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9화>
21. 집착
어느덧 5월, 완연한 봄이 되었다.
이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데 얇은 점퍼면 충분했고, 밀레니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마음껏 패션을 뽐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가루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정말 앙골모아 대왕이 내려와 세상을 멸망시키려나."
"넌 그런 오컬트적인 걸 믿냐? 차라리 운석이 떨어진다는 게 더 현실성 있겠다."
"튈까?"
"어디로?"
"……우주?"
"야, 뭘 걱정해. 미국에서 다 알아서 해 줄 텐데. 영화 아마겟돈 못 봤어?"
"맞아. 브루스 윌리스가 있었지?"
시시덕거리며 거리를 걷는, 귀걸이를 한 이십대 청년들.
"진짜 요새 밀레니엄 버그 때문에 미치겠다니까?"
"아, 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 엄청난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그거?"
"응! 그것 때문에 박 부장이 컴퓨터 시간 1998년으로 해 놓으라고 지랄이잖아! 그러다 문서 정리 순서 바뀌면? 자기가 책임질 거야?"
한 손에 커피를 든 채 투덜투덜거리며 걷는 여사원들.
이치로 교수는 그 활기찬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걸었다.
건너편 빌딩 옥상의 전광판 ‘21세기 앞으로 ○○○일’이라는 글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재밌는 나라야, 한국은."
밀레니엄 괴담이 판을 치고 있지만, 이치로 교수가 판단하기에 한국인들은 괴담에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즐기는 것 같다.
정말 무서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치 하나의 축제처럼 그날만을 기다리며 기대하고 있다.
-미안해. 그런 표정은 짓는 게 아니었는데.
리어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어설픈 한국어.
이게 바로 그 증거다.
"Y2K 밀레니엄."
지금 흘러나오는 곡을 부르는 밴드 이름이 Y2K 밀레니엄이다.
한일 합작 밴드이다. 노래가 꽤 좋아서 이치로 교수도 리어카에서 테이프를 구매했다.
"그런데……."
이제 며칠 후면 이 즐거운 나라에서도 떠나야 한다.
술 마시고 노는 것에도 진심인 이 나라를.
고작 두 달이지만 정이 들었는지 마음이 좀 울적해진 이치로 교수는 종혁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아차했다.
오늘,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으로 갔다는 게 떠올랐다.
그는 CD 플레이어에 달린 이어폰을 꼈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요새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 보이그룹의 목소리에 그는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육아일기 할 시간이군."
시꺼먼 남자 다섯의 좌충우돌 육아일기.
요새 그가 한창 애청하는 프로그램이다.
검찰에서도 이게 아니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는 맥주가 든 봉지를 흔들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숙소인 아파트에 도착한 이치로 교수는 잠시 멈칫했다. 까만 양복을 입은 한 사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누굴 기다리는 사람이겠지 하고 스쳐 지나가던 그는 다시 멈췄다.
이번엔 타의에 의해서다.
"야마노구치 이치로 교수님?"
"……누구신지?"
까만 양복을 입은 사람이 사람 좋게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서 나왔습니다. 귀하가 개발한 복구 프로그램, 디지털 포렌식에 관해 이야기할 게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국가정보원?"
이치로 교수의 눈이 부릅뜨였다.
"권&박 홀딩스에는 따로 사람이 갔으니 안심하시길."
* * *
종혁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일그러져 있다.
"국정원 이놈들 이때도 엉덩이가 무거웠네."
평소처럼 금메달을 따고 돌아오던 길에 이치로 교수에게 연락이 왔다. 국정원에서 디지털 포렌식을 정식으로 구입하고 싶다며 접촉해 왔다는 연락이었다.
경악스러운 말이었지만, 회귀 전에도 있었던 일이기에 종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국가를 상대로 공작을 펼치고 기밀을 다루는 게 국정원이다.
티끌만큼이라도 나은 기술이 있다면 무조건 확보해야 하는 게 그들의 일이다.
그럼에도 디지털 포렌식이 경찰과 검찰에 팔린 순간 접촉하지 않은 건, 현장에서 얼마나 효용성이 있는지 검토한 것일 터였다.
즉 이제야 충분히 쓸 만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원활한 업그레이드를 위해 교수님에게 접촉한 것이겠지. 어쩌면 교수님을 귀화시키려고 할 수도 있고.’
말 몇 마디로 개발자가 대우받는 느낌을 받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면 충분히 이득이었다.
국정원이 이런 건 좀 잘했다.
경찰이나 검찰도 꿀리진 않지만.
"그렇다면 이치로 교수님은 이제부터 국정원의 관리를 받겠군."
그 기한은 더 나은 버전의 디지털 포렌식이 개발되지 않을 때까지.
여기서 다행인 점은 종혁 본인이 드러나지 않은 점이다.
이러려고 권&박 홀딩스 이름으로 계약한 것이지만 말이다.
종혁은 앞으로 이치로와의 연락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얽히면 골치 아파지지."
국정원과 얽혀서 좋게 끝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특히 그 북한 장교 때.’
"혀억-!"
와락!
쌀가마 한 개 반이 등을 덮치자 종혁은 목을 감싸는 팔을 끌어안으며 허리를 비틀었다.
"What-?"
풀썩!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은 이리나가 종혁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사람 함부로 덮치는 거 아니다."
"와우……."
종혁은 넋이 나간 이리나의 손을 잡아 끌어올렸다.
하교하던 학생들은 그런 둘을 멍하니 보았다.
"빠, 빨간색! 큽!"
"티, 티 팬…… 크학!"
"응?"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남학생들.
의아해하던 이리나가 씩 웃으며 치맛자락을 잡았다.
"이거?"
"흐억!"
여학생들도 꺅 얼굴을 가렸다.
이리나는 귀엽다며 깔깔깔 웃었다.
"얘, 얘가 미쳤어-!"
후다닥 달려온 소영이 이리나의 손을 치며 타박했다.
"왜? 보여 준다고 안 닳아."
"닳아-!"
"오우, 리틀 마미. 넌 우리 동부 애들보다 얌생이야. 그러다 처녀 귀신 된다?"
"시끄러워-!"
종혁은 오늘도 여전한 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수호는 뒤에서 단어장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예, 최종혁입니다."
-요, 브로! 잘 지냈어?
"오우. 요새 가장 잘나가는 가수님이 웬일이셔?"
토요일 오후, 음악 방송이다, 행사다 하며 평일보다 바빠야 했다.
-응! 우리 쌀 떨어졌어!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싸장님이 우리보고 굶으래! 먹어도 너무 먹는대! 배고파!
"호영이 형 바꿔 봐요, 형."
이들 다섯 중 그나마 이성적인 게 요새 미소 천사라 불리는 호영이다.
-응, 종혁아.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이 밥 안 줘요? 그럴 분이 아니실 텐데?"
-아하하. 그게. ……억이래.
"네?"
-1억이래. 데뷔하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먹은 게…….
종혁은 잠시 귀를 후볐다.
"요새 새벽까지 공부한다고 귀가 맛이 갔나."
낙법을 너무 많이 했나 싶기도 했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그러니까 데뷔한 지 두 달도 안 돼서 1억? 먹는 걸로만?"
-카드랑 다 압수됐어. 외상도 못 하게 하셔. 세민이 올 때나 겨우 먹을 정도야.
세민이는 요즘 이들이 촬영 중인 육아일기의 아기 주인공이다.
"형들이 사람이야?"
-아하하. 그래서 그러는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머님 식당 좀 이용할 수 있을까? 저녁에 배가 너무 고파…….
참 뻔뻔한 말이다.
"에라이."
이게 소는 키워도 너는 못 키우겠다의 예시인가 싶었다.
‘미래에 먹방 하는 애들보다 더 먹는 것 같은데.’
아니, 유도 선수보다 더 먹는다.
"하, 알았어요. 저녁 9시까지 하니까 아무 때나 와요."
-고마워! 사랑해!
전화를 끊은 종혁은 어느새 다가와 ‘쭌이 형이야? 호영 오빠야?’ 하며 눈을 빛내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그들은 입을 떡 벌렸다.
"혁. 이거 탈세하는 게 분명해."
"그럴 사람들은 아니야."
"그럼 유전자 결합 슈퍼 솔져? 초능력자?"
"그런 사람들이 가수 할 리는 없지."
"Holly Jesus."
종혁도 놀라웠다.
고개를 저은 종혁은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저녁을 같이 먹고, 다 함께 중간고사 공부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즐거운 토요일, 오후에 끝났음에도 공부를 해야 되는 고3.
좀 슬펐다.
"종혁아, 영어 다음에 뭘 익히는 게 좋을까?"
소영이 떠듬거리며 영어로 말했다.
그들 넷은 발음 교정과 회화 실력을 높이기 위해 가끔씩 이렇게 영어로 대화했다.
"일본어 아님 중국어."
둘 다 싫은 나라지만, 훗날을 위해서라면 익히는 게 좋다.
"만약 미국 쪽을 생각한다면 스페인어도 나쁘지 않지. 그치?"
"응. 미국에선 스페인어만 해도 웬만큼 말이 통해. 이민자가 많거든. 딱히 미국에 오는 건 추천하지 않지만."
"왜? 아메리칸 드림 아냐?"
"인종차별이 심해서 그래. 특히 동양인 차별이.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만큼 못 배운 놈들도 많아. 시카고에선 뱅! 총 맞을 수도 있다?"
"마, 말도 안 돼!"
종혁은 겁을 주는 이리나를 무시하며 계단을 오르다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계단에 처음 보는 화분이 있는 것도 모자라 캠코더가 숨겨져 있다.
"뭐야, 이건?"
"왜? 어? 카메라다. 누가 잊어버리고 간 건가?"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지."
종혁의 목소리가 절로 낮아졌다.
캠코더를 이렇게 숨겨 둔다는 건 결코 좋은 의도로 볼 수 없다.
지문이 묻지 않게 조심히 든 종혁은 어머니 식당 문을 밀었다.
딸랑!
"엄마, 요새 무슨 일…… 응?"
"어머니! 저희 왔…… 엑?"
뒤따라 들어오던 세 친구도 깜짝 놀라 다리가 굳었다.
커다란 카메라와 조명, 낚싯대같이 긴 털북숭이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삼십여 명의 사람들.
방송국 촬영이다.
그 중앙에 방금 전 통화한 형들이 아기를 안고 있었다.
"브로! 이제 퇴근해? 우리 왔어!"
이쪽으로 향하는 카메라.
‘……이 화상들이!’
갑자기 목이 뻣뻣해졌다.
* * *
캠코더는 제작진이 종혁이 올라오는 모습을 찍기 위해 숨겨 둔 것이었다. 유도 국가대표 금메달리스트와 공부로서도 상위 0.1퍼센트인 엘리트의 평소 모습을 날것 그대로 찍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모습이 찍혔다.
"허, 공부 잘하는 애들은 평소에 영어로 대화하네."
"이거 방송 타면 전국의 학생들이 괴로워지겠는데요?"
"부모들 때문에?"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PD는 피식 웃으며 아기 세민이와 눈싸움을 하는 종혁을 봤다.
‘그냥 올라오기만 해도 충분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니 참 고마웠다.
그는 종혁의 말에 집중했다.
"햐, 고놈 잘생겼다. 너 커서 여자 울리면 안 된다."
종혁은 세민이의 얼굴을 쓸어내렸고, 세민이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듯 그 손길에 얼굴을 맡기며 배시시 웃었다.
제작진까지 뒤집어졌다.
"헉!"
"어머어머!"
"얼씨구? 이 자식 예쁨 받을 줄 아네?"
종혁도 좀 놀랐다.
하지만 웃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우였다.
"마, 말도 안 돼! 세민아! 왜 처음 본 사람에게 웃어 주는 거야! 너 그런 남자 아니잖아-!"
이 멤버 중 세민과 친해지기까지 가장 오래 걸린 멤버가 재우다. 아니, 아직까지도 친해졌다고 볼 수가 없다.
"그거야 네가 무섭게 생겨서 그런 거고."
"지는!"
"소리치지 마. 애 놀라. 그리고 형이라 부르라고 했지? 이걸 확 씨."
재우가 다급히 입을 막자 종혁은 아예 호영의 품에서 세민을 데려와 무릎에 앉혔다. 수호, 소영, 이리나의 눈이 ‘나도 안고 싶다’ 하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올려 종혁을 빤히 본 세민은 머리를 종혁의 배에 기대며 편한 자세를 잡았다.
준형 멤버들은 아예 뒤집어졌다.
"호. 애가 낯을 안 가리네. 너 크게 되겠다, 야."
"후후. 세민이가 좋은 사람을 알아보나 보다. 원래 낯을 엄청 가리거든."
"아, 호영이 형."
"말도 안 하고 와서 미안해. 많이 놀랐지?"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요. 엄마도 좋아하시니 됐습니다."
주방에서 고개를 내민 고정숙이 세민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얼른 재혼해서 동생 낳아 달라고 해야 되려나."
"풉! 콜록콜록!"
"왜요? 우리 엄마 아직 가능……."
호영이 다급히 종혁의 입을 막았다.
"아니야. 그런 말 하면 안 돼."
‘왜 안 되는 건데?’ 참 순진하다 싶었다.
몽타주는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나저나.’
종혁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낯익은 여성을 보았다.
TV에 많이 나오는 미녀 솔로 가수.
여기 왜 있는지 약간 의문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최종혁입니다."
움찔!
‘음?’
깜짝 놀란 그녀가 곧 환하게 웃었다.
"박시윤이에요! 유도 금메달리스트 최종혁 선수 맞으시죠?! 팬이에요!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그 한판! 아니, 그 전에 마치 방금 막 사우나 마친 것처럼 개운해하던 그 여유로운 모습이!"
"어, 네…… 진정하세요."
"네? 아, 네……."
이제야 카메라를 인식한 듯 흠칫 놀란 그녀가 얼른 진정한다.
"엄청 조용하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아하하."
"아무튼 좋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가수님 팬이에요."
"정말요?"
"저희 국대들 사이에선 SOE, 스위티와 더불어 삼 대 여신으로 통하시거든요. 아. 여전사들 아마조네스도 있구나, 참. 여러분들 노래 들으면서 운동해요."
"와-. 진짜요? 국가대표 선수님들이요?"
제작진도 관심을 드러냈다.
언제나 비밀에 쌓여 있는 태릉 선수촌 이야기.
관심이 안 갈 리가 없다.
"뭘 님까지."
손을 저은 종혁은 호연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래서 저분은 여기 왜 온 거야?"
흠칫!
"……조금 있다가 말해 줄게."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뭐가 있구먼.’
왜인지 방금 전 허공을 보는 박시윤의 눈동자 흔들림이 익숙하다 싶었다.
‘지루해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 안에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서운 뭔가에 쫓기듯 겁먹은 사람처럼.
종혁의 눈이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