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96화>
29. 낙원에 가다
어느덧 여름은 물러가고, 긴 옷을 꺼내야 하는 가을이 됐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어디까지나 제3자의 입장이 되어야……."
임성원 교수의 교수실.
종혁과 임성원 교수가 치열하게 의견을 대립하며 하나의 수사 기법 이론을 완성시켜 간다.
일본에서 진가가 드러난 종혁의 수사 기법이다.
뼈는 이미 세웠고, 지금은 살을 붙여 성형하는 단계.
근육을 채우고 혈관과 신경을 이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만, 차근히 그리고 빨리 나아가고 있다.
"후. 오늘은 이 정도만 하자."
"수고하셨습니다."
"어우. 나도 나이가 드나. 목이 뻐근하네."
종혁은 슬그머니 무시했고, 피식 웃은 임성원 교수가 몸을 일으켜 커피를 타 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후룩!
원두커피의 구수한 향이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식혔다.
해가 저문 저녁.
기분 좋은 침묵이 여운을 달랬다.
"종혁아, 그거 아냐?"
"……?"
"요즘처럼 경찰에 복직하고 싶은 적도 없던 거?"
"그래요?"
"그럼. 이 나라 수사 기법의 새 지평을 열 이론을 만들고 있지, 일본에서 넘어온 과학수사 기술 덕분에 놓쳤던 놈들도 잡고 있지."
일본과 과학수사 기술을 교류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300여 건의 미제 사건이 해결됐다.
형사라면 죽을 때까지 가슴에 품는 미제 사건.
"일본이 크게 도움이 됐나요, 뭐. 그저 방아쇠 정도만 되어 준 거죠."
놀랍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실망스럽다고 해야 할지.
일본의 과학수사 기술과 한국의 과학수사 기술은 그리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디지털 포렌식은 오히려 한국이 몇 단계 위.
일본은 그저 백업된 파일을 복구하는 수준이었다.
이런 일본이 미세하게 앞선 건 DNA 수사 기술이다.
"알지. 나도 놀랐지. 그래도 나이 든 양반들 일제라면 껌뻑 죽잖아."
그래서 DNA 수사에 대한 예산도 증대됐다.
일본과의 수사 기술 교류로 인한 이득이라면 바로 이 점이다.
DNA 수사 기술이 보다 활성화되는 것.
덕분에 미제가 될 뻔한 사건도 해결 중이었다.
즉, 범인 잡을 맛이 나는 거다.
"모두 네 덕분이다."
"하하. 뭘요."
시선이 뜨겁다.
멋쩍어진 종혁은 화제를 돌리고자 임성원 교수의 책상을 봤다.
"저건 진짜 언제 치우실 겁니까?"
돼지우리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놔둬. 뭐가 어디 있는지 다 아니까. 참고로 내 마누라도 고치지 못한 거다."
"자랑스럽게 말할 일은 아닌데."
"뭐 인마?"
장난기를 머금은 상쾌한 바람이 진지해졌던 교수실의 공기를 흐트러트린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잘 자라. 아, 맞아. 종혁아."
"예?"
"너 미국 한번 안 가 볼래?"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학부 건물을 나와 커피 자판기 앞에 서자니, 오와 열을 맞춰 정자세로 절도 있게 걷던 1학년들이 빠르게 다가온다.
자세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모습이 귀엽다.
"오늘도 임 교수님 만나러 오신 겁니까?"
"와아!"
1학년들의 눈에 존경심이 차오른다.
그들로서는 말도 붙이기 힘든 교수와 함께 어떤 수사 기법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고작 한 학년 차이가.
교내에서 입어야 하는 정복에 주름조차 지지 않은 그들로서는 종혁이 신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신계에 사는 사람이다.
종혁의 일화는 너무 많았다.
많은 범인 검거와 제3기숙사 건설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면서도 성적은 언제나 수석.
마치 소설 속 주인공 같은 존재다.
"강의는 다 끝났어?"
"옙! 오늘 강의는 다 끝났습니다!"
"들어가서 또 레포트 써야 하지만요……."
"하, 교수님들은 우리가 자기 강의만 듣는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종혁은 피식 웃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서 온 경찰대학교.
처음엔 대학에 대한 환상에 젖었을 거다.
교정 잔디밭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며 술 마시고.
선후배가 하하호호 어울리며 서로 이끌어 주고.
하지만 경찰대학교는 그런 낙원이 아니다.
하루에 습득해야 되는 지식의 양은 고3 수험생 때보다 더 지독하고, 체력과 제압술까지 신경 써야 한다.
문무를 겸비한 장수, 아니 간부를 육성하는 곳.
구타와 욕설이 없을 뿐, 군대와 똑같은 곳이다.
경찰대학교는 그런 곳이었다.
"너희가 이번 학기부터 주말 휴가를 갈 수 있던가?"
순간 1학년들의 눈이 번뜩인다.
"네!"
전원 기숙사제인 경찰대학에서 1학년은 2학기부터 한 달에 한 번 1박 2일 주말 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
1학기는 한 달에 한 번의 외출만 허락된다.
규율과 규범만 있는 경찰대 교정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
‘좋을 때다.’
얼마 뒤의 주말 휴가를 잔뜩 기대하는 햇병아리들을 보자니 지갑을 열지 않을 수가 없다.
"자. 나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먹어."
"아,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도 돈 있습니다!"
"괜찮아. 어른이 주는 건 감사합니다 하고 받으면 되는 거야."
"가, 감사합니다. 힉!"
얼떨떨 수표를 받아 들었던 그들은 액수를 확인하곤 기겁했다.
무려 오십만 원이었다.
"형 돈 많다.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햇병아리들이 귀엽기도 하지만, 이들은 후에 도움이 될 후배 기수다. 고작 오십만 원으로 최종혁이란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다면 싼 값이었다.
‘아, 그 선배?’와 ‘좋은 선배’는 천지 차이니 말이다.
"가, 감사합니다."
"아, 선배님!"
"음?"
"이번에 견학 가신다면서요?!"
듣기로 6박 7일 일정이라고 했다.
대구 햇빛복지원, 주식회사 신대륙 등 경찰에 안 좋은 의미인 장소를 찾아가 경찰의 역사를 되짚고 경찰로서의 뜻을 세우는 행사다.
그러나 어찌 보면 여행이었다.
부러움이 그들의 눈에 차올랐다.
"어쭈? 시간이 남아도나 봐? 선배들 스케줄에도 관심을 가지고?"
"아하하."
그럴 리가.
그래도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다.
"그런데 난 안 가."
"예?"
"다른 곳에 가거든."
‘최첨단 범죄수사기법에 관한 포럼이라.’ 관심이 가지 않는다면 형사라 할 수 없었다.
* * *
기이잉!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공항.
경찰 정복을 입은 종혁이 나탈리아와 통화한다.
-섭섭해요.
러시아가 먼저 종혁과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러시아보다 미국을 먼저 간다.
일본이야 그럴 수 있다.
수작을 부린 점도 있지만, 한국과 가까우면서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나라니 말이다.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나라.
"아하하."
-우리도 SVR 포럼을 열어야 할까요?
구 소련 정보국 KGB의 후신 SVR.
러시아 대외정보국.
"워워. 참아요."
SVR이 포럼을 연다?
전 세계 정보국이 달려들 것이다.
-미국이 유혹할까 봐 이러죠.
"미국이요? 저를?"
‘왜? 어떻게?’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당시, 나탈리아조차도 종혁이 러시아 최고위층과 연결이 되었다 판단하여 찾아왔었다.
그러다 권&박 홀딩스의 진짜 주인이 종혁임을 알게 됐다.
그런데 아무 관계도 없는 미국이 그걸 안다?
이건 권아영이나 박태규, 권회수 셋 중 한 명이 배신한 거다.
-그 예지에 가까운 통찰력이 아닌 다른 통찰력도 있고…….
종혁의 손을 거치면 기량이 20퍼센트 발전하는 점도 있다.
스포츠 과학을 10년 이상 발전시킨 인물.
-이런 존재를 그 어느 국가가 원하지 않을까요?
‘투정인가?’
왠지 귀여웠다.
"음. 저를 어떻게 유혹할 수 있는데요? 돈?"
-저도 그게 가장 큰 문제랍니다.
닷컴 붕괴로 인해 세계 부자 반열에 든 종혁이다.
돈은 의미 없다.
명예는 알아서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그런데 이것도 좀 꺼림칙하다.
-최. 성 기능에 이상 없죠?
혈기 왕성한 스물한 살임에도 연애는커녕 욕구 해소조차 안 한다.
-혹시 특이한 취향이라거나…….
종혁은 싱긋 웃었다.
"끊습니다."
-자, 장난!
탁!
거칠게 폴더를 닫은 종혁은 혀를 찼다.
"남자한테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지."
이건 아무리 예뻐도 용서할 수 없다.
콧방귀를 뀐 종혁은 임성원 교수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직까지도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그렇게 신기하세요?"
"그럼 넌 안 신기하냐? 인천에서 배가 아니라 비행기를 타는데?"
그랬다.
여긴 김포국제공항이 아니라 인천국제공항이었다.
2001년 올해 3월에 개장하면서 국제노선 중 일부를 가져온 인천국제공항.
‘딱히?’
종혁이 해외여행을 가게 됐을 땐 이미 인천국제공항이 활성화된 이후였다.
"허어. 내 살다 살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는 날이 오다니."
"가시죠. 비행기 놓치겠어요."
"어? 어……."
임성원 교수를 잡아끌며 게이트로 향하던 종혁은 누군가를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
눈이 마주친 금발의 여성도 놀랐다.
"애나?"
"혁?"
친구인 이리나 샤크.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도 있다.
"오우, 혁!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이리나의 모친이 종혁의 볼에 입을 맞춘다.
이리나와 친구가 된 이후 마치 친어머니처럼 따뜻하게 대해 주는 그녀.
"여긴 왜 계세요?"
방학이나 주말도 아니고 평일이다.
이들이 국제공항에 올 이유가 없다.
이리나가 입을 열었다.
"먼 친척이 돌아가셨거든. 거기에 참석하러 가."
"아…… 미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괜찮아. 왕래가 거의 없던 친척이거든. 누구 때문에 여름에 고향에도 못 갔으니 이번 기회에 미국 친구들도 만나고 기분 전환도 하려는 거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싶었다.
그녀의 고향은 뉴욕이고, 포럼이 열리는 곳도 뉴욕이다.
"그런데 넌?"
종혁은 사정을 설명했다.
"정말? 와."
그녀의 부모도 감탄한다.
"아, 이쪽은 함께 가는 임성원 교수님."
"임성원입니다."
인사를 나눈 그들은 안쪽 게이트로 향했다.
같은 곳으로 향하는 비행기라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종혁은 탑승 안내 방송이 나오자 몸을 일으켰다.
"응? 화장실 가게?"
"아니, 우린 탑승해야 되거든."
"무슨 소리야. 이코노미는 아직…… 헉!"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본 이리나의 눈이 흔들린다.
곧 정신을 차린 그녀는 종혁을 간절하게 봤다.
종혁은 샤크 부부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뉴욕에서 뵐게요."
"이씨! 나도! 나도 퍼스트-!"
"뉴욕에서 봐. 사랑한다, 친구야."
"최종혁 이 나쁜 놈아!"
* * *
씩씩거리며 비행기에서 내린 이리나의 숨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입국 게이트를 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종혁에게 달려들었다가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린 먼저 갈게. 한국에서 봐."
"예. 조심히 가세요, 아버님."
"가자. 내 멍청하지만 예쁜 공주님."
"아앗! 안 돼, 아직 한 대도! ……혁! 너 진짜 죽일 거야-!"
이리나의 가족들이 멀어지자 임성원 교수는 허헛 웃었다.
"재밌는 아가씨네. 여자 친구야?"
"여자 사람 친구요."
"여자 사람 친…… 풋! 큭큭큭큭큭!"
배를 잡고 떠는 그를 보니 종혁은 슬쩍 뿌듯해졌다.
"어후. 배 아파서 혼났네. 종혁이 아주 재치 있어, 어?"
"흐흐. 가시죠. 숙소에 짐부터 풀어야죠."
"그래, 그래."
"포럼은 내일부터 열린다고 했던가요?"
"그렇긴 한데 우리가 참관할 건 2일 차 프로파일링과 4일 차 행동심리학이야."
3일 차 네고시에이션 포럼도 여유가 되면 참관할 계획이었다.
나머진 과학수사기술 포럼인데, 5일 차와 6일 차 포럼도 관심이 있었다.
"아, 그래요? 잘됐네요."
"왜?"
"만나야 할 오랜 친구가 있거든요."
"뉴욕에? 방금 그 아가씨 말고?"
"네. 그동안은 전화와 팩스, 이메일로만 이야기를 나눈 친구예요. 굉장한 연상이죠."
임성원 교수는 의아해했고, 종혁은 웃으며 발을 뗐다.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온 둘은 멈춰 섰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금발의 남성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안경을 낀 서글서글한 인상.
그러나.
‘이 새끼?’
뒷목의 솜털이 쭈뼛 선다.
실력자였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임성원이 종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종혁 최?"
"……그렇습니다만?"
"CIA에서 나왔습니다. 미국에 오신 걸……."
"CIA에서 우리 러시아의 친구를 왜 만나려는지 모르겠군."
흑발의 러시아인이 등장한다.
CIA라 소개한 남성이 이를 간다.
"세르게이."
종혁은 눈싸움을 벌이는 둘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뭐야. 왜 CIA가 널 마중 나와? 러시아는 또 뭐고?’
그리고 둘은 왜 갑자기 싸우는지.
‘글쎄요?’
종혁도 그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