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97화 (97/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97화>

    눈싸움의 승자는 세르게이였다.

    "쯧.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럴 이유는 없어. 램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운 CIA 요원이 멀어지자 종혁은 세르게이를 봤다.

    "안젤리나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안젤리나 씨요?"

    "못된 악마의 손길에서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못된 악마?"

    "국가에 도움이 될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CIA라는 악마입니다."

    "저를요?"

    "저도 당신의 트레이닝을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아."

    ‘그런 거였구나.’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종혁은 안심을 했다.

    권&박 홀딩스의 진짜 주인임이 들통난 게 아니라 유도 국가대표 수석 코치이자 스포츠 과학을 발전시킨 인물 최종혁을 욕심낸 거다.

    종혁은 의아해하는 임성원에게 설명을 했다.

    "뭐?!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

    정말이냐며 경악과 감탄을 하는 한편, 왜 말을 안 했냐는 배신감 어린 시선도 보낸다.

    "동기들과 선배님들은 다 코칭하고 있는데……."

    선배들은 일본에 다녀온 이후 코칭을 받고 있다.

    "허흠."

    멋쩍어진 임성원은 눈을 빛냈다.

    러시아와 미국이 욕심내는 트레이닝이다.

    ‘경찰의 하드웨어가 좋아진다면?’

    현장에서 다칠 확률이 적어진다.

    많은 이유로 현장에서 다치는 경찰들.

    임성원 교수는 다급해졌다.

    "종혁아. 그거 한국 경찰한테도 가르칠 수 있겠냐?"

    당연하다.

    종혁도 정말 간절히 그러고 싶었다.

    이유는 임성원과 같았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종혁이 줄인 말을 알아들은 임성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튼 넌 그러고 싶다는 거지?"

    "네, 당연하죠."

    "알았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교수님이요?"

    ‘어떻게?’ 임성원은 믿으라며 웃었고, 세르게이는 그걸 부럽다는 듯 쳐다봤다.

    세르게이는 러시아 대사관 차량을 이용해 숙소까지 안내했다.

    "여기 거기 아냐? 나 혼자 집에 투! 뉴욕 편!"

    플라자 합의가 이뤄진 그 호텔이다.

    종혁은 이곳의 펜트하우스를 예약했다.

    "크으! 진짜 내가 네 덕분에 호강을 한다."

    "제가 예약했나요. 후원해 주시는 곳에서 다 해 준 거죠."

    퍼스트 클래스와 호텔 예약.

    모두 권&박 홀딩스 이름으로 했다.

    "그거나 이거나. 이야, 내가 이런 곳에서 다 자 보다니!"

    언제나 쪼들리는 연구 예산.

    이런 호텔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임성원 교수는 신이 나 안으로 들어갔고, 종혁은 세르게이를 봤다.

    "미국에서 쓰실 핸드폰입니다, 최."

    "안 그래도 유심을 새로 사려고 했는데……."

    자동 로밍은커녕 일반 로밍 신청조차 힘든 시기.

    세르게이는 센스 있게 핸드폰을 두 대 준비했다.

    "안젤리나 씨에게 고맙다 인사해야겠네요."

    CIA가 마중 나왔고, 세르게이와 마찰을 빚었다.

    이제부턴 말조심을 해야 됐다.

    세르게이가 푸근히 웃었다.

    "혹시라도 나가실 일이 있으면 가로등 없는 골목엔 들어가지 마시고, 지갑과 귀중품은 안 보이는 곳에 숨기십시오. 혹여 강도가 총을 겨눈다면 저항하지 마십시오. 한국과 달리 진짜 쏩니다."

    911테러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져 강도 사건이 급증했다는 게 세르게이의 부연 설명이다.

    "총기 소유가 자유로운 나라라서 허투루 들리지 않네요."

    긴장의 끈이 절로 당겨졌다.

    고개를 끄덕인 세르게이는 그 외에도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세심하게 설명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새벽이라도 이 번호로 연락 주십시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종혁은 멀어지는 세르게이를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끼이익! 쿵!

    쿵쿵쿵! 쿵쿵쿵!

    멀리서 희미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종혁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뭐야. 몇 시야? 엑?"

    오전 7시 30분이다.

    어제 임성원 교수와 저녁을 먹은 후 돌아와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는데, 지금까지 잔 것이다.

    여기가 한국이라고 해도 믿지 못할 기상 시각이었다.

    ‘퍼스트로 편히 왔는데도 피곤했나.’

    "근데 이 새벽부터 누가 문을 두드리는 거야? 거 얼른 문 좀 열어 주지."

    그게 자신의 룸이라 생각지 못한 종혁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쿵쿵쿵! 쿵쿵쿵!

    "어? 우리 방이……."

    "FBI! OPEN UP!"

    "네?"

    우리 방, 펜트하우스였다.

    ‘FBI?! 가, 갑자기 왜?!’

    FBI. 미국 내 최상위 수사기관 중 하나.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FBI가 문을 두드린다면 순순히 열어 주십시오. 절대, 절대 반항하면 안 됩니다.’

    어젯밤 세르게이가 남긴 말.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임성원 교수도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마음이 다급해진 종혁은 재빨리 외쳤다.

    "갑니다! 열어요! 쏘지 마세요!"

    후다닥 달려간 종혁은 다시 한번 외치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재빨리 양손을 뒤로 하며 엎드렸다.

    그런데.

    "Good morning!"

    고개를 드니 FBI 대신 이리나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내 모닝콜 재밌었어?"

    "……오냐. 오늘 날 잡자."

    종혁은 이리나에게 달려들었다.

    *  *  *

    "아니, 허어."

    벌써 30분째 벌을 받고 있는 이리나를 보던 임성원 교수는 결국 피식 웃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냐. ……허허. 아가씨가 정말 재밌네. 오늘 데이트 잘하고, 내일 8시까지 숙소로만 와."

    "네?"

    "나 꽉 막힌 꼰대 아니다."

    "아니, 저랑 얘는 그런 관계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복 말고 사복 입고. 하음, 난 좀 더 자야겠다."

    방으로 들어가는 임성원 교수를 망연히 응시하던 종혁은 이리나를 죽일 듯 노려봤다.

    "아오, 불 받아!"

    빠악!

    "……!"

    입을 떡 벌린 이리나는 정수리를 잡은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한 짓이 있어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미, 미안해. 그렇게 놀랄 줄 몰랐어."

    "……됐다. 그보다 어쩐 일이야? 장례식 참석한다며?"

    "어제 참석했어. 바린? 아, 어제가 발인이었거든. 다행히 늦지 않게 참석할 수 있었어."

    "정말 다행이네. 그래서?"

    아직 이유를 듣지 못했다.

    이리나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잔뜩 기대하는 얼굴.

    "서울 촌사람인 내 친구 혁에게 뉴욕을 알려 주려고! 브로드웨이! 소호! 센트럴파크! 자유의 여신상! 월 스트리트! 가 볼 곳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아, 그래?"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지?"

    "응? 왜?"

    "약속이 있거든."

    "……에?"

    *  *  *

    "말도 안 돼. 나 같은 미녀가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말 돼. 아무리 미녀라도 그런 짓 하면 아웃이야."

    아직도 심장이 떨린다.

    ‘넌 진짜 친구니까 살았어, 이것아.’

    "후후. 많이 친하신가 보군요."

    운전석에 앉은 세르게이가 말하자 종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친구니까요."

    차 안에 훈풍이 불었다.

    괜스레 미안해진 이리나는 다시 한번 사과했다.

    "됐어. 앞으로 또 하지만 마."

    일반인이었다면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종혁은 볼 꼴 못 볼 꼴 다 본 형사다.

    FBI 특공대 같은 진압 부대의 위험을 잘 아는 베테랑 형사.

    "응. 그런데 누굴 만나는 거야?"

    "꽤 오랜 친구랄까?"

    "친구? 네가? 뉴욕에?"

    "응. 저기에 사는 친구지."

    종혁이 가리킨 곳을 본 이리나는 눈을 껌뻑였다.

    "NFL 사무국?"

    NFL 사무국의 로비.

    적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60대의 백인 남성이 이리저리 배회하다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인물을 보곤 설마 한다.

    "최?"

    종혁은 싱긋 웃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인사 나누는 건 처음이죠, 잭?"

    처음 종혁이 NFL 선수들의 훈련 자료를 요청했을 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도 인연을 맺어 오고 있는 NFL 사무국 소속 스포츠 싸이언스 및 메디컬 치프 잭 와일러.

    "오, 맙소사! 정말 어리잖아!"

    "미국 나이로 이제 열아홉 살이니까요."

    "정말 어려! 하지만 몸은 훌륭해!"

    "내 경기 안 봤어요?"

    "오! 내 어린 친구, 최. 난 NFL 말고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야. 그런데 이쪽의 레이디는?"

    "섭섭하네요. 아, 미리 얘기했던 제 친구 이리나 샤크예요. 굳이 따라오겠다고 해서 데려왔지만, 곧 갈 거예요."

    세르게이는 이미 돌려보냈다.

    "아냐, 아냐."

    싫었다면 처음부터 거부했을 거다.

    "우중충하게 남자 둘만 이야기 나눌 뻔했는데 이렇게 화사한 꽃 한 송이가 피었잖아?"

    잭 와일러는 이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우리 두 남자를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뇨리따. 잭 와일러입니다."

    이리나는 꺄르르 웃었다.

    "이리나 샤크예요, 세뇨르 와일러."

    종혁은 초면부터 죽이 맞는 둘을 어이없다는 듯 봤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고마워요, 젠틀맨."

    ‘어이, 잠깐?’ 종혁은 고개를 저으며 둘의 뒤를 쫓았다.

    잭 와일러는 NFL 사무국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그러다 종혁은 한 곳에서 눈을 빛냈다.

    의료 기기처럼 생긴 기기들이 가득한 층.

    의사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여긴?"

    "역시 자네라면 흥미를 드러낼 줄 알았지."

    도핑 테스트 및 피지컬, 메디컬 테스트를 위한 룸.

    나날이 발전하는 선수의 피지컬과 메디컬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사무국의 일이었다.

    즉, 종혁이 받은 NFL 자료도 여기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야, 역시 미국이네요."

    "왜? 이런 시스템이 부러워?"

    종혁은 뿌듯해하는 이리나를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전혀?"

    "……?"

    "……으하핫! 동양에서 이 기기들을 첫 번째로 구입한 게 저 친구입니다, 아가씨!"

    "에?"

    "이 최첨단 기기들을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저 친구 덕분이죠!"

    그동안 계속 의견을 나눴던 종혁과 잭 와일러다.

    이 기기들 개발에 종혁의 의견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내막을 모르는 이리나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종혁은 한 기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처음 보는 기기가 있네요?"

    "아, 체내 산소 포화 농도를 신체 부위별로 보다 세밀하게 검사하게 된 버전인데……."

    잭 와일러는 종혁의 몸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종혁의 피지컬.

    "한번 써 보겠나?"

    눈을 동그랗게 떴던 종혁은 이내 짓궂게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 올림픽 참가 이후 신체 능력이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검사를 하지 못해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그래 볼까요?"

    종혁은 상의를 벗으며 한 발 내디뎠다.

    지이이잉!

    타타타타탓!

    "맙소사."

    "말도 안 돼. 동양인이 어떻게!"

    "그 기록들이 진짜였다고?"

    이들도 모두 안다.

    동양, 한국의 어린 천재에 대해 말이다.

    그런 종혁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던 이들은 종혁이 산소마스크를 쓴 채 러닝머신을 달리며 써 가는 기록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종혁은 왠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아 테스트를 종료했다.

    "잠깐만! 조금만 더!"

    "최!"

    "자자. 이걸 줄 테니 내 친구는 그만 괴롭혀."

    눈치 좋게 나선 잭 와일러가 종혁의 테스트 기록지를 넘겨주자 그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원래 이쪽 부류 인종들이 한번 눈이 돌아가면 뵈는 게 없거든."

    "아뇨. 괜찮아요. 덕분에 운동도 했는걸요."

    그사이 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도 알게 돼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잭 와일러는 테스트를 극한까지 했음에도 고작 개운해하는 종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최, 요즘은 하루 몇 시간 운동하지?"

    "빡세게 3시간? 그 정도 하죠?"

    "와우. FBI나 CIA 그 머저리들도 이걸 보고 반성하면 좋을 텐데! 퍽킹 FBI! 퍽킹 CIA!"

    종혁은 의아했다.

    "마치 그들과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잭? 지인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 내가 말 안 했나?"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말에 입을 떡 벌렸다.

    "FBI 피지컬 트레이닝 고문을 맡고 있는 중이야. 벌써 10년 됐지. CIA도 중간에 했었고."

    "말 안 했는데요!"

    배신감이 든다.

    NFL 자료와 미래 지식을 버무려 보다 발전된 훈련법을 개발하고 그 자료를 잭과 공유했다.

    스포츠 과학 및 의학 발전을 위해서.

    하지만 FBI와 CIA는 별개 문제였다.

    한국에도 전하지 못한 훈련법이 이들에게 유출됐을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하군. 이건 분명 내 실수야. 하지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결코 그 훈련법을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거야."

    "……정말입니까?"

    "내 아내와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지."

    "……후. 놀랐잖아요."

    "다시 한번 사과하지."

    유출하지 않았어도 실수는 실수다.

    끙끙 앓던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러면 어떨까? 사과 선물과 별도로 FBI 구경을 시켜 주지. 자네도 경찰 간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다니 관심 있지 않아?"

    "FBI를요?"

    종혁은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FBI.

    최첨단의 수사 기법들이 탄생하고 모이며, 활용하는 곳.

    형사로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범죄 사건 기록들이.

    "정말이죠?"

    한시름 놓은 잭 와일러는 환하게 웃었다.

    *  *  *

    잭 와일러와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종혁은 NFL 사무국을 나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눈에 불을 켠 닥터들 때문이다.

    "시간이 애매해……."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보기도, 센트럴파크에서 피크닉을 즐기기에도 모두 애매한 시간이다.

    잭 와일러와의 저녁 식사 약속 때문이다.

    종혁은 툴툴거리는 이리나를 어이없다는 듯 봤다.

    "너 친구 만나며 기분 전환한다고 하지 않았냐?"

    "가장 가까운 곳이 세계무역센터인데, 갈래?"

    "어이, 대답은? ……에휴. 됐다."

    ‘세계무역센터라.’ 회귀 전의 참사를 비켜 간 곳.

    "……그럴까?"

    "응!"

    이리나가 팔짱을 훅 끼며 종혁을 이끌었다.

    110층 세계무역센터(WTC)의 위용은 아쉽게도 로비만 구경할 수 있었다.

    그래도 두 개의 빌딩이 모두 제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종혁에겐 큰 감흥으로 다가왔다.

    ‘지킨 건가.’

    이 사람들, 이 풍경을 지킨 거다.

    빵빵, 우글우글.

    차와 사람들이 가득한 이 평온한 풍경을.

    "자, 커피!"

    "고마워. 흠."

    입안에 닿은 커피 향이 제법이다.

    "그거 알아? 바로 이 옆이 그 유명한 월……."

    재잘거리는 이리나의 말을 음악 삼은 종혁은 좀 더 이 풍경을 즐기기로 했다.

    "여기 기억나?"

    "당연히 기억나죠. 여기서 데이트 중 갑자기 잠깐만 기다려 달라며 저기 보석 가게로 달려갔잖아요."

    "그날 딸, 네가 생겼단다."

    "엑. 알고 싶지 않은 말인데."

    40대 중년 부부가 십 대의 딸과 스쳐 지나간다.

    화기애애한 일가족의 모습.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랑 엄마도 저랬을까?’

    왜인지 갑자기 감격하는 부인의 손목을 잡은 남편이 길 건너편 보석 가게로 데려가고, 딸이 손을 모아 환호한다.

    ‘깜짝 이벤트인가 보네.’

    남편이 로맨티스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곧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네.’

    일 년에 어머니 고정숙이 약해지는 때가 두 번 있다.

    아버지의 제사, 그리고 결혼기념일.

    결혼기념일 때는 안방 문을 꼭 닫고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준 청혼 반지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비록 지금은 돈이 없어 다이아몬드가 가짜지만, 나중에 꼭 진짜로 해 줄게. 결혼해 줘서 고맙다, 정숙아. 라고 하셨다지.’

    가짜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갑자기 심장에 박힌다.

    ‘맞아. 그걸 잊고 있었구나.’

    IMF 금모으기 운동 때 어머니가 내놓았다가 종혁이 회수한 청혼 및 결혼반지.

    종혁은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 가?"

    "엄마 선물 사러."

    그 조직 소탕과 어머니를 위해 살겠다 다짐한 인생이다.

    어머니를 기쁘게 만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종혁은 빨간불로 바뀐 횡단보도 앞에 섰다.

    마음이 앞서서 그런지 약간 초조해진다.

    이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방금 빨간불로 바뀌었어. 진정해, 혁."

    "아, 그런가."

    종혁은 머리를 긁었다.

    ‘그래. 뭐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답지 않았다 생각한 종혁은 그제야 커피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주위의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멀리서 과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으로 오는 듯 소리가 점점 커진다.

    "쯧쯧. 5분 먼저 도착하려다 50년 먼저 가지."

    "신호야, 혁."

    다시 바뀐 파란불.

    종혁은 발을 성큼 내디뎠다.

    "혁. 어떤 선물을 살 거야?"

    "아, 그게……."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부아아아앙! 끼기기긱!

    타이어 마찰 소리와 함께 종혁의 시간이 느려진다.

    드리프트를 하며 나타난 회색 승용차.

    앞 유리에 투영되는 남성 운전자가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멈출 생각이 없다?’

    사람들을 발견했을 텐데도 이를 악문다.

    동승자가 말리는데도 눈빛이 표독해진다.

    종혁은 다급히 횡단보도 위를 봤다.

    "우와아아……."

    "끼아아……."

    모두가 기겁하며 피하는데 할머니 한 명이 이제야 차를 인식한 듯 핸드폰을 내리며 고개를 느릿하게 돌린다.

    느려진 시간 그 모습이 심장을 내려앉게 만든다.

    ‘씨발!’

    망설일 겨를도 없었다.

    탓!

    "혀어억……."

    놀라는 이리나의 부름을 뒤로한 종혁은 그대로 몸을 날리며 할머니를 낚아챘다.

    놀라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게 품 안에서 느껴진다.

    종혁은 그녀를 꼭 안으며 몸을 뒤집었다.

    쿠당탕!

    ‘큭!’

    그리고.

    부아아아앙!

    빠르게 빌딩 숲 사이로 사라지는 회색 승용차.

    "야 이 개새끼들아!"

    벌떡 일어난 종혁은 회색 승용차를 향해 주먹감자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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