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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54화 (54/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4화>

*  *  *

달그락.

미지근한 찻잔을 내려놓은 권회수는 차갑게 식어 버린 맞은편 자리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흘렸다.

"……허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더니."

실제로 겪고 나니 얼마나 미친놈인지 감이 잡힌다.

인성, 재능, 지능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데, 미친놈.

그런데 그런 놈이 다 늙어 관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아무리 벌어도 욕먹지 않은 일이라."

여태껏 눈에 보이는 현금만을 믿으며 살아왔던 그.

주식도 원금이 보전이 되지 않으면 담보로 잡지 않았다. 그렇기에 온갖 욕과 저주를 받았는데, 그땐 그럴 거면 돈을 빌리지 말았어야지 하는 생각에 이기적인 놈들의 개소리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 나이를 먹으니 가슴에 얹힌 떡처럼 숨통을 죄었다.

"허헛. 나도 늙은 게지."

웅성웅성.

벌컥!

마루가 좀 소란스럽더니 권아영이 들어와 몇 시간 전 종혁이 앉아 있던 자리에 양반다리를 틀며 앉았다.

"손님 왔다 갔어요?"

"쯧쯧. 과년한 계집이 앉는 자세하고는. 그래서 시집은 가겠어?"

"……."

또 그 말 하려고 불렀냐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다과상 옆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를 눌렀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달칵! 끼리리릭!

-김밥에 햄이 없대-!

"음. 됐다. 식사는 하셨어요?"

"……고얀 것. 어째 제 언니는 하나도 안 닮았는지."

"개성이에요."

혀를 찬 권회수는 새 찻잔에 차를 따라 내밀었다.

"웬일이세요? 아빠가 차를 다 주시고?"

"됐고. 요새 건물이며 사업 컨트롤이며 가출 청소년 쉼터며 꼬랑지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닌다며? 달리 성과는 없고."

찻잔을 들던 권아영의 몸이 굳었다.

그녀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가출 청소년 쉼터는 바로 오늘 나온 말이 아니었던가.

"이젠 딸도 감시하세요?"

"됐고. 가출 청소년 쉼터는 왜 하려는 게냐? 싸구려 동정 때문이야?"

"……도움이 되니까요. 정치인은 민심을 잡은 사람을 해하지 못하잖아요."

"그렇지."

‘이제야 봐줄만 하구먼.’ 이제야 머리가 돌아간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동정에서 시작한 일이라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이득을 봐야 했다.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인 권회수는 두툼한 노란 대봉투를 다과상에 내려놓았다.

퉁!

눈을 굴리며 봉투 속 내용물을 살핀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이건?"

"오 년만 묵혀도 최소 두 배는 건질 놈들로 추렸다."

건물 등기부 등본들이다.

"아, 아빠!"

"하나, 다섯 배, 열 배 진또배기는 여기에 있지."

"……네?"

권아영은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아버지 권회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왜 못 알아들어? 가출 청소년 쉼터건 부동산이건 해 줄 테니 자리 만들어 보라는 거 아냐?!"

이전에는 담보가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았던 부동산.

‘아무리 벌어도 욕을 안 먹는다고? 하긴 그렇지. 허헛.’

수십억 부동산을 보유해도, 수백억 부동산을 보유해도, 부러워하는 사람은 있을망정 저주하는 사람은 없다.

가슴이 뛰었다.

"……아빠?"

그녀의 머릿속이 헝클어졌다.

‘지, 지금 이 말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다는? 아, 아니지, 복지사…… 미치겠네. 왜? 갑자기 왜?’

호록!

권회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떤 놈이 그러더구나. 관에 함께 묻히지도 못할 돈, 남의 눈에서 피눈물 뽑아 모은 돈 뜻 깊게 써 보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 꼬라지를 보니 아직 정정하니 소일거리 삼아 일해 보는 게 어떠냐고. 늙을수록 일을 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종혁은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았다.

"어, 어떤 미친 인간이요?!"

권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지금이야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에 묻혀 있지만, 한땐 내로라하는 사업가나 정치인도 허리를 굽히게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아버지 권회수다.

가족에겐 호랑이 그 자체.

꼬장이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이 집에선 그의 말이 법이었다.

그래서 언니 내외, 소영이도 쉽게 찾아오지 못하지 않던가.

"있다. 그런 못된 놈이. 고얀 놈이."

‘훗날 손자손녀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가 되어 보는 건 어떠냐고? 허허, 미친놈.’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늙은 몸을 움직일 명분이 되어 주었다.

‘피눈물을 흐르게 한 죗값을 갚아 원한이 대물림되지 않게 해라…….’

권회수의 머릿속에 권아영과 소영의 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늙은 게지, 나도 늙은 게야. 그래서 그딴 말이 들리는 게지.’

그래도 죽어 갈 날짜가 오길 바라며 의미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아니, 벌써부터 몸이 달았다.

"아무튼 자리 만들 게야, 말 게야?"

"……비율은요?"

권아영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어차피 아버지 권회수가 한번 한다고 마음먹은 이상 막을 수가 없다.

"아빠 말대로라면 합작 법인을 세워야 할 텐데, 비율은요?"

직원이 아니라 본인이 가진 돈도 출자한다.

권회수는 냉철한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구 대 일. 너희가 구다."

"……그, 그걸 받아들이셨다고요?"

권아영은 뜨악했다.

"설마 요새 깜빡깜빡……."

"주둥이!"

"……아, 알았어요. 일주일 안까지 법인이랑 자리 하나 만들게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다시 싸늘해졌다.

"참견은 용납 못 해요. 제 회사고, 제 스타일이에요."

"그럴 생각도 없다."

콧방귀를 뀐 권회수는 손바닥만 한 수첩과 휴대전화를 들었다.

권아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예, 박 원장. 나 권회수올시다. 혹시 날 기억하시오?"

-……어, 어르신!

뾰족하게 울리는 여성의 음성에 권아영은 더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요즘도 불쌍한 아이들 거둬다 키우시오?"

"음?!"

-……흑!

울음을 삼키는 그 한마디는 참 많은 걸 말해 주었다.

"쯧쯧. 어쩌다가."

-모두 제 부덕이죠. 그런데 어쩐 일로 전화를 주셨나요?

"내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이다. 세상에 올바른 어른들의 도움을 바라는 아이들이 참 많다더구려. 박 원장이 그 아이들 모두 거둬 보는 건 어떻겠소? 돈밖에 없는 이 늙은이니 박 원장이 원하는 만큼 돈을 내어 드리리다."

-어르신?

"아빠?"

그렇게 가출 청소년 쉼터 프로젝트에 시동이 걸렸다.

*  *  *

-그러하니 사흘 뒤에 오시게. 자네 대신 손발이 되어 줄 사람은 봐야지.

"예, 알겠습니다. 모레 뵙겠습니다."

-그래, 그때 봄세.

전화를 끊은 종혁은 혀를 내둘렀다.

이야기를 끝낸 지 단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쉼터로 쓸 건물과 원장이 되어 줄 사람을 구했다.

그것도 모자라 구청과도 이야기를 끝냈다.

다음 주 내로 가출 청소년 쉼터는 구청장의 축전을 받으며 문을 열 것이다.

"예상한 것보다 더 대단한 분이시네."

역시 잘 꼬드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그는 양손에 하나씩 든 난을 고쳐 들며, 오늘따라 어수선한 서울지방검찰청의 싸늘한 복도를 걸었다.

웅성웅성.

제법 넓은 사무실 안, 사무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가슴에 검사 배지를 단 검사 몇 명이 잘해 보자며 강철선과 악수를 나눈다.

"어? 최종혁 선수?"

"오, 반가워요. 나 형사 3부 서규선이에요."

인사를 건네는 검사들의 눈이 빛난다.

명예 수사관으로 임명되자마자 한 건 크게 터트리며 중수부장을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소환하고, 차장검사를 로비까지 내려오게 만든 종혁.

"강 검사가 힘들게 하면 나한테 와요. 내가 더 잘해 줄 테니까."

"아니, 내가 더 잘 해 줄…… 어, 그 난은?"

종혁이 든 난을 알아본 검사들이 눈을 더 빛냈다.

"헉! 이 귀한 걸 어떻게?"

혼란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에, 씩 웃은 종혁은 왜인지 씩씩거리는 강철선에게 난을 내밀었다.

"영전 축하드려요."

"영전은 무신……."

"그래도 조직범죄보단 경제 범죄가 낫죠."

"그건 맞제."

모두 종혁 덕분이다.

이렇게 종혁의 말처럼 영전을 한 것도, 가족이 평화로운 것도 모두 종혁 덕분이다.

‘이 은혜를 우째 갚아야 하노.’

아마 평생 갚아도 못 갚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방해꾼들이 있었다.

"다들 안 갑니까? 축하 다 했으면 가이소, 이제."

"닥치고 있어 봐. 허어, 내가 이걸 직접 보게 되다니."

"크. 이 분홍 꽃의 영롱한 자태!"

강철선은 미간을 좁혔다.

"이런 풀때기가 뭐 좋다고……."

혀를 찬 강철선이 손을 확 뻗었다.

"조심해!"

"……깜짝아. 뭡니꺼?"

강철선은 재빨리 난의 밑에 손을 가져다 댄 검사들을 하찮게 응시했다.

"이게. 야, 강 검사! 그게 얼마짜린 줄 알아?!"

"싸울래, 이 자식아!"

"와, 와 이랍니까?"

종혁은 당황하는 그의 귀에 대고 난의 가격을 말했고, ‘히익!’ 하고 새된 소리를 낸 강철선은 양손으로 공손히 난을 받아 들었다.

다른 검사들도 재빨리 도왔다.

파르르 떨리는 손은 난을 내려놓고 나서야 멈췄다.

"뭐, 뭔 난이 내 월급보다 비싸노? 미칬나! 돈이 어디 있어가 이 비싼 걸……."

강철선은 입을 다물었고, 검사들은 눈을 빛냈다.

‘냄새도 잘 맡는데, 돈까지 있다?’

‘맞아. 몰래카메라 때 금감원에서 전화가 왔지?’

검사들의 눈이 더 빛나자, 아차 했던 강철선은 이내 가슴을 폈다. 이미 들켜 버린 이상 플랜 B였다.

"쯧. 뭘 이런 걸 다 가져왔나. 니캉 내캉 이런 사이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종혁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보란듯이 검사들을 응시했다. 검사들의 눈이 부러움으로 일그러졌고, 강철선의 콧대는 더 높아졌다.

"다들 일 안 합니꺼? 부장님 쫓아옵니데이."

"……쯧."

"아이고, 부럽다. 난 저런 거 선물해 주는 사람 없나."

검사들이 미련 가득한 발길을 억지로 떼며 나가자 흐흐 웃던 강철선은 종혁을 툭 치며 검지와 중지를 입에 가져갔다.

둘은 옥상으로 향했다.

"푸후."

1월 말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담배 연기를 흩어 버렸다.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영전을 했는데도 강철선의 얼굴이 밝지 않다.

‘아, 설마?’

"걱정이 되시는 거예요?"

움찔!

강철선은 피식 웃었다.

"내 속에 들어왔나? 닌 참 가끔 보면 점쟁이가 따로 없데이."

"하하."

점쟁이가 아니라 이해하는 거다.

종혁도 지능범죄수사대로 옮길 때 강철선과 똑같은 걱정을 했었다.

"맞다. 평생 조폭이나 살인범만 잡던 놈이 대가리 쓰는 놈들을 잘 잡을 수가 있을지 걱정이 된다. 아니."

‘나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지 걱정을 했지.’

"내 때메 억울한 피해자는 안 생길랑가 걱정이다."

종혁은 푸근히 웃었다.

‘이래서 좋아합니다.’

범인을 잡는 것보다 피해자부터 생각하는 그의 마인드를 말이다.

"아버님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있는 힘껏 도울게요."

"나도 못 믿는 내를 믿나?"

"제가 보아 온 아버님을 믿는 거죠."

"글나."

강철선은 피식 웃었다.

아들뻘의 말이지만, 가슴에 놓인 짐이 가벼워진다.

‘그래. 이리 진심으로 믿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못난 모습을 보여야겠나?’

무조건 해내야겠다며 강철선은 다짐했고, 종혁은 변화하는 그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강철선이 짓궂게 웃었다.

"근데 날 제대로 도울 수나 있겠나? 니 이제 일주일 남았데이."

"아?"

인턴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리고 곧 고 3의 시작이었다.

"우야노. 이제 니 좋아하는 수사 못 하겠네. 내가 힘 좀 써 볼까?"

"아, 그게……."

지이잉!

종혁은 미간을 좁혔다.

"받아라."

"예, 잠시."

몇 발 물러선 종혁은 전화를 받았다.

"예, 최종혁입니다."

-보스, 접니다.

"태규 씨?"

-작전 세력을 하나 발견해서 연락드렸습니다. 넥스트를 흔들려고 하더군요.

"넥스트를요?"

넥스트는 종혁이 태규에게 시켜 지분을 매입하라 말한 포털 사이트이다. 훗날 한국의 양대 포털 사이트 중 하나가 될 곳.

-보스가 훗날 법조인이 됐을 때 내밀 커리어와 영전하신 강 검사님을 위한 축하 선물이 될 듯한데…… 오지랖이었습니까?

"……아뇨."

왜 갑자기 작전에 대해 말하는지 의문이었던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정말 잘 말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했는데 잘됐군.’ 한국 닷컴 버블 때 활개를 치며 많은 이들을 도탄에 빠트린 사기꾼들과 작전 세력들.

경찰보다 먼저 움직이는 일이 거의 없는 게 검사이다 보니,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려야 하나 걱정을 했는데 돌파구가 생겼다.

‘그래, 검사는 이런 불편함이 있지.’

혐의가 있으면 얼마든지 자율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형사와 달리, 사건에 치이는 검사들은 쉽게 움직이기가 힘들다.

‘태규 씨가 이런 식으로도 도움이 되는군.’

미소가 더 짙어진 종혁은 전화를 끊으며 강철선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아니, 검사님. 지금 대가리 쓰는 놈들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털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으시죠?"

강철선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혐의의 입증부터 어려운 경제 범죄.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경제범죄형사부는 서울지방검찰청의 일등 부서이자 위로 향하는 필수 코스지만, 양날의 검이기도 했다.

"와? 방법이 있나?"

"표적 수사 한번 해 보실래요?"

"……응?"

강철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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