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61화>
* * *
"끄윽! 머리 아파."
머리를 잡으며 눈을 뜬 30대 후반의 사내는 당황했다.
천장에 커다란 거울이 있는 낯선 공간.
"러브호텔? 내가 여길 왜……."
그는 어젯밤 일을 기억했다.
"분명 겨울 학기 듣는 학과 애들과 회식을 하다가……."
너무 좋은 일이 있어 큰마음 먹고 쐈다.
학점을 깐깐하게 주는 게 미안하기도 했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신 것 같은데,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쏴아아!
"응?"
달칵!
"휴."
사내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노랑머리의 20대 여성을 보곤 하얗게 질렸다.
"네, 네가 왜…… 서, 설마?!"
"흑! 치한! 변태!"
"자, 잠깐!"
"흑흑흑…… 풋!"
여성은 화장대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들어 보여 줬다.
"어제 대단하던데요?"
여성의 눈이 뱀처럼 찢어졌다.
"이제 어떻게 할래요. 교. 수?"
사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 * *
세 명은 도쿄에 위치한 미나토 대학의 4-5미터 높이의 철문, 정문 앞에 섰다.
일본 전통 건축물인 토리이와 닮은 철문.
수호의 눈이 가늘게 뜨인다.
"가만 보면 일본은 토리이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여길 가도 토리이, 저길 가도 토리이."
토리이는 신사에 가야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수호로선 무척 실망스러웠다. 처음엔 흥분했지만.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하르방 같은 의미랄까."
"아. 액막이구나. 하긴 일본은 600만이 넘는 토속 신을 모시는 나라니까. 그만큼 요괴도 많고."
종혁과 소영은 놀랐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수호가 콧대를 세웠다.
"게임에서 그렇게 말하더라고."
"……그럼 그렇지."
소영의 눈은 짜게 식었지만, 종혁은 다시 놀랐다.
"일본어 할 줄 알았어?"
이 시기 일본산 게임이나 만화들은 대표적인 것 몇 개 제외하고는 죄다 미번역본이었다.
"쓰고 읽는 것만 쪼금. 나머진 다 통빡이지! 히히힛! ……그런데 그마저도 내가 아는 거랑 다른 게 많더라. 응."
그래서 공항에서 그런 일이 있었던 거다.
남자 입국 심사관이 하는 말을 많이 알아듣지 못했다.
‘미연시 히로인들은 그렇게 말 안하던데.’
"아마 여자가 쓰는 단어랑 남자가 쓰는 단어가 달라서 그럴 거야. 그래도 대단한데?"
수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튼 종혁아! 오늘 일 끝나면 꼭 신사랑 동경대 가는 거야."
"동경대도 알아?"
"미연시 단골이거든!"
"왜 그걸 여행 계획에 넣었나 했더니…… 야!"
수호가 정신을 차렸구나 하고 대견해했던 소영은 이제 실망을 넘어 숫제 경멸까지 했다.
종혁은 소영을 툭 쳤다.
"동경대 아니 도쿄대는 일부러라도 찾아가 볼 만해.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학이거든. 일본의 한국대랄까?"
세계적 지명도로 따지면 그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진짜?!"
그녀의 눈빛이 변한다.
"응. 꽤 볼만할 거야."
회귀 전, 일본 경찰과 처음 공조수사를 이뤘을 때 투어를 한 적이 있었다. 범인을 넘겨주기 싫어 한 일본 경찰의 수작이었지만, 그 속내를 알기 전까지만 해도 이게 일본 스타일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순진하게도.
"그렇구나. 아, 그런데 여기서 누굴 왜 만나려는 거야? 아는 사람이야?"
"스카우트? 일본에 간다니까 아영 이모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일단 말만이라도 전해 달라고 부탁했거든."
"이모가? 왜?"
이제야 왜 종혁이 정장을 입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왜 이모가 이런 일을 종혁이에게…… 그만큼 믿는다는 걸까? 이모는 나에겐 이런 말 한 적이 없는데.’
같은 나이지만 묘하게 연상 같은 종혁.
소영의 생각이 많아졌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일본 사람이야? 한국엔 없대? 일본인이라면 말도 안 통할 텐데……."
"아, 반은 한국 사람이셔."
"재일 교포?"
"3세라 한국계 일본인이라 해야겠지만."
‘그 때문에 많은 불편을 겪은 분이지.’ 곧 일어날 어떤 사건으로 인해 그는 결국 미나토 대학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한국으로 넘어온다.
하지만.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였지.’
재일 교포, 한국계 일본인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니었다.
‘그런 상처를 입기 전에 끌어들여야지.’
그게 그가 만든 결과물로 범인을 잡았던 종혁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은이었다.
종혁은 그녀와 수호를 툭 쳤다.
"가자."
그들은 미나토 대학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튼 좀 있다가 시부야에 가면 소매치기나 강도당할 수 있으니까 함부로 지갑 꺼내지 말고, 범죄에 이용당할 수 있으니까 리서치 조사 같은 것에 전화번호도 함부로 적지 말고……."
종혁의 입에서 일본 여행 시 주의 사항이 흘러나오자 소영과 수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말만 들으면 거리에 범죄자만 있는 것 같았다.
"이, 일본이 그 정도로 위험한 나라야? 아닌데? 내가 하던 게임에선 좋은 사람들만 있었는데. 정도 넘치고……."
그게 일본 게임의 폐해다.
"맞아. 일본은 선진국 아니었어?"
"선진국?"
종혁은 코웃음 쳤다.
"선진국 맞지. 다만 범죄도 선진국이라서 문제지."
"으응?"
살인 수법을 제외한 모든 형사 사건의 선구자라 불리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특히 사기 수법은 거의 10년을 앞선다.
‘보이스 피싱, 사이트 피싱 등 피싱 사기가 일본에서 넘어왔지.’
일본을 겪다 보면 ‘역시 한국이 최고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혁은 옆 건물을 가리켰다.
"……응. 무서운 나라구나."
건물 벽에 페인트로 낙서가 되어 있다.
"저, 저건?"
일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수호는 식겁했다.
종혁은 그를 보며 쉿 하고 검지를 입에 가져갔다.
"으응."
그걸 본 소영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후. 아무리 삼류 대학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아, 여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공과대학이었다.
5층 공과대학 건물의 4층으로 향한 종혁은 둘을 보았다.
"굳이 여기까지 안 따라와도 되는데. 음, 오래 걸리진 않을 테지만 심심하면 대학 구경이라도 하고 있을래?"
"응? 아냐. 우린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해야 돼! 최종혁 파이팅!"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은 친구들의 응원을 뒤로한 종혁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목적지 앞에 도착하자 낯빛이 굳었다.
위치가 화장실 앞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종혁은 악의를 느꼈다.
-예,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좁은 교수실, 30대 후반의 사내가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더벅머리에 인상을 어수룩하게 만드는 뿔테 안경.
변함없는 그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그런데.
‘면상이 왜 그러십니까?’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듯 낯빛이 검고 수척하다.
"누구…… 체육학과는 여기가 아닌데……."
"나흘 전 연락드린 권&박 홀딩스의 투자 자문 최종혁입니다."
"아, 한국에서 오신다는!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야마노구치 이치로입니다."
명함을 주고받은 이치로 교수는 종혁을 소파로 안내했다.
종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좁다. 겨우 4평이나 될까 한 공간에 전문 서적이 쌓여 있어서 창고로 오해할 정도다.
거기다 화장실 맞은편이었다.
‘역시 차별을 당하는 건가.’
"하하. 사무실이 많이 더럽죠? 미안합니다. 제가 정리하는 습관이 없어서."
"아닙니다. 정리를 할 수 없을 만큼 연구에 매진하시는 것 같아서 좋은데요, 뭘."
"하하.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치로 교수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종혁은 그가 왜 그런지 알아차렸다.
"흠흠. 그런데 투자 자문이시라고요? 젊어 보이시는데 정말 대단합니다! 일본어도 일본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돕니다!"
"고작 서른 살에 특채로 교수에 임용되신 교수님만 할까요."
이치로 교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종혁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한때 더티 버니……."
"어억!"
1991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된 해에, 일본 재무성의 모든 컴퓨터가 일제히 해킹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 뉴스에도 타지 않은 사건인데, 그때 모니터에 나타난 심볼이 누더기 토끼 인형이었다.
<너희가 일본을 망치고 있다>라고 계속 외친 토끼 인형.
일본 해킹계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고, 그 범인이 바로 눈앞의 이치로 교수였다. 그의 해킹 능력을 높이 산 일본 정부는 그에게 보안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했다.
그러며 교수직도 제안했는데, 그가 택한 건 놀랍게도 이곳 미나토 대학이었다.
‘한때 방황한 아이들도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이유였지.’
이 모든 이야기는 이치로 교수가 말해 준 것이었다.
"그, 그건 잊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보니 더 이상 놀릴 수가 없었다. 이치로 교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런데 제 연구에 관심이 있다고요? 알고 계시겠지만, 제 연구 분야는 보안과 안티 바이러스입니다. 기업 보안에 있어 제 프로그램을 따라올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사람답지 않은 직설적인 화법.
종혁은 이질감을 느꼈다.
‘급하다? 왜?’
그가 만났던 이치로 교수는 삶에 달관했다고 말할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흠칫!
‘무슨 일이 있군.’
종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설마 그 일인가?’
어떤 사건이었는지 끝까지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2001년 한국으로 귀화를 했었다. 한때 방황했지만 다시 시작하려는 아이들을 위해 더 좋은 대학의 교수직을 걷어찼을 만큼 일본을 사랑했던 그가.
"흠흠. 굳이 시간 낭비하지 않으려는 겁니다. 금액이 맞으면 판다. 시장의 간단한 논리죠."
"음."
종혁은 불편해지는 마음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원하는 건 다른 연구입니다."
"다른 연구요?"
"더티 버니 말입니다."
"그걸 또 왜 말하……."
인상을 찌푸리던 이치로 교수는 순간 하얗게 질렸다.
종혁은 불신으로 물드는 그 두 눈을 보며 폭탄을 던졌다.
"해킹."
벌떡!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이치로 교수의 얼굴이 공포로 물든다.
"그, 그걸 어떻게……."
쿵쿵쿵! 흠칫!
이치로 교수는 다급히 문을 보았다.
그는 종혁과 문을 번갈아 보며 갈등에 빠졌다.
쿵쿵쿵!
"자, 잠시."
애써 말한 그는 얼른 문을 열었다.
"헉?!"
"교수. 잘 있었…… 호호. 누가 있네요. 좀 있다가 봐요."
"……으응."
종혁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맹수 앞에서 벌벌 떠는 초식동물처럼 반응한다.
‘설마 저 여자인가?’
이치로 교수로 하여금 일본을 등지게 만든 이유.
이치로 교수가 절대 말하지 않은 사건.
쉽게 단정하면 안 되지만, 느낌이 딱 왔다.
26년 형사로서의 직감.
코가 간질거리며 고약한 냄새를 맡았다.
당장 머리채를 잡고 뺨을 후려친 다음, 뭔 일이냐 묻고 싶다.
종혁은 울컥 솟는 뜨거운 감정을 누르며 여성에게 다가갔다.
"오, 반갑습니다. 공대에서 이런 미녀를 볼 줄이야. 아, 전 이런 사람입니다."
"궈느 앤도 바그 호르디그스?"
일본인 특유의 영어 발음. 아니, 그냥 일본어다.
"한국의 투자 기업이죠. 실례가 안 된다면 연락처를 물어도 될까요? 너무 제 스타일이라서요."
노랑머리의 20대 여성은 종혁의 몸과 얼굴을 훑곤 눈을 빛냈다.
"아무한테나 주지 않는데……."
종혁은 옆에서 입술을 달싹이는 이치로 교수를 애써 무시했다.
그렇게 삐삐 번호를 말한 여성은 이치로 교수를 힐끗 보곤 몸을 돌렸다.
‘호. 삐삐라.’
옆으로 맨 가방에 화려하게 장식된 휴대전화가 액세서리처럼 달려 있는데도 삐삐 번호를 준다.
‘아, 맞아. 일본에선 친하지 않는 이상 곧바로 전화로 연락하는 건 실례지, 참.’
그래서 초면엔 이메일 주소나 삐삐 번호부터 알려 준다.
2000년 이후부터는 대부분 휴대전화, 소위 가라케라는 피처폰 전용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쿵!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앉은 이치로 교수는 이를 악물었다.
"제 피가 반은 한국인이기에 작은 충고 하나 하겠습니다. 저 아이와는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흠. 그런가요?"
‘맞구먼.’ 종혁은 눈빛을 가다듬었다.
"그건 생각해 보죠. 그럼 계속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이치로 교수는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아 보이는 모습을 보이던 그는 결국 한숨을 뱉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제가 개인적으로 연구한 게 해킹을 기본 골자로 하는 것이지만……."
"압니다. 해킹에 의한 컴퓨터 탐색 프로그램. 지금은 각국 정보부에서만 쓰이기에 일반인은 모르는 신개념 탐색 프로그램."
두 번 이상 포맷한 컴퓨터의 모든 파일과 기록을 복구하는 프로그램이다.
일명 디지털 포렌식.
그걸 한국에 와서 만든 사람이 바로 눈앞의 이치로 교수였다.
"아닌가요?"
종혁은 다시 경악하는 이치로 교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등하던 이치로 교수는 이내 곧 이를 악물었다.
"……팔겠습니다."
"예?"
"가격만 제대로 쳐 주십시오."
너무도 쉬운 허락에 종혁은 당황했다.
‘이거 진짜 심각하군.’
종혁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의 불씨가 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