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2화>
* * *
계약은 모레 맺기로 했다.
‘디지털 포렌식.’
이치로 교수가 만든 디지털 포렌식 프로그램은 한국 디지털 포렌식의 원형이 된다. 한국은 그것을 바탕으로 한국형 디지털 포렌식 프로그램을 개발, 첨단 과학수사의 문을 연다.
‘그러나 팽을 당하지.’
이 시기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인색할 뿐, 한번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무섭도록 발전하는 한국.
귀화한 이치로 교수는 학계의 교수들과 연구원에게 밀려서 설 자리를 잃고, 결국 경찰과 검찰을 상대로 디지털 포렌식에 대한 강연만 하다가 은퇴를 한다.
‘그 원형이 정말 대단했음에도.’
2015년까지 그 원형이 차지하는 지분이 70퍼센트 이상이었다.
후에 개발된 디지털 포렌식도 원형의 개량형일 뿐 결코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개인이 조직을, 사회를 이길 순 없는 법이었다.
그는 그렇게 잊혔다.
‘여기서 걸리는 점은 그 대단한 작품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일본에 넘기지 않은 것.’
와세다 대학이나 게이오 대학의 교수직도 걷어차고 미나토 대학에 올 만큼 일본인을 사랑했던 그가 말이다.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껍데기만 가질 거면 오지 않았어.’
알맹이인 이치로 교수를 영입하기 위해서 일본에 온 거다.
그런데 현재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고, 유일한 단서는 아까 전의 그 여성뿐이다.
‘꽃뱀? 협박? 아님 약점이라도 잡혔나?’
확실한 단서가 없으니 골치가 아프다.
‘그래도 계약은 이틀 후니까 그 전에…….’
종혁의 미간은 좁혀졌고, 카레 가게에서 일본식 카레를 먹다 그걸 목격한 소영과 수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음? 아니야. 일은 잘 풀렸어. 어서 먹어. 맛있네."
종혁은 카레를 씹으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멋지다.’
마치 사회인 같다.
어른 같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를 보는 듯한 느낌.
아니, 검찰청에서 인턴을 한 종혁은 이미 사회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약간 어른스럽지만, 그래도 함께 어울렸던 친구가 멀어진 것 같다.
‘종혁이는 이미 미래를 준비하고 있구나.’
애써 외면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던 종혁이 떠오른다.
둘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라고 마냥 신나기만 했던 모습들이, 돌아가서 자랑할 생각에 기뻐했던 자신들이 갑자기 초라하게 느껴졌다.
‘안 돼!’
친구로서 뒤처질 순 없었다.
약간 다른 마음인 소영으로선 더욱 그랬다.
둘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음?"
종혁은 갑자기 여행 회화책을 꺼내드는 둘을 보며 의아해했다.
* * *
"와앙! 일본 최고! 예쁜 옷 진짜 많아!"
시부야에서 양손 가득 쇼핑을 한 소영이 행복한 미소를 짓다 종혁을 보곤 풋 웃었다.
종혁은 얼굴을 구겼다.
"시끄러워. 말하지 마."
"하지만. 하지만……."
연예인들을 따라 하기 바쁜 수호도 옷을 샀는데, 종혁만 옷을 사지 못했다. 모두 사이즈가 맞지 않아서이다.
가장 큰 옷도 종혁이 입으니 어린아이 옷을 입은 어른 같았다.
"아, 너한테 맞는 옷은 서울에도 거의 없나?"
"이게 진짜. 어후! 수호야, 넌 친구가 당하는데 말도 없냐!"
여자한테 말로 이길 수가 없다.
함께할 동료를 찾았던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당첨된 복권을 잃어버린 것처럼 수호가 축 처져 있다.
"메이드…… 메이드. 메이-읍?!"
"어허. 아니다. 거리에서 소리 지르는 거 아니다."
"어후, 진짜 저질. 고슈진 사마? 그런 말 듣고 싶니?"
아키하바라라는 골목에서 딱 하나 있던 메이드 카페.
중세 하녀복을 입고 가슴을 드러낸 모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야 했다.
"마녀 네가 피아 케럿을 알아?! 고양이 소녀의 귀여움을 아냐고!"
"그냥 너 같은 변태를 모르고 싶다……."
"어헝. 종혁아."
종혁은 수호의 곁에서 떨어졌다.
같은 취급은 사양이었다.
"너, 너마저!"
"됐고. 저녁 먹어야지?"
벌써 오후 7시다.
지금 료칸으로 돌아가 봐야 어차피 저녁 식사는 놓친다.
그런데 둘의 반응이 썩 좋지 않다.
"음. 그렇기는 한데."
"우리 라멘이랑 덮밥 말고 다른 거 먹자."
종혁이 킥 웃었다.
"하긴 일본 음식 간이 한국이랑 맞지 않지."
둘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왜 그렇게 짜고 느끼해? 김치도 없으면서!"
"심지어 계란말이는 달아! 계란말이에 설탕이 말이 돼?"
"흠. 맛있는 게 많은데 말이야."
"설마."
종혁은 크게 데인 듯한 둘의 모습에 안타까워했다.
‘초밥, 사시미, 전골, 꼬치구이, 어묵, 고로케, 빵…… 먹을 거 많은데.’
"그럼 어쩔 수 없네."
"응?"
종혁은 일본에서 구매한 선불 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료칸이죠? 하네코 씨 부탁드립니다."
팁 값을 할 차례였다.
그들이 하네코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은 료칸 근처 번화가의 스키야키 체인이었다.
"와, 냄새 좋다."
"음. 간장과 고기 냄새."
담배를 피우는 어른들의 모습도 한국 식당 같아 친숙했다.
코를 벌렁거리며 주위 테이블을 둘러보던 둘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스, 스키야키 8인분. 밥 여섯 개 맞나요?"
"일단 그렇게 주세요."
"일단…… 네! 더 필요한 거 있으신가요?"
종혁은 수호와 소영을 봤다.
"뭐 더 시킬래?"
둘의 눈이 번쩍였다.
"비르. 비르! 야사히!"
"사케!"
"술?"
‘이건 언제 외운 거야?’ 딱 일본어 발음이다.
종혁은 피식 웃었다.
"그래. 해외여행 왔는데 이 정도 일탈은 해야지."
종혁은 종업원을 보았다.
"적당히 독한 사케 한 병과 맥주 세 잔 주세요."
"한 병은 너무 많으실 텐데……."
종혁은 대답 대신 본인의 몸통을 가리켰다.
이해한 종업원이 살포시 웃으며 돌아갔다.
그러자 소영과 수호는 다시 일본어 회화책을 꺼냈다.
"공부 열심히 한다?"
둘은 쉬는 시간마다 회화책을 꺼내 외웠고, 물건을 살 때도 일본어로 하려고 노력했다.
"언제까지 네 도움만 받을 수는 없잖아!"
"응! 우리도 공부해야지!"
‘그래서 가장 먼저 배운 게 술이냐.’ 그래도 생각이 좋았다.
이윽고 음식이 나오고, 직원이 설명해 준대로 고기를 구워 먹은 둘은 엄지를 치켜세웠다.
"짠!"
채앵!
황금빛 맥주가 든 잔이 부딪쳤다.
꼴깍꼴깍.
"캬아."
"하 뜨! 짜지만 이 정도면 맛있어!"
종혁은 많이 먹으라고 흐뭇하게 말하며 젓가락을 들었고, 셋은 일본 여행 둘째 날을 만끽했다.
"어머. 진짜 오셨네요?"
"아, 하네코 씨. 퇴근하시나 봐요? 덕분에 맛있게 잘 먹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여기가 정말 유명한 체인인데 이 지점이 가장 맛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동네에서도 올 정도예요!"
"그런가요?"
"네코 짱 누구?"
하네코의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아, 우리 료칸에 투숙하시는 분이야. 한국에서 오셨어."
"한국? 와, 나 한국 사람 처음 봐!"
"그, 그럼 저흰 이만. 가자!"
"아앙! 한국에 대해……."
종혁은 일행이 실수하기 전에 끌고 가려는 하네코를 보며 피식 웃다가 눈매를 좁혔다.
"으하핫!"
"호호호!"
‘저 여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으며 들어오는 세 명 중 이치로 교수와 만난 노랑머리 여성이 있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90도 꺾어 코너로 사라지는 여성.
"하. 요괴는 뭐 하나 몰라. 쟤들 안 잡아먹고."
걷다 멈춘 하네코의 말에 종혁의 귀가 쫑긋 솟았다.
"하네코 씨. 아는 사람들입니까?"
"네? 아…… 아, 아니에요! 그럼!"
하네코가 부리나케 사라지자 종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경멸과 분노, 공포. 순간 하네코의 얼굴에 서린 감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형사였던 종혁에겐 너무도 익숙한 감정이었다.
‘노랑머리뿐만 아니라 그 일행 전체를 그렇게 봤어.’
촉이 섰다.
종혁은 소영과 수호를 봤다.
"미안한데 나 배터리 좀 바꾸고 올게. 좀 있다가 엄마한테 전화해야 되는데 깜빡거리네."
"아, 그럼 내 것도! 어휴. 한잔 먹으니까 좀 취하네?"
"으응. 나도 그런 것 같아. 종혁아, 나도 부탁해."
"……에라이. 그냥 짐도 다 내놔. 가져다 놓게."
소영과 수호는 재빨리 짐을 내밀었고, 종혁은 고개를 저으며 가게를 나섰다. 그리고 료칸을 향해 뛰었다.
* * *
지글지글.
마블링 좋은 소고기가 익어 간다.
침을 꼴딱 삼킨 보라색 머리 여성이 노랑머리 여성을 보았다.
"근데 미 짱. 괜찮아?"
이 체인점에서 최고로 비싼 소고기를 시켰다.
"괜찮아. 곧 돈이 생기거든. 아, 우리 다음 주에 하와이 갈까?"
두 여성은 깜짝 놀랐다가 이내 음흉하게 웃었다.
"……물주 크게 물었구나? 이번엔 어떤 변태야?"
돈이 떨어질 때마다 가끔 이런 짓을 하던 그들의 얼굴엔 죄책감이나 걱정이 없었다.
"그게……."
"어? 아까 그분 맞죠? 이치로 교수님 교수실에서."
고개를 돌린 셋은 깜짝 놀랐다.
위협이 느껴질 만큼 큰 덩치.
하지만 순수하게 생긴 외모.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매가 섹시했다.
종혁이었다.
"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종혁은 테이블을 짚으며 노랑머리 여성, 미나미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며 그 손은 테이블 밑을 훑었다.
엄지 한 마디 크기의 검은 사각형 기계가 테이블 밑에 붙었다.
"근데 왜 답장 안 줬어요? 음성 메시지 남겼는데."
종혁은 내일 만나자며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누구냐며 눈을 빛내는 친구들을 무시한 미나미는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분홍색 삐삐와 휴대전화를 가리며 도도하게 웃었다.
"바빠서 아직 확인 못 했어요.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이런, 일본에 있을 시간이 얼마 없는데.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친구들과 온 것 같은데 식사 잘 해요."
싱긋 웃은 종혁은 몸을 돌리다 아차 했다.
"아, 맞아. 이치로 교수님의 제자 맞죠? 애인 아니라?"
"풋! 그런 거 아니에요!"
순간 그녀의 눈에 조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음. 아까 분위기가 아닌 것 같던데…… 뭐, 믿어 주죠. 나 한국 가기 전에 꼭 봐요."
종혁이 멀어지자 숨을 죽이고 있던 친구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미 짱! 저 와일드하게 생긴 남자 뭐야? 시계 봤어? 로레크스야! 저 남자야?"
미나미의 콧대가 높아졌다.
"아니. 그건 딴사람. 저 남자는 한국 투자 회사의 사원인데……."
종혁은 투자 자문이 아니라 여러 상황을 위해 만든 명함 중 하나인 사원 명함을 줬다.
"투자 회사!"
"어쩜! 있어 보여! 저런 사람이 이케맨인가?"
지난달 한 패션 잡지에서 나온 용어, 이케맨.
"흠흠. 아무튼 그런데, 삐삐 번호 줬어."
친구들의 얼굴이 미세하게 구겨졌다가 펴졌다.
"그래서, 만날 거야?"
"글쎄……."
"만난다면 우리도 데려가 줘라! 그럴 거지?"
"뭐, 봐서."
더욱 콧대를 높이는 그녀의 모습에 둘의 얼굴은 조금 더 구겨졌다가 펴졌다. 배알이 꼴린 둘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아까 그건 무슨 말이야? 너 교수실에도 가? 네가?"
"오, 미나미. 양키 주제에 공부하려는 티 내려는 거야?"
묘하게 깔보는 말투에 미나미는 발끈했지만, 이내 음흉하게 웃었다.
‘이러니까 너희와 나는 레벨이 다른 거야.’
고등학교 졸업과 대학생. 여기서부터 레벨이 다르다.
"내 물주가 그 교수야."
"……미쳤어! 와, 너!"
"푸흐흐. 그 바보 머저리. 하지도 않았는데, 지레 겁먹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매달리는 거 있지? 애초부터 그러기 위해 데려갔지만…… 호호. 그렇게 찌질하니까 우리 과 애들이 싫어하지!"
"미 짱. 사악해."
"그런데 교수 월급이면 많이 나오겠는데?"
"당연하지. 학점도 A+받기로 했어. 그럼 취업하는 데 도움되겠지! 솔직히 그 찌질이 좋아하는 애 없다? 다 취업 때문에 맞춰 주는 거야. 그것도 모르고 열혈 교사 흉내 내고. 머저리."
"와아. 진짜 사악해."
"히힛. 자, 우리 건배하자. 우리의 엘레강스한 삶을 위하여!"
"건배!"
채챙!
그들은 축배를 들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돈 걱정이 없는 그들은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셨다.
"그런데 괜찮겠어? 너 다니는 대학교수면 우리랑 비슷한 과 아니야?"
그러면 얼마 벌지 못하고 끝이다.
이런 일을 꽤 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판이 깨지지 않을 선과 사람 유형을 알았다.
미나미는 피식 웃었다.
"괜찮아. 최소 나 졸업할 때까지는 안전하니까. 그 사람 엄청 어수룩한 것도 있지만……."
"있지만?"
"풋. 웃긴 게 뭔지 알아?"
그녀는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술잔을 흔들었다.
"나 이거 누가 시켜서 하는 거다? 그 교수가 그만둬도 졸업할 때까지 돈을 주겠다는 계약서도 썼어."
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뭐야, 이거 냄새나는데? 얼른 말해 봐."
둘의 채근에 알딸딸한 정신이 번쩍 깬 미나미는 기대하는 친구들의 눈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너희만 알아. 이 일 시킨 거 나 다니는 대학교 학장이야."
"뭐?"
"……뭐?"
"나 원래 그 교수 감시하는 역할이었거든."
둘의 눈은 동그래졌다.
그리고 그건 몇 시간 후 온천에 몸을 담그며 방금 전 회수한 녹음 파일을 듣고 있던 종혁도 마찬가지였다.
"학장은 또 뭐야?"
‘꽃뱀 사건에 배후가 있다고?’ 이런 내용의 대화를 바라며 이치로 교수라는 키워드를 던졌는데 생각지도 못한 게 튀어나왔다.
종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