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83화>
25. 싫은데?
"흐랏챠! 흐앗!"
대머리 최경석이 바벨을 부숴 버릴 듯 격하게 움직인다.
"개새끼! 씨발 새끼!"
하마터면 업장을 다른 간부에게 내줄 뻔했다.
그것도 경찰이 되지 못한 애송이 한 놈 때문에.
합의를 하며 무마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때만 생각만 하면 열이 솟는다.
‘한 번만 봐주는 거다. 이제 사고 치면…… 알지?’
"씨발!"
터어엉!
바벨을 던지듯 내려놓은 그는 크게 외쳤다.
"김 양-! 음료수 가져와!"
"네, 네!"
탱크톱을 입은 여성이 말총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왔다.
"여, 여기 있어요!"
신경질적으로 음료를 들이켜던 전무는 김 양의 엉덩이를 힐끔 보았다. 달라붙는 운동복 때문인지 엉덩이 라인이 여실히 드러난다. 최 전무는 그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펄떡!
"고마워. 역시 나 챙겨 주는 건 김 양밖에 없다. 오빠가 명품 백 하나 사 줄까?"
오들오들.
"아, 아뇨. 그, 그럼 전 이만."
최 전무는 도망치듯 떠나는 김 양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 고년. 언제 날 잡아서 공사 들어가야 하는데."
하지만 조직과 동업한 회장님의 지인이 데려온 여자다.
건드렸다간 큰일 난다.
거기다 얼마 전부터 공을 들이고 있는 박 양이 삐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쓰벌, 이놈의 습관!’
그에 짜증이 난 그는 괜스레 애먼 화를 냈다.
"야! 왜 그것밖에 못 들어! 여기 놀러 왔어?!"
"죄, 죄송합니다.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이 안 된다면, 어?!"
주위를 힐끗 본 그는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퍽퍽!
최 전무의 주먹이 풍선처럼 부푼 남성 트레이너의 가슴을 때렸다.
"약물을 더 쓰라고. 팍팍 들어야 손님들도 반해서 PT를 할 거잖아."
이전에는 생각도 못 한 돈벌이 PT.
이게 꽤 짭짤했다.
"월급 받기 싫어? 대회 나가기 싫어? 어?"
헬스장 관장의 추천이 있어야 나갈 수 있는 머슬 대회.
그게 이들의 목줄 중 하나이다.
"죄, 죄송합니다."
"잘하자."
남자 트레이너의 목을 토닥인 그는 센터 옥상으로 향했다.
치이익!
"후우. ……하, 이 씨발 새끼를 어떻게 공사하지?"
하마터면 좌천당하게 만들 뻔했던 놈.
알아보니 유도 영웅이라고 했다.
거기다 경찰 간부후보생.
이쪽도 건드렸다가는 골치 아파진다.
완전히 담가 버리면 모를까.
"카악, 퉤!"
가래를 뱉으며 고개를 든 그는 맞은편 건물을 보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5층짜리지만 옆으로 넓었던 건물. 한 달 전부터 무슨 공사를 하던 건물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문구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저건 또 뭐야?"
신개념! 종합 피트니스 센터. 모든 운동을 한자리에서!
태릉 피트니스! 곧 OPEN!
"씨발?"
그는 다급해졌다.
* * *
늦은 저녁, 지친 몸을 이끌고 지하철역을 나서는 회사원 김나정의 손에 따끈한 풀빵 한 봉지가 들려 있다.
다른 손엔 치킨과 캔 맥주가 든 봉지가 들려 있다.
"……결국 사 버렸어."
다이어트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결국 열어 버린 지갑.
그녀는 튜브처럼 배를 두른 뱃살을 만지며 오늘도 절망했다.
"안녕하세요!"
그녀는 헛숨을 삼켰다.
민소매 밖으로 마치 야생마의 그것 같은 촘촘한 근육을 지닌 남자가 활짝 웃고 있다.
드넓은 어깨에서 이어지는 역삼각형의 진짜 남자 몸매.
그 때문인지 평범한 외모인데도 잘생겨 보인다.
‘이, 이런 남자가 왜? 설마 내가 취향?’
남자는 분홍빛 상상에 빠져든 그녀에게 전단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저희가 이번에 오픈했거든요!"
‘……그럼 그렇지.’ 환한 불빛에 고개를 든 그녀는 옆 건물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2층부터 벽 전체가 통유리이다.
그리고 2층의 유리 속에 러닝 머신이 가득 늘어서 있다.
뭔가 되게 예뻐 보였다.
그녀는 이 건물의 맞은편을 보았다.
몇 달 전, 세 달 정액으로 등록했다가 PT도 강요하고 너무 힘들어서 환불을 하려 했지만 협박만 받은 헬스장.
그래선지 망설임이 생긴다.
"좋은 거 많은 데 한번 둘러만 보고 가실래요?"
마치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가 드리워지자 그녀의 입이 자동적으로 열렸다.
"네."
‘……하, 나란 여자, 진짜.’
"잘 생각하셨어요! 나 잠깐 안에 다녀올게!"
"어! 빨리 와!"
거리에 진짜 남자들이 더 있다.
자괴감에 퍼덕이며 따라 들어간 그녀는 순간 자신이 호텔에 온 건가 착각했다.
커다란 샹들리에와 상앗빛 대리석의 로비.
한쪽에 ‘카페테리아(식단관리 문의 환영)’이라는 글자도 있다.
거기서부터 홀리기 시작한 그녀는 어느새 찜질방 옷 같은 운동복을 입은 채 거울 앞에 서게 되었다.
"어? 어어어?"
"괜찮아요. 저희 센터가 회원제로 운영되기는 하는데 처음 방문하시는 방문객님들에게는 하루 운동이 공짜거든요."
김나정은 어느새 자신을 담당하는 여성을 멍하니 봤다.
방금 전 남성과는 다르지만, 탄탄한 팔뚝, 매끈하게 쫙 빠진 다리와 우뚝 솟은 엉덩이, 11자 복근,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아기 피부가 김나정의 눈을 어지럽힌다.
"와."
"자, 그러면 오늘 하루 지친 몸을 풀어 볼까요?"
"네? 아, 네."
그게 시작이었다.
스트레칭으로 꽉 뭉친 어깨와 허리 근육을 푼 김나정은 3층의 스쿼시, 4층의 요가, 지하 3층의 수영장, 5층의 사우나 시설에 있는 경락 마사지까지 모두 이용하게 되었다.
"와. 와아."
"어머. 제가 너무 잡고 있었네요. 조심히 들어가시고 혹여 운동할 생각이 드신다면 저희 태릉 피트니스를 떠올려 주세요."
"네? 어? 가요? 그냥 가도 돼요?"
‘정말 돈을 안 내도 된다고?’ 몇 년 전 서울 입성 전, 친척 결혼식 때문에 묵게 된 5성 호텔에서도 받지 못한 서비스다.
그리고 무려 2시간을 운동하며 땀을 쭉 뺐는데도 아픈 곳이 없다. 그녀가 다이어트 노래를 부르면서도 운동을 하지 않은 이유가 뭐였던가. 헬스장을 그만둔 이유가 뭐였던가.
모두 힘들어서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김나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이런 운동이라면?’
"그런데 모두 엄청 전문적이신 것 같던데."
"아."
여성 트레이너가 활짝 웃었다.
"저희가 모두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이거든요."
수영, 스쿼시, 요가 트레이너 모두.
스쿼시는 테니스 상비군이고, 요가는 체조 상비군이다.
"그래서 저희 센터 이름이 태릉이에요."
"네에?! 사, 상비군이요? 그, 그럼 언니도?"
"네. 유도 48킬로그램 선수였어요."
"그렇게 안 보여요!"
유도 하면 우락부락한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그런데 눈앞의 트레이너는 마치 패션잡지 속 모델 같다.
"후후. 저도 제 몸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네?"
"어떤 친구가 도와줘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 어떤 친구는 종혁이다.
종혁이 수석 코치를 맡으며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도입하자 선수들의 기량이 20퍼센트 이상씩 늘었는데, 그로 인해 진짜 천재와 비천재의 간극이 커져 버렸다.
몇 년 동안 후보조차 등록을 못 한 상비군들은 재능의 한계를 깨닫고 유도를 포기하려 했는데, 이때 종혁이 많은 도움을 줬다.
이번 취직도.
"자기한테 배운 것만 활용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다. 지도자 코스를 밟아도 되고, 스포츠 메디컬을 공부해도 좋고, 유도 학원이나 헬스장을 차려도 된다. 그런데 헬스장을 차리려면 보여지는 게 중요하다. 그 말에 헬스장을 차리고 싶어 했던 몇몇 선수들이 그 친구에게 근육 커팅을 해 줬는데……."
"해, 해 줬는데?"
"너무 예쁜 거 있죠? 그래서 저도 막 졸랐어요!"
여자에다 48kg의 애매한 체급이다.
종혁의 말처럼 헬스장을 차리거나 경찰, 혹은 경호원에 지원하는 수밖에 없다.
여타 선수들처럼.
"근데 그거 알아요? 이거 딱 1년 만에 만든 거예요!"
"마, 말도 안 돼!"
"되더라고요."
여성 트레이너는 아련히 웃었다.
"뭐시여-! 왜 안 된다는 것이여!"
갑자기 로비가 시끄러워졌다.
"회원제라고 사람 차별하는 거여, 뭐여!"
정장을 입은 덩치 큰 남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김나정은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여성 트레이너는 고개를 저었다.
"양아치 왔네."
"네?"
"아, 곧 끝날 테니 걱정 마세요."
그 말처럼 프런트에 있던 한 여성이 핸드폰을 내밀자, 누군가와 통화를 나눈 남성은 하얗게 질렸다.
"예, 예. 아닙니다요. 예, 들어가십시오."
프런트 직원이 활짝 웃었다.
"어떻게, 회원 등록하시겠어요?"
"아, 아니어라. 다음에 올게요."
간혹 이런 일이 벌어질 시 본청 특수범죄수사과에 연락을 한다. 그들에 한해서는 회원비가 공짜라서 적극 협조해 주고 있었다.
여성 트레이너는 김나정을 봤다.
"아무튼 이틀에 두 시간, 2년만 투자하시면 저처럼 되실 수 있어요."
"기, 긴데요?"
"대신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요."
김나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 진짜요? 치킨도? 족발도?"
"신체 대사량이 높아지면 삼시 세끼 치킨을 먹어도 소화돼요. 운동선수가 괜히 우악스럽게 먹겠어요?"
"와."
그녀의 눈이 스러질 듯 흔들렸다.
마냥 풀떼기만 먹으라는 맞은편 헬스장과는 완전히 다른 말.
"그, 그러면 가격이……."
"석달에 45만 원이면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어요."
"비, 비싸! 아, 아니 안 비싼가?"
보편적으로 헬스장 3달 이용료가 10만 원에서 15만 원이다.
하지만 여긴 호텔보다 더 전문적이다.
그녀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웅성웅성.
로비가 다시 소란스러워지자 고개를 든 김나정은 경악했다.
"어? 어어어?!"
"어머, 오빠들 오셨네. 웬일이야? 시윤 씨도 같이 왔잖아?"
저들 다섯 명, 국민 남자아이돌 그룹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다 같이 온 여성은 2000년 최고의 섹시 여가수이다.
2000년 최고의 핫 아이콘, 성인식의 박시윤.
"저분들 여기 회원이세요?!"
"네."
그 순간 김나정의 눈빛이 돌변했다.
"등록할게요!"
‘여긴 무조건 알려야 해!’ 종혁이 쓴 치트키가 제대로 먹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한편,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몸매 좋은 여성과 남성은 전단지의 한 문구를 뚫어지게 봤다.
트레이너 상시 모집(월 120 보장. 개별 PT 별개.)
‘내 월급의 네 배…….’
2001년 최저 시급 1,865원.
그들이 일하고 있는 피트니스에서는 인센티브를 준다는 명목으로 월급이 30만 원에 불과했다.
인센티브를 합해도 월 60만 원.
이쪽의 기본 월급이 두 배 더 많았다.
반대편에서 보낸 스파이들의 마음이 폭풍처럼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 * *
어느덧 다시 봄이 왔다.
경찰대학교 교정에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폈고, 벚꽃나무 아래에 모인 생도들은 과자와 음료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크크. 그놈 아주 똥줄이 탈 거다.
"당연하죠."
탄산음료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기분을 내는 동기들 틈을 빠져나온 종혁은 김종두 과장의 말에 비릿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세팅했다.
운동기구만 갖춘 그 센터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사장도 뒤가 구린 인물.
조폭하고 어울리면 그놈도 조폭인 거다.
-그놈 조직도.
"음? 겨우 헬스장 하나 날아가는 것뿐인데요?"
목표로 삼은 전무만 타격을 줄 뿐이지, 전무가 있는 조직에까지 타격을 준다고 볼 수 없다.
-그게…… 푸하핫!
‘뭔데?’
-알고 보니 2년 전 대검발 유흥 업소 일제 단속 때 그놈 조직의 업장들이 거의 다 날아갔더라고!
남은 건 나이트 지분 조금과 주류 납품, 유흥 업소와 성인 오락실 몇 개였다.
종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게 이렇게 이어진다고?’?
"잠깐. 업장이 그렇게 쉽게 날아간다고요?"
-종혁아, 대검이 작정하고 때렸다. 요새 빚에 팔려 오는 애들 찾기 힘들어.
즉, 여자 도우미가 없으니 장사를 거의 접었다는 뜻이다.
-강제로 데려온다? 조직 해체되는 거지. 실제로 그때 숟가락 놓은 놈들 많아.
"와."
뽑아도 뽑아도 계속 튀어나와 골머리를 썩게 만들던 잡초 놈들이 뿌리 뽑혔다.
물론 일부일 테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했다.
‘대검이 움직이니 달라도 다르구나.’
이건 좀 부러웠다.
"그럼 설마?"
-굶어 뒈질 것 같으니까 양지로 기어 나오려고 한 거지. 잘되면 프랜차이즈 하려던 걸 테고. 세상 어느 누가 조폭이 헬스장 운영한다 생각하겠어. 햐, 요새 달건이들 머리 잘 써.
그렇게 하려는데 종혁에게 딱 걸린 거다.
‘뭐 이런 우연이?’
놀란 종혁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그러면 얼마 남지 않았겠네요?"
지난 3개월 동안 손님을 거의 뺏겼다.
궁지에 몰렸다고 봐야 했다.
-양아치 근성 버리지 않았다면 곧이겠지.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건데…….
자칫 태릉 피트니스 관계자들이 크게 다칠 수 있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응? ……설마, 너?
"때가 되면 알려 드릴게요."
-허어. 이 빈틈없는 놈.
"하하하."
김종두가 크게 웃었다.
-아, 이건 상관없는 이야긴데 그 가격만 받아서 감당 가능하겠어? 시설이 너무 좋던데?
특수범죄수사과 소속 형사들과 그 가족들까지 무료로 시설을 이용하게 해 주는 것은 너무 고맙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달 이용료가 너무 싸다.
45만 원이면 분명 비싼 가격인데, 싸다.
"삼촌. 그 건물 저희 엄마 거예요."
-아.
그 말로 끝이다.
-제수씨, 진짜 수완 좋네…….
벌써 빌딩이 몇 갠지 몰랐다.
-알았다. 그럼 나중에 보자.
"옙.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종혁은 태릉 피트니스가 있는 방향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 곧 끝나겠구먼.’
"종혁아, 뭐 해! 우리가 다 먹는다!"
"어. 가!"
종혁은 동기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