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93화>
백종명과 장 씨 노인만 남겨진 후원 사무실.
창문 앞에 서 있던 백종명이 돌아선다.
장 씨 노인이 부동산 매매 계약서를 내민다.
집 주소는 방금 전 순덕이 계약서를 쓴 파출소 옆 집이다.
"백 회장, 이거 진짜 문제없지?"
막상 일을 벌이려고 하니 심장이 떨린다.
백종명은 사람 좋게 웃었다.
"산골에서나 살던 모자란 년이 부동산 거래에 대해 알기나 하겠습니까?"
아무리 매매 계약서를 썼어도 신고 된 이름이 다르면 의미 없다. 순덕은 이사한 집의 명의가 정순덕이 아니라 백종명이란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시골 년이 등기부등본을 떼어 볼 일도 없을 건데."
세금이야 이쪽에서 내주면 그만이다.
어차피 푼돈이다.
"혹여 들킨다고 하더라도 다 순박한 순덕 씨가 사기를 당할까 걱정돼서 그랬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니……."
너만 입 다물면 된다.
백종명의 눈은 그렇게 말했다.
"푸흘흘흘. 나야 뭐 돈만 벌면 되니까!"
악인의 웃음이다.
‘고작 5백에 조카 지인을 속이다니. 이놈도 참.’
‘이놈은 악마야, 악마. 그래도 난 돈만 벌면 되지!’
악인 둘은 서로를 비웃었다.
백종명은 계약서에 인감도장을 꾹 찍었다.
"그럼 난 먼저 일어나지! 오늘 등록하려면 시간 없어! 다음에 또 불러 달라고!"
백만 원 뭉치 다섯 개를 보물인 듯 챙긴 장 씨 노인은 후다닥 달려 나갔다. 느긋이 창문 앞으로 걸어간 백종명은 뒤뚱뒤뚱 멀어지는 탐욕스러운 돼지를 경멸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는 어제 은행에서 정리한 후원 통장을 열었다.
약 2천만 원의 숫자가 찍혀 있다.
원래 5천인데, 나머진 썼다.
고작 한 달 만에 5천만 원.
매주 행해진 ARS 모금으로 3700만 원.
개인적 후원 1300만 원.
그 외 생활 필수품 등 기타 지원.
오늘 어린 호구 한 마리 덕분에 매매한 부동산까지 합하면 1억이 넘는다.
"돈 벌기가 이렇게 쉬웠나?"
옛날 하던 사업도 월 1억은 벌지 못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저녁 12시까지 일했어도.
그땐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다.
죽을 만큼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던 아내가 바람이 난 후로 더.
"에이. 왜 그년이 떠오르고 지랄이야?"
하지만 바람난 아내를 쫓아 일본에 갔기에 이걸 배울 수 있었다.
얼마를 해 먹든 절대 처벌받지 않는 수법을.
백종명은 이런 행운을 안겨 준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대리, 회사엔 언제 입사시켜 줄 거야? 이 정도면 되지 않아?"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입사는 그 이후에 이야기하죠.
"허. 나도 큰물에서 놀고 싶은데."
-적성에 맞으십니까?
"어. 맞아. 너무 맞아. 매순간 짜릿해서 죽을 것 같아."
-이제야 맞는 일을 찾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흐흐흐."
듣는 사람 아무도 없는 후원 사무실.
그는 마음껏 본성을 드러냈다.
그의 가슴팍에 꽂힌 황금 만년필이 빛났다.
* * *
살림살이가 얼마 없어서 그런지 이사는 금방 끝났다.
천덕 마을에서 유일하게 차를 가진 장 씨가 도왔고, 동하리 주민들은 새로운 입주민을 반겼다.
이웃인 파출소 경찰들도 카메라 때문인지 성심성의껏 도왔다.
"아니, 된장은 지금 넣으면 안 된다니까!"
"이거 어디로 가요?"
해가 어스름히 저물 무렵, 순덕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떠들썩하다. 천덕 마을 어르신들도 모두 축하하기 위해 내려왔고, 동하리 주민들도 몰려들었다.
"뀌이익! 뀌이익!"
마당 한구석에서 돼지의 목이 갈라지며 피 냄새가 확 번진다.
"웩!"
"우욱!"
치솟는 토악질을 겨우 참아 낸 동기들이 종혁을 본다.
"조, 종혁아. 너 괜찮아?"
"뭘 이런 걸 가지고."
현장에 나가면 이보다 더한 것도 보고, 더한 냄새도 맡는다.
"일반인인 애나도 저렇게 태연한데 간부후보란 것들이. 쯧쯧. 반성해라."
"응? 나?"
"애나. 저거 보면 무슨 생각 들어?"
"……숯 사 올까? 삼겹살은 구울 거지?"
"봐. 반성해."
"너희들이 이상한 거거든!"
하얗게 질린 소영과 수호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구. 서울 청년들은 이런 거 처음 보나?"
"다들 귀하게 자라서 그래요."
"푸허허. 그래?"
종혁은 다가온 노인의 손에 들린 핏덩어리를 봤다.
다른 한 손엔 과도 한 자루가 들려 있다.
"간은 안 주셔도 돼요. 날것은 회밖에 안 먹어서요."
"아쉽구먼. 이게 진짜 맛있는 건데. 어이구! 백 회장 왔어?!"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백종명이 뒷짐을 진 채 느긋이 걸어 들어온다.
모여 있던 마을 주민과 유지들이 벌떡 일어나 맞이한다.
순덕도 젖은 손을 옷에 닦으며 달려가 인사한다.
서울에서 큰 사업을 하지만, 철수를 위해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이런 시골로 내려온 의인의 등장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한다.
왕.
왕의 행차를 보는 것 같아 종혁의 속이 뒤틀린다.
일이 잘됐는지 참 밝은 백종명의 얼굴을 박살 내 버리고 싶다.
이쪽을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철수의 시선이 살의를 더 돋운다.
까드득!
종혁은 몸을 돌렸다.
"나 잠깐 전화 좀."
"어? 어."
지금쯤이면 등기부 등록이 완료됐을 시간이다.
집에서 약간 떨어진 종혁은 핸드폰을 들었다.
"예. 접니다, 권 이사님. 이 주소로 등기부 등록된 사람 이름 좀 알아봐 주실래요?"
-네. 잠시만요. 전화 끊지 마세요.
권아영의 목소리가 멀어지자 마음이 조급해진다.
‘미끼를 물었을까?’
멍청하다면 그 가치를 모르고 물지 않았을 미끼.
그러나 종혁이 본 백종명은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이었다. 아마 미끼를 물지 않고는 못 배길 터였다.
그래도 초조해지는 마음에 종혁은 담배를 물며 평상에 앉는 백종명을 봤다.
"백 회장을 위하여!"
"위하여!"
부딪친 잔 속 막걸리가 꿀떡꿀떡 넘어간다.
왁자지껄.
기다릴수록 소리가 점점 뭉쳐진다.
-여보세요?
우직!
담배 필터가 뭉개진다.
"네. 듣고 있습니다."
-등기부에 등록된 사람 이름이 백종명이에요.
세대주는 정순덕이다.
-오늘 매입한 것 같은데요?
"……푸흐흐. 그럴 줄 알았지."
덫을 놨지만, 아니나 다를까다.
장 씨 노인도 한통속이었다.
-여보세요? 보스?
권아영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종혁은 백종명을 죽일 듯 노려봤다.
"빙고다, 씹새끼야."
세 밤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 * *
풍덩! 풍덩!
"잡았다!"
"꺅! 하, 할 거야?"
"응. 할 거야."
"꽂아!"
푸웅덩!
소영이 뒤통수부터 계곡물에 꽂힌다.
"콜록! 켈록! 우웩! 이씨, 너희 다 죽었어!"
눈이 뒤집힌 소영이 달려들고, 이제 친구가 된 이들이 모두 흩어진다.
이미 물을 한 대야 먹은 수호는 바위에 널브러져 있고.
"1번 애나! 갑니다!"
큰 바위 위에 올라간 이리나는 폴짝 뛰어 또 배로 다이빙한다.
"아흑! 아파! 짜릿해!"
"……쟤도 정상은 아냐."
"응."
어제 이사 전, 마을 어르신들의 집 청소와 지붕 수리를 하고, 오늘 새벽부터 모두가 달려들어 잡초를 뽑은 후 새참까지 야무지게 먹은 그들은 모든 체력을 쏟아 버리겠다는 듯 정신 줄을 놓고 놀았다.
"우웩! 크우엑!"
"이번엔 철수다!"
"네?! 아, 안 돼요!"
"철수 잡아!"
"으아아앙!"
결국 잡혀 내리꽂힌 철수가 재밌었는지 해맑게 웃는다.
그렇게 물에 젖은 미역이 된 모두는 다음 타깃을 찾았다.
"음?"
물가 바위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며 수박을 조지고 있던 종혁은 몰리는 뜨거운 시선에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뿌드득!
가슴을 펴자 몸이 한층 더 커진다.
"해보자고?"
"……씨발! 우리는 여덟이야! 덮쳐!"
"우와아아아!"
철수도 함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수박을 내려놓은 종혁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다 들어와!"
그 순간.
부스럭부스럭.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에 모두가 멈춘다.
자신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어야 할 계곡.
누군가 나타나자 급 소심해진 그들은 등장한 인물을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인다.
동기들은 어디서 본 인물 같아서.
소영과 수호는 본 인물이어서.
"어우. 뭐 이렇게 깊은 곳에 계곡이 있어?"
"그래도 사람 없어서 좋지 말입니다."
"그래? 다음에 팀 회식 여기로 올까? 어, 종혁아!"
종혁은 손을 흔드는 인물을 보곤 피식 웃었다.
"오셨어요, 삼촌?"
"우리 종혁이가 부르는 건데 당연히 와야지! 그것도 사건인데!"
‘사건?’
"아."
아차 한 종혁이 입을 열었다.
"다들 인사해. 이쪽은 본청 특수범죄수사과 김종두 과장님과 직원들."
"헉! 충성!"
동기들이 다급히 차렷하며 경례했고, 소영과 수호는 그제야 김종두를 알아봤다.
"아아앗!"
"흐흐. 먼 미래 내 상관들이구먼. 반갑다. 본청 특수 김종두다."
동기들과 친구들은 그런 그의 등장을 의아해했다.
이에 김종두가 물었다.
"종혁아, 말 안 했어?"
"어제까진 확실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동기와 친구들의 고개가 더 기울어진다.
김종두는 종혁을 떨떠름히 보았다.
어젯밤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네가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나는 건지, 아니면 네가 사건을 몰고 다니는 건지."
"하하."
"종혁아…… 무슨 일이야?"
한 동기가 조심스럽게 묻자 종혁은 사정을 설명했다.
"뭐?! 백 회장이?! 진짜?"
"어. 진짜."
"말도 안 돼!"
"넌 대체 그걸 어떻게 안 거야!"
종혁은 철수를 불렀다.
"네!"
철수가 다가오자 종혁은 그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움찔!
철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가 곧바로 해맑게 웃었다.
"봤지?"
"……."
"이런 개 씨발 새끼가!"
동기들도 배웠기에 안다.
철수의 반응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나타나는 건지.
그들은 부끄러워졌다.
경찰은 피해자가 보내는 구조 신호를 알아채야 한다.
경찰대 교수들이 귀에 인이 박히도록 한 말임에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종혁의 말이 꾸중처럼 들렸다.
김종두 과장과 특수의 형사들은 혀를 내두른다.
‘고작 저걸로 의심했던 거야?’
최소 7년 이상은 형사 밥을 먹어야 겨우 의심할 수 있는 찰나의 반응이다.
‘이놈 진짜 괴물이네.’
"이것 때문에 의심했는데 어젯밤에 결정적인 범행 증거가 나왔어. 미리 말 안 해서 미안."
"끄음……."
서운했지만, 말할 수 없다.
피해자의 구조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자신들이고, 해가 온전히 지기 전부터 취해 있던 것도 자신들이니 말이다.
천덕까지 올라온 것도 장 씨의 차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종혁은 김종두를 봤다.
"영장은요?"
"흐흐. 발급받아서 왔다."
종혁이 넘겨준 증거만 해도 압수수색영장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김종두 과장이 얼굴이 어두워진다.
미성년자 유산 상속 시 일어나는 사건들과 비슷한 사건이다.
자칫 놈이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
"괜찮아요. 나머지 증거는 거기 있을 테니까."
"음?"
"놈의 동의까지 얻은 확실한 증거가."
"응?"
종혁은 그럴 수 있냐며 의아해하는 이들의 시선을 일견하며 철수를 봤다.
"철수야, 많이 기다렸지?"
"네?"
"이제 그 나쁜 아저씨 혼내 주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네!"
종혁은 동기와 친구들을 봤다.
"어쩔래?"
"뭘 물어! 당연히 가야지!"
"가자! 그 개새끼 잡으러!"
그들은 백종명이 있는 후원 사무실로 우르르 향했다.
* * *
철수 후원 사무실.
백종명이 푸근한 미소로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를 응대한다.
"정말 좋은 일 하시는 겁니다."
‘흐흐. 또 호구가 굴러 들어왔군.’ 읍내 시장에서 장사하며 한 푼 두 푼 힘들게 모았지만, 불쌍한 철수를 위해 흔쾌히 투척하는 노부부.
"비록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철수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 꼭 철수를 위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잘되는 게 철수가 잘되는 거지!’ 오늘만 벌써 5백만 원을 벌었고, 이후 약속만 두 건이다.
‘돈 벌기 진짜 쉽다니까-!’
그는 찢어지는 입을 제어하느라 혼쭐이 났다.
"어르신들. 여기 보고 웃어 주세요!"
이 겉으로 흐뭇한 광경을 지방 신문 기자가 찍는다.
찰칵!
환하게 웃는 백종명과 쑥스러워하는 노부부가 악수하는 모습이 필름에 담긴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철수를 보고 가시겠습니까?"
"아뇨. 한창 공부할 시간일 텐데, 방해해서 쓰나요."
"어이구. 그래도……."
‘진짜 호구네, 호구야!’
"그럼 저흰 가 보겠습니다. 철수 잘 부탁드립니다."
"예, 예. 걱정 마십시오!"
백종명은 문까지 그들을 배웅했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며 김종두와 다른 이들이 어슬렁 들어왔다.
"오, 역시 있었네."
"뭐, 뭡니까!"
"누구요!"
회색 항공 점퍼에 면바지, 껄렁한 걸음까지.
못된 사람이라 생각한 노부부가 백종명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다 뒤이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놀란다.
"……철수?"
백종명은 다른 이도 발견하며 놀란다.
"너, 넌?"
종혁이다.
차갑게 노려보는 종혁의 시선에 뭔가 잘못된 걸 느낀다.
‘설마?!’
"어이구. 어디 보시나. 여기 봐야지?"
화들짝!
백종명은 드밀어진 경찰 배지와 영장에 경악했다.
"겨, 경찰?!"
"백종명 씨? 당신을 사기 및 김철수 군 폭행, 갈취, 횡령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미란다원칙이 읊어지자 백종명의 머리가 엉클어진다.
하지만 살려고 하니 입이 절로 열렸다.
‘그들이 이 상황엔 이렇게 하라고 했어!’
설계도에도 나와 있고, 설계자에게도 들은 대응법.
백종명의 얼굴이 느긋해진다.
"뭣 때문에 이러시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요.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시겠습니까?"
"뭐?!"
"이 나쁜 인간아! 그게 할 말이냐!"
동기들이 버럭 하지만, 종혁과 김종두 과장, 형사들의 눈빛은 무심했다.
김종두 과장이 입술을 뒤튼다.
"아, 그러세요. 철수 집 명의를 자기 걸로 해 놓고도 무슨 일인지 모르시겠다?"
노부부와 기자가 눈을 크게 뜬다.
‘빌어먹을! 그, 그게 어떻게 들킨 거지? 설마?’
반사적으로 종혁에게로 시선이 간다.
그렇지 않다면 종혁이 여기 나타날 리 없다.
하지만 괜찮다.
이마저도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아, 그거 말이군요. 순진한 철수 어머님이……."
"혹여 사기를 당할까 봐 당신 명의로 했다, 철수가 성인이 되면 명의 이전을 하려고 했다?"
흠칫 놀란 그가 종혁을 봤다.
"그런 거라고요?"
‘어떻게 그걸?!’
"그, 그렇습니다."
"이야. 훌륭하네."
박수를 친 종혁이 백종명의 멱살을 잡아챘다.
"켁!"
버럭 화를 내려던 백종명은 잡아먹을 것 같은 사나운 종혁의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종혁은 이를 드러냈다.
"어떻게 설계도랑 똑같은 말을 하지? 대가리가 없나?"
"……뭐, 뭣?!"
"어이구. 비싼 거라고 소중히 간직도 했다."
종혁은 백종명의 앞섶에서 황금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만지더니 끝을 꾹 눌렀다.
그러자…….
위이이잉!
기계가 작동하는 소리.
황금 만년필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흘러나온다.
-백 회장. 이거 진짜 문제없지?
장 씨 노인의 목소리다.
-산골에서나 살던 모자란 년이 부동산 거래에 대해 알기나 하겠습니까? 시골 년이 등기부등본을 떼어 볼 일도 없을 건데. 혹여 들킨다고 하더라도 다 순박한 순덕 씨가 사기를 당할까 걱정돼서 그랬다고 하면 됩니다. 그러니…….
"허어억!"
‘이, 이게 뭐야!’ 백종명의 머릿속이 완전히 엉클어졌다.
"야. 이래도 아니냐?"
"……이, 이건 무효야! 동의가 없는 도청은 불법이라고 했다고!"
맞다. 도청은 불법이다.
피식 웃은 종혁은 다시 만년필 끝을 꾹 눌렀다.
-지금부터 말하는 모든 내용은 법적인 증거가 된다는 걸 명시합니다. 인정하십니까?
"……."
"너도 동의했다? 나 분명히 이것도 같이 보여 줬어?"
끝났다.
모든 게 끝났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 백종명은 눈이 돌아갔다.
"놔-! 이 씨발-!"
종혁의 팔을 뿌리친 백종명은 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어딜!"
김종두가 발을 걸자, 백종명의 몸이 붕 떴다.
쿠당탕!
바닥을 뒹구는 백종명을 형사들과 동기들이 덮쳤다.
"크악! 놔! 놔아-!"
찰칵! 찰칵! 찰칵!
사람 좋은 독지가 백종명의 추악한 민낯이 드러났다.
압수수색이 시작되자 사무실이 어수선해졌다.
종혁은 양팔이 붙들린 백종명에게 경고를 했다.
"철수 폭행 묻을 수 있을 것 같지? 애가 모자라다고? 아냐. 꿈도 꾸지 마. 내가 고법원장급 변호사를 붙일 거거든. 나 돈 많다?"
파랗게 질린 백종명은 고개를 푹 숙였다.
"클클. 데려가!"
종혁은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위로를 받고 있음에도 얼떨떨 멍해 있는 철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
"다 끝났으니까 이제 하기 싫은 건 안 해도 돼."
"저, 정말요? 막 싫은데 안 웃어도 돼요?"
"응. 이젠 네 마음껏 뛰어 놀아도 돼."
인생극장 철수 편의 제목, ‘철수야 놀자’처럼.
"……네!"
철수는 그제야 몇 주 만에야 진짜로 웃을 수 있었다.
모든 수고가 아깝지 않은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