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53화 (53/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3화>

*  *  *

"그거 알아요? 사랑해요."

‘3%’라는 쪽지를 쥔 권아영은 방금 전 잡아먹으려 했던 건 어디 간 건지 얼굴에 환한 꽃을 피웠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종혁을 믿고 작은 도박을 한 그녀, 아니, 그들.

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박을.

사람을 믿는 최고의 도박을 한 결과가 그 짧은 시간 내에 이런 성과를 냈다.

그녀는 절대 종혁의 손을 놓지 않으리라 다시 한번 다짐했다.

"고백은 애인에게 하시고…… 권 PB, 아니 권 이사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일이요?"

종혁은 스키장에서 세운 계획을 말해 줬고, 권아영과 박태규는 눈을 깜빡였다.

"가출 청소년 쉼터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종혁의 표정은 진지했다.

"정확히는 갱생이 가능하거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을 돕는 겁니다. 단순히 숙식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교육과 의료, 법률, 카운슬링까지 제공하는."

"카운슬링?"

"겉으로 드러난 상처만이 전부는 아니죠. 마음의 상처도 치료해야죠."

"아."

회귀 전엔 하지 못했던 일.

아니, 승진에 목을 메느라 애써 외면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종혁은 그러며 박태규가 건넨 결과물을 두드렸다.

"이 돈이면 충분하겠죠?"

벌었다면 갚아야 했다.

그리고 종혁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갚을 생각이었다.

"아."

권아영과 박태규의 눈이 흔들렸다.

‘진짜…….’

"그거 알아요?"

"사랑한다고요?"

"이래서 보스를 좋아한다고요."

그 어떤 열아홉 살이 이런 걸 생각해 낼까.

그들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어깨를 폈다.

이런 사람이 자신들의 보스였다.

그들 사이에 훈훈한 공기가 흘렀다.

"아, 그런데 부동산 매입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죠? 신사옥 이전은요?"

움찔!

종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그게……."

대답이 궁색해지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박태규는 TV 리모컨을 들었다. 괜히 휘말리기 싫었다.

띠잉!

-익명의 제보자의 제보로 인해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잠자리 소년들의 유골이 발견됐다는 소식입니다. 현장에 가 있는…….

"어머!"

"오?!"

권아영과 박태규는 깜짝 놀랐지만, 종혁은 눈을 감았다.

형사들 가슴에 새겨진 무거운 짐.

김선우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과 같은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

종혁은 회귀 전보다 일찍 발견된, 아니, 발견하게 만든 그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온전한 모습으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춥고 어두운 곳에서 벗어나.

‘부디 좋은 곳에 가기를.’

종혁은 조용히 명복을 빌었다.

*  *  *

권&박 홀딩스를 나선 종혁은 머리를 긁었다.

"많이 바쁜가 보네."

능력 좋은 그녀가 부동산 일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만했다.

준형 등과 계약을 맺은 정영탁의 연예기획사 EBM 관리와 정인철의 봉제 인형 사업 컨트롤에, IMF 피해자 구제 투자 사업, 소영이 아버님이 추천한 이들의 투자 검토, 인맥 관리 등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권 이사에게도 믿을 수 있는 손과 발이 있으면 좋으련만…… 나도."

손과 발뿐만 아니라 눈과 귀까지 되어 줄 사람들.

정보원.

형사 하면 정보원이었다.

형사에게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인 정보원.

회귀 전, 종혁도 개인적으로 부린 정보원만 여덟 명이 넘었다.

방금 전 모든 포지션을 정리한 결과를 본 후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너희가 그렇게 은밀하다고?"

그렇다면 개미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촘촘한 그물을 치면 된다. 어느 정도의 돈이 들어갈지 상상조차 안 가서 얼마 전까진 엄두도 못 냈던 일.

종혁의 머릿속에 그 일을 맡길 만한 몇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하, 이 시기엔 죄다 미짜네."

성인인 몇 명은 행동거지가 좀 나쁘고, 나머진 입이 가볍다.

골치를 썩일 이들을 제하니 죄다 미성년자.

다른 의미로 골치가 아팠다.

"뭐, 일단 그 전에."

이는 누구도 모르게 진행되어야 할 일.

아주 오래전, 거의 97년도부터 따라붙었던 거머리를 떼어 내야 했다.

"이 정도 봐줬으면 됐지."

만약 태국이나 한상원 검거, 합숙이나 가족 여행 때 따라왔다면 벌써 치워 버렸을 존재들. 도로가 세워진 봉고차 옆을 지나던 종혁은 주먹을 들었다.

그리고 봉고차의 조수석 창문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쾅! 쾅! 쾅! 콰자작!

금이 가며 부서진, 검은 선팅의 창문.

몸을 움츠린 항공 점퍼 사내의 손에 사진기가 쥐여 있다.

운전석에 앉은 중년인도 마찬가지다.

종혁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유명 운동선수들에게도 따라붙는 파파라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면상이 범죄자형이다.

"야, 너희 뭐냐?"

"이런 씨!"

푸드등!

대답 대신 시동부터 켜려는 운전석 사내.

"뭐, 말할 생각 없단 거지?"

종혁은 보조석에 앉은 사내의 멱살을 잡아 끌어냈다.

"으허억?!"

"겨, 경식아!"

봉두난발에 흥건한 코피.

얼굴이 엉망인 30대, 40대 남성이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관객이 되어 지켜보기 시작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예, 예. 그러니까 저희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최 선수?"

"……쯧."

아쉽지만, 현재로써는 이들을 처벌할 법령이 없다.

그건 미래도 마찬가지.

종혁은 손을 저었고, 재빨리 일어난 그들은 차에 탑승해 부리나케 도망쳤다.

부아아앙!

멀어지는 봉고차를 보던 종혁은 그들이 알려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종혁은 미간을 좁혔다.

늙은 노인의 음성인데, 왜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누구쇼?"

-…….

*  *  *

"이야.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다 있네."

고풍스러운 한옥 담장이 쭉 세워져 있다.

재벌가들이 몰려 사는 동네에서도 본 적이 없는 한옥이다.

"누굴까."

종혁은 몸을 풀며 대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중 나온 노인을 보곤 낯빛을 굳혔다.

"어서 오세요, 최종혁 선수."

가슴팍에 변호사 황금 배지를 차고 있는 노인.

"당신, 아니, 어르신은……."

기억에 있는 몽타주다.

박태규를 구출할 당시 봤던 사람.

거기까지 생각한 종혁은 눈을 껌뻑였다.

"여기가 설마 소영이 외할아버님 댁이었습니까?"

노인은 박태규 사건 때 경찰서에 왔던 권아영의 대변인 이영창 변호사였다. 서울지방검찰청의 지검장을 지낸 입지적인 인물.

김종두 반장이 후에 말해 줬기에 권아영의 배경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왜 익숙한 목소리였는지에 대한 의문은 풀렸지만, 머릿속은 더 헝클어졌다.

‘권 이사 아버지가 날 왜?’

쪼르륵!

옥빛의 찻물이 찻잔에 따라진다.

"드시오."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종혁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들며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을 응시했다.

마른 몸매지만, 등이 꼿꼿이 펴져 있는 호랑이 같은 기세의 노인.

하얀 한복 때문인지 더 깐깐하게 느껴진다.

‘권회수, 통칭 권 영감.’

금융실명제의 철퇴를 맞기 전까지 명동 바닥을 주름잡던 사채업자이다. 종혁이 살던 시대엔 없던 인물. 아니, 정확히는 너무 오래전 은퇴했기에 그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은 것뿐이다.

호록!

‘괜찮네.’

제법 상등품의 차다.

"미안합니다."

탁!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종혁은 혀를 찼다.

너무 이른 타이밍의 사과다. 그러면서도 진심이 느껴진다.

‘명동의 돈 귀신이라 불리던 양반이 존댓말이라…….’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종혁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째서입니까?"

감정이 사라진 눈이 권회수를 응시한다.

아무리 권아영의 부친이라고 해도 감시한 걸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처음엔 과년한 계집이 시집갈 생각은 안 하고, 또 강짜를 부리나 싶었습니다. 하나, 딸아이가 내민 자료를 보니 아니더군요."

"소영이 이모, 아니, 권 이사가 저에 대해 말했군요."

권회수는 많은 걸 알고 있다.

더 이상 내숭은 필요 없었다.

‘호.’

딸 권아영을 부르는 호칭이 너무 자연스럽다.

게다가 호칭이 바뀌자 기세도 바뀌었다.

19살 나이가 생각나지 않을 만큼 묵직한 기세.

한 분야에서 성공하지 않은 이상 가질 수 없는 기세다.

‘진실로 이 청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한 것뿐이지만,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경악스럽다. 하나 권회수는 그런 걸 겉으로 표현할 만큼 허튼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었다.

"예. 그래서 뭐 하는 놈일까."

권회수가 고개를 비틀며 내밀었다.

돈 귀신의 눈이 웃음으로 번들거렸다.

"어떤 놈이기에 또 그 아이의 마음을 흔들었나 궁금해졌습니다."

사내처럼 괄괄하고 공부에 영 관심이 없었던 권아영은 어느 날 갑자기 유학을 가겠단 폭탄을 터트렸다.

알아보니 학교 선배의 손에 이끌려 한국대 경제학과 교수의 간담회에 참석했는데, 그때 그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다고 했다.

이후 권아영은 매일 코피를 쏟으며 공부해 성적을 끌어올리더니 결국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름 짓이나 하며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도 모를 만큼 총기가 흐려지던 그 아이를 다시 뜨겁게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종혁은 속으로 혀를 찼다.

‘부정이군.’

아버지의 사랑이다.

짜증이 나지만, 마냥 안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결과는 물어볼 것도 없겠군요."

돈 귀신이라 불릴 만큼 피도 눈물도 없었던 그다.

영 아니었다면, 벌써 떼어 놨을 것이다.

"예. 훌륭하더군요."

어느 하나 꼽지 못할 만큼 모든 게 훌륭했다.

솔직히 종혁이 드라마 속 등장인물인 줄 알았다.

"이후부턴 매일 이런 차를 마시는 것 말곤 할 일 없는 심심한 늙은이의 작은 호기심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아영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못 당하겠군.’ 세월, 나이, 연륜. 모든 게 까마득히 앞서는 노인이 서른 넘은 딸을 위해 열아홉 살짜리에게 허리를 굽힌다.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가 감시를 한 것도 따져 물을 수가 없게 되었다.

‘능구렁이 같으니. 쯧.’?

하지만 괜한 심술이 들었다.

‘어쩐다. 흠…… 아!’

사채업자. 세상만사 수많은 인간군상을 보아 온 직종.

떠오르는 게 있었다.

탁!

종혁은 다 마신 찻잔을 내려놨다.

"제 덕분에 재산을 몇 배 불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융실명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아야 했던 재산을 모두 복구하셨겠죠."

"음."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결국 당신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감시한 게 아니냐 하는 물음. 딸을 팔지 말고 솔직해지라는 물음이었다.

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권회수의 낯빛이 흐려졌다.

그러다 울컥 솟는 게 있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 돈을 못 벌었을 놈이! 감히!’

하나 공부하던 시절처럼 뜨겁게 움직이는 딸이 눈에 밟힌다.

"그 돈."

……까득.

‘결국 이놈도 돈에 미친놈이었던가.’

하지만 딸이 웬수다.

"원한다면……."

"뜻 깊게 써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음?"

"겸사겸사 소일거리도 하시면서. 더 이상 심심하지 않게. 아무리 벌어도 욕먹지 않은 일을."

권회수는 씩 웃는 종혁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종혁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