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75화>
부우웅!
사내의 시체를 태운 봉고차가 멀어진다.
‘정말 그 조직이었다니.’
설마 했는데…….
이 대한민국에서 어린아이를 죽일 만큼 잔인한 놈들이 또 있나 해서 한 번 떠봤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종혁은 사내의 커다란 반지를 매만졌다.
반지 안쪽에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다.
회귀 전 봤던 문신과 똑같이 생겼다.
이로써 그 조직의 일원은 몸에 같은 문신을 새긴다는 걸 70퍼센트쯤 확신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이런 결정을 한 거다.
"빌어먹을. 형사가 시체 유기를 다 하네."
증거인멸도 안 해 봤는데, 시체 유기를 하고 말았다.
한때 경찰로서 자괴감이 들었다.
원래라면 경찰에 인계해야 됐을 일이다.
그래서 경찰이 그 조직을 쫓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사내는 잡힐 것 같자 자살을 했다.
일이 복잡해지는 걸 떠나 종혁 본인이 드러날 위험이 컸다.
폐차장에서 김 의원 사태 때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흰색 엘란트망을 발견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리고…….’
종혁은 반지 안쪽의 문양을 봤다.
‘안녕하십니까, 이 새끼들아.’
이젠 회귀 전 종혁을 죽인 그놈이 아니라, 그 조직을 쫓을 단서가 생겼다.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또각또각!
다가온 나탈리아가 종혁에게 초소형 카메라와 녹음 장치를 내밀었다.
"반경 30미터 안으로 CCTV가 없더군요. 목격자도, 감시자도."
몸에서 나온 것도 없다.
‘그렇겠지.’
회귀 전에도 사내의 모습을 잡은 CCTV는 없었다.
모두 목격자의 진술뿐이었다.
회귀 전엔 단순한 우연인 줄로만 알았는데, 철저히 계획된 범죄이다.
‘왜?’
의문이 떠오르자마자 바로 답이 도출된다.
이건 경고다.
‘상민이의 부모를 향한 경고!’
종혁은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니, 잠깐!’
자식이 처참하게 죽었다.
일반적인 부모라면, 이 내막을 알고 있다면, 반발을 했어야 맞다. 그런데 회귀 전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종혁이 조사를 했을 때도 이 ‘대전 어린이 사건’은 어떤 미친 사이코패스에 의한 살인으로만 생각했을 뿐이다.
‘자세한 내막은 그 부모를 만나 봐야 알 수 있겠군.’
이쪽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게, 아주 조심히 만나야 했다.
지금쯤 상민과 해우했을 상민의 부모를 떠올린 종혁은 나탈리아를 봤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녀는 KGB다.
러시아 해외정보국 SVR 소속인지 연방보안국 FSB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러시아 정보국 요원이다.
그런 그녀가 여기 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반년 만에 만나서 그런 재미없는 걸 물을 건가요?"
"끙. 나탈리아."
미녀가 고혹적으로 웃으니 난감했다.
"후훗. 농담이에요. 제가 이렇게 직접 온 건 우리 러시아가 그만큼 당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최."
그녀는 그러며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 2급 서기관 안젤리나 마카로프.
종혁은 화들짝 놀랐다.
‘러시아가 날 보호하기로 했다고?’
"……가시적인 결과가 나왔군요. 닷컴 버블이건 SPA건."
나탈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탐이 나.’
혼란스러워도 금세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한다.
거기다 오늘 일.
그녀는 종혁이 칼 두 자루를 든 킬러를 때려눕히는 걸 보곤 기함했고, 사정없이 팔을 부러트리려 했던 독심에 경악했다.
차분히 정당방위에 대한 법령을 읊는 냉정함과, ‘이제부터 정당방위 성립이다, 개새끼야.’라고 외치던 사나운 야성.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좋으며, 성격이 대범하다고 해도 이런 면모는 보일 수 없다.
사람을 정말 죽이려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거기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는데도 얼음처럼 냉정하다.
마치 시체를 수없이 봐 온 사람처럼.
‘까면 깔수록 새로운 게 나오네요, 최.’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나탈리아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반지에 보석처럼 박힌 독 캡슐.
정보부 요원, 스파이의 방식이다.
그것도 국가에 충성심이 짙은 요원들만이 적에게 사로잡혔을 때 행하는 자살 방법.
거기다 종혁을 향해 휘두르던 칼질도 간결하고 독했다.
"음."
‘역시 관심을 드러낼 수밖에 없나?’ 사람이 눈앞에서 자살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킬러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저도 알고 싶습니다. 그자가 누군지, 그들이 누군지."
종혁은 고개를 숙이며 이를 악물었다.
"그들?"
"아까 말한 것처럼 그자는 혼자 오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패거리가 있단 소리겠죠. 뭐, 대충 짐작 가는 게 있긴 하지만……."
나탈리아의 눈이 호기심으로 타오르자 종혁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까지다.
여기서 김 의원 일을 흘리는 건 하수나 할 짓이다.
나탈리아를 움직이려면, 그녀가 직접 알아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보다 결과를 듣고 싶은데요."
너무하다며 눈을 흘긴 그녀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제가 온 걸로 대답이 되지 않았나요? ……그래도 명확한 게 좋겠죠. 앞으로의 관계를 지속하려면."
그녀는 품에서 꺼낸 수첩에 숫자와 글자를 적어 내밀었다.
투자 전 시뮬레이션 결과 값까지.
"……호오."
SPA 예상 매출이 놀랍다.
솔직히 종혁이 상상한 그 이상이다.
‘빅토르가 잘하고 있나 본데?’
연락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치솟는다.
하지만 그보다 놀라운 건 닷컴 버블의 피해 규모이다.
‘내가 말한 그대로다?’
말이 안 된다. 국가 단위의 지성체들이 움직였을 게 분명한데도 숫자의 변동이 없다.
나탈리아를 본 종혁은 깨달았다.
그녀의 입가에 맺힌 의뭉스러운 미소.
‘……속아 주는 거군.’
당장의 이득보다 종혁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 거다.
한 사람을 믿고 수백조 원의 돈을 포기한 거다.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줄 것을 소망하며.
"거참. 내가 뭐라고."
그 생각과 배려가 가슴을 파고든다.
방금 전 일로 뒤숭숭해진 마음이 진정된다.
종혁은 숫자 몇 개에 줄을 그은 뒤 그 밑에 다른 숫자를 적었다.
허리 뒤로 돌린 그녀의 주먹이 꾹 쥐였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경악했다.
‘이 정도라고?!’
러시아 지성체 집단이 낸 결론보다 30퍼센트는 더 많은 액수.
종혁은 메모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걸 바탕으로 얼마를 벌건 상관없지만, 그보단 미국이란 나라에 빚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꾹!
그녀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영원한 라이벌, 미국.
적당히 이득을 취한 후 ‘우리가 봐준 거 알지?’라고 종혁이 보여 준 숫자를 내민다?
짜릿한 전율이 그녀의 혈관 전체를 타고 흘렀다.
종혁은 들뜬 그녀의 얼굴을 보며 침을 삼켰다.
‘엄마가 이해해 주려나?’
스물 몇 살 차이. 이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가 싶었다.
‘아, 엄마.’
종혁의 눈빛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경찰이든 검사든 되기 전에 경호원을 구하려고 했는데 잘됐군.’
신중하게 고르고 고르려고 했다.
권&박 홀딩스를 지키는 보안 업체에 대해서도 은밀히 조사하고, 회귀 전의 기억도 뒤지며 적합자를 고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게 어머니 고정숙의 안전이었으니까.
이번에도 회귀 전처럼 종혁 본인의 일에 휘말려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그런 후에 마음 놓고 뒤를 쫓으려 했는데, 벌써 그 조직과 두 번이나 얽혔다.
더 이상 지체한다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목격자와 CCTV가 없다지만, 혹시 몰라.’
정체가 드러났을 경우도 대비해야 된다.
그런데 마침 그런 쪽으로 빠삭한 여자가 눈앞에 있다.
그것도 뭐든 퍼 주려는 얼굴을 한 채.
‘KGB.’
"정말 당신은! 지금도 바라는 게 없나요, 최?"
"있습니다."
나탈리아는 활짝 웃었다.
"뭔가요? 전에 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답니다!"
"경호원. 은밀히 어머니를 밀착 경호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위험에서도 어머니를 지켜 줄 사람이. 한국어가 능통한 고려계로."
종혁은 나탈리아와 함께 나타난 고려계 요원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나탈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우글우글!
"D 프로젝트 건 어떻게 됐어?!"
"지금 갑니다!"
와이셔츠를 입은 십여 명의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공간.
누가 봐도 작은 회사의 사무실 풍경이다.
그런데 한 구석의 개인 사무실의 분위기는 달랐다.
컴퓨터 앞에 앉은 사십대 중년인이 책상을 검지로 두드린다.
"박 대리가 늦는군."
이곳 대전 지부 내에서도 일 처리가 수준급인 박 대리.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게 단점이지만, 이번 일은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그냥 맡겼다. 그런데 작전 종료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 온다.
"흠."
띠리링! 띠리링!
내선 전화다.
"어. 무슨 일이야."
-김 사장 아들이 방금 전 집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쯧."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작전이 실패했다.
머릿속이 엉클어졌지만, 중년인은 입을 열었다.
"박 대리한테 연락해 봐."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답이 들려왔다.
-받지 않습니다.
"모두 다?"
출장을 나간 직원은 일이 어그러질 때를 대비해 현장 주변과 퇴로에 연락 방법을 숨겨 두는 게 원칙이다.
회사에서도 복귀 시간이 지나면 그쪽으로만 연락한다.
-예.
불길함이 커진다.
"……경찰 쪽에 알아봐."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후 다시 내선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 쪽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검찰도 마찬가집니다.
"시체도?"
중년인은 혹시나 하며 물었다.
-신원 미상의 시체가 접수된 적도 없답니다.
중년인의 표정이 더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박 대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건데…….’
하지만 살아 있는데도 이 시간까지 연락을 안 할 리가 없다.
그분을 향한 충성심이 깊은 박 대리기에 더욱 말이 안 된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현장에 지원부 파견할까요?
"어, 당연……."
흠칫!
말을 하려던 중년인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그의 촉이 맹렬하게 울리고 있다.
‘이거 누가 개입한 거 아냐?’
누군가 박 대리가 김 사장의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을 목격했고, 그것도 모자라 박 대리를 제압했다.
현재 추론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 가장 높은 수다.
‘……설마 죽은 건가? 아니, 죽었을 확률이 높다!’
애초부터 이 작전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어떤 미친놈이 어린아이를 타깃 삼아 처참하게 죽인 사건으로 설계되어 있다.
만에 하나 일이 어긋나 제압되고 경찰에 넘겨져도 박 대리는 본인이 한 일이라고 딱 잡아뗄 터였다.
하지만 경찰에 잡힌 게 아니다.
그랬다면 벌써 연락이 와야 한다.
즉, 박 대리는 경찰이 아닌 누군가 때문에 조직이 들통날 것 같아서 죽음을 택했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구금되어 있든지.
‘설마 안기부?’
"음."
여태껏 조직이 드러난 적이 없기에 망설임이 생긴다.
하지만 안기부, 아니, 국정원 정도가 아니면 박 대리가 이렇게까지 연락을 안 할 리가 없다.
잡혔든지 죽었든지.
둘 중 하나다.
‘어디서 어떻게’란 의문은 나중으로 미뤄 뒀다.
‘만약 정말로 안기부에서 우리 조직의 냄새를 맡은 거라면…….’
중년인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현장을 감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선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다.
-김 사장 집에 영업 사원 보낼까요?
"아니!"
‘이 미친놈이! 김 사장 집도 감시하고 있을 게 뻔한데, 뭐?’ 속으로 욕을 뱉으며 일어난 중년인은 다급히 외투를 걸쳤다.
"지금부터 대전 지부를 폐쇄한다."
‘박 대리의 충성심을 믿지만…….’ 이게 답이다.
‘쯧. 김 사장을 잡아야 했는데.’
조직의 돈을 가지고 잠적한 김 사장.
찾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쓴 거다.
‘운이 좋군.’
얼마 전 인천 지부가 작업한 일처럼 조직의 돈을 훔치고도 살아 있는 놈은 한 명도 없는데, 예외가 생겼다.
‘쯧. 인천 지부가 일 처리를 요란하게만 안 했어도.’
그랬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김 사장의 일가족 모두를 죽여 끌어냈을 거다.
하지만 두 일이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그렇게 했다간 경찰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자식만 죽이려는 선에서 그친 거다.
"한 시간 주겠어."
-……예!
"김 사장 집 감시조 복귀시키고, 검경에 디지털 포렌식이라는 복구 프로그램이 생겼다고 하니까 본체도 챙겨. 그리고……."
중년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이번 작전을 방해한 게 정말 안기부라면, 작전 내용이 새어 나간 거다.’
즉, 대전 지부에 배신자가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 않다면 방해받을 리가 없었다.
설계부터 실행까지 대전 지부에서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결과만 보고받으면 되는 상부가 이번 작전의 개요를 알 리가 없다.
지금 보고를 하는 직원도 의심스러웠다.
"지부 인원 전부 강원도 수련원으로 간다."
-예!
바깥에서 울리던 전화벨 소리가 멎으며 모두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책상 아래 금고에서 문서들을 꺼내고, 책상 위 노트북도 챙긴 그는 혀를 찼다.
"얼마 전 서울에서도 들킬 뻔했다고 했지."
몇 달 전, 조직 내에서도 일 처리가 최상위권인 이가 작업을 할 때 썼던 차량이 발견되어 사건이 대검으로 넘어갔다. 지문이나 DNA가 발견되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꽤 골치 아플 뻔했다.
당시 그 직원은 하마터면 퇴사를 당할 뻔했고, 지방에서 일하는 조직원들을 은근히 무시하던 놈이라 중년인은 직접 전화해 꼴좋다며 비웃어 주었다.
‘발견자가 일반인이라서 더 크게 비웃어 줬지.’
"유도 국가대표랬던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탈옥수 한상원을 제보한 청년이라 서울지방검찰청에 인턴으로 발탁됐는데, 김 의원이란 자에게로 향하는 장부는 직접 발견했고, 차량이 발견된 장소에도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서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그렇게 된 거라고 결론 냈지만, 그래도 놀릴 거리라 힘차게 놀려 주었다.
그런데 그 꼴을 본인이 당하게 생겼다.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차라리 낫다.
"제발 안기부가 아니길 바라야겠군."
그래야 퇴사를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