오라바니…… 보위부."

    "응?"

    고개를 든 순철은 순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곤 숨이 멎는 걸 느꼈다. 이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다.

    순철은 본능보다 빨리 순희를 안아 들었다.

    "잠깐!"

    *   *   *

    "헉! 헉!"

    거미줄처럼 복잡한 골목을 순철이 내달린다.

    삐익! 삑!

    사방에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몰이를 당하는 중이다.

    입술을 깨문 순철은 집과 집 사이 틈 사이로 순희를 밀어 넣었다.

    "우리 순희 오빠 없어도 잘 살 수 있지?"

    "어디 가십니까! 나도 데려가시라요!"

    "이래야 너랑 나 둘 다 산다. 이 오라비가 해 뜰 때까지 안 오면 여기로 연락해라. 약속할 수 있지?"

    순철은 부유한 남조선 사람이라 접근했던 종혁에게 받은 명함과 돈을 모두 순희에게 쥐여 줬다.

    "……알았시오."

    고개를 끄덕인 순철은 그대로 달음박질을 쳤다.

    ‘아주바이, 부디 우리 순희만은 살려 주시라요!

    그리고 잠시 후.

    투다다닥!

    "어디네!"

    삐익! 삑!

    "저깁니다!"

    "가자!"

    뛰는 소리가 멀어지자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순희가 기어 나온다. 순철은 해 뜰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오라바니……."

    명함과 돈을 꼭 쥔 그녀는 순철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반대 방향으로 호다닥 달음박질을 쳤다.

    한편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린 순철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널따란 공터.

    3개의 입구 전체에서 달음박질 소리가 들리더니 곧 4명의 사람이 쏟아진다.

    총 7명.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다.

    "헉! 헉! 이 간나 새끼. 오랜만에 땀나게 하고 있어."

    "후우우. 어이, 순철 동무. 그거 날래 가지고 오라. 누나 만나야 하지 않갔어?"

    포위망을 좁히는 요원들의 모습에 순철은 절망을 느꼈다.

    ‘순희야…….’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이를 악문 순철은 수첩을 뒤로 돌렸다.

    "누나부터 데려오라! 그럼 주갔어!"

    "하아. 그 누나를 찾기 위해 그 수첩이 필요하다. 그러니 얼른 가져오라."

    "가을 뻐꾸기 날리는 소리 말라! 인민의 적인 간나들아! 내 너희를 믿을 것 같네?!"

    요원들의 미간이 좁혀진다.

    뭔가 이상한 말.

    "그거이 무슨 말이야? 인민의 적?"

    "……아무래도 우리가 순영 동무를 팔아넘겼다 그리 오해하는 거 같지 않슴니까?"

    "뭐?"

    그들은 어이없다는 듯 순철을 봤고, 순철은 이를 악물었다.

    "뻔뻔하구나야! 그 두툼한 배때지를 만들기 위해 인민을 팔아먹고도 후라이까는 거이네?! 네들이 그러고도 정찰총국이라고 할 수 있갔어?!"

    "아니……."

    삼십대 초반의 사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체 이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야. 컴퓨터열중자는 원래 저렇게 상상력이 창조적이네?"

    요원들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아. 순철 동무, 무슨 오해를 하는지 이해하겠는데 그런 거 아니다. 교화소에 잡혀간 네 아바디, 오마니도……"

    덜컥!

    순철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우리 오마니, 아바디는 어떻게 한 거네-!"

    삼십대 사내는 처절하게 울부짖는 순철의 모습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됐다. 그냥 뺏어 오라. 우리가 언제부터 말로 했네?"

    "……미안하다, 동무. 사감은 없어. 진정되면 이야기하자."

    순철은 다가오는 대원들을 노려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오마니, 아바디, 순영 누나…….’

    추수를 마치고 한바탕 웃던 가족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평상에 앉아 술 한잔 기울이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고사리나물을 곱게 무쳐 주던 어머니와 누나 순영. 뭐가 그리 좋은지 마당을 뛰어다니며 웃던 순희.

    이제 다시 못 볼 그 모습.

    ‘순희야, 약속도 못 지키는 나쁜 오라바니는 잊고 남쪽에서 씨름꽃처럼 곱게 살아라.’

    마지막을 직감한 순철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오케이,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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