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16화>
36. 시베리아
드바 로마노프 유통 본사의 회장실.
두꺼운 시거가 타오르며 희뿌연 연기를 뱉는다.
시거를 내려놓은 빅토르는 눈앞의 동양인, 아니,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소개한 이들을 무심히 쳐다봤다.
"반코 킴이라고 했습니까?"
끈질기게 매달리기에 귀찮아서 만나 줬더니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한다.
"편하게 김 대리라고 불러 주십시오, 회장님!"
김 대리는 하얀 코트를 어깨에 걸친 빅토르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나 속내는 좀 달랐다.
‘이게 사업가라고?’
거리에서 봤으면 러시아 마피아로 오해할 외모다.
눈빛도 배부른 맹수처럼 사납기 그지없다.
"김 대리라……."
빅토르는 앞 테이블 위에 놓인 명함을 봤다.
일라이자 채굴 러시아 지사.
한국에 본사를 둔 채굴 전문 기업이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러시아에서 채굴을 한다면 가문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내 땅에 매장된 그 금을 노린다고요."
"……알고 계셨습니까?"
"모를 수가 없죠."
그렇지 않았다면 오지 시베리아에 있는 그 땅을 예전에 팔아 버렸을 것이다.
주위엔 하얀 눈과, 목재로도 못 쓸 나무만 가득한 쓸모없는 땅.
대신 작은 금광이 하나 있는 땅.
빅토르가 10살 때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다.
‘내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날려 버렸으면 그거나 개발하려고 했었지.’
로마노프 가문의 직계는 마흔 살이 되기 전까지 총 다섯 번 창업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매번 천만 달러씩 지원을 받는다.
방계는 그 반절.
사업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면 그 이상도 지원해 준다.
다만, 그걸 모두 날리면 결국 사는 동안 가족이나 친척에게 선물로 받은 건물이나 땅 정도나 운용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평소엔 잊고 지내다가 가끔 토끼나 여우 사냥이 생각날 때나 겨우 떠올리는 곳이 이 땅이다.
"그런데 그 금광은 채산성이 별로 없을 텐데요?"
깊숙이 묻혀 있는데 매장량도 적다.
순이익이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5천만 달러나 나올까.
5백만 달러라도 건지면 다행이었다.
"로마노프 회장님에겐 미흡할지 몰라도 저희 같은 작은 기업에겐 정말 엄청난 기회입니다! 부디 기회를 주십시오!"
"작은 기업?"
"작다고 해도 모두 베테랑들로 채워진 탄탄한 회사입니다!"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확보했다던 인물들을 보니 죄다 채굴 쪽에서 20년 이상씩 구른 사람들이다.
그것도 죄다 러시아인이다.
그중엔 빅토르에게도 낯익은 이름과 얼굴 사진도 있었다.
‘이 사람 가스트롬에 있었던 것 같은데…….’
러시아 국영 가스 기업, 가스트롬.
언젠가 아버지 손잡고 따라갔을 때 본 현장 소장 중 한 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가스 채굴과 광물 채굴은 엄연히 다른 분야지만 마음이 쏠린다.
툭! 툭!
빅토르는 검지로 소파를 두드렸다.
"한국에 본사를 두고 있다고요?"
"예! 믿지 못하시겠다면 지금 바로 본사와 통화 연결을 하겠습니다!"
"그건 됐고."
전화를 어찌 믿나.
따로 알아보면 될 일이다.
‘흠. 한국이라…….’
한국이라 하니 절로 종혁이 떠오른다.
그런 천재, 러시아 정부가 그런 선물을 서슴없이 줄 만큼 엄청난 능력자임에도 한국을 너무나 사랑해 한국의 경찰이 되려는 존경하는 어린 친구.
또 드바 로마노프 유통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던 이유도 한국산 제품 때문이다.
‘가문에 채굴 기업이 있긴 하지만…….’
한국에서 왔다니 마음이 좀 약해진다.
이런 점도 있지만, 가문에 개발을 맡겼다간 5백만 달러가 아니라 백만 달러나 겨우 건질 거다.
지원하는 게 있기에 더 깐깐해지는 가문.
"뭐 나한테 이 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예?"
"아닙니다. 신중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김 대리가 물러나자 빅토르는 옆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예, 빅토르입니다. 조사해 줄 것이 있습니다. 한국에 본사를 둔 채굴 기업이라는데…… 1시간. 예.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그는 시거를 물었다.
희뿌연 연기가 다시 도자기나 명화, 금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회장실을 채워 갔다.
띠리링! 띠리링!
전화기를 든 그는 들려오는 말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귀엽게 구는군."
이미 그 땅 근처 마을 주민들에게 금광이 개발될 거라 홍보를 했단다. 아직 허락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빅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개발하게 하자.’?
별로 쓸모도 없는 땅, 이번 기회를 빌어 한국에 진 빚을 갚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반코 킴이라는 신분도, 일라이자 채굴이라는 회사도 모두 있는 회사다. 재무재표까지 확인한 가문의 정보팀의 말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죄다 KGB 출신인 가문의 정보팀.
모스크바 대학의 경영학과를 졸업한 반코 킴이 전공과 상관도 없고 러시아도 아닌 한국의 채굴 기업에 입사 한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세상살이 마음처럼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빅토르는 대충 넘겨 버리며 몸을 일으켰다.
"최에게 놀러 가자 해야겠군."
토끼와 여우 사냥.
친구이기에 취미를 공유하고 싶었다.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의 입가에 기대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편, 다음 날.
모스크바의 한 모처에서 대기하던 김 대리는 빅토르의 전화를 받고 입술을 비틀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화끈하군요."
한국이었으면 몇 날 며칠이 걸렸을 일인데, 겨우 하루 만에 도장을 찍자고 한다.
계약을 맺을 테니 그 땅으로 오라고 했지만, 어차피 가야 했기에 오히려 고맙다.
"모두 대리님의 출중한 러시아어 실력 때문 아니겠습니까."
파견 직원의 말에 김 대리는 진저리를 쳤다.
‘내가 이걸 배우기 위해 어떤 지랄을 했는데!’
프로젝트가 확정되고 7개월.
러시아인들과 부대끼며 하루 24시간 온종일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러시아에 대한 모든 걸 뼈에 새겼다.
이젠 꿈에서라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그럼 시민 투자 모집을 진행합시다."
이번 프로젝트의 꽃 중 꽃.
시민 투자 모집.
정확한 명칭은 다단계 투자 모집이었다.
"예!"
입술을 비튼 그들 모두 몸을 일으켰다.
* * *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움츠린다.
동물들이 겨울을 준비하는 늦여름의 적막한 숲을 사부작사부작 풀 밟는 소리가 깨운다.
허공에 퍼지는 입김이 숲에 열기를 더한다.
웨에엥!
짝!
"씨부럴, 모기."
모기 쫓는 약을 다시 바른 종혁은 따끈한 캔 커피를 입에 가져갔다.
다시 고요해진 숲이 지친 그의 몸과 마음을…….
웨에엥! 짜악! 짝!
종혁은 얼른 숲속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엔 사슴 머리 박제가 걸려 있고, 바닥엔 곰 가죽이 깔린 오두막엔 여우 모피로 만든 털모자가 굴러다닌다.
"산책을 벌써 끝낸 겁니까?"
"시베리아에도 모기가 살 줄은 몰랐습니다."
어젯밤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날벌레가 많다 싶었는데, 그게 모기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큭큭. 시베리아 모기가 지독하긴 하죠."
오늘 새벽 관리인이 가져온 양식 토끼의 가죽을 벗기던 빅토르가 키득키득 웃는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아주 기가 막힌 토끼 스튜를 만들어 줄 테니까!"
빅토르가 5년 전 한국에 왔을 때 구매한 압력밥솥을 가리킨다.
고무처럼 질긴 고기도 단시간에 야들야들하게 만드는 마법의 냄비.
이걸 먹고 여우나 토끼 사냥에 나서는 거다.
종혁은 한쪽 벽에 걸린 사냥총, 아니, 저격총을 봤다.
흔히 드라고노프라는 저격용 총.
800미터 바깥에서도 적을 정확하게 맞힌다는 총이다.
훈련 교관들에게 총기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외웠다.
종혁은 압력밥솥에 물을 올리는 빅토르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술로 시작하는 휴가.
너무 좋았다.
"음?"
달그락! 달그락!
빨간 속살을 드러낸 토끼를 한 손에 쥔 채, 찬장과 냉장고를 뒤지던 빅토르가 당황한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마늘이 없습니다."
종혁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거 큰일이네요. 토끼 고기는 누린내를 잡지 못하면 먹기 힘든데."
언젠가 토끼 탕을 먹어 본 적이 있기에 확실히 알고 있다.
별다른 처리를 안 해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돼지고기나 소고기와는 180도 다르다.
꼬르륵!
이렇게 배가 고파도 누린내를 잡지 못한 토끼 고기는 먹을 수 없다.
"우유는요?"
"없습니다. 끙. 역시……."
종혁은 보드카를 응시하는 빅토르의 모습에 흐뭇이 웃었다.
"마을에 가서 마늘을 사 오죠."
빅토르의 생각은 이걸 거다.
보드카에 취해 미각을 죽여 버리든가, 아님 보드카를 넣어서 술맛으로 먹든가.
둘 다 사양이었다.
‘이놈의 러시아인들은 보드카를 무슨 마법의 재료로 생각하나!’
종혁의 그 생각은 맞았다.
보드카를 사랑하지 않으면 러시아인이 아니다.
보드카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하다.
겁쟁이도 용사로 만들고, 오줌조차 어는 추위도 이겨 낼 수 있게 만드는 마법의 물.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다.
"음…… 어쩔 수 없군요. 고민할 시간에 사 오는 게 빠르겠습니다."
"제 말이 그겁니다."
둘은 어젯밤 벌인 모닥불 파티의 흔적 옆에 세워져 있는 차를 타고 근처의 마을로 향했다.
부우웅!
한적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다.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게 맑은 하늘 아래, 트럭에 사료를 싣는 어느 농부와 어디론가 우다다 뛰어가는 아이들.
아침임에도 슈퍼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보드카를 병째로 들이켜다 ‘다친다!’ 하고 소리치는 어르신들.
한쪽에 순찰차를 세워 놓고 잠든 시골 경찰.
‘……에라이.’
한국의 시골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러시아의 시골 풍경.
외모만 다를 뿐이다.
"여깁니다."
"오, 크네요?"
이런 시골에 세워진 마트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응? 로마노프?"
Романов рынок.
로마노프 마켓이란 뜻이다.
빅토르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가문의 사업체 중 한 곳입니다."
"아, 가문에서 유통업을 하나 보군요."
5년 전 천만 달러의 자본금을 가지고 있던 빅토르다.
부모님이 마트 체인을 운영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둘은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 안엔 없는 게 없었다.
가전부터 생활용품, 심지어 안경점까지 있었다.
어젯밤 숲속 오두막으로 향할 때 웬만한 건 다 샀기에 딱히 필요한 게 없던 둘은 마늘이나 여러 향신료만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어? 말고기 육포다.’
언젠가 먹어 봤을 때 썩 괜찮았던 말고기.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한 봉지를 집어 들고 몸을 돌렸던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계산대에 앉은 긴 금발 머리칼의 캐셔와 빅토르가 서로를 멍하니 보고 있다.
"설마 빅터?"
"……올가."
"와,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래, 오랜만이야."
캐셔는 반가워하는데, 빅토르는 낭패 어린 표정이다.
‘이건 또 뭐 하는 시추에이션이야?’
"잘나가는 사업가가 됐다는 말은 아빠에게 들었어! 옷차림이 멋진걸? 정말 사업가 같아!"
"하하. 이번에 셋째 낳았다고?"
"응. 딸이야!"
"널 닮았으면 아주 미인이겠는걸? 아, 최 미안합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올가? 인사해. 이쪽은 내 친구인 최. 한국에서 왔지."
"러시아에 온 걸 환영해요, 최!"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가. 그런데 빅토르와는 어떤 사이인지?"
"아, 그게……."
왠지 당황한 빅토르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보다 올가의 답이 빨랐다.
"빅토르의 오두막과 땅의 관리인이 제 아빠예요!"
"……아하."
종혁은 그제야 둘의 관계를 이해했다.
빅토르가 왜 불편한 모습을 보였는지까지도.
종혁은 음흉하게 웃으며 빅토르를 봤다.
"아하아?"
빅토르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큼. 그게 최……."
"응?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무슨 일 있어?"
"아니, 올가 그게……."
‘……오호라? 이게 또 그런 거였어?’ 머릿속에 한 편의 영화가 그려진다.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오두막에 도착한 도시 소년 빅토르. 때마침 그 땅의 관리인으로 고용된 아빠를 따라온 시골 소녀 올가.
두 소년소녀의 풋풋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한 소년의 애달픈 짝사랑 스토리다.
‘그럼 이 마트도 설마?’
액셀을 과하게 밟는 종혁의 심장이 설렌다.
재밌다. 무척이나 재밌다.
종혁의 미소는 더욱 짓궂어졌다.
그 순간.
툭! 툭!
누군가 어깨를 두드린다.
‘이 중요한 순간에 누가!’
짜증이 나면서도 순간 계산대 앞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걸 깨달은 종혁은 몸을 돌려 사과를 하려고 했다.
"역시 최였군!"
"……세브첸코 씨?"
스페츠나츠의 훈련 교관 세브첸코.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