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128화 (128/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28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파리한 낯빛이다. 숨은 거칠고, 고약한 구취가 치약 냄새와 함께 미약하게 맡아진다.

종혁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여성의 눈에 아픔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곧 뭔가를 생각하며 활짝 웃는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본인의 몸 상태를 알고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거다.

마지막 촛불을 태우는 거다.

종혁은 그 누군가가 짐작이 갔다.

"……일단 8인으로 주세요. 많이 먹으니까."

"네! 8인 주문 받았습니다!"

그녀가 돌아가고 남겨진 자리.

종혁을 비롯한 4명의 입이 다물어졌다. 이 자리에서 그녀의 각오를 읽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젊은 아가씨가…… 쯧쯧."

권순호 경사는 이를 쑤시며 혀를 찼다. 무로이와 미하일도 생각이 많은 얼굴이다.

"그럼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야, 벌써 가려고?"

"오늘은 그냥 인사 차 온 거예요. 내일부터 제대로 뵙겠습니다!"

"쩝, 그래. 내일 봐."

띠리링! 띠리링!

"프로파일링수사과 과장 권순호입니다. 아, 용산서요?"

권순호 경사는 손을 저었고, 거수경례를 한 종혁은 돌아섰다.

"자, 그럼 둘이 머물 숙소부터 알아볼까요?"

멘토링 시스템이 시작되며 제약이 풀렸다.

경찰대학교에 복귀하지 않아도 됐다.

종혁은 두 사람을 종혁 본인의 집이 있는 정혁 빌딩에 머물게 할 생각이었다.

부우웅!

달리는 차 안.

방금 전 여성 때문인지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우리 러시아도 저런 여성이 많습니다. 부양해야 될 가족을 위해, 자식을 위해."

돌아오지 않는 남편 대신 몸이 부셔져 가도 이를 악물고 일하는 여성이 많다.

무로이의 낯빛도 어두워진다. 일본에도 미혼모 가정이 많기 때문이다.

종혁은 그런 둘을 보며 엄한 표정을 지었다.

"섣불리 일반화를 하면 안 됩니다."

"예?"

"그녀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는 겁니다."

성급한 일반화는 편견을 만들어 내고, 이는 무고한 피해자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확실한 근거가 없다면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나 프로파일링에서는 몹시 조심해야 될 부분이었다.

종혁 본인도 그녀에게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배우게 될 테지만 미리 말하죠. 무엇이든 끝까지 의심하세요. 결코 함부로 짐작하지 마세요. 그게 두 분이 배우러 온 수사 기법의 기본입니다."

"아……."

싸늘하도록 냉정한 눈빛.

마치 철부지 망나니를 훈계하는 어른 같다.

정신이 번쩍 든 둘은 낯빛을 무겁게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종혁은 그제야 활짝 웃었다.

"그럼 친목 도모를 할 겸 술이나 한잔하러 갈까요?"

남자 셋이 친해지는 데 술만큼 좋은 게 없다.

"오! 한국에도 보드카가 있습니까?!"

"맥주도 있어요."

"오오오! 술을 마실 줄 알군요, 동지!"

"잠깐, 종혁. 아직 해가 떠 있는데 마시자고?"

"응? 전에도 마셨잖아요, 낮술."

"잠깐?! 그,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일본 경찰들의 위신을 짓뭉갰던 탈옥 사건.

종혁에 의해 놈이 내륙으로 도망친 걸 알게 된 것도 모자라, 검거도 종혁이 하자 부끄럽고 괴로워 술을 마셨다.

"음? 시라사기에서 같이 마셨잖아요."

시라사기. 일본판 한상원 사건을 해결한 후 무로이가 데려간 BAR이름이다.

탈옥한 범죄자에게 끔찍한 일을 당한 피해자의 아버지이자, 전직 사기 브로커가 일하던 곳.

종혁은 여기서 철수야 놀자 사건인, 후원사기 사건에 대해 한국인이 배워 갔다는 걸 알게 됐다.

"아? 아아아……!"

"아, 혹시?"

생각해 보니 탈옥수를 검거한 다음 날, 무로이는 꽤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마치 숙취에 시달리는 듯한 얼굴로.

"자, 잠깐-!"

*  *  *

웅성웅성.

폴리스 라인이 쳐진 한 주택 앞.

권순호 경사는 좀비가 따로 없는, 그것도 장렬히 산화하기 일보 직전인 무로이를 가리켰다.

"술이 약하더라고요."

"허약해, 무로이 동지."

"あなたがたが狂った(당신네들이 미친 거야)……."

피식 웃음을 흘린 권순호 경사는 어제 접수한 사건 파일을 넘겼다.

"한번 훑어봐."

종혁은 두꺼운 사건 파일을 살폈다.

미하일과 무로이도 다가온다.

"연쇄 절도 사건이네요?"

"어. 그런데 귀신이 따로 없어. 족적이나 지문, 머리카락이 나오지 않아. 족흔만 겨우 있어."

빈집털이범.

무려 1년 사이에 관내에 똑같은 놈이 저지른 것 같은 사건이 15건이나 터졌다. 그런데 놈에 대한 뚜렷한 단서가 무엇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그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프로파일링수사과까지 사건이 넘어온 것이다.

"시그니처는요?"

시그니처.

계획적, 또는 습관적으로 나오는 행동을 의미했다.

"3페이지."

시그니처를 확인한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미하일과 무로이에게 사건 파일을 넘겼다.

그리고 두 사람이 다 훑어보자 질문을 던졌다.

"지금 거기서 판단할 수 있는 건?"

"대범하다?"

무로이의 말에 미하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심지어 너무 여유로워, 동지."

범인은 물건을 모두 훔친 뒤 마치 청소라도 하듯 여유롭게 자신의 흔적을 은폐했다.

꺼냈던 서랍을 다시 집어넣고, 보석함은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 모습에선 어떠한 초조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게 놈의 시그니처였다.

"또?"

"……."

어제 들은 충고 때문인지 말을 아낀다.

좋은 모습이다.

종혁은 따라오라 손짓하며 현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놈이 남기고, 과학수사대가 보강한 족흔을 쫓아 안방 장롱 앞에 섰다.

결혼 예물 등이 담긴 보석함이 있는 장롱.

놈은 여기부터 시작해 TV 서랍장, 화장대, 안방 서랍장 등 시계 반대 방향을 뒤진 후에야 작은 방으로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실을 뒤졌다.

심지어 거실은 다 뒤지지도 않았다. 마치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여기서도 여유가 가득 느껴졌다.

"알겠어?"

둘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저 이놈이 더 대범하다는 확신만 가졌을 뿐이다.

"가장 돈이 되는 게 있는 곳부터 뒤졌잖아."

과학수사대와 권순호 경사가 정리한 화살표가 그걸 말해 준다.

"……어?"

경악한 무로이와 미하일이 다시 사건 파일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미리 와서 탐색을 했다?"

"그럴 확률이 높지."

종혁은 따라온 권순호 경사를 봤다.

"가스검침원, 인터넷이나 유선TV 설치기사, 보험설계사 같은 걸로 위장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권순호 경사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크. 역시 너도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역시 종혁은 프로파일링수사과에 와야 했다.

"문제는 그때 어떻게 집 안을 뒤질 수 있었냐는 건데……."

설령 신분을 꾸며 집 안에 미리 들어와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값나가는 것들의 위치를 파악해 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들어온 게 아니고서야 말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권순호 경사는 얼른 핸드폰을 꺼냈다.

"예, 권순호입니다."

그는 형사에게 현재까지 내린 추측을 설명했다.

"혹시 집에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때 화장실을 가거나 주차 문제 등 때문에 잠깐이라도 자리를 비운 피해자가 있을까요? 아님 그게 아니라도 귀중품의 위치가 바뀌었다든가."

살다 보면 평소처럼 일을 보고 집에 들어왔는데 갑자기 위화감 같은 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치 누군가 왔다간 것 같은 위화감.

권순호는 그걸 말하고 있었다.

"중요한 거니 바로 확인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형사가 어떻게 알았냐며 전화를 해 왔다.

모두 인터넷 설치기사나 보험설계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차 문제 혹은 유리창이 깨져 잠깐 자리를 비웠고 한다.

종혁과 권순호는 서로를 바라봤다.

"최소 2인조네요."

"한 명은 바람잡이일 거고. 행동조는 아니야."

두 명이 교차 검증을 끝냈다면 다른 현장을 볼 필요도 없다. 어차피 다른 현장은 모두 수습되어 사건 파일로만 남았을 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접니다. 원숭이 박상철 지금 뭐합니까? 좀 바꿔 주세요."

회귀 전, 종혁의 위를 드러내게 만든 원숭이 박상철.

빈집털이 잡범이었다가 강도살인범으로 변한 놈.

그동안 흥신소를 시켜 놈이 또 범죄를 저지르나 감시 중이었다.

잠시 후, 박상철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씨발. 진짜 나 감시하네. 왜?!

"어떤 놈이 사전 답사 후 빈집을 털었어. 가장 돈이 되는 게 있는 곳부터. 머리털, 족적, 지문은 없고. 최소 2인조야."

-나 아니야! 나 손 씻었다고! 지금 눈 빠지게 용접하거든!

"알아. 너 아닌 거."

박상철의 시그니처와 다르다.

또 그는 독고다이다.

"그러니까 누굴 것 같아?"

원래 비슷한 놈들끼리는 서로 아는 법이다. 교도소에서 만나게 되니까.

-……최소 2인조면 육효종? 박병수?

종혁도 같은 생각이다.

이 정도로 치밀한 빈집털이 단체는 몇 명 없다.

아니, 애초부터 빈집털이를 하는데 단체로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아, 그래? 그 새끼들 지금 어디 있냐?"

무로이와 미하일은 순식간 끝나 버린 사건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프로파일링 수사?"

"……미쳤군."

전율이 몸을 달린다.

‘무조건 익혀야 된다!’

‘더 많이 보내야 된다고 보고해야 돼!’

종혁은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어제 말했잖아. 확신은 금물이라고. 놈들일지 아닐지는 아직 몰라."

"음?"

"대장님은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세요? 전 한 60퍼센트로 잡고 있는데."

범인이 잡히기 전까지 경찰은 절대 저놈이 범인일 거라 확신하면 안 된다.

이건 기본이다.

그래서 용의자란 말이 있는 거다.

"역시 종혁이 넌 짜네. 난 한 70퍼센트?"

권순호는 의아해하고 인정할 수 없다는 강렬한 눈빛을 짓는 무로이와 미하일의 모습에 역시 젊음이 좋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미디어의 발달 때문이야. 미디어가 보다 더 이런 사건을 상세하게 다루기 시작하면서 모방 범죄가……."

혹여 모방이 아니라도 참고가 된다.

이를 통해 범죄자들은 변수를 줄이고, 더 치밀해진다.

‘이 외에도 여러 이유들 때문에 범죄 수법이 나날이 진화하는 거지. ……그런 거 할 대가리로 좋은 일은 못할망정.’

참 엿 같은 일이라며 중얼거린 종혁은 담배를 물었다.

"엄마! 경찰차, 경찰차!"

"그러네. 경찰차네. 우리 영우가 되고 싶은 게 뭐?"

"경찰차!"

‘푸핫!’ 경찰도 아닌 경찰차.

웃긴 말에 고개를 돌렸던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번까지가 우연이라면, 세 번째는 필연이다.

그래선지 작고 귀여운 남매의 손을 잡은 채 어딘가로 걷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어? 아빠다! 아빠-!"

‘남편이 있구나. 그런데 왜 그런 몸으로 일을?’ 엄마의 손을 놓으며 후다닥 달려가는 두 남매.

양복을 입은 30대 초반 남성이 환하게 웃으며 두 남매를 양팔로 끌어안는다.

꺄르르 맑고 예쁜 웃음소리가 퍼진다.

하지만…….

‘흡?!’

의문이 들어찬 눈으로 달리는 아이들을 좇다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종혁은 경기를 일으키듯 반응했다.

어찌 저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왜 또 나왔어. 몸도 아픈 사람이."

"우리 멋진 오빠 1초라도 더 빨리 보려고요."

"하, 진짜 그놈의 고집은. 밥은 먹었어?"

‘죄는 회개할 수 있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지껄인 인면수심의 악마.

아내가 병으로 사망하자, 두 자식에게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만든 후 영종대교에서 던져 버린 악마 중 악마.

영종대교 유아 투기 살인사건의 주범, 정천우.

왜 필연이 됐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뭐야, 이 다정한 모습은?’

*  *  *

21평 작은 맨션.

옅은 한약 냄새가 이희선의 코를 찔렀다.

그녀는 정천우의 재킷을 벗기며 물었다.

"콜록. 콜록. 오늘도 힘들었죠?"

한방병원 레지던트인 남편, 정천우.

"뭘. 애들 보느라 자기가 고생이지."

"피이. 애들 보는 게 뭐 힘들다고. 환자 치료하는 오빠가 더 힘들지. 콜록!"

"씁. 또 싸워?"

"알았어요. 물 받아 놨으니까 씻고 나와요. 밥 차릴게요."

톡톡 엉덩이를 두드린 이희선은 부엌으로 향했고, 그걸 빤히 바라보던 정천우는 팬티만 챙겨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빠, 영우도 목욕할래!"

"설이도 할래!"

정영우, 정희설.

정천우, 이희선의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보물이다.

도도도!

달려온 아이들이 정천우의 다리에 매달렸다.

"씁! 너희 아빠 힘들게 할 거야?"

"괜찮아. 놔둬."

"오빠가 계속 받아 주니까 애들이……."

"자, 그럼 아빠랑 목욕할까?"

"네!"

"우와아!"

아빠랑 목욕할 때가 아니면 놀 수 없는 욕조.

아이들은 뱀이 허물 벗듯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풍덩풍덩!

"어푸어푸!"

"물 튀기지 말고 놀아."

"네-!"

욕조에서 노는 아이들을 빤히 바라보던 정천우는 샤워기를 틀어 몸을 적셨다.

그리고 다리와 어깨를 박박 문질렀다.

꾸벅꾸벅.

목욕 때문인지 아이들이 밥상머리에서 존다.

이희선은 깨우려 했지만, 만류하다 못해 작은 방에 눕힌 정천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이희선이 불퉁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재우면 안 되는데. 만날 나만 나쁜 엄마 만들고……."

다 좋은 남편이지만, 이 부분은 불만이다.

정천우는 화제를 돌렸다.

"장인어른은 좀 어떠셔. 여전해?"

양가에서 극구 반대했는데도 강행한 결혼이다. 영우가 들어서지 않았다면 결혼을 못했을 거다.

영우 덕분에 친가는 용서를 했지만, 처가는 여전히 둘을 싫어했다.

"지원은 역시……."

"네……."

이희선은 어깨를 움츠리며 간신히 답했다.

이 집도 마련해 주고, 레지던트 월급이 얼마나 되겠냐며 매달 200만 원씩 지원을 해 주는 시댁.

그런데 시댁에서 주는 그 200만 원도 전부 정천우가 병원 의사들을 대접하는 데 써야했기에 얼마 안 되는 월급만으로 살림을 꾸려야 했다.

한의사는 이래야 면허를 딴다니 어쩔 수가 없다.

빠듯하긴 해도 생활에 부족함은 없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아무래도 친정에 섭섭함을 느꼈다.

괜히 시댁과 남편에게 눈치가 보여서 더.

모자란 며느리 같고, 부족한 부인 같아서.

매주 찾아오는 시어머니께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아, 곧 오빠 생일이잖아요. 콜록! 콜록!"

그녀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가, 가지고 싶은 거 있어요?"

"됐어. 미역국이나 끓여 줘. 그렇게 몸 아픈데 무슨."

"곧 봄이니까 양복은 어때요?"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 됐어."

‘있는데!’ 그녀가 비밀리에 불백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이유가 뭐던가. 모두 남편 정천우의 깜짝 생일 선물을 위해서다.

"아니면 오빠 좋아하는 경마장 놀러 갈까요?"

"경마?"

정천우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이희선은 음흉하게 웃었다.

연애 시절엔 주말마다 들렀지만 결혼을 하자마자 딱 끊어 버린 경마장. 그래서 더 이 남자가 내 남편이고, 내 자식들의 아빠라고 생각했다.

"어흠흠. 요새 몸 많이 힘들지?"

얼굴이 빨개진 그는 부엌 식탁에 놓인 하얀 통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이온음료를 꺼내 들었다.

"으. 그거 싫은데."

"또 안 먹었지? 몸에 좋은 거니까 참고 먹어."

아내에게서 몸을 돌린 그는 통에서 꺼낸 가루와 물을 섞었다.

달그락, 달그락.

차가운 물이라 잘 개어지지도 않지만 그는 세심히 저어 녹였다.

그런데 그런 그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손에 묻은 가루도 재빨리 털어 냈다.

하지만 돌아서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호선을 그리는 눈.

"자, 쭉 들이켜."

‘진짜 싫은데. 이거 먹은 후부터 몸이 더 아파진…….’ 이희선은 화들짝 놀랐다.

이게 무슨 생각인가.

남편이 몸 생각해서 힘들게 구해다 준 영양제다. 그것도 목구멍이 좁아 알약을 잘 넘기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가루로 된 걸 구해 줬다.

그녀는 빤히 바라보는 남편의 눈에 눈을 질끈 감으며 단숨에 들이켰다.

"으으. 써."

"자, 여기 커피사탕."

"만날 커피사탕이야. 레몬사탕은 안 돼요?"

"레몬사탕은 약효를 방해할 수 있어서."

"그런 게 어디 있어."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커피사탕을 받아먹었다.

"아이, 예쁘다."

"히히. 정말 예뻐요? 오늘 셋째 만들까요?"

"……아이, 피곤하다."

"오빠. 오빠-! 정천우 거기 서라, 얍! 콜록콜록!"

그렇게 정겨운 저녁도 불이 꺼지며 막을 내렸다.

새벽 1시, 불이 꺼진 안방.

갑자기 눈을 뜬 정천우가 옆을 본다.

등을 돌린 아내 이희선이 고롱고롱 잠을 자고 있었다.

한 번 자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는 아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팔뚝을 벅벅 씻었다. 저녁을 먹을 때 아이들의 몸이 닿았던 팔을, 가슴을.

물기를 닦은 그는 거실로 걸어가 TV 서랍장 아래에서 어떤 종이를 꺼냈다.

희미한 달빛이 종이의 글자를 비췄다.

총 3개의 생명보험.

피보험자: 이희선

보험수익자: 정천우

정천우의 눈과 입술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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