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52화>
16. 부모에게 다시 돌아가다
사락사락.
대검이 세워진 이후 해결된 사건과 미제 사건이 빼곡하게 모인 대검의 사건 자료실. 그 방대한 넓이의 자료실에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탁!
어느 두꺼운 사건 자료를 덮은 종혁의 눈이 번들거렸다.
"찾았다."
또 하나를 찾았다.
그 조직이 자살을 시킨 거라 의심이 되는 사건을.
이번 피해자는 서울의 3선 시의원. 재개발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던 그는 비리가 포착되면서 수사에 들어갔는데, 1996년 4월 자살을 한 걸로 수사가 종결됐다.
이 사건도 김 의원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와 연결되는 중간 다리가 증발해 버렸다.
‘차량도, 목격자도, 사람도…….’
돈을 옮길 때 쓴 차량도 사라져 버렸고, 돈을 옮긴 사람도 누구 한 명 목격한 사람이 없다.
분명 있어야 함에도 마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그가 회귀 전 조사하던 사건들처럼.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은 포지션.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인 포지션에서 움직이다가 사라졌다.
하수구 악취보다 구린 냄새가 풍겼다.
"96년."
이게 정말이라면 이 조직의 역사가 너무 깊다.
종혁이 죽임을 당하기 직전까지 생각하면 최소 30년.
파면 팔수록 이가 갈린다.
그리고 지독한 고독도 가슴을 갉아먹는다.
이 조직에 대해 공유할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 함께 찾을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강철선을 지원하는 거지만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같이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흠.’
갑자기 종혁의 머리 한구석이 간질거린다.
‘뭐지? 뭐가 걸리는 거지?’
김 의원 사건과 다 똑같은데 뭔가 다른 게 있는 느낌.
‘다른 게 있다면 이 사건은 종결된 거고, 김 의원 사건은 현재 진행형인…….’
저벅저벅!
"뭐 찾는 거라도 있어요?"
마치 도서관의 사서처럼 이 자료실을 지키는 사람이 다가온다.
은퇴를 코앞에 둔 60대 중반의 노인.
"여러 사건들을 살피던데."
종혁은 주름이 잡히게 웃는 그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이 대한민국에 미제 사건들이 참 많다 싶어서요. 이 사건도 몸통과 머리는 잡았지만, 배달부가 사라져서 일망타진했다고 볼 수 없잖아요."
사건명을 본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휴, 얼른 과학이 발전돼야 그런 사람들을 잡을 텐데……."
노인은 그러며 주위에서 하나의 박스를 꺼냈다.
"이 사건도 그렇죠."
"……아."
박스에 적힌 사건명을 본 종혁은 탄식을 뱉었다.
‘이게 대검에 있구나.’
김선우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
그가 회귀하기 전까지 범인을 잡지 못한, 영구 미제로 남은 사건이자 대한민국 3대 영구 미제 사건 중 하나이다.
‘이걸 잊고 있었구나.’
노인의 눈이 빛났다.
"기억해요?"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중앙경찰학교에 다닐 때나 연수 때 질리도록 범인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형사들이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건.
"역시 검사님을 꿈꾸는 분답게 기억력이 좋네요."
"에이, 여기 있는 모든 사건을 외우고 계신 어르신만 할까요."
종혁은 씩 웃었다.
인간 컴퓨터나 다름없는 그.
"커피 좋아하세요?"
"어이쿠. 미래의 검사님이 이 뒷방 늙은이에게 바라는 게 있구나."
"제가요? 설마요. 그저……."
지이잉! 지이잉!
"잠시만요."
종혁은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는 전화를 받았다.
-어데고? 밥 묵자!
"……네."
노인은 푸근하게 웃었다.
"가 봐요. 난 언제나 여기 있을 테니까."
"쩝. 그럼 다음에 뵐게요."
노인은 얼른 가 보라는 듯 손을 저었고, 사건 파일을 원래 자리에 꽂은 종혁은 사건 자료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종혁을 기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노인은 방금 전까지 종혁이 읽던 사건 파일 박스를 돌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른 박스를 가져와 가렸다.
* * *
시의회 건물을 나온 종혁은 한숨을 내뱉었다.
"공통되는 게 없네."
혹여 배후가 정치인이 아닐까 싶어서, 자살을 당한 걸로 추정되는 시의원이나 구의원이 소속된 지역구의 당시 국회의원을 찾아봤지만, 공통되는 인물이 없다.
당파도 어느 의원은 야당이고, 어느 의원은 여당이었다.
그들 비리에 얽힌 다른 인물들도 공통점이 없었다.
혹시나는 역시나가 되었다.
톡톡.
다시 쓰기 시작한 형사 수첩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던 종혁은 혀를 찼다.
"하긴 이렇게 쉽게 꼬리가 드러날 거였으면 벌써 잡았지."
‘다른 점이 뭘까.’ 종결과 현재 진행형이기에 다른 점.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 답은 하나이다.
막막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하는 행동.
회귀 전 형사인 그가 지겹도록 했던 행동.
"발로 뛰어야지."
보이지 않아 막막하면 보일 때까지 뛰면 된다.
그게 형사다.
마침 ‘수사관증’도 있지 않던가. 비록 ‘명예’이긴 하지만.
종혁은 씩 웃었다.
"자, 그럼……."
지이잉!
"아."
오랜만에 움직일 생각에 달았던 몸이 전화 한 통으로 팍 식어 버렸다. 종혁이 전화를 받았다.
"정말입니까?! ……알겠습니다. 곧 가죠."
전화를 끊은 종혁은 얼른 도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택시! 여의도요!"
그는 권&박 홀딩스로 향했다.
* * *
"에프릴 닷컴 매수해 주세요!"
"AT 풀 매수 들어갑니다."
"회계 자료 아직 안 넘어왔어요!"
권&박 홀딩스 2층의 사무실, 미국투자 팀. 전화기를 붙든 몇몇 남녀들의 몸에서 뜨거운 열정이 뿜어져 나온다.
"예, 부탁합니다."
달칵!
전화를 끊은 30대 중반의 사내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한숨을 토해 냈다.
"푸후."
됐다. 성공이었다.
권&박 홀딩스가 하는 거대한 공사에 주춧돌 하나를 더 놓았다.
짜릿한 성취감이 그의 온몸을 뒤흔들었다.
똑똑!
30대 초반의 여성이 그의 책상을 두드렸다.
"선배, 커피?"
"오, 시간 되나 봐?"
"모두 끝났거든요."
짙은 피로 속에도 성취감이 가득 서려 있다.
남성의 눈이 빛났다.
"……오케이."
둘은 탕비실로 향했다.
쪼르륵.
까만 원두커피가 두 개의 머그잔에 담겼다.
"크. 커피 맛 죽이고."
"동감. 여의도 그 어디든 우리 회사처럼 진짜 커피를 주는 곳은 없을걸요? 죄다 몸에 안 좋은 믹스 커피나 블랙커피지."
그뿐만이 아니다. 원하는 모든 부식거리가 무한으로 제공되고, 직원 복지도 미국 월가에서나 듣던 수준이다.
보너스는 매달 나오는 수준.
여의도 증권가의 신화 박태규가 만든 이 회사는 모든 게 상상 이상이었다.
‘그중 백미는 무조건 실력이라는 거지.’
사내 정치? 없다.
회식? 없다.
주말 등산? 없다.
오직 실력. 실력으로만 직위와 연봉, 보너스가 정해진다.
여성인 그녀에게 있어 이 직장은 꿈에서나 그리던 파라다이스였다.
"풀어 봐. 얼마나 벌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러시아 모라토리엄을 작업한 박태규에게 일부분의 일감을 넘겨받은 여성.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넘겨받은 일감을 모두 정리한 결과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왔다.
"제가 맡은 것만 80배요. 총액은……."
마치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핀 그녀의 귓속말에 남성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이야? 그게 가능한 거였어?"
"나도 이게 꿈이면 좋겠어요."
미쳤다. 그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었다.
"그, 그렇다면 이번 작업으로 인한 총수익은 대체 얼마……."
"몰라요. 추정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에요."
"네가? 말이 돼?"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을 받아 홧김에 증권사를 박차고 나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 능력만큼은 최고라 평가받았다.
"대표님이 혼자 다 했잖아요.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어요. 우리 대표님은 정말 미친 인간이라는 거."
"동감이다. ……하긴 이러니 IMF 때 그렇게 털어먹은 거겠지."
어찌어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평가되던 종금사 다섯 곳과 은행 하나가 무너졌다.
박태규가 해낸 일이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던 여성은 눈빛을 빛냈다.
"그래서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닷컴 버블 붕괴?"
"네. 정말 일어날 것 같아요?"
미국 닷컴 활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연일 고공행진이고, 국내도 그에 편승에 시동을 걸고 있다.
슬슬 닷컴 불패라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호록!
"반반. 솔직히 우리 대표님이 확신하지 않았다면, 방금 네 말을 듣지 않았다면 무조건 닷컴 불패에 올인했을 거야."
IMF와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예견.
박태규는 그들 증권맨들에게 있어 신의 손이었다.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렇지. 아, 시간 됐다. 다 마셨으면 들어가자."
고개를 끄덕인 둘은 탕비실을 나왔다.
"어? 쟤는?"
계단을 오르는 종혁을 발견한 여성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최 선수, 자주 보네. 아무리 컴퓨터를 하러 온다지만. 흠."
"왜요. 얼굴과 몸이 좋잖아요. 어머. 눈 마주쳤다."
종혁이 손을 흔들어 주자 여성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고, 남성은 그런 그녀를 어이없다는 듯 보았다.
"그거 범죄예요, 노처녀 아줌마."
"아직 노처녀 아니거든요!"
"서른한 살이?"
"야."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통통!
종혁은 3층 박태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Yes. That’s right."
손가락을 펴서 기다려 달란 신호를 준 그는 이내 곧 전화를 끊으며 활짝 웃었다.
"보스!"
"새로 뽑은 직원들은 좀 어때요?"
박태규는 미소로 선대답을 했다.
"권 이사가 정말 노력해 줬습니다."
최고라는 소리였다.
종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규 씨가 이제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돼서 다행이네요."
"하하. 걱정해 주셨습니까?"
"저야 언제나 태규 씨를 걱정하죠. 그래서 스키장에서 푹 쉬도록 해 드렸잖아요. 아, 이틀째 저녁에 권 PB랑……."
"무슨 오해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아닙니다. 여기 포지션을 모두 정리한…… 결과입니다."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모든 포지션을 정리한 결과.
피식 웃으며 용지를 받아 들어 살핀 종혁은 이내 눈을 비볐다.
하지만 숫자는 방금 전 봤던 그대로였다.
거북이 눈처럼 끔뻑이던 종혁의 눈이 박태규를 보았다.
"왜죠?"
그때도 경악스러운 액수였지만, 지금은 눈앞이 컴컴한 수준이다.
2차로 정리했을 때 액수의 딱 두 배.
박태규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러시아. 생각보다 막장인 나라더군요."
2차로 정리했을 때, 약 80퍼센트를 털어 냈었다.
그래서 모두 정리하면 얼마 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머지 20퍼센트가 진짜배기였다.
박태규도 정리를 하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모두 러시아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만들어진 상황.
이런 박태규의 말에 종혁은 피식 웃었다.
‘이거 나탈리아가 날 잡아먹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그보다는 이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뭐든 할 수 있겠지.’
대기업을 사는 것 말고는 뭐든.
그러자 하나의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발로 뛰는 것도 좋지만, 그보단…….’
"보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로."
종혁은 박태규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그 두 눈을 또렷이 응시했다. 그 뜨거운 시선에 박태규의 가슴이 술렁였다.
뿌듯하면서도 자긍심이 가득 차올랐다.
"보스……."
"그리고 이렇게 해 주신 분에게는 선물이 있어야겠죠."
"예?"
종혁은 결과가 적힌 용지를 뒤집어 ‘10%’라는 숫자와 기호를 썼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박태규는 펄쩍 뛰었다.
"너, 너무 많습니다!"
"아니요."
종혁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박태규의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리 미리 예상했다지만, 태규 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거액을 벌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이는 진심이다.
애초 2차로 정리했을 때조차도 예상했던 것보다 수십 배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않았던가.
"종혁 씨……."
박태규의 가슴에 방금 전과 다른 의미의 자긍심이 차오른다.
‘이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가…….’
얼마 전처럼 완벽하지 못한 결과물이 아니라 완전한 결과물로 인해 받는 인정. 왜인지 울 것 같았다.
"대신 어디 가지 말고 계속 나와 함께 있어 주세요."
"예, 암요. 당연히 그래야죠."
종혁은 코가 붉어지는 그를 보며 따뜻하게 웃었고, 사무실 분위기는 훈훈해졌다.
벌컥!
"보스 여기 있…… 어머? 둘이 연애해요?"
"음? 으핫!"
종혁은 재빨리 손을 빼는 박태규를 음흉하게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씩 웃었다.
"아, 미안합니다. 제가 애인분 손을 잡고 말았네요."
순간 사무실 공기가 얼었다.
"……아니거든요!"
"절대 아닙니다!"
‘맞구먼, 뭘.’ 어쩜 이렇게 마음이 잘 맞는지.
종혁은 귀를 후비며 낄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