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64화>
49. 태국에서
태국의 대표 휴양지인 푸켓.
작은 공항의 출국 게이트를 넘는 사람들의 눈빛이 몽롱하다.
"……와."
그저 감탄사밖에 안 나오는 그들의 입.
박봉인 경찰 월급에 택시조차 쉽게 타지 못했던 그들에게 전세기의 고급 서비스는 별세계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엄마, 나 다시 저 비행기 타고 한국 가면 안 돼?"
"안 돼."
"아, 왜! 저것만 타도 좋은데!"
특히 여성들의 만족도는 최고였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자식인 형사들은 그런 가족들의 표정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한편, 종혁을 보며 말없이 고마워했다.
종혁은 씩 웃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아들,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지금이라도 돈 보태 줘?"
이번 여행은 자신과 특수범죄수사과 형사들이 모은 상여금으로 해결하겠다며 당차게 말했던 종혁.
그래서 그녀로선 걱정이 들었다.
"걱정 마세요. 이 인원이 이코노미 티켓 끊는 값이나 전세기 빌리는 값이나 별로 차이 안 나니까."
아니다. 제법 차이가 난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껏 비싼 돈 들여 여행 왔는데, 줄 서서 기다리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도 없잖아요."
"오케이. 그럼 난 신경 끈다? 돈 안 보태 줄 거야?"
"걱정 마. 아들도 돈 있어요."
"그건 알아. 그럼 안내 부탁해요, 최 가이드."
"예, 사모님! 편안한 휴가가 되시도록 이 최 가이드가 성심성의껏 가이드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하하!"
"호호호호호!"
그들은 리조트에서 보내 준 픽업카를 타고 움직였다.
"와아!"
"우와아!"
높다란 야자수와 이름 모를 화초들이 가득한 리조트.
이 인원이 모두 놀아도 될 정도로 넓은 수영장과 그 앞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사람들은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자자, 주목!"
모두의 시선이 종혁에게로 모인다.
"이 리조트는 휴가가 끝날 때까지 통으로 빌린 거니까 아무 방이나 골라잡으세요! 가족끼리 놀러 가는데 방해를 받으면 안 된다는 남자분들의 적극적인 의지를 반영한 거니까, 이번만큼은 돈 걱정 마시고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우와악! 아빠 최고!"
"여보!"
사람들은 여행 가방을 무슨 인형처럼 든 채 리조트 안으로 달려갔고, 형사들은 끝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 종혁아."
"정말 고맙다."
종혁은 코밑을 쓱 문질렀다.
"흐흐. 그럼 저희는 요거 시작 콜?"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하는 종혁의 모습에 형사들은 이제 전율마저 느꼈다. 한편으론 소외될 수 있는 그들까지 챙기는 완벽함.
이건 정말 완벽한 여행이었다.
이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였다.
"코올-!"
* * *
"꺄아!"
"으아악!"
풍덩! 어푸어푸!
수영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신이 나서 뛰놀고, 어린아이들은 엄마, 누나 보호 아래 첨벙첨벙 물장구를 친다.
비치 체어에 누운 노인들은 그런 떠들썩한 풍경에 미소를 짓는다.
"이야, 이렇게 술을 마셔 본 게 얼마 만이냐."
"술을 마셔도 잔소리를 듣지 않다니!"
"이야, 한국에 남은 사람들 이거 알면 눈에서 피눈물 흘리겠다."
"그러게 누가 가위바위보 지래?"
지글지글 고기가 구워지는 야외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 술을 마시던 형사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어쩌다 사건 터져 며칠 만에 들어가면 술은커녕 씻고만 자야 했던 눈치의 나날들.
언제나 자식이 잠들어 있는 모습만 보고, 자식이 자라는 걸 손뼘으로만 재야 했던 나날들.
그들은 생동감 있게 뛰노는 가족들을 보며 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온 진짜 휴식과 술 한잔에 모두 나른하게 늘어졌다.
"그런데 종혁아. 우리 저녁엔 어디 가냐?"
"한 4시부터 움직일 거지?"
종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한국인들은 이래서 문제다. 휴가를 왔으면 휴가를 즐겨야 하는데, 마치 전쟁을 하듯 전투적으로 스케줄을 진행한다.
"안 갑니다. 오늘은 리조트에서 푹 쉴 거예요."
"어? 왜?"
"야, 돈 아깝게!"
"지금 가자고 해서 뭔 원망을 들으려고요? 더 이상 술 드시기 싫으시면 그렇게 하고요."
"……아, 태국 맥주도 먹을 만하네!"
"소주는 안 파려나. 웨이터! 기브 미 소주! 두 유 노우 소주?"
종혁은 피식 웃었다.
"내일도 한 10시쯤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거니까 오늘 하루는 마음 푹 놓고 쉬세요.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가이드도 구해 놨으니까."
"오케이!"
"자, 그럼 짠 합시다!"
"짠!"
종혁도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여유를 마음껏 만끽했다.
다음 날, 한 명도 빠짐없이 조식을 즐긴 후 로비에 모인 사람들은 종혁이 불렀다는 가이드를 기다렸다.
"가이드가 친구랬지?"
"예. 전에 방콕 아시안게임 때 사귄 친구예요."
사귀었다는 말에 모두의 눈이 번쩍 뜨인다.
"여자?"
"아들, 엄마는 다 좋아."
"남자입니다, 아줌마."
남자도 보통 남자가 아니다.
방콕 아시안게임뿐만 아니라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치열하게 붙었던 상대, 태국의 유도 메달리스트 라차논.
오늘 가이드를 해 주겠다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혹시 갑자기 여자가 되어서 나타나고 그러는 거 아니냐? 왜? 한국에 일하러 오는 애들 중 그런 애들 많잖아."
종혁은 농담을 건네는 김종두 과장을 한심하다는 듯 봤다.
태국이 타국에 비해 트렌스젠더에 대한 편견이 없고, 트렌스젠더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이 성전환을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무엇보다 라차논은 종혁과 비슷한 키에, 체중은 더 많이 나갔던 털복숭이 마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절대 그럴 리가……."
뚜각뚜각!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돌린 사람들은 우와 입을 크게 벌렸고, 종혁은 망연자실했다.
"……있네."
모델 뺨치는 몸매와 종혁과 비등하게 큰 키.
분명 프랑스 혼혈의 아리따운 외모지만, 그 안에 라차논이 있다.
신장 192cm, 몸무게 136kg이었던 태국 친구가 여자가 되어 나타났다.
"최!"
"오지 마! 잠깐! 오지 마!"
"……오랜만에 만났는데 섭섭하게 이러기야?"
"그딴 표정도 짓지 말고! 확 죽여 버린다!"
"후훗. 많이 놀랐어? 나 예쁘지?"
"목소리 똑바로 해, 새끼야! 주댕이도 처넣어!"
"이 목소리?"
"억?!"
"히약!"
아리따운 미녀의 등장에 므흣한 표정들을 지었던 사람들이 두꺼운 남자 목소리에 경악한다.
"나, 남자가 맞네? 으응…… 엄마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게. 아들, 파이팅. 결혼하면 분가하자."
"아니라고-!"
종혁은 라차논을 노려봤다.
"너 뭐야! 꼴이 왜 그래!"
"네가 시드니를 마지막으로 출전 안 한다고 했잖아. 더 이상 유도가 재미없을 것 같아서 내 진짜 성정체성을 찾은 것뿐이야. 정말 그것뿐."
"아니, 너 원래 안 그랬……. 그래서 시드니 이후로 메일로만…… 와, 돌아 버리겠네."
머릿속이 뒤엉켜 말이 안 나온다.
마른세수를 한 종혁은 다시 라차논을 봤다.
"……그래. 오랜만이다, 라차논. 내 친구."
"앞으론 래빗이라고 불러 줘, 자기."
씩 웃은 종혁은 그대로 악수한 손을 잡아당기며 업어쳐 버렸다.
부지불식간이었지만 겨우 허리를 비틀어 착지한 라차논이 뚱한 표정을 짓다 굳어 버렸다.
"한 번만 더 자기라고 했다간 죽여 버린다."
"……네."
진심 어린 말투에 라차논은 장난을 그만두기로 했다.
* * *
부아아앙!
새하얀 요트 세 대가 쪽빛 바다 위를 질주한다.
관광객들이 타는 말만 요트가 아니라 진짜 요트.
끈적한 바닷바람이 맹렬히 달려와 온몸에 부딪치자 모두 기쁨의 비명을 질렀고, 요트 조타석 뒤에 있는 의자에 앉은 종혁은 그걸 보며 웃었다.
그러다 옆에서 울상을 짓는 라차논을 봤다.
얼음이 담긴 컵에 맥주를 따르려다 계속 실패하는 그.
"그럼 요즘 뭐하고 지내?"
"맨날 똑같지. 사건, 또 사건, 그리고 또 사건."
라차논도 경찰이 됐다.
시드니 올림픽 이후 경찰사관학교에 진학한 게 아니라, 이미 방콕 아시안게임 때 경찰사관학교의 생도였다.
현재 계급은 러이 땀 루어 또.
한국으로 치면 경감이다. 진급이 무척이나 빨랐다.
"태국도 똑같네."
"세계 어딜 가든 똑같지. 너 태국에서 하루에 발생하는 살인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알면 깜짝 놀랄걸?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 여기 푸켓으로 자원한 거잖아."
"그 정도야?"
"말해 뭐해. 그런데 여기까지 놀러 와서 이런 우울한 이야기만 할 거야?"
"음?"
의아해하던 종혁은 이내 깜짝 놀랐다. 라차논이 갑자기 상의를 벗었기 때문이다.
면적이 적은 정열의 빨간 비키니에 힘들게 가려진 하얗고 큰 가슴.
"왜? 끌려?"
"겨드랑이에 수술 자국 보인다."
"뭐? 그럴 리가…… 쳇!"
중지를 치켜 든 라차논은 영어로 ‘나도 끼워 줘, 아가씨들!’이라며 외치곤 밑으로 내려갔고, 종혁은 난간에 팔을 걸치며 턱을 괴었다.
"그런데 어떻게 방콕에서 여기까지 온 거지?"
푸켓은 태국 남쪽에 있는 섬이다.
게다가 태국 남부는 불교가 아니라 이슬람교를 믿기에 생활상마저 판이하게 다른 곳이다.
버스를 탄다면 거의 보름 가까이 걸리는 거리.
방콕의 엘리트 경찰이 올 만한 곳이 아니었다.
"……뭐 올 수 있으니까 왔겠지."
‘그리고 뭔 이유가 있겠지.’
라차논의 말처럼 휴가를 왔다면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해야 됐다. 종혁은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좋다."
이게 바로 휴가였다.
그렇게 할리우드 영화 비치 때문에 유명해진 피피섬 관광을 마친 그들은 다시 푸켓으로 돌아와 마사지를 받고, 판타지 쇼라는 코끼리 쇼까지 관람을 한 후 야시장 투어에 나섰다.
삐이익! 빵빵!
사방에서 터지는 폭죽들.
격렬한 비트가 흘러나오는 주점에서 맥주를 마시는 관광객들, 그런 관광객들에게 특산품이나 과일을 권유하는 상인들.
그 자유로운 분위기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일행들이 서슴없이 지갑을 연다.
"야, 이거 진짜 칼인데? 날만 갈면 완전히 칼이야."
"태국은 도검 관리법이 없나?"
‘에라이.’
여기까지 와서 일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종혁은 병맥주를 들이켜며 무시했다.
그때였다.
"호, 혹시 남조선에서 오셨습네까?"
"응?"
종혁은 조개를 엮어 만든 목걸이나 열쇠고리 따위를 들고 있는 소년을 봤다.
얼마나 못 먹었는지 피골이 상접하고 꼬질꼬질한 소년. 이제 16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은 그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소녀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북에서 왔니?"
탈북민이다.
‘탈북민이 자유를 찾아 태국, 그 너머까지 도망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형사들의 표정이 무너진다.
갑작스레 찾아온 분단의 아픔이 그들의 가슴을 헤집는다.
"가, 같은 동포인데 사정 좀 봐주시라요."
"……그래. 다 해서 얼마니? 모두 살게."
순간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됐습네다. 동정은……."
"오라바니, 집엔 언제 갑니까? 순희는 배가 고파요."
"……."
종혁은 입을 꾹 다무는 소년의 모습에 무릎을 숙여 눈을 마주쳤다.
"아저씨 일행들이 좀 많은데, 혹시 물건 더 없니?"
"지, 지금은 없습네다!"
"그래? 그럼 그것만 줘."
종혁은 형사들에게 시선을 줬고, 바로 알아들은 그들은 인의 장막을 쳤다.
보호자조차 없어 보이는 아이들에게 큰돈은 오히려 화근이다. 그래서 인의 장막을 친 거다.
그제야 종혁은 지갑에 있는 지폐를 전부 꺼내 소년이 허리에 찬 낡은 힙색에 쑤셔 넣었다.
"이건 너무 많습네다! 치우시라요!"
"꼬마야."
진지한 종혁의 얼굴에 불같이 화를 냈던 소년이 입을 다문다.
동정은 단 한 점도 없이 진지함만 가득한 눈.
"너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홀몸이 아니잖아. 지킬 것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는 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가장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책임감이지."
"책임감……."
소년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동생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고 힙색의 지퍼를 잠갔다.
"가, 감사합네다."
"앞으로 이틀 동안은 푸켓에 있을 테니까 혹여 도움이 필요하거나, 한국에 오고 싶으면 거기 전화번호로 연락해."
"아니……."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머리를 헤집은 종혁은 몸을 일으켜 돌아섰다.
"자, 가시죠."
"에이, 씨부럴. 통일은 대체 언제 되는 건지."
"되긴 된답니까?"
"내가 아냐. VIP나 아시겠지."
소년은 멀어지는 종혁의 넓은 등을 멍하니 응시했다.
"오라바니, 배고픕네다. 내 말 안 들립네까?"
"……뭐 먹고 싶니? 오늘 우리 순희 먹고 싶은 거 다 먹자."
"일없습네다. 저기 망고라는 것만 하나 사 주시라요. 저게 무슨 맛인지 정말 궁금했습네다."
"그래, 먹자. 배 터지게 먹자야."
‘그리고…….’
소년은 저 멀리 높게 세워진 호텔을 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갈 수 있겠구나야. ……큰누나, 내가 곧 가겠습네다. 조금만 기다리시라요.’
소년은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