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14화>
"와."
"진짜 러시아 짱이다."
인솔 교수와 생도들은 러시아가 내준 3층 주택을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연립주택도 아닌 일반 주택이다.
엘리베이터와 청소부, 요리사까지 있다.
위치도 실무를 배우기로 한 내무본부와 5분 거리.
러시아의 경찰 조직 편제는 한국처럼 경찰청이나 경찰서 이렇게 나눠지지 않고 내무행정기관 소속으로 되어 있는데, 이중 내무본부는 한국으로 치면 본청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정말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황송한 대접이었다.
"그럼 전 가 볼게요, 교수님."
"친구 집에서 출퇴근할 거라고 했지?"
친구 집이 아니다.
나탈리아가 따로 집을 구했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베스트 프렌드라며? 난 오히려 네가 이런 좋은 숙소에서 지내지 못하는 게 아쉬운걸?"
"하하."
"소속 부서가 달라서 주말에나 겨우 볼 테지만, 최 생도라면 잘할 거라 믿어."
이번 현장 실습에서도 사건을 두 개나 해결한 종혁이다.
"옙!"
경례를 한 종혁은 밖으로 나왔고, 나탈리아는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나탈리아."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다.
"후훗. 겨우 이 정도로 놀라면 섭섭한데요?"
"네?"
"가요. 우리 러시아가 당신을 위해 마련한 집으로."
나탈리아는 종혁의 손을 잡아끌며 타고 온 리무진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종혁은 입을 떡 벌렸다.
모스크바 외곽.
경호원이 지키는 커다란 철문을 넘어 정원을 지나 도착한 곳.
리무진에서 내린 종혁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주택이 아니라 저택이다.
영화에서나 보던 귀족 저택.
주차장엔 한국에선 볼 수조차 없는 명차들이 줄줄이 서 있다.
"혼자 살기엔 적당한 크기죠? 혹시 작나요?"
"이게요?"
나탈리아는 장난이라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 저택을 중심으로 5만 평. 모두 최, 당신 거예요. 이런 게 각 대도시마다 있으니 러시아의 배짱이 겨우 이것밖에 안 되냐 실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종혁은 눈을 부릅떴다.
"어서 들어가 봐요. 안은 더 죽여주니까."
"……들어가죠."
안으로 들어온 종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천장에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린 로비의 공기가 따뜻하다.
온풍기나 라디에이터를 튼 게 아니다.
레드 카펫 때문도 아니다.
바닥에서 뜨끈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보, 보일러도 깔았어요?"
"한국에선 모두 맨발로 지내잖아요?"
즉, 오직 종혁을 위해 역사적인 가치가 있어 보이는 이 저택의 바닥을 모두 뜯어내고 보일러를 깔았단 뜻이다.
‘……돌겠네.’
이러면 해 준 게 있다 한들 부담이다.
부담이 팍팍 된다.
그래도 러시아가 종혁 본인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절절히 전해져 왔다.
나탈리아는 그런 종혁을 보며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됐어.’
혹여 훗날, 어쩌다 종혁의 진짜 정체가 미국에 발각이 돼도 종혁은 회유되지 않을 거다.
미국은 이 정도로 해 주지 못할 테니까.
‘미안해요. 순수하게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네요.’
그러기엔 종혁의 가치가 너무 대단했다.
그녀는 우울해진 마음을 꿀꺽 삼켰다.
"아."
"또 뭐가 있는 겁니까?!"
종혁은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 빌고 싶었다.
"아뇨. 사과를 하려고요."
"사과?"
"당신의 집인데, 당신이 첫 번째로 이 현관문을 열었어야 했는데 먼저 온 손님이 있어서요."
"……?"
저벅저벅.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린 종혁은 눈을 크게 떴다.
"……빅토르?"
"오랜만입니다, 나의 최."
빅토르 로마노프.
1997년 동대문에서 불법 비디오 유통 상인에게 된통 당하려던 걸 구해 준 것으로 인연을 맺어 컨설팅을 해 준 그였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는데……."
"내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빅토르는 애정을 담아 종혁을 와락 껴안았다.
놀란 종혁은 곧 푸근히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예.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빅토르."
* * *
사우나, 수영장, 영화관.
저택 안엔 없는 게 없었다.
"푸후우!"
미지근한 수영장에서 나온 종혁은 비치 체어에 앉아 보드카를 즐기는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수영 안 해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죠. 그보다……."
빅토르가 옆에 둔 가방에서 서류를 내민다.
"당신과 내가 세운 드바 로마노프의 매출입니다."
빅토르가 세운 드바 로마노프 유통.
로마노프의 두 번째 유통 회사란 뜻이지만, 종혁은 그런 자세한 내용까진 몰랐다.
서류의 숫자를 확인한 종혁은 혀를 내둘렀다.
"어마어마한데요?"
당장 올해 상반기 매출만 한화로 십 조가 넘는다.
‘고작 5년 만에 이 액수가 가능하다고?’
빅토르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확인을 안 했습니까?"
종혁이 가져가는 컨설팅 비용은 매년 순수익의 3퍼센트다.
"아, 죄송합니다. 일정 액수가 넘어가 버리니 그냥 그러려니 해 버리게 되더군요."
아니다.
이 돈 역시 박태규가 굴리고 있기에 신경 쓰지 않을 뿐이다.
"음, 이해합니다. 저도 솔직히 패션에 대한 러시아 여성들의 갈망이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으니까요."
드바 로마노프의 매출 중 70퍼센트가 종혁이 제시한 SPA사업에서 나온다.
패스트 패션인 SPA사업.
빅토르는 거기에 향수, 액세서리, 화장품 등을 추가시켰다.
"갈망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그저 몰랐던 것뿐이에요. 자신들이 보는 것 외에도 세계엔 더 다양한 패션이 있다는 걸, 나이 든 여성도 얼마든지 꾸밀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드바 로마노프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예뻐지고 싶으면 로마노프로.
러시아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는 생각이다.
"아."
"정답입니다, 마담."
빅토르는 나탈리아에게 윙크를 했고, 그녀는 살포시 웃었다.
눈썹이 꿈틀거린 종혁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나군요.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빅토르."
"뭘요. 저도 에바 미진 킴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이 정도까지 성장하진 못했을 겁니다."
거리 패션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서였다.
"미진?"
종혁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때 미진이 말하는 겁니까? 김미진?"
"예, 그 미진입니다. 현재는 드바 로마노프 패션 전략기획의 1팀장입니다. 저희 회사의 중추죠."
너무도 뜬금없이 듣게 된 미진의 소식이다.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였던 그녀.
빅토르와 함께 동대문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 외쳤던 그녀.
그래서 돕게 된 그녀.
"대체 언제? 어떻게?"
검정고시에 합격한 미진은 그녀의 목표대로 외국 전문대학에 진학하며 이제 혼자서 자립해 보고 싶다고 한 뒤 연락을 끊었다.
가끔 메일을 보내며 생존 신고만 했다.
그래서 종혁은 열심히 공부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회사를 세운 지 2년 정도 됐을까요? 갑자기 찾아와 취직시켜 달라더군요. 능숙한 러시아어로 말이죠."
"그랬습니까?"
‘이놈의 자식.’ 작은 배신감이 들었지만,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성공할 길을 찾아 걷고 있었다.
종혁은 가슴속에 남아 있는 짐을 덜어 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일은 모르셨나 보군요."
"자기도 이제 대학생이라며 간섭 말라더군요. 쪼끄만 한 게 한 대 맞으려고."
"초대할까요?"
종혁은 푸근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취직을 했는데도 연락을 안 했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종혁은 그저 응원하기로만 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나의 최. 그녀 역시도 제게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둘은 ‘믿는다, 믿어라’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뜨겁게 바라봤다.
"식품 유통 매출도 대단하군요."
싱긋 웃은 종혁이 서류 한 곳을 찍는다.
드바 로마노프의 나머지 매출은 식품이 차지한다. 대부분 한국에서 수입하는 식품이다.
러시아 시장의 가능성을 알아차린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진출했을 텐데도 무려 30퍼센트의 매출을 이어 가고 있다.
"모두 최의 컨설팅대로 맞춤 전략을 짰기 때문이죠."
캔 커피를 팔기 위해 전국 마트에 온장고를 증정했다.
도시락 컵라면에는 온수기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레시피를 써 놨다.
이 외에도 많았다.
덕분에 러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재미를 못 보고 있었다.
이런 그의 말에 종혁은 의문을 표했다.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기업을 다 꺾었다?
아무리 선점을 했어도 이게 가능한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후."
종혁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예. 당신의 조언대로 옐친의 선거 캠프에서 인연을 맺은 분이 있습니다."
불끈!
종혁의 주먹이 꽉 쥐였다.
빅토르에게 이런 조언을 한 이유가 왜였던가.
2007년에 일어나는 바이칼호 보물 인양 사기 사건 때문이다.
러시아 공무원들까지 합세한 대규모 사기 사건.
그 조직이 저지른 사건이 아닌가 의심이 되는 사건.
빅토르가 사는 곳을 지역구로 삼은 정치인의 아들이 러시아 총책이 아닌가 의심이 되던 사건이다.
그를 쉽게 만나기 위해서였다.
빅토르가 정치인과 친해지면 소개받기 편해지니까.
이런 이유까지 합하여 빅토르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대하십시오, 최.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
"오, 그래요?"
종혁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거기 남자들. 이런 미녀가 있는데 계속 재미없는 이야기만 나눌 건가요?"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저도요. 미안해요, 나탈리아. 그럼 우리 건배할까요?"
"좋아요!"
빅토르도 웃으며 잔을 들었다.
보드카가 담긴 세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렇게 러시아에 온 첫날이 저물어 갔다.
* * *
두두두두두두!
"헬기로 출근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요."
저 멀리 크렘린궁전이 보인다.
종혁은 묘하게 웃으며 입술을 달싹이는 나탈리아의 모습에 얼른 입을 열었다.
"뭐가 더 있다, 이 정도가 끝이 아니다, 하지 마세요. 정말 심장 아픕니다."
"호호호호호!"
종혁은 배꼽을 잡고 웃는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FSB요."
"……네?"
러시아 연방 보안국 FSB.
"전에 저희 러시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적 있죠?"
"……예?"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
숨이 막힌다.
족히 천 명은 뛰어놀 커다란 체육관인데도 숨이 막힌다.
덩치 큰 러시아 형님들이 내뿜는 사나이의 향기에.
그들이 보내는 초롱초롱한 눈빛에.
그래서 당황스럽다.
종혁은 나탈리아에게 귓속말을 했다.
"왜 이러죠?"
자존심으로 둘째가라 하면 서러워하는 러시아 남자다.
평균 수명 60세를 넘지 못하는 상남자들.
그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상남자인 스페츠나츠를 가르치는 훈련 교관이다.
FSB 소속 대테러 부대 알파의 훈련 교관이다.
러시아 경찰에, 러시아 해외 정보국 SVR 요원도 있다.
중간중간 여성도 있다.
러시아를 가르쳐 달라는 나탈리아의 말이 맞았다.
이들이 러시아였다.
이들로 인해 러시아가 강해지는 것이다.
그런 러시아가 스타를 만난 소녀 팬 같은 모습을 보인다.
"……대체 무슨 약을 친 겁니까?"
"기량이 20퍼센트 상승할 거란 말밖에 안 했어요."
약을 친 게 맞다.
그것도 거하게 쳤다.
스페츠나츠, 알파, FSB, SVR.
고르고 고른 정예들의 기량이 20퍼센트 상승한다?
작전 수행 능력부터 달라진다.
못해도 2배.
종혁 본인이라도 눈이 뒤집힐 이야기였다.
"끙."
종혁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당황스럽지만, 수백 명을 모아 놓고 계속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약 두 달간 여러분들께 피지컬 트레이닝을 가르칠 최종혁입니다. 참고로 최가 성입니다."
"전체 차렷!"
척!
"경례!"
"Слава России!"
러시아에 영광을.
종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돌겠네.’
* * *
기이잉.
모스크바의 국제공항.
선한 인상의 30대 사내가 걸어 나오다 놀란다.
"춥지…… 않네?"
언제나 눈을 볼 수 있는 나라라는 러시아.
그런데 거리에 눈이 쌓여 있기는커녕 죄다 반팔이다.
그의 뒤를 따라 나오던 3명 중 30대 사내가 공손히 말한다.
"러시아도 여름엔 여름답습니다, 김 대리님. 한국으로 치면 가을 수준이지만 말이죠."
대리급 직원이다.
일개 파견 직원인 그로서는 감히 쳐다보기 힘든 존재다.
"구웨에에엑!"
"……곰?"
부우웅! 쾅!
"버스가 받았어?!"
두 바퀴 구르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일어난다.
"흠. 입마개를 한 걸 보니 누가 키우는 곰인가 보네요."
"……곰을 키운다고요?"
"러시아인은 호랑이도 키웁니다."
김 대리는 할 말을 잊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자신이 왜 이 러시아에 왔는지를 상기했다.
‘프로젝트!’
조직, 아니, 회사에 입사한 이후 난생처음으로 진행하는 단독 프로젝트다.
곧 회사에서 진행할 일생일대 최대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이전에, 시뮬레이션하는 프로젝트라서 무척이나 중요했다.
지원과 사원 3명에, 파견 직원까지 붙여 준 게 그 증거다.
‘이 프로젝트만 제대로 성사시키면!’
승진가도, 탄탄대로다.
사원으로 입사해 어느새 8년.
참 오래 걸렸다.
그는 왼손에 낀 반지를 매만지며 치미는 희열을 억지로 눌렀다.
검은색의 큰 보석이 달아오른 머리를 차갑게 했다.
"수배에 문제가 생겼다고요?"
"음. 딱 알맞는 곳을 고르긴 했는데……."
말을 흩트리는 러시아 파견 직원의 모습에 김 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견 직원은 회사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각 나라에 파견돼 인맥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을 맡는다.
회사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포지션이다.
하지만 한 나라에 많아야 두 명 정도 파견되다 보니 혹여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나 자금이 꽤 제한된 편이다.
"누굽니까?"
"빅토르 로마노프. 그를 만나야 합니다."
빅토르 로마노프.
단 5년 만에 러시아 패션 유통을 한 손에 쥔 천재 사업가.
그들이 노리는 땅의 주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