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63화 (63/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3화>

19. 잊힌 인재들(2)

계약 날보다 하루 빠른 이른 오전의 료칸 로비.

휴식 공간의 소파에 앉아 귀에 이어폰을 낀 이치로 교수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라 있다.

"이게 대체……."

약속한 날보다 왜 하루 먼저 만나나 했더니 믿지 못할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필름이 끊겨 제자에게 몹쓸 짓을 한 게 아니다.

관계는 없었고, 그냥 당한 거다.

관계를 맺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녀가 악독하게 굴어도 아무 말 못 했던 그는 지독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내가 왜 너희를 가르치려 했는데……."

그의 눈에서 후회의 눈물이 쏟아졌다.

미나미의 계략에 당한 것보다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말이 심장을 찢는다. 한때 반항은 했어도 사람은 바뀔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그랬기에.

더티 래빗으로 온갖 나쁜 일을 저질지만, 결국 개과천선하여 이렇게 교수가 된 것처럼.

그래서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아무리 자더라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내뱉는 한마디가, 공식이, 노하우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난 도대체 여태까지 뭘……."

종혁은 다급히 카세트테이프를 껐다.

"아마 그냥 한 말일 겁니다. 교수님의 뜻에 감화된 학생이 더 많을 겁니다."

"……."

‘쯧.’ 글렀다. 지금 이치로 교수에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종혁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보다, 왜 학장이 교수님을 감시한 건지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 무슨 마찰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장이 그를 감시할 이유가 없다.

한참을 생각하던 이치로 교수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굳이 있다면 학장이 말을 들어주지 않기에 총장에게 최신형 컴퓨터를 구매해 달라고 건의를 넣은 것 정도뿐입니다. 그동안 개발한 것들도 모두 대학에 귀속시켰는데 이 무슨……."

"연구를요?"

"대학 레벨이 낮다 보니 연구비 지원이 적기에 다 시시한 결과뿐이었습니다."

예산이 없기에 퀼리티가 적은 결과물만 나오는 악순환.

열정만으로 버티던 것도 이젠 한계였다.

이사장의 대학 건립 이념이 이치로 본인과 같아서 이 대학을 선택하긴 했지만 이제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런 이치로 교수의 푸념을 들은 종혁은 미간을 좁혔다.

‘굳이 이 대학을 택한 이유가 이거였군.’

같은 뜻을 지닌 동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마음이 흔들리다 보니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기는 한데…….’ 이야기를 듣자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이거 학장 뒤를 캐 봐야 하려나."

그래야 명확해질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선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종혁의 한국어 혼잣말을 들은 이치로 교수는 묘한 눈빛을 지었다.

"대체 저를 돕는 이유가 뭡니까? 왜 이런 걸 알려 준 겁니까?"

권&박 홀딩스로서는 프로그램만 사면 그만이다.

‘아차!’

방금 전까지 일본어로 대화했기에 순간 그의 조부모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하지만 이미 디뎌 버린 걸음이다.

동요를 가라앉힌 종혁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흠칫!

이치로 교수의 몸이 흔들렸다.

종혁의 그 말에 눈치를 채 버렸다.

종혁은 쐐기를 박았다.

그는 이치로 교수가 가져온 하드 드라이브를 검지로 두드렸다.

"전 이런 껍데기가 아니라 알맹이인 당신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당신을…… 원하는 겁니다."

뜨겁다. 부담스럽다.

생애 처음으로 들어 보는 동성의 구애다.

그것도 무척이나 뜨거운 눈길로 보내는 구애다.

하지만.

이치로의 마음은 더욱 크게 흔들렸다.

"이, 이런 계략에도 속는 바보를 말입니까?"

종혁은 피식 웃었다.

"방금 말하셨죠. 지원이 적어서 그런 것만 만들었다고. 하지만 무한대의 지원이 당신에게 주어진다면?"

‘디도스를 막아 낼 보안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지.’ 종혁의 눈이 더 뜨거워진다.

"아."

‘무한대의 지원?’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구상만 하던 걸 모두 만들 수 있다.

"특허 지분도 원하는 만큼 드리죠."

이제 그의 마음은 풍랑을 맞은 듯 휘몰아쳤다.

"저는……."

"잠시."

종혁은 그의 입을 막았다.

"자문님?"

"그 결정은 이번 사건의 내막이 완전히 밝혀진 뒤 내려 주시죠."

"대체 왜……?"

종혁이 쉴 틈을 주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신에겐 너무 좋은 상황이었는데……."

"그래야 교수님 마음에 한 점의 미련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이치로 교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 남자는 정말!’

감긴 그의 눈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잠시 후 다시 뜨인 이치로 교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방법이 있겠습니까?"

종혁은 피식 웃었다.

"이 세상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던가요?"

이치로 교수는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  *  *

붉은색의 커다란 토리이 너머로, 위는 하얀색, 아래는 빨간색 옷을 입은 무녀 한 명이 어딘가로 향한다.

수호의 눈이 빨개졌다.

"무녀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무녀를 직접 보다니! 가자, 얘들아, 얼른! 소원 부적 쓰고 운세 뽑아야 해!"

그렇게 외친 수호는 재빨리 달려갔고, 소영은 한심해했다.

"하여튼 쟤는."

"왜. 의욕 없는 것 보단 훨씬 낫잖아. 그리고 하네코 씨가 말하길 여기 운세 뽑기가 제법 잘 맞대."

"운세?"

"학업운이라든지 금전운, 오늘의 행운 같은 거?"

"연애운도?"

"그렇겠지?"

순간 눈빛이 달라진 소영은 크게 발을 내디뎠다.

"나 수호 길 잃기 전에 잡으러 갈게!"

"저기 큰 방울이 달린 곳에서 보자."

"응!"

종혁은 멀어지는 소영을 보며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 그에게 아까부터 시선을 보내던 모자를 쓴 사내가 다가왔다. 볼에 흉터가 있는 험한 인상의 사내.

"요시다 인력이십니까?"

"저희 요시다 인력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사장님."

그가 내민 두툼한 서류를 받아 들어 내용을 살핀 종혁은 눈을 빛냈다.

"……이것 봐라?"

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반나절도 안 되어 이 정도의 내용을 조사한 걸 보니 역시 요시다 인력답다고 할 수 있었다.

미래 일본 경찰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요시다 인력.

한국의 심부름센터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종혁은 아침에 찾은 백만 엔 다발을 꺼내어 내밀었다.

얼굴이 활짝 핀 사내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도움이 필요하실 땐 언제든 요시다 인력을 찾아 주십시오!"

종혁은 떠나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키타무라 유이치."

이치로 교수가 재직하는 공과대학의 학장.

자료를 보니 꽤 흥미롭다.

특히 소비 부분이.

"견적 나오네."

견적이 나오면 바로 설계에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을 위반하는 건 요시다 인력을 이용하는 걸로 충분했다.

그는 손가락을 딱 튕기며 이치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교수님.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무얼 꾸미는지 종혁의 입매가 뒤틀어졌다.

이치로 교수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고 전화를 끊은 종혁은 큰 방울이 달린 곳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응? 뭐 좋은 일 있어?"

"아니, 재밌는 걸 봐서. 그러는 넌?"

"난 뭐……."

겨우 외운 단어로 어찌어찌 연애운을 뽑긴 했는데, 내용이 죄다 일본어라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지 주머니를 두드렸다.

‘한국 가서 번역해야지!’

"종혁아! 마녀! 우리 소원 빌자!"

"그래!"

수호는 소원 비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고, 세전함에 동전을 넣은 셋은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

‘부디 연애운이 좋게 나왔기를!’

‘머리가 좋아지기를! 종혁이처럼 멋지게!’

‘어머니가 언제나 행복하고 건강하길. 그리고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길.’

셋은 각기 다른 소원을 빌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틀간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게 고됐는지 뻗어 버린 둘의 모습에 다행이라 생각한 종혁은 다시 미나토 대학을 찾았다.

아직은 9시. 오늘 강의는 10시부터 시작이라 조용한 공과대학 입구. 크로스 백을 맨 채 초조하게 떨던 이치로 교수가 눈을 크게 떴다.

"자문님!"

"좋은 아침입니다, 교수님. 행정관에선 사람이 왔나요?"

행정관이란 말에 이치로 교수가 펄쩍 뛴다.

"정말 저희 대학에 투자를 하시려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희 대학은 투자할 가치가 없습니다!"

이사장의 건립 이념과 생각에 끌려 재직하는 교수가 많을 뿐, 결국 삼류 대학이다.

"설마 이게 자문님이 말한 ‘돈이면 안 되는 건 없다’입니까?"

종혁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했었다.

키타무라 유이치가 절대 가 보지 못한 곳에서 접대하며 떠볼지, 요이치 인력을 계속 써서 불법적으로 증거를 수집할지, 아니면 일본에 공학 계열의 회사를 세우고 미나토 공과대학과 연계를 추진할지 등 많은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법이 가장 좋고 가장 빨랐다.

"삼류 대학이라. 글쎄요."

어젯밤 다시 요시다 인력을 통해 이 대학에서 쓰는 전공서 몇 개와 필기 노트, 강의 내용 녹화본을 살펴본 후, 종혁은 표정이 묘해졌다.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지켜보면 알 일이죠."

"자문님!"

이치로 교수는 본인 때문에 막대한 돈을 쓰레기통에 처박으려는 종혁의 모습에 미칠 것 같았다.

"걱정 마십시오. 교수님이 생각하는 그런 방향의 투자는 아니니까."

연구에 관한 투자가 아니다.

"하아. 정말 당신은…… 아, 그런데 이건 왜?"

이치로 교수는 크로스 백을 두드렸고, 종혁은 하하 웃었다.

"그건 좀 있으면 알게 될 겁니다. 그보다 좀 늦는 것 같군요. 일본인이 약속 시간에 늦다니. 의외……."

"어머?"

고개를 돌린 종혁은 좁혀지려는 미간을 얼른 폈다.

"흐음. 어제 약속을 깨더니……."

이 남자와 있었냐는 미나미의 눈빛에 종혁은 치솟는 화를 애써 누르며 웃었다.

종혁은 어제 갑자기 음성 메시지로 약속을 미루자 연락했다.

만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안합니다. 일이 바빠서."

"……됐어요."

종혁과 이치로 교수를 번갈아 본 미나미는 이치로 교수가 헛소리를 하기 전에 물러나기로 했다.

‘어차피 전화번호는 있으니까!’

그녀는 본인이 연락하기로 마음먹으며 공과대학으로 향했다.

"만나실 건가요?"

"그럴 리가요. 교수님도 앞으로 볼 일이 없어질 겁니다."

"네? 그게 무슨……."

또각또각!

묘하게 귓가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작은 체구지만 정정한 걸음의 칠십대 노파가 다가오고 있다.

‘설마 저분인가?’

종혁이 원한 행정부장이 아니라 이사급이다.

종혁은 당황했지만, 이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사라면 이보다 좋을 수 없지!’

앞으로 벌어질 한 편의 활극에 딱 어울리는 등장인물이다.

물론 허튼짓만 안 한다면 말이다.

종혁은 그녀의 성향을 살피기로 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랜만이에요, 야마노구치 교수."

"……허억! 이, 이사장님?!"

‘뭐?’ 종혁도 놀랐다.

‘이사장은 또 왜 튀어나와?!’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종혁은 경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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