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138화 (138/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38화>

도자기나 명화들이 걸린 큰 사무실.

50대 장년인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점심때라서 그런지 소리가 잘 울리지 않는다.

-형배 그 친구가 그렇게 간 건가…… 허어. 그렇게 갈 친구가 아니었는데.

주형배. 서울 3지부 지부장의 이름이다.

장년인은 서울 3지부와 한빛 비즈니스 수련원이 날아갔는데도 지부장부터 찾는 ‘어르신’의 모습에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3지부가 러시아에서 일을 하다 KGB를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무얼. 그게 자네 잘못도 아니고.

러시아는 국정원이 서울 3지부와 한빛 비즈니스 수련원에 도착할 때까지 목적지에 대해 함구를 한 것도 모자라 연락조차 못하게 막았다.

결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본사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일을 가지고 질책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안가를 관리하던 이가 서울 3지부장 등을 제거하면서 국정원 전체에 내사가 들어간 상태지 않은가.

본사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내막을 알아봐 준 게 고마웠다.

-길상이와 덕만이는 어찌 됐나.

"김 원장은 러시아로 이송됐고, 안가를 관리하던 그분은 자살을 선택하셨습니다. 김 원장은 기억에 이상이 있다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저도 더 파고들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마저도 겨우 얻은 정보다. 더 파고들었다면 추적은 물론이고, 겨우 만들어 놓은 끈조차 잘렸을 것이다.

-그랬는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침묵에 장년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은 누군가?

움찔!

갑자기 무정해지는 목소리.

하지만 장년인은 몸을 굳혔더라도 놀라지는 않았다.

방금 전 조직이 입은 손해보다 사람부터 찾았지만, ‘어르신’의 본성은 이런 맹수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반이라는 러시아 졸부가 이 일의 원흉인 것 같습니다. 3지부의 모든 자료가 날아간 상황이라 자세한 사정은……."

-졸부라 함은 배움도 없고, 교양도 없이 돈만 있는 놈들이라 알아서 적을 만들고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때를 봐서 지울 테니 잊으시게.

본사에서 직접 나서겠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그래, 언제 넘어올 건가?

"날 잡아서……."

-허어. 몇 년 전엔 대전에 있던 그 아이가 가더니만 이번엔…… 허허. 이렇게 점점 가는구만.

"끙. 곧 약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기다리겠네. 아, 그리고 곧 지방 쪽에서 큰 프로젝트를 하나 시작할 건데, 혹여 협조 요청이 들어오면 받아 주시게.

‘프로젝트? 지방에서?’

장년인은 본사에서 직접 내려보낸 프로젝트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시게.

전화를 끊은 장년인은 전화기를 빤히 바라보다 내려놓았다.

그러곤 담배를 물며 일어섰다.

벌컥!

"2지부 관측 보고는 왜 안 들어오는 거야?"

"송 대리!"

"예!"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사무실.

언제나 똑같은 서울 1지부의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왜일까. 곧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이는 건.

지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서 그런지도 몰랐다.

"후우우."

담배 연기를 뿜은 그는 몸을 돌렸다.

일할 시간이었다.

*   *   *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가시고 어느덧 겨울이 왔다.

거리를 울리던 캐롤송도 사라지고, 다사다난했던 2003년도 마지막을 고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거리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3차 가자, 3차!"

"어이구. 많이 취하셨어요, 부장님."

송년회를 끝낸 회사원들.

2003년이 지나기 전에는 꼭 이성을 사귀겠다며 나이트클럽으로 향하는 청춘들.

"군고구마 사세요!"

"군밤도 있어요!"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우렁차게 외치는 군고구마 장수와 그 맞은편 군밤 장수.

따끈한 온기가 퍼지는 포장마차엔 사람들이 옹기종기모여 뜨거운 어묵 국물을 호호 불며 마시고 있다.

술집엔 사람들이 더 북적였다.

종혁도 그런 술집에 있었다.

아직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끝나려면 멀었고, 과제도 넘쳐 나지만 나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야 이씨!"

친구 박수호가 군대에 입대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가장 추울 내년 1월 초에.

놀리기 위해 시간을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야, 강현석! 너도 그러기냐! ……어휴."

겨우 허락을 받고 종혁과 함께 나온 강현석을 노려보던 수호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야, 밤톨! 안주도 먹어 가면서 마셔!"

만날 아옹다옹 다투던 소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안주를 챙겨 줬고, 그걸 보는 이리나의 표정도 썩 좋지 못했다.

종혁은 오늘따라 더 좁아 보이는 수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 마, 인마. 죽으러 가냐?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가는 거잖아.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맞습니다, 행님. 제가 아는 수호 행님이라믄 어딜 가서든 잘하실 수 있을 겁니더. 게다가 후방이라믄서요."

믿는다는 두 사람의 말에 작게나마 힘을 얻었던 수호는 이내 중요한 사실을 깨닫곤 얼굴을 구겼다.

"잠깐. 근데 너흰 안 가잖아. ……좋냐?"

거기까지 말한 수호는 울컥했다.

"왜 사지 멀쩡하다 못해 몸 좋은 너흰 안 가고, 나만 가는 건데! 이게 말이 되냐고!"

종혁은 꼬장을 부리는 친구를 향해 활짝 웃어 줬다.

"응, 나 금메달."

"전 졸업 후 의갱 부소대장입니데이."

빠직!

수호는 말없이 달려들었고, 곧 현석의 선에서 정리되었다.

"에헤이. 다칩니더, 행님. 에헤이. 다친다니까요? 이라다 어디 뿌사졌다꼬 군대 안 가는 거 아닙니데이."

움찔!

"……헉헉! 힘만 좋은 짱돌 자식."

"칭찬 감사!"

"아오오!"

킬킬 웃은 종혁은 수호의 잔에 술을 따라 줬다.

며칠 후면 가는 친구, 다른 건 몰라도 술만큼은 원 없이 사 줄 수 있었다.

"3차 가자! 3차…… 웨에엑!"

"하이고야. 이 행님 걸뱅이 됐쁫네. 우얄까요, 행님?"

"어쩌긴 뭘 어째. 근처 호텔에 처박아야지."

종혁은 소영과 이리나를 봤다.

얼굴이 발갛고 초점이 풀린 게 더 이상 술을 마실 수 없을 듯했다.

"너희도 가라. 택시 잡아 줄게."

"시른데? 더 마실 꼰데?"

"나! 나도 호텔가고 싶습니다! 호텔 가서…… 에헤헤."

꼬장을 부릴 시동을 거는 소영과 이미 맛이 가서 또 헛소리하는 이리나.

종혁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의 풀어진 모습에 흐뭇이 웃었다.

"택시-! 따따따블-!"

*   *   *

털썩!

"나이트 갈 거야…… 음냐. 나이트……."

수호를 침대에 던져 버린 종혁은 따라온 현석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더. 제가 업었어야 했는데."

"누가 업으면 어떻다고. 어쩔래? 한 잔 더…… 잘래?"

따뜻한 곳에 와서 그런지 현석의 눈이 갑자기 천근만근이다.

"씁! 아입니더! 가입시더!"

"그냥 자도 돼."

"무슨! 저 그리 의리 없는 놈 아입니데이!"

"……그래. 나가자."

호텔을 빠져나온 종혁은 잠시 술을 깨고자 겨울 찬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밤,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좀 감성적으로 변한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김 대리가 실토한 조직의 구성이 떠올랐다.

‘……니미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아하도 아니고.’

대도시마다 지부라는 게 있다고 한다. 광주에도 인천에도.

조직원의 숫자는 불명.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본사라는 것도 있고, 세계 각국에 파견 직원이라는 것도 있다.

예상을 한 번 더 벗어난 어마어마한 규모.

앞이 막막할 정도지만, 절망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사지를 찢어야 될 놈들이 많아서.

복수할 대상이 그저 그런 놈들이 아니라서.

좋다 못해 고마웠다.

‘정말로…… 고맙다!’

사납게 웃은 종혁은 다시 밤 하늘을 보며 숨을 골랐다.

몰려온 차가운 공기가 달아오르던 몸을 식히며 술을 깨웠다.

"2003년도 이제 하루만 남았네."

"그라니까요. 와, 시간 빨리 갑니데이."

걷다 보니 술이 깬 건지 현석의 눈이 또렷했다.

"참 길었지."

"그랬습니꺼? 전 음청 빨랐습니더."

종혁과 현석의 눈가에 아련한 미소가 맴돌았다.

하지만 종혁은 좀 다른 의미였다.

회귀를 하고 벌써 7년.

드디어 내년이면 진짜 경찰로서 현장에 복귀를 한다.

지금처럼 더 이상 놈들을 어떻게 쫓았냐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범죄자를 잡아도 수갑을 채울 수 없던 날들도 이젠 안녕이었다.

"검거 때 뒤로 빠져야 했던 소외감도 이젠 안녕이지."

‘뭐 그 전에 처리해야 될 놈이 있지만…….’

"예? 머라캤습니꺼?"

고개를 저은 종혁은 옆 골목을 향해 몸을 틀었다.

"아이고. 바쁘다, 바빠."

한 손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하얀 봉지를 든 40대 중년 여성이 둘을 힐끗 보고 걸음을 재촉한다.

현석은 그 모습을 보며 추억에 젖어든다.

‘나도 저랬는데…….’

"행님, 근데 어데까지 가는 겁니꺼? 이러다 술 다 깨겠습니더."

"응. 다 와 가."

"예?"

주위를 둘러본 현석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주택이나 원룸 건물만 가득한 골목.

술을 마실 수 있는 가게는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다.

"정말 다 왔어."

"대체…… 어?"

현석은 갑자기 옆 골목을 향해 몸을 날리는 종혁의 행동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경악했다.

"케헥!"

분명 새까만 어둠만 가득했던 장소에서 웬 비명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종혁은 잡아당기는 팔에 끌려 나오는 사내를 향해 사납게 웃어 줬다.

움켜쥔 목이 싸늘하다 못해 차갑다.

이놈이 여기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증거다.

"잡았다, 이 쥐새끼야."

이맘때 대한민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연쇄살인마, 정병규.

처음엔 이렇게 늦은 밤 어 둔 골목을 오가는 부녀자를 칼로 찌르는 걸로 욕구를 풀다가, 결국 살인의 참맛을 알며 연쇄살인마가 된 정병규.

베고 찔려 고통에 일그러진 눈을 보면 그날 하루가 참 좋았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던 놈.

그러다 마음속 악마가 부추겨 결국 살인을 저질렀다는 희대의 망언을 지껄인 개새끼.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는 말은 정말 유명했고, 그 말이 정말이라는 듯 정병규는 독방에서 목을 메달아 죽는다. 마치 마지막 살인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듯.

미친놈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이놈을 지칭하던 단어는 찌질이였다.

여성, 노인, 어린아이 등 자신보다 약한 상대만 노린 찌질한 살인마.

‘그냥 병신 새끼지.’

그리고 회귀 전 정병규는 오늘 이 장소에서 몇 시간 뒤 첫 범행을 저질렀다.

슉! 터억!

종혁은 어느새 뽑은 건지 명치를 향해 찔러 오는 칼을 쥔 정병규의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 꺾으며, 그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줬다.

"케게게게겍! ……크륵?!"

종혁은 결국 정신을 잃은 정병규를 내던지며 핸드폰을 꺼냈다.

"삼촌, 전데요. 혹시 서울, 경기에서 저녁에 갑자기 튀어나와 부녀자를 칼로 찌르고 튀는 사건이 발생한 적 있을까요?"

-왜? 혹시 너…….

본청 특수범죄수사과 김종두 과장의 의심 가득한 말투에 입맛을 다신 종혁은 정신을 잃었는데도 칼을 꼭 쥐고 있는 정병규를 응시했다.

"넌 이제부터 밀착 마크다."

이제 정병규가 남의 피를 볼 일은 평생토록 없을 터였다.

종혁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   *   *

"아니, 이건 대체……."

당황으로 물든 현석이 김종두의 손에 이끌려 사라지는 정병규와 종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이게 우째 된 일입니꺼?!"

술을 마시러 가던 와중에 범죄자를 잡았다. 아니, 곧 범죄를 저지를 예비 범죄자를 잡았다.

그것도 칼을 든.

"……우째서?!"

종혁은 혼란에 빠진 현석의 어깨를 잡았다.

"현석아."

"예."

"범인을 많이 잡다 보면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왠지 저길 가 보고 싶다, 저놈을 잡아야겠다 뭐 그런 촉이 설 때가. 개소리 같지만 정말 그래."

"……진짜요?"

종혁의 말처럼 개소리 같은데, 종혁은 생도 신분으로 범죄자를 아주 많이 잡은 사람이라서 그렇게 들리지가 않았다.

‘휴. 다행이네.’

흔들리는 현석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린 종혁은 다시 밤하늘을 보았다.

어느새 눈이 멈춘 밤하늘엔 별이 떠 있었다.

‘이제 올해 일어날 사건도 모두 끝인 건가?’

그렇다고는 볼 수 없다.

분명 종혁이 모르는 곳에서 온갖 범죄가 일어나고 있었다.

어딘가에선 강도 사건이.

또 어딘가에선 살인 사건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의 범죄가 발생하는 대한민국.

그러나 종혁이 알고 있는 사건은 이걸로 끝이었다.

종혁은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순간이었다.

띠리링! 띠리링!

"음? 권 대장님?"

프로파일링수사과의 권순호 경사다.

종혁은 잠시만이란 제스처를 취하곤 전화를 받았다.

"예, 대장님."

-종혁아, 넌 밀실 살인이라는 게 성립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고개를 모로 기울이던 종혁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그러고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회귀 전, 그가 막 퇴원을 했을 무렵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밀실 살인 사건을.

종혁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밤이 깊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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