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124화 (124/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24화>

    "……."

    모니터에서 재생되는 영상 파일과 음성 파일을 모두 확인한 김종두 과장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 아침, 특수범죄수사과로 배달이 된 박스.

    내용물을 같이 확인한 특수범죄수사과 대원들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수 복귀하라고 할까요?"

    휴직 신청을 하고 영화 사무소에 취직한 김정수.

    "어. 이거 보니까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다."

    "옙!"

    그들이 물러나자 김종두 과장은 핸드폰을 들었다.

    -네, 삼촌! 최종혁 전화 받았습니다.

    "야 이 미친놈아-!"

    -으헉!

    "내가 이쪽은 신경 쓰지도 말랬지-!"

    -네?

    "이거! 이거 네가 보낸 거잖아!"

    -예? 뭘요?

    "이놈이 또 수 쓰네! 너 지금 어디야!"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고 제가 뭘 보냈다면 선물이거나, 제가 감당하기 힘든 거라서 보낸 거 아닐까요?

    ‘너 맞잖아, 인마!’

    종혁의 말이 맞았다.

    박스 안에 담긴 것은 선물이기도 했으며, 아직 생도 신분인 종혁이 감당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알았어. 네가 보낸 거 아니란 거지?"

    -뭔지 모르겠지만, 예. 그럼 삼촌 믿고 끊겠습니다. 흐흐.

    뚝!

    김종두 과장은 한숨을 쉬었다.

    "썩을 놈."

    또 빚을 졌다.

    ‘대체 어떻게 이걸 입수한 거야?’

    칼튼호텔이야 어찌어찌 그랬다 쳐도, 삼성클럽이란 놈들이 파티를 벌이는 연회장 내부 영상과 음성은 어떻게 구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김종두 과장조차도 어제야 겨우 알게 된 연회장 주소.

    ‘뭐, 나중에 사건이 해결된 후 들어 보면 되겠지.’

    그땐 말할 테니 말이다.

    김종두 과장은 박스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난 영감님 뵙고 온다."

    "다녀오십쇼!"

    그렇게 김종두 과장은 강철선을 만났고, 강철선도 김종두 과장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다만 극구 말려서 종혁에게 전화를 걸진 않았다.

    강철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거 저희가 예상한 사이즈보다 큰 것 같습니다."

    대선 후보의 이름이 거론됐다.

    그것도 현재까지도 지지율 1위인 현몽준이다.

    "종혁이 갸가 괜히 토스했겠슴니꺼? 이건 내한테 맡기이소. 우리가 감당할 사이즈가 아입니더."

    그렇게 말하지만 다 생각이 있는 눈빛이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영감님."

    "이놈아들 싹 다 낚아챌 준비만 하소."

    김종두 과장과 헤어진 강철선은 곧바로 검사장실의 문을 걷어차며 들어갔고, 잠시 후 검사장과 강철선은 이번엔 대검찰청 검찰총장실의 문을 걷어차며 난입했다.

    *  *  *

    늦은 저녁, 서울 변두리의 한정식집.

    여당의 두 대선 후보가 비밀리에 만났다.

    악수를 나눈 둘은 자리에 앉아 서로에게 담배를 권했다.

    "또 그 일 때문에 부른 겁니까, 박 후보?"

    마른 체형의 현몽준이 눈빛을 매섭게 굳힌다.

    그러자 또 다른 대선 후보, 박노형은 푸근히 웃었다. 그의 잇새로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급하십니다. 우리 문제도 급하게 결론 내려 주시면 좋을 텐데요."

    "그건 경선 결과가 나온 후에 논의하자고 합의 봤을 텐데요?"

    대선 후보 단일화.

    대통령을 노리는 둘로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일이다. 너무 예민한 나머지 언제든 서로의 등에 찌를 수 있었다.

    그건 눈앞의 박노형도 알고, 현몽준 본인도 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현몽준은 박노형이 오늘 자리를 왜 만들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꺼내 봐요. 어떤 칼을 준비했는지 한번 봅시다."

    "흠."

    박노형은 현몽준을 빤히 봤다.

    한 사람에게만 불쾌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이봐요, 박 후보. 지금 내 말이……."

    ‘그래. 역시 아니다.’ 박노형이 여태껏 보아 온 현몽준은 이런 참담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박노형은 결론을 내렸다.

    "현 후보도 호가호위라는 말을 아시겠지요."

    호가호위.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가 호기를 부린다.

    "무슨……."

    박노형은 의아해하는 현몽준의 모습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이 끔찍한 일에 끼어 있지 않아서.

    아직은 도덕적으로 믿을 수 있어서.

    박노형은 현몽준을 향해 가져온 노트북을 밀었다.

    "오랜만에 만난 검사 선배가 주더군요. 현재 검찰총장으로 계신 분인데, 귀댁에서 눈살 찌푸릴 일이 생겼다고. 그런데 이쪽 일이니 이쪽에서 알아서 하라고요."

    불길해진 현몽준은 두꺼운 노트북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럼 전 옆방에 있겠습니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옆방으로 건너온 박노형은 식탁 위에 올려 진 테이블에 담뱃재를 털었다.

    "식사 드릴까요?"

    "그래 주세요. 오랜만에 주방장님 솜씨를 맛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혀에 침이 고입니다."

    "주방장님께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고소하면서도 쌉쌀한 전복죽.

    계절이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뚝 떨어졌던 입맛이 전복죽 한 수저에 다시 살아난다.

    "역시 전복죽은 이 집이 최고인 것 같아."

    주머니 사정상 자주 찾을 순 없지만 말이다.

    박노형은 한 숟가락 더 입에 가져갔다.

    드르륵!

    고개를 돌려 열린 문을 보니 현몽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미안한데 먼저 가 보겠습니다. 식사는 다음에 제가 초대하겠습니다."

    "멀리 안 나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미리 경선 승리 축하합니다, 박 후보님."

    "감사합니다, 현 의원."

    "……날 믿어 줘서 고맙습니다."

    드륵!

    문이 닫히자 박노형은 마지막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눈을 감으니 전복의 맛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너무 씁쓸한 맛이.

    한편 캠프로 돌아온 현몽준은 벌떡 일어나는 자신의 사람들을 쭉 둘러보다 한 사람을 발견하곤 그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후보님!"

    중후하게 2 대 8 가르마를 탄 마른 몸의 사십대 사내.

    1988년 울산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을 때부터 곁을 지킨 참모의 얼굴에 진 주름을 보니 세월이 무상함을 깨닫게 된다.

    아버지 현주영 왕 회장조차 반대했던 1988년의 출사표.

    아무 지원도 없어 힘들어하던 중 와중,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던 24살의 패기 넘치던 청년이 어느덧 배만 나온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이 사람아……."

    "박 후보와 식사는 잘…… 후보님?"

    쩌억!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자 캠프 사무실이 조용해진다.

    볼을 붙잡은 참모는 당황하며 현몽준을 쳐다봤다. 그는 시계를 풀고 있었다.

    "후, 후보님?"

    쩍! 쩍! 쩍!

    "악! 아악! 악! 왜, 왜 이러십니까 후보님!"

    "이 실장, 잡아."

    "예."

    현몽준의 사무실 앞을 지키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참모의 양팔을 붙든다.

    현몽준은 다시 참모의 뺨을 때렸다.

    코에서 피가 터지고, 입 안에서 피가 터져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본인의 손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현몽준은 공포에 질렸으면서도 궁금증을 두 눈에 담고 있는 오랜 친구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지독한 배신감에 그의 눈이 눈물을 머금었다.

    "왜 그랬냐. 내가 못해 준 것도 없을 텐데 왜 그랬어."

    철렁!

    참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했는데 정말 들킨 것이다.

    현몽준은 노트북을 그에게 안겨 줬다.

    "켜."

    "후, 후보님! 이건 제가 다 설명……."

    "켜-!"

    눈을 질끈 감은 참모는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바탕화면에 있는 영상 파일 중 하나를 재생했다.

    슬금슬금 모여들었던 선거 캠프 위원들은 영상을 보곤 경악했다. 두 남녀가 호텔로 보이는 방 안으로 들어오고, 여성은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남성이 허리를 숙인다.

    -박스는 차에 실어 드렸습니다. 총 120장, 12억입니다. 후보님께 말씀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한두 번도 아니고. 후보님께서 내일 연락드릴 겁니다.

    -음. 지금 뵙는 건 무리…….

    -김 회장, 정말 우리 후보님 뵙고 싶어요? 지금 차에 계시는데 김 회장이 기어코 봐야겠다며 올라오시라 할까요? 그럴까요?

    -죄, 죄송합니다! 수고하십시오!

    현몽준은 노트북을 뺏어 옆 사람에게 넘겼다.

    영상은 계속 재생됐다.

    "그래. 이 얼굴 기억이 나. 삼성클럽? 아마 가요계 쪽 사람이라고 했을 거야."

    소속 연예인으로 하여금 홍보를 해 줄 만큼 꽤나 열정적인 지지 단체로, 당장 오늘 아침에도 안부 전화를 했었다.

    지지자, 후원자에게 안부 인사를 하는 건 아침 일과 중 하나니까.

    하지만 결단코 후원금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후, 후보님."

    "쉿."

    잠시 후 화장실에서 여대생이 가운만 걸친 채 걸어 나온다.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보님.

    -들어서 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 방금 널 데려온 사람에게도 비밀로 해야 하는 거야. 그냥 잘 대접했다고만 말하면 돼.

    -네? 네, 네!

    -그래. 이리 와.

    탁!

    현몽준은 그제야 영상을 중지시켰다.

    박노형이 말한 호가호위.

    그 정도가 아니다.

    호랑이 위세를 빌린 정도가 아니라, 여우가 호랑이 흉내를 냈다. 마치 자기가 진짜 호랑이인 듯.

    현몽준은 선거 캠프 위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지금까지 부족하고 부덕한 저를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다음 대선 때 다시 뵙고 다 갚도록 하겠습니다."

    "……흑!"

    "후보님!"

    오직 현몽준만 믿고 쪽잠을 자며 버텨 왔던 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오늘은 조심히 들어가시고, 다음에 봅시다. 이 실장, 데리고 들어와."

    선거 캠프는 곧 망연자실 절망과 분노에 휩싸였다.

    사무실 안, 강제로 앉혀진 참모의 앞에 앉은 현몽준은 담배를 물었다.

    참모의 두 눈은 미쳐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창모야, 변명해 봐."

    "제, 제 말부터 들어 주십시오! 이건 계략이고, 모함입니다! 분명 누군가……."

    "창모야, 그게 아니잖아."

    "검찰이 문제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아는 검사가 서울지검에 있는데, 그놈에게 제가 생명의 은인이라 지검장부터 검찰총장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사고를……."

    "창모야!"

    "들통날 걸 대비해 원래부터 그러기로……."

    눈이 뒤집혀 지껄이던 참모 윤창모는 현몽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구겼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돼지! 내가 당신 밑구멍 닦아 준 게 몇 년인데!"

    무려 14년이다.

    "나 아니었으면 당신 깜냥에 계속 그 배지를 달았을 것 같아?!"

    현몽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신이 뭘 알아! 처음부터 다 가지고 태어난 당신 따위가 뭘 아냐고! 나라고 이러고 싶었을 것 같아? 당신이……!"

    그는 다 쏟아 냈다.

    마지막이라고 다 쏟아 냈다.

    "더 할 말 없지?"

    더 있다는 듯 참모의 두 눈이 악독해진다.

    "왕 회장님이 없는 이상, 당신 같은 인간은 절대 대통령 못해."

    푸욱.

    커다란 칼이 심장을 찌른다.

    기어코 가슴을 헤집고 진실을 꺼내 든다.

    "그래. 그런 것 같다. 내가…… 너무 긴 꿈을 꿨나 보다."

    그러니 친동생 같았던 이가 숨겨 뒀던 속마음조차 몰랐던 거다.

    이제야 알겠다.

    감당하기 힘든 꿈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

    "왜 나한테 박쥐처럼 옮겨 다니라 한 거냐?"

    "정치는 후안무치! 아직도 그걸 모르는 당신이 병신인 거야!"

    현몽준은 완전히 깨달았다.

    자신은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었다. 그저 대통령이란 욕심에 눈이 가려져 주위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던 인형 따위에 불과했다.

    이 모두 한여름 밤의 지독한 악몽이었다.

    그걸 깨달았으니 이젠 깨어날 시간이었다.

    "이 실장."

    "예, 후보님."

    "창모 잘 데리고 있다가 대선 끝나면 검찰에 데려다줘."

    "예."

    그렇게 참모 윤창모가 끌려 나가며 조용해진 사무실.

    담배에 손을 가져가던 현몽준은 핸드폰을 들었다.

    "총장이시오? 나 현몽준입니다."

    -어이구. 무슨 일이십니까, 후보님.

    "이제 후보 아니니 그런 호칭은 관두십니다. 이제 우리 쪽 후보는 박노형 후보뿐이오."

    -…….

    "적절할 때에 도착한 선물이라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혹시 술 좋아하시오?"

    -이거 검찰과 대선 후보가 만나면…….

    "기자들에게 다 말하고 갈 테니 봅시다. 날 배신한 친구가 그쪽에 심어 둔 벌레에 대해 할 이야기도 있고."

    -잘 아는 대포집이 있습니다.

    "소주 좋지요. 그럼 있다 봅시다."

    이후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린 현몽준은 몸을 일으켰다.

    취하고 싶은 밤이었다.

    *  *  *

    현몽준 후보, 박노형 후보 지지!

    경선 전 후보 단일화 선언!

    한국이 시끄러워졌다.

    "미리 축하드립니다. 이러다 중수부 가시는 거 아니에요?"

    -치아라, 마. 아직 멀었다. 뭐 그래도…….

    특수부 부장을 약속받았다.

    종혁은 그 말에 열렬히 축하했고, 강철선은 고맙고 고마우면서도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하, 진짜 검찰 안 될 끼가?

    "흐흐."

    -에효, 문디 자슥. 아, 니 그 아나?

    "뭘요?"

    -그놈아가, 윤창모라는 개새끼가 우리 지검에 독을 숨겨 뒀대이.

    그리고 윤창모가 그 독에게 여차하면 최소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의 목을 쳐 버릴 만한 일을 저지르라고 지시했단다.

    검사 관두게 되면 로펌에 취직시켜 주겠다고.

    종혁은 눈을 부릅떴다.

    그의 머릿속에 서울지방검찰청 물고문 치사 사건이 떠올랐다.

    ‘그게 이렇게 연결된 거였다니!’

    촉이 왜 그렇게 반응하나 싶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상황이 꼬롬하게 됐으니까 검사는 몇 년 뒤에 지망 하그래이. 알긋나?

    "꼬롬이요?"

    -총장님이 전수 조사를 지시했다.

    "……난리 나겠네요."

    거의 개혁 수준의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럼 그놈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하긴. 곧 도착할끼다. 그쪽 처리되면 합류 하래이.

    "오, 갑자기 웬일이세요?"

    -씁. 닌 이거 끝나면 죽었다. 각오 단디 해라! 알긋나!

    "흐흐.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종혁은 세트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경찰서의 강력계처럼 꾸민 세트장.

    그 무명 연예인,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연기를 한다.

    "이 씨, 씨발놈들아! 내가……."

    "커엇!"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아니 그 대사 몇 마디 못해?! 눈물도 못 흘려서 안약까지 넣어 줬는데 왜 이러는데! 지금 낙하산으로 꽂혔다고 자랑해?!"

    김영진 감독이 메가폰을 집어 던지고, 앞에서 그녀의 연기를 받아 주던 양동현의 얼굴도 굳는다.

    단역이 벌써 4번째 NG.

    촬영장의 공기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10분 휴식!"

    종혁은 하얗게 탈색되어 밖으로 향하는 여성을 보며 혀를 찼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면 잘이라도 해야 할 텐데, 눈치를 보고 움츠리고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 악물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정신 한구석이 그쪽에 쏠려 있기에 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몸의 중심은 언제나 뒤로 빠져 있고 발끝은 세트장 밖으로 향해 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거다.

    도망치고 싶은 거다.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크게 입어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진 피해자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이다.

    이 모든 걸 종합한 종혁은 결론을 내렸다.

    ‘자의로 스폰을 받은 게 아니야.’

    강제로 짓밟히고 유린당한 거다.

    영혼을 억지로 팔게 된 거다.

    지이잉. 지이잉.

    "예, 삼촌."

    특수범죄수사과 형사다.

    -우리 20분 뒤에 도착할 건데, 안에 좀 말해 줄 수 있을까? 소란 없이 따야 돼서.

    따다. 검거하다의 은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삼성클럽 멤버들부터 따는 게 낫지 않아요?"

    -그쪽은 강 검사님이 맡기로 했는데, 놈들이 다 그 호텔에 모이고 있는 중이란다.

    "아, 그래서……."

    놈들이 알아서 한자리에 모이니, 그 시간 동안 놈들과 연관된 피해자 및 공범들부터 어느 정도 확보하겠다는 소리다.

    잠시 후 검거될 놈들이 피해자 및 공범에게 헛짓을 하지 못하게. 혹여 어떤 압박이 들어와도 피해자랑 공범이 있다 말하게.

    즉, 이번 작전은 은밀하고 빠른 확보가 생명이었다. 절대 그 호텔에 있는 놈들에게 연락이 닿아선 안 됐다.

    "알겠습니다. 저도 그에 맞출게요."

    -크으! 그럼 부탁한다!

    "옙!"

    핸드폰을 구겨 넣은 종혁은 감독에게 허락을 받은 뒤 여성에게로 향했다.

    주차된 소나타 뒤 고성이 퍼진다.

    "대체 왜 이러는데! 어떻게 얻어 낸 배역인지 알잖아!"

    "알죠. 아주 잘 알죠."

    눈을 부릅뜨지만 손이 떨린다.

    무서운 거다. 싫은 거다.

    종혁은 사장을 봤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고 했다.

    ‘저 사람…….’

    왜인지 억지로 화를 내고 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일그러진 눈이 그 증거다.

    ‘흠.’

    종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일단 앞으로 나섰다. 그녀를 찾아온 이유 때문이다.

    "저……."

    흠칫!

    그녀를 다그치던 사장이 종혁을 보고 놀란다.

    "자, 자문님이 여긴 어쩐 일로……."

    "아, 제가 배우님께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해서요. 실습 나갔을 때 이 역할 같은 피해자를 제법 봤거든요."

    사장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그런데 이게 남자가 듣기에 좀 거북해서……."

    "아, 예예. 전 그럼 담배 좀 피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사장의 낯빛이 굳어진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흠.’ 종혁은 멀어지던 사장을 응시하다 시선을 돌린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지치고 도망치고 싶은데도 간절한 눈빛이 종혁을 응시했다.

    "아가씨."

    "……?"

    "앞으로 20분이 아가씨가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연기 할 수 있는 시간이라 생각하세요."

    20분이 지나면, 강제로 팔린 영혼이라도 구제할 수 없게 된다.

    "그게 무슨…… 서, 설마?"

    영리하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유야 어찌 됐든 부당하게 따낸 배역이다.

    그녀로 인해 그녀만큼 간절했던 누군가가 기회를 박탈당했을 수도 있기에 순수하게 응원할 수 없다.

    그래도 배역을 연기할 만한 실력이 충분함을 증명했으면 했다.

    아픔은 남겨도 미련은 남기지 말아야 하기에.

    이대로 물러나면 정말 남는 게 없으니까.

    그래서 종혁이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흔들리는 두 눈을 진지하게 응시하던 종혁은 수고하시라 고개를 숙이며 돌아섰다.

    "에헤헤. 형님, 어디가십니까? 저도 같이 가시죠!"

    "……에휴."

    종배수를 상대할 시간이 없다.

    종혁 본인의 말로 인해 그녀가 어떻게 행동할지 모른다. 일단 사장부터 확보해야 됐다.

    ‘뭐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지.’

    고개를 저은 종혁은 걸음을 재촉했다.

    "형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