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7화>
박병춘 선생은 이리나를 이리 무리에 던져 놓고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이리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그녀가 종혁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Hi, Long time no see. 소영 Hi, 수호 Hi!"
수호와 소영에게도 시선이 모였다.
종혁은 정신을 차렸다.
"뭘 오랜만이야. 연락은 계속 주고받았잖아."
반 아이들은 종혁의 유창한 영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국인의 고질병. 영어는 잘 알지만,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단하다는 듯 보았다.
"우리 학교엔 왜 온 거야? 너 한국어도 못 하잖아."
이리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한국어로 말했다.
"할 줄 아눈데? 나 대디보다 잘해."
"어?"
"……우오오오오오!"
"전학생이 우리나라 말을 할 줄 안다!"
"발음 좋아!"
아이들은 뒤집어졌지만, 종혁은 복잡해졌다.
"종혁아! 난 너희가 전학생이랑 어떻게 아는지 정말 궁금하다!"
"시끄러워."
"네."
늑대 한 놈을 침묵시킨 종혁이 이리나를 봤다.
"그런데 왜?"
"맞아! 왜 말 안 했어?!"
수호와 소영도 따지듯 물었다.
이리나는 배시시 웃었다.
"안 물어봤잖아? 만날 영어로 말하고."
"아니, 그러긴 했지만 그거야……."
외국인인 그녀를 배려한 것이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지? 그때도 좀 마이 웨이긴 했지만.’
종혁은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 입학식 시작한다!"
"자자, 모두 자리에 앉아! 우리 담임 독사다!"
임시 반장의 말에 모두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뭐, 그래. 동일고에 온 걸 환영해. 애나."
"응! 잘 지내자, 혁. 수호. 소영."
"가자. 애나. 내가 애들 소개시켜 줄게!"
그녀는 왜인지 다급히 손을 잡아끄는 소영과 함께 여자들 자리로 향했고, 종혁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속인 게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나쁘지 않았다.
‘친구가 늘었네.’
회귀 전엔 친구라 부를 사람이 한 명도 없던 학창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좋은 친구인 수호와 소영이 있고 이리나도 함께하게 됐다.
가슴이 절로 따뜻해졌다.
그는 막 교가가 흘러나오는 TV로 시선을 돌렸다.
체육관,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열린 창문에서 살랑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 * *
경찰 본청 앞.
웬일로 제복을 꺼내 입은 김종두 과장과 두 명의 경찰이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순간 한 대의 중형차가 다가와 섰다.
탁탁!
"종혁이?"
설마 이 차량인가 하고 지켜봤던 그는 선두 차량 보조석에서 냉큼 내려 뒷좌석 문을 여는 종혁을 발견하곤 멍해졌다.
그는 육십대 노인 한 명, 사십대 중년인 한 명과 다가오는 종혁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
종혁은 김종두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공적으로는 처음 뵙겠습니다. 행복의 쉼터 재단 해외 협력 사업부 사원 최종혁입니다. 여기 이치로 교수님의 통역 및 일일 비서로서 오늘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성화대 컴퓨터공학과의 한종학 교수님이십니다."
안다. 한국대와 더불어 국내 3대 대학 중 하나인 성화대.
한종학 교수는 본청 컴퓨터범죄수사대에서도 종종 자문을 구하는, 해킹과 보안 관련 분야의 권위자다.
김종두는 종혁을 봤다.
맞춤 슈트를 입은 종혁의 모습이 낯설다.
하지만 어울린다.
"아니……."
"그렇게 됐어요. 일본어를 잘하시는 분이 안 계셔서."
"경찰 한다고 했잖아, 이 자식아!"
김종두 과장은 속삭이며 배신감을 표출했다.
"행복의 쉼터 재단이 가출 청소년 쉼터예요. 내신 때문에요."
"내신?"
"봉사 활동 같은 거예요."
종혁은 그러며 봉사를 하러 갔다가 우연히 일본어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생겼고, 그 때문에 사원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말은 사원이지만, 주말에만 일하기에 아르바이트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덧붙임과 함께.
"허어."
그도 얼핏 들은 적 있다.
요샌 대학에 가려면 봉사 활동 같은 것도 해야 한다는 말을 말이다.
‘봉사를 하러 갔다가 사원이 되다니.’
이걸 잘났다고 해야 할지, 운이 좋다고 할지.
"그런데 어떻게?"
"여기 이치로 교수님께서 저희 재단과 첫 협력 관계를 맺은 일본 미나토 대학의 교수님이시자 그 프로그램의 개발자시거든요."
"협력? 재단이?"
"저희 재단에선 원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유학을 보낼 예정이거든요. 지금은 일본뿐이지만, 곧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나라의 대학에도 유학을 보낼 예정이에요."
김종두 과장은 그제야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협력을 위해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하다 우연히 종혁이 발탁된 게 분명했다.
‘권 영감 그 양반, 정말 회개하려는 건가?’
명동의 돈 귀신 권회수가 행복의 쉼터 재단의 이사장인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거물이 다시 등장해 부동산과 빌딩을 무차별로 매입함에 경찰 내부에서도 말이 많았다.
한데, 그 모든 부동산을 행복의 쉼터 재단에 귀속시켰다.
마치 사람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았던 과거의 행동을 뉘우치려는 듯한 그의 행보에, 경찰은 일단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왜 과장님이 나와 계세요?"
"그 프로그램이 정말이라면 우리도 필요해서. 아, 우리 쪽 소개가 늦었네. 이쪽은 컴퓨터범죄수사대의 대장 박성호 경정. 정보보안팀의 팀장 구명성 경정."
‘크. 컴퓨터범죄수사대.’ 종혁이 경찰이 됐을 땐 사라진 이름이다.
김종두와 마찬가지로 권회수에 대해 생각하던 박성호와 구명성은 소개가 되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두 달 만입니다, 교수님."
"허헛. 잘 계셨습니까. 이쪽이 그 대단한 프로그램을 만든 야마노구치 이치로 교수입니다. 한국 이름은 정일구. 일본 재무성 등 정부 부서의 보안 프로그램 개발자였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도 이 사람이 만든 걸 기반으로 한 보안 프로그램을 쓰고 있죠."
김종두와 경찰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치로 교수의 연배가 이제 사십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천재?’
종혁의 통역을 받은 이치로 교수가 한 발 나섰다.
"이치로입니다. 잘 부탁하무니다."
이치로 교수가 정중히 허리를 90도로 숙이자 경찰들도 얼른 허리를 숙였다.
"어이구. 한 교수님께서 추천하시는 분이라면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자,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들은 본청의 소회의실로 향했다.
소회의실에는 제복을 입은 십여 명의 경찰들이 앉아 있었다.
‘죄다 경정 아니면 총경이네. 얼씨구? 경무관까지 있어?’
경정이면 과장급이고, 총경이면 서장급 인사이다.
경무관은 그보다 한 급수 위.
모두 대한민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경찰 고위 간부였다.
그들 모두 일어나 한종학 교수와 악수를 나눴다.
‘그만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는 거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후 곧바로 프레젠테이션에 들어갔다.
어두워진 방, 마이크를 잡은 이치로 교수가 발표를 하면 종혁이 실시간 통역을 하고 본청에서 따로 부른 통역사가 검증을 하는 방식이었다.
프레젠테이션이 절정에 다다르자 소회의실에 앉은 모든 경찰 간부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경찰에 필요한 물건이다.
무조건. 어떻게든.
꿈에 그리던.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촤악!
누구보다 빨리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네. 컴퓨터범죄수사대의 박성호 대장님."
손을 늦게 든 간부들은 아쉬워했다.
"정말 두 번, 세 번 포맷된 컴퓨터도 복구 가능합니까?"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이거다. 간부들의 눈이 빛났다.
종혁은 이치로 교수에게 통역했고, 이치로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컴퓨터로 작업했다면 복구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핸드폰의 삭제된 문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오오!"
간부들의 엉덩이가 더 들썩였다.
스윽!
유일한 경무관이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열기가 가득 서려 있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시험해 봐도 되겠습니까?"
"실례라뇨. 당연한 일이죠. 교수님께선 얼마든지 시험해 봐도 괜찮다고 하십니다."
촤좌좍!
경정들의 고개가 다급히 경무관에게로 향했다.
"특수."
"옛!"
벌떡 일어난 김종두 과장이 소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아."
"우리도 급한데……."
아쉬워하는 간부들을 뒤로한 종혁은 의아해하는 이치로에게 설명을 해 줬다. 이치로 교수는 기겁했다.
"아직 검증도 안 한 프로그램을 증거물에 쓴다는 겁니까?"
"그만큼 증거 확보에 간절하다는 겁니다. 아마 지금 가져오려는 건 무슨 수를 써도 복구하지 못한 컴퓨터나 노트북일 테죠."
일부 소수 때문에 오욕을 뒤집어쓸 뿐 원래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게 대한민국 경찰이다.
"범인만 잡을 수 있다면 무당, 일본으로 치면 점술사에게도 빌 수 있는 게 대한민국 경찰입니다."
"허…… 열정이 대단하군요. 일본 경찰도 이걸 배워야 할 텐데."
"하하."
종혁과 이치로 교수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경무관이 다시 손을 들었다.
"예, 경무관님."
"그런데 왜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택한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뜬금없는 타이밍에 날카로운 질문이다.
기대감에 물들어 있던 경찰 간부들의 눈빛이 변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질문이다.
종혁이 통역해 주자 이치로 교수가 마이크를 잡았다.
"일본 경찰이 노인처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노인?"
"신문물을 받아들일 생각을 안 하고 발로 뛰면 다 된다는 구시대적인 고집만 가득한 노인의 마인드."
종혁의 통역에 간부들은 뜨끔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경직되고 구시대적인 조직 문화를 가진 곳 중 하나가 경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곧 어깨를 폈다.
결국 한국을 택한 건 한국의 수사 방식이 더 신세대적이라는 소리기 때문이다.
"그렇지. 일본분이 뭘 좀 아시네."
"어흠. 아무리 일본이 선진국이라도 검거율은 우리가 낫지."
"또 제가 자이니치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선 조상이 한국인이라면 발언권 자체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뭐? 한국인이 조상이라서 발언조차 못 한다고? 그게 말이야, 방구야?!"
한국 경찰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던 간부들은 발끈했다.
경무관도 울컥했지만, 이곳에서 가장 상급자라 냉정해지려 애썼다.
"그런데 소개하시길 재무성 등의 정부 부서 보안 프로그램 개발자였다고 들었습니만."
"개발은 제가 했지만, 사후 관리는 일본인들 손에 맡겨졌습니다."
토사구팽. 이 사자성어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끝내 경무관의 입에서 분노의 불길이 터져 나왔다.
"이런 씨부랠 새끼들이 진짜!"
"하여튼 정이 안 가는 새끼들!"
"이 새끼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
마치 본인이 직접 당한 것처럼 간부들의 얼굴이 달아올랐고, 이치로 교수는 그 모습을 보며 당황했다.
"원래 한국인이 좀 이래요. 교포라고 해도 같은 한국인이거든요."
정이 넘쳐 나는 지금 이 시대는 그랬다.
아프리카에 살아도 한국인의 핏줄이라면 같은 한국인.
같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이웃사촌이었다.
"또 그런데, 최 선수?"
"아, 예."
종혁은 경무관을 봤다.
"행복의 쉼터 이사장이 부동산을 왜 사들이는지 아나? 아르바이트라 잘 모를 테지만, 들은 게 있을 것 아닌가."
눈을 빛낸 종혁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척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 그건 후원이 없어도 재단 운영에 어려움이 없고자 그러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랄까, 돈 걱정 없이 불쌍한 아이들을 돕고 싶다?"
"호오."
다른 간부들의 눈도 가늘어졌다.
"다른 의도는 없고?"
"예?"
종혁은 천연덕스럽게 반응했지만, 경무관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안다.
행복의 쉼터 재단은 권&박 홀딩스와 분리된 재단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둘은 마치 모자 회사처럼 보인다.
권회수와 권아영이 부녀 관계이며 권&박 홀딩스에서 막대한 후원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익 중 일부, 당초 계약을 맺은 대로 구 대 일을 후원이란 명목으로 보내는 것이지만 경찰은 그걸 모른다.
즉, 권회수가 행복의 쉼터를 앞세워 돈세탁을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그러나.
‘행복의 쉼터가 매입하는 부동산은 권&박 홀딩스의 이름으로 매입하는 것에 비하면 자투리 수준이지.’
권회수가 부동산이나 건물을 찍으면 권&박 홀딩스가 계약한다.
대현 현성오의 부동산도 행복의 쉼터 명의로 매입했다가 권&박 홀딩스에 되파는 형식을 취했다.
세금도 모두 내면서 두 회사가 연관 관계는 있지만, 독립된 회사라는 걸 강조했다.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진행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과거의 거물인 권회수가 전면에 나서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있지만, 권아영이 권회수의 인형이 아니냐는 의혹도 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권&박 홀딩스는 사회적인 기여도 한다는 이미지도 얻을 수 있었다.
"아닐세."
‘정말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그렇다면 가출 청소년 쉼터도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
좀 더 진지하게.
종혁은 변화하는 경무관이나 다른 이들의 눈빛에 속으로 씩 웃었다.
‘됐군.’
오늘 미팅에 종혁은 권&박 홀딩스가 아니라 행복의 쉼터 재단의 사원으로 나타난 이유가 바로 이걸 위해서였다.
경찰로 하여금 행복의 쉼터를 좋게 생각하게끔 만들기 위해.
"흠. 그러면 이치로 교수님도 행복의 쉼터 재단의 투자를 받는 건가?"
이 역시 예상한 질문.
종혁은 이치로 교수를 향해 물었고, 이치로 교수는 미리 짜 놓은 대본대로 답했다.
"이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권&박 홀딩스라는 곳에 심사를 넣은 상태입니다."
"권&박 홀딩스."
경찰들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타다닥! 쾅!
"가져왔습니다! ……음?"
김종두 과장은 기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게 주승엽 그 사기꾼 새끼 컴퓨터라고?"
경무관뿐만 아니라 간부들, 종혁도 눈을 빛냈다.
주승엽. 종혁은 듣기만 했지만, 이 시기 엄청난 다단계 사기를 친 범죄자다.
후에 나타날 희대의 사기꾼 조희구의 위명에 가려졌을 뿐, 경찰이 언제나 예의 주시하는 네임드 범죄자다.
‘이거 그거구나! 120억대 다단계 사기!’
많은 일반인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은 사건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런데 그놈 결국 풀려났다고 했는데?’
이유는 증거 불충분. 검찰도 분통을 터트린 사건이다.
‘이걸 삼촌이 맡다니…….’
과거 이 사건을 맡은 건 광수대였다.
‘아, 잠깐. 설마?’
"예. 은신처까지 모두 뒤졌지만 장부를 발견하지 못했고……."
경무관이 손을 들었다.
"거기에 거래 내역이 있을 거라 추정되는데, 락이 걸려서 못 풀고 있잖아. 맞지?"
"예!"
"끙. 가져와도 하필이면……."
"어차피 여기도 없으면 그놈 풀어 줘야 합니다, 차장님."
눈앞의 한종학 교수도 난색을 표한 락.
그렇다면 확보했어도 쓸 수 없는 증거물이란 소리이다.
"……좋아. 해 봐."
컴퓨터 본체가 연결되자 이치로 교수가 나섰다.
경찰들은 주먹을 꼭 쥐며 부디 락이 풀리기를 기원했다.
그렇게 이치로 교수 어깨 너머로 지켜보길 몇 분.
배경은 검은색이요, 요상한 글자와 숫자들이 빠르게 올라가던 컴퓨터 화면이 다시 확 밝아졌다.
"어? 뚫렸다."
윈도우 98의 메인 화면이 나타나자 순간 멍해졌던 경찰들은 이내 양팔을 번쩍 들었다.
"뚜, 뚫렸다!"
"이런 씨발?!"
반쯤 일어났던 경무관만 애써 진정할 뿐 모두 축배를 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컴퓨터 메인 화면이 기본 화면이다.
내 컴퓨터, 내문서, 휴지통, 인터넷만 전부인 화면.
경찰들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이치로 교수는 다시 프로그램을 조작했고, 컴퓨터는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우우웅! 찌직찌직!
본체가 오버 히팅하며 격한 소리를 냈지만, 경찰들은 입을 떡 벌렸다.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서 파일들 때문이다.
"저, 정말 복구됐어?"
김종두 과장은 홀린 듯 컴퓨터로 다가갔고, 이치로 교수는 눈치 좋게 비켜 주었다.
문서 파일 중 하나를 클릭한 김종두 과장은 순간 휘청거렸다.
그는 힘겹게 경무관을 봤다.
"자, 장부가 마, 맞습니다. 주승엽 그 새끼 거 맞습니다!"
경무관의 주먹이 불끈 쥐였다.
"맞다면서 뭐 해?! 얼른 그 새끼 모가지 비틀어 버리지 않고!"
"옙!"
"와아아!"
다시 만세를 외친 경찰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흐윽! 이제 나도 처자식들이랑 봄에 꽃구경 갈 수 있는 거냐?"
누군가의 말에 경찰들은 숙연해졌다.
"아니지. 그땐 또 다른 사건이 있겠지."
반박하는 누군가의 말에 더 숙연해졌다.
사건을 빨리 해결해 봤자 다음 사건이 대기하고 있다.
그게 형사의 딜레마다.
"야이씨! 좋아하지도 못하냐! 그래도…… 뭐 만세다! 이제 못 잡을 놈이 없잖아!"
못 잡을 놈이 없다는 말에 경찰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지! 증거 인멸 좆 까라고 해!"
"사건이 늘어나면 뭐 어때! 한 놈이라도 더 잡는 게 좋지!"
"씨발. 이새끼들 다 뒈졌어!"
검거율이 올라가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듯했다.
구수한 욕설을 뱉으며 좋아하던 간부들은 다급히 경무관을 봤다. 같이 기뻐하던 경무관이 그 뜨거운 시선들에 흠칫 몸을 굳혔다.
"왜, 왜 이 자식들아?!"
"이거 무조건 사야 합니다, 차장님."
"사 주십쇼!"
"사 주실 거죠?"
"……아니,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일단 좀 더 확인을…… 청장님한테 보고드려야 하고. 그리고 예산이……."
"아, 몰라! 야, 드러누워!"
"옙!"
"어이구, 바닥이 차네."
총경들까지 모두 드러누우려 하자 경무관은 펄쩍 뛰었다.
"손님도 계시는데 뭐 하는 짓이야!"
"손님이든 뭐든 우린 모르겠고!"
"사 주실 때까지 안 일어날 겁니다! 저거면 잡을 놈이 몇 명인데! 뭐 해? 안 누워?!"
"옙!"
"이 새끼들이 진짜! 너희가 애냐? 애야?!"
개판이 되어 버린 소회의실의 모습에 종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에겐 참 익숙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 귀여운 양반들. 그렇지. 이래야 형사지.’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게 형사다.
선진화된 수사 기법을 도입할 수만 있다면 이런 땡깡은 몇 날 며칠이라도 부려 줄 수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건 대부분 먹힌다.
경찰 요직에 앉은 간부들 모두 치열하고 더럽고 힘든 현장을 겪었기 때문이다.
현장의 고충을 잘 아는 간부들.
그렇기에 사석에선 사사로이 형, 동생이라 부르기도 한다.
종혁은 이젠 넋을 놓으려는 이치로 교수를 다독였다.
"흔히 있는 일이니 걱정 마세요. 교수님 프로그램을 사 달라고 떼쓰는 것뿐이니까요."
"겨, 경찰이요?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아, 일본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죠?"
"예. 진짜 다르네요……."
‘하하. 대한민국 형사들이 좀.’ 종혁의 어깨가 죽 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