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89화 (89/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89화>

"그땐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후처리 때문에."

아니다.

백 명이나 동원했음에도 결국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쪽팔려서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 술을 펐다.

‘내가 미쳤지!’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아버지에게 전화한 기록이 있었다.

"하하. 아닙니다. 그러실 수 있죠."

"……감사합니다."

한숨을 폭 내쉰 무로이 코헤이는 낯빛을 굳혔다.

"그리고 당신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저를요?"

‘누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야마다에게 당한 여인의 유족,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아."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끙."

종혁은 골치 아프게 됐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피해자 가족을, 그것도 유족을 만난다는 건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다.

조금만 일찍 잡았다면 하는 죄책감 때문이다.

볼 면목도, 할 말도 없다.

그러나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범인이 어떻게 잡혔고, 어떻게 처벌받을지 알려 주어 그들의 한을 풀어 주는 것도 형사가 할 일이었다.

실제로 이걸 못 해서 형사를 관두고 교통계나 일선 파출소로 전출 가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여깁니다."

시부야 어느 작은 건물 지하의 작은 바.

"시라사기? 해오라기?"

"이곳의 주인이 새를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점심인데도 문을 열었군요."

"마음의 위안을 바라는 사람은 낮에도 있으니까요."

"낮술 즐기면 술꾼 아닙니까?"

"……들어가시죠."

무로이 코헤이는 문을 열었다.

"마스터, 저 왔습니다."

와이셔츠와 조끼를 입은 중후한 외모의 50대 장년인이 마른 천으로 컵을 닦고 있다.

피식 웃으며 뒤따르던 종혁은 ‘오!’ 하고 감탄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분위기도 있지만, 바텐더가 여자가 아니었다.

‘하긴 바는 이런 곳이지.’

한 잔의 술을 걸치며 속에 담긴 이야기를 털어놓는 곳.

그런 곳이 바였다.

종혁과 무로이가 자리에 앉자 장년인은 말도 없이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와."

주둥이가 넓은 작은 잔에 붉은빛의 술이 따라진다.

그리고 그 위로 주황빛의 술이 따라지고, 또 노란색의 술이 따라진다.

그런데 서로 섞이지 않고 층을 이룬다.

이 놀라운 광경에 종혁과 무로이는 시선을 뺏겼다.

작은 술잔 안에 피어나는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

딱!

술잔 위로 불의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장년인의 입이 열렸다.

"이 레인보우 칵테일에는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 친구가 옆에 있을 때 이 칵테일을 시켜 놓고 바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기도하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 경우에는 존경하는 사람, 감사한 사람이겠군요. 부디 소원을 빌어 주시길."

"아."

작은 술 한 잔에 그의 마음이 전해진다.

범인을 잡자 자식을 지키지 못한 한이 조금은 풀어졌을 것이다.

그동안은 슬픔을 안고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것이 부모이기에.

자식을 가슴에 묻고 겨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범인이 탈옥을 했다.

겨우 봉합한 상처가 다시 터지고 썩어 들어갔을 거다.

종혁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슴이 무거워진 종혁은 화려한 술과 그 위에 피어난 불꽃을 보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후."

꿀꺽!

입김으로 불을 끄고 단숨에 들이켠 종혁은 고개를 숙였다.

"잘 마셨습니다."

작게 웃은 장년인이 다시 술을 제조했다.

"한국의 경찰 간부후보생이라고요."

"이제 2학년입니다."

"경찰이 되실 생각이십니까?"

"예."

‘잡아야 할 놈들이 있으니까!’ 종혁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눈빛이 좋으시군요. 꼭 옛날, 정의감 넘치던 한 애송이 형사가 떠오릅니다."

"하하. 그러십니까?"

"무로이 켄타라는 친구죠."

"무로이?"

아버지 이야기에 호기심이 차오르던 무로이 코헤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제 아버지십니다."

"오. 아버님도 형사…… 어? 설마?"

"예. 저번에 보셨던 경시청 형사제2부장 경시감님이 제 부친 되십니다."

종혁은 화들짝 놀랐다.

‘그런 관계였어?’

그제야 무로이 코헤이의 초고속 승진이 이해된다.

45세에 경시청 형사제1부장이 되는 무로이 코헤이 경시감.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조직이든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런 진급은 할 수 없다.

‘이래서 이번 검거에 날 참가시킬 수 있었던 거구나. 아, 이건 좀 부럽네.’

위로 향해야 하는 종혁으로선 많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일일 뿐이었다.

"힘드시겠네요. 아버님의 눈높이에 맞추려면."

한국으로 치면 치안정감이 경시감이다.

자식이 뭘 해도 눈에 차지 않을 거다.

무로이 코헤이는 눈을 빛냈다.

여태껏 정체가 밝혀졌을 때 이렇게 반응한 사람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할 뿐입니다."

"뭐, 고생하십시오. 힘드시겠지만."

"하하. ……예, 감사합니다."

탁! 탁!

두 개의 술잔을 내려놓는 장년인이 웃는다.

"두 분의 모습을 보니 그 친구와 어울리게 됐을 때가 떠오르는군요. 저도 켄타도 그땐 젊었죠. 이 아메리칸 뷰티처럼 두 분도 다른 나라, 다른 멋의 서로에게 반하면 좋겠습니다."

‘이야. 말 잘하시네.’ 이게 진짜 바인가 싶었다.

"뭐, 이렇게 말해 주시니 건배하시죠."

무로이 코헤이는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미래 최고위 간부가 확정이지만, 그보다는 좋은 사람.

종혁은 회귀하며 놓았던 옛 인연의 끈을 다시 잇기로 했다.

"……그러죠."

챙!

술잔이 부딪치며 인연의 끈이 이어졌다.

장년인은 증인으로서 그 모습을 흡족히 보았다.

"멋진 광경입니다."

종혁은 왠지 쑥스러워 말을 돌렸다.

"그런데 무로이 경시감께서도 젊었을 적엔 꽤 힘드셨나 봅니다. 이런 곳에도 들르시고."

장년인의 눈이 순간 아련해진다.

"아니요. 절 잡으러 왔었습니다."

"……예?"

"혹시 쿠로사기라는 단어를 아십니까?"

"쿠로사기? 흑로? ……아, 그거 일본 사기꾼을 총칭하는 단어 아닙니까?"

무로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일본은 이 쿠로사기들 때문에 병들고 있는 중이었다.

‘어, 설마……?’

장년인은 씁쓸히 웃었다.

"예. 전 범죄자였습니다. 그것도 쿠로사기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고 때론 설계도 해 주는 브로커였습니다."

설계자. 브로커.

종혁에겐 낯설지 않은 단어다.

사기엔 언제나 설계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딸아이가 소학교에 진학한 후 묻더군요. 아빠 직업이 뭐냐고."

소학교.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다.

뒷이야기가 짐작이 간 종혁은 가슴이 무거워졌다.

사람들 눈에서 피눈물을 뽑았지만, 지금은 회개하고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게 아니라면 무로이 경시감이 아직까지 인연을 이어 올 리 없다. 지금만큼은 그 아픔에 공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벌을 받았다 생각하시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눈가를 훔친 장년인이 옅게 웃었다.

"좋은 광경을 목격도 했으니 이제 제 선물을 드릴 차례군요."

"예? 아뇨. 이 술로도 충분합니다."

종혁은 절대 그러지 말라며 손을 저었지만, 장년인은 바 아래서 두꺼운 종이 뭉치를 꺼냈다.

"80년대부터 현재까지 쿠로사기의 수법을 담은 설계도면입니다. 보아하니 한국은 일본보다 좀 느리더군요."

"……예?!"

눈이 동그래진 종혁은 장년인이 내미는 종이 뭉치를 다급히 받아 들었다.

장년인의 말이 정말이라면, 이건 거의 성경, 예언서, 지침서다.

사기총론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하지만 종혁은 이내 곧 작게 실망했다.

‘아, 다 아는 거네.’

미래에 유행하는 피싱 사기는 있지도 않다.

‘뭐 그래도 주신 거니까…….’

종혁은 이 내용을 알지만, 일선 형사들은 모른다.

잘만 쓰면 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아직 장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서 배우러 오는 이들도 있다더군요."

종혁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한국에서 말입니까? 한국인이?"

"예, 한국인이. 그렇게 들었습니다."

"호오."

순간 종혁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그거 좀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배운 놈이 누군지까지."

종혁의 미소가 살벌해졌다.

감사 인사를 받으러 왔다가 생각지도 못한 소득을 올리게 됐다.

*  *  *

생각지도 못한 소득은 하나 더 있었다.

한 달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귀국 길의 공항.

"다음에 또 보자."

그날의 일로 친해진 무로이 코헤이가 악수를 청해 온다.

그의 뒤로 경시청 간부나 경찰대 간부후보들도 있다.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는 종혁 일행을 배웅하기 위해서다.

"그땐 일이 아니라 사적으로 봅시다, 쿄 형."

"하핫. 그래, 사적으로."

"몸조심 잘하고. 괜히 칼 든 범인에게 맨몸뚱이로 덤비지 말고."

"너도 총 든 범인에게 달려들지 말고."

"한국엔 총 거의 없어."

"그건 좀 부럽군."

서로의 어깨를 토닥인 둘은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언젠가 서로 다시 만날 걸 알기에 그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렇게 공항 안으로 들어가니 어떤 인물들로 인해 굉장히 시끄러웠다.

"아, 씨바. 놔라."

"어이, 형사 양반. 이것 좀 풀어 봐. 오줌 마려워."

수갑을 찬 채 껄렁거리는 백여 명의 범죄자들.

일본으로 도망친 흉악범들.

일본 경찰이 준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다.

‘거참, 많기도 하다. 얼씨구? 저놈 망치잖아?’

부산 전국구 조직의 간부급 조직원도 있다.

"아, 씨발! 안 놔?! 놔 봐, 좀! 이러다 싼다고!"

"아, 안 돼! 가만히 있어!"

"야 이 개새끼야! 이러다 싸면 니가 책임질 거야?!"

20대 후반의 형사가 큰 덩치를 지닌 범죄자에게 쩔쩔맨다.

종혁은 그의 뒤통수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빠아악!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무너지는 덩치.

박 터지는 소리에 소란이 잠시 잦아들었다.

종혁은 범죄자들을 찢어 버릴 듯 훑어봤다.

"아가리 싸물어. 확 다 찢어 버리기 전에."

범죄자들은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씨벌 놈들이 어디서. 쯧."

젊은 형사가 종혁을 멍하니 보았다.

"괜찮냐, 종혁아! 손 안 다쳤어?"

김종두 과장이 호들갑을 떨며 다가온다.

그의 입가가 함지박만 하게 찢어져 있다.

오늘 일, 단순한 범죄자 인도가 아니다.

한국 경찰이 직접 잡게 해 줬다.

한국 경찰의 위신이 제대로 서는 날이었다.

그리고 이걸 종혁이 해 줬다.

"어디 봐 봐. 어…… 괜찮네?"

빨갛게 변색된 곳도 없다.

"겨우 이런 걸 가지고 뭘요. 괜찮아요."

"그래, 인마. 너 같은 보물은 함부로 범죄자 때리고, 어? 그러다 다치면 안 돼. 알았찌?"

"아하하."

"아주 물고 빨고 지랄 났다. 왜? 포대기 채워서 업고 다니지?"

"그럴까? 종혁아, 업힐래?"

김종두 과장과 비슷한 연배의 형사 두 명이 다가온다.

"광수대 대장 손원호다."

"마약반 과장 신창호다."

종혁은 다급히 거수경례를 했다.

본청 광역수사대와 마약반.

본청에서 끗발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메이저 수사과.

이번 일에 특수범죄수사대뿐만 아니라 광역수사대 마약반 전원이 차출됐다.

"충성. 경찰 간부후보생도 최종혁."

"에이. 뭔 인사야. 편히 해, 편히."

"그래. 그냥 삼촌이라고 생각하고 편히 해."

둘이 푸근히 웃으며 종혁의 위아래를 훑는다.

그들의 머릿속에 종혁이 저지른 일, 아니, 해결한 사건들이 떠올랐다.

"임용 후에 일할 곳 선택했니?"

"혹시 현장에서 뛰는 거 좋아해? 우리 광수대 어때? 전국을 쫙 누비면서 연쇄살인 같은 초강력 사건 해결하고, 어?"

김종두 과장이 펄쩍 뛰었다.

"눈독 들이지 마, 이 자식들아! 종혁이는 내가 찜했어!"

"에이. 그건 네가 찍은 거지, 우리 종혁이가 선택한 건 아니잖아. 그치?"

"그러엄. 종혁아. 혹시 나이트클럽 좋아하니? 마약이 그런데 나돌거든? 가서 쿵쾅쿵쾅 소리에 춤추다가 어?"

"우, 우리?! 야, 광수대! 넌 니 새끼나 신경 써! 방금 전 못 봤어?! 저런 물 풍선 덩어리 따위에게 쩔쩔매기나 하고! 이야, 잘한다, 광수대! 아주 경찰의 모범이야! 마약반 너도 씨!"

광수대 대장이 젊은 형사를 죽일 듯 노려보고, 식겁한 젊은 형사는 종혁을 째려봤다.

종혁은 선배의 눈빛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20대에 본청 광수대 대원이면 경찰대학교 졸업생이 분명했다.

종혁은 임성원 교수와 3, 4학년 선배들에게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곧 포기해 버렸다.

임성원 교수는 마냥 흐뭇이 웃고 있었고, 선배들은 부럽다는 듯 쳐다볼 뿐이었다.

"내 보물이라고!"

"어허. 우리 종혁이가 선택할 일이라니까. 너 이거 협박이야."

"종혁아, 마약반 좋다."

"우리라고 하지 마, 짜샤-!"

‘하. 좋은 주먹 두고 왜 말로 싸우는지.’ 종혁은 지연되는 출국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