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42화>
12. 도주의 달인
"친구들을 만나랬지 여행을 가란 게 아니었는데."
"나도 이제 고 3이고 하니 잠깐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거예요. 미안해, 엄마."
여행.
합숙이나 대회 출전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떠나는 거다.
지금껏 품 안에만 있던 아들이 품을 벗어나 날갯짓을 하려고 하자 고정숙은 섭섭해졌다.
지금까지 홀로 키워 오며 못해 준 게 더 많은 하나뿐인 아들이라 시원하고 대견했지만 그보단 섭섭함이 컸다.
언제나 품 안에서만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너무 갑작스럽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았어. 조심히 갔다 와."
부모로서 자식의 성장을 막을 수 없다.
종혁은 작은 체구의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더 말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돌아섰지만, 서운함이 가득했던 그녀는 아들의 팔을 쓸어내렸다.
"밥 잘 챙겨 먹고, 아프지 말고, 사고 치지 말고."
"엄마도. 괜히 귀찮다고 물 말아서 김치만 먹지 말고, 아프면 병원 가고."
"그래. 가. 연락 자주 하고."
"다녀올게요."
‘죄송합니다.’ 쿵!?
등 뒤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종혁은 몸을 돌리며 이를 갈았다.
정보에 대한 출처를 제대로 밝힐 수만 있어도 이러진 않았을 일. 아는 지인에게 들었다고 둘러대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워낙 대단한 놈이라 이쪽도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까득!
"이렇게 된 이상 넌 무조건 잡는다."
밖으로 나온 종혁은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청계천이요!"
* * *
-나도! 나도 여행 가고 싶은데!
전화기 너머, 드러누워 발버둥 치는 수호.
-여자 조심해. 여자는 나 빼고 다 여우야! 알았지?
귀여운 말을 하며 투정을 부리는 소영.
혹여 찾아올까 전화를 한 종혁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돌아다는 대로 안쪽 골목, 그런 종혁을 안내하다 멈춘 50대 여성이 종혁의 위아래를 훑는다.
"가출은 아니죠?"
"가출하는 놈이 이렇게 속옷이나 옷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겠어요?"
종혁은 백팩과 스포츠 백을 들고 있었다.
"……하긴. 미안해요. 요새 밀레니엄이다, 세상이 곧 망한다 해서 마지막을 즐기겠다고 가출하는 애들이 워낙 많아서 그래. 우리 옆집 애도 그렇게 가출했어."
"그래요? 뭔 핑계가 그렇게 거창하대요?"
"호호호! 내 말이. 아, 주택 사글세보다는 원룸이 좋다고?"
"혼자 살 거라서 넓은 곳보다는 좁아도 깨끗한 곳이 좋아요. 요새 금리 안 좋아서 월세 매물 많죠?"
"어머나. 그런 것도 알아요? 뉘집 아들인지 엄청 야무지네. 그래서 그렇게 까다롭나?"
벌써 3개의 집을 패스했다.
"아, 저기 어때요?"
복덕방 아주머니가 가리키는 원룸을 본 종혁은 주위를 둘러봤다가 눈을 빛냈다.
‘드디어 여기에 왔군.’
생각보다 빨랐다.
"그보다 저기는 어때요? 채광이 좋을 것 같은데."
종혁은 하얀색 맨션을 가리켰다.
"저기 좋죠. 지은 지 얼마 안 돼서 튼튼하고. 그런데 매물이 있을지 모르겠네…… 잠시만."
여기저기 전화를 건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쩌죠? 매물이 없다는데…… 그보단 저 맞은편 원룸은 어때요? 작년에 지은 건데 엄청 깨끗해."
"으음."
종혁은 찢어지려는 입을 억지로 감추며 고민하는 척했다.
본디 감시는 같은 건물보다 그 맞은편, 특히 입구가 보이는 곳이 좋았다.
즉, 이 동네에 도착하자마자 노렸던 건물이란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한번 보죠."
여러 개의 방 중 하나를 택한 종혁은 그 자리에서 바로 가계약을 했다.
"한 달 월세는 지금 은행 가서 쏴 드릴게요. 그리고 일주일 뒤에 어머니 오시면 그때 정식으로 계약서 쓸게요."
지방이라 그런지 월세가 무척 쌌다.
"호호. 젊은 사람이라 화끈하네! 사장님 땡잡으셨어. 이 힘든 시기에 방 하나 나가는 게 어디야?"
"어흠.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요."
원룸 주인과 복덕방 아주머니가 나가자 종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것저것 물어 오는 복덕방 아주머니 때문에 꽤 곤욕스러웠다. 그래도 성실히 대답한 건 이 동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해서였다.
동네 온갖 소문의 근원지인 미용실 원장님과 복덕방 주인.
이로써 가구 같은 걸 들이는 모습을 보이면 동네에 완전히 녹아드는 거다.
"크. 최종혁. 돈이 있으니까 이렇게 편하게 잠복을 하는구나."
형사 시절, 언제 범인이 나타날지도 모르기에 비싼 원룸은 꿈도 못 꿨다. 거의 차에서 감시하다 교대한 후 사우나에서 잤고, 정말 어쩌다 모텔이었다.
"차는 안 되지. 차는."
모르는 차가 동네에 있는 순간 튀어 버릴 놈이다.
그렇기에 이놈을 잡기 위해 97만여 명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의 지방경찰청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었었다.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 행각을 벌인 한상원. 놀랍게도 그 와중에 범죄까지 저지른 악질이다.
"그러게 왜 일기 같은 걸 썼니."
지난 그의 범행과 탈출 경로, 그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두 적힌 일기.
"몇 호인지 적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한상원은 만난 여성들의 신원에 대해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 본인은 의리를 지키겠다 말했지만,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원활한 도주를 위해 이용한 것뿐인 주제에 무슨."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다.
창문에 서서 맨션을 바라보던 종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등에 멘 가방을 내려 열었다.
지이익!
메가폰을 닮은 작은 안테나와 컴퓨터 본체 반만 한 사각 기계.
청계천 뒷골목에서 구한 도청 장치이다.
튜닝을 거치기에 보급품보다 나은 성능을 자랑하는 이 시기 청계천표 물품들. 괜히 청계천에서는 돈만 있으면 탱크도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게 있는 이상 어차피 길어야 일주일."
문제는 한 동뿐인 5층짜리 맨션, 십수 개의 방 중 어디에 숨었냐는 것이지만 괜찮다. 알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크기의 작은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꾹 눌렀다.
-달링 알러뷰.
비실 웃은 그는 몸을 일으켰다.
"커튼 사야겠네."
그리고 침대나 가구도.
종혁은 한상원을 비롯해 동네 주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모든 걸 사기로 했다.
"역시 돈이 좋아."
오랜만에 하는 잠복이라서 그런지 가슴이 뛰었다.
* * *
짙은 암막 커튼에 숨어 찰칵찰칵.
맨션 입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주로 여성들을 찍던 종혁은 띵동띵동 벨이 울리자 카메라를 숨기고 암막 커튼을 활짝 열었다.
촤악!?
정오의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띵동! 띵동!
"예, 나갑니다!"
활짝 문을 여니 40대 중년인이 환하게 웃었다.
"떡 시키셨죠?"
종혁도 그가 든 박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왔구나!’
어디에 숨었는지 알아낼 방법.
아주 고전적인 방법.
바로 이사 떡 돌리기였다.
계산을 치른 종혁은 곧바로 움직였다.
"그래요. 이웃끼리 잘 지내 봐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옆집부터 차례로 떡을 돌린 종혁은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재잘거리던 아주머니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동네의 모든 소문은 어디든 한군데 모인 아주머니들에게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잠복을 할 땐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제일 우선순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들. 슈퍼 아주머니는 어제 뵀죠?"
"그러게. 어제 저기 원룸에 이사 온 총각이네."
그는 아까 전부터 보고 있었음에도 이제야 알아보는 척하는 한 아주머니의 모습에 웃음을 삼켰다.
"아, 이 총각이 어제 복덕방 언니가 말한 그 총각이야?"
"응. 이 총각이야. 공부를 하러 왔다나? 맞지? 어제 바리바리 짐을 옮기더니만 벌써 정리 끝났어? 방금까지 커튼 쳐져 있더니 이제 일어난 거야?"
"하하. 보셨어요?"
역시 넘쳐 나는 이웃 간의 정에 비밀이 없는 시기다웠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여기 이사 떡 좀 가져왔어요. 그리고 선물도요. 인형이에요."
커다란 봉지에 담긴 떡과 포장지에 싸인 무언가들.
아주머니들의 눈이 빛났다.
"어머. 젊은 총각이 이런 것도 알아?"
"어이구. 사람이 됐네, 됐어. 원룸에도 떡은 다 돌렸고?"
"아니요. 나중에 돌리려고요. 출근하신 것 같더라고요."
"하긴. 거기 원룸이 다 아침에 출근하긴 하지. 그래도 너무 늦게는 돌리지 마. 예쁜 아가씨들이랑 눈 맞을라!"
깔깔깔 웃음이 터졌고, 종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슈퍼 아주머니는 그 말을 한, 맨션 입구에서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를 퍽 밀쳤다.
"다 늙은 아줌탱이가 젊은 총각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하여튼 어제 야무지게 사는 걸 보니 도움 줄 건 없는 것 같고…… 떡이 그렇게 많은 걸 보니 주위에 다 돌리려는 거야?"
"다는 아니고. 이 근처만요. 이 앞에 맨션까지."
"저거?"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왜요? 안 돼요?"
"으응.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런 말을 해도 되나 갈등을 하던 슈퍼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소문이 좋지 못한 여자들이 사니까 조심해."
"소문이요?"
눈을 빛낸 종혁은 슬그머니 평상에 엉덩이를 뭉갰다.
"만날 오후에 나갔다가 새벽에 술 취해 들어오는 여자들이 많거든."
‘그렇지!’ 도주하는 동안 여자가 끊이지 않았던 한상원.
그와 함께 산 여성은 대부분 업소 여성이었다.
"아아. 걔네들 말하는 거지, 언니?"
"응, 걔네들. 뭐 이렇게 훤칠한 총각이 그런 데 한눈팔 사람은 아닐 테지만,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슈퍼 아주머니의 눈을 본 종혁은 입맛을 다셨다.
‘들켰네.’
이래서 얼굴이 알려지면 귀찮다.
그래도 더 이상 내색을 하지 않는 게 고마웠다.
"그래요? 혹시 몇 호, 몇 호인지는 아세요?"
"왜에? 혹시……."
"피하려고요."
아니다. 무조건 가야 했다.
이런 생각을 모르는 슈퍼 아주머니는 혹여 종혁이 나쁜 물에 물들까 얼른 방 호수들을 말했고, 종혁은 감사함을 표했다.
‘정말 귀중한 정보를 얻었군.’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군 결과가 바로 나온 것에 종혁은 주먹을 꾹 쥐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또 봐, 총각!"
손을 흔드는 아주머니들을 뒤로한 종혁은 맨션으로 향했다.
* * *
띵동! 띵동!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알몸의 여성을 끌어안은 채 자고 있던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숨을 죽인 그는 귀를 기울였다.
계…… 이사…… 떡……?
방음이 잘되지 않는 맨션이다 보니 희미하게 대화가 들린다.
‘젊은 사내 목소리. 이사 떡?’
"……누가 이사 온 건가?"
안심하며 다시 잠들려는 순간, 왜인지 뒷목의 솜털이 쭈뼛 선다.
‘설마?!’
팔을 빼낸 그는 재빨리 옷을 입고, 안방 창문의 커튼을 살짝 걷어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그렇게 한참 살핀 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닌데?"
주차 된 차, 지나는 사람, 거리의 분위기. 모두 평소와 같다.
수다쟁이 여편네들도 슈퍼 앞 평상에 앉아 평소처럼 깔깔거리며 웃고 있다.
"우웅. 상원 씨?"
허우적거리다 기어 온 여성이 한상원의 등을 끌어안는다.
"흐응. 상원 씨 냄새……."
한상원의 눈빛이 차가워졌다가 이내 호선을 그렸다.
"내 냄새가 그렇게 좋아?"
"좋아……."
"후훗. 알았어. 더 자."
"으응."
그 순간이었다.
띵동띵동.
"계세요? 맞은편 원룸에 이사 온 사람인데요. 이사 떡 좀 돌리러 왔습니다! 맛있는 찹쌀떡이에요!"
어느덧 옆집에서 들리는 소리에 여성의 눈이 떠졌다.
띵동! 띵동!
"안에 안 계세요?"
혀를 찬 여성은 몸을 일으켜 티셔츠를 입었다.
"나가지 마. 느낌이 안 좋아."
띵동! 띵동!?
"여보세요?"
띵동! 띵동!
"……저런 데도요? 나 이 시간에 잠 깨?"
"쯧."
한상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장실로 향했고, 여성은 현관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누구……."
현관문을 벌컥 연 여성은 침을 꼴깍 삼켰다.
지퍼가 열린 재킷 사이로 드러난 우람한 근육질 덩치에,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
꼬리 끝이 올라간 눈매가 사내다움을 물씬 풍기는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돌린다.
여성은 셔츠와 팬티만 입은 자신의 옷차림을 보곤 피식 웃었다.
‘귀엽네.’
일단 형사는 아니다.
형사치곤 너무 어렸다.
긴장을 푼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옆집 이사 갔어요."
"그래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 여기요. 맞은편 원룸에 이사 왔는데, 이사 떡을 돌리고 있거든요. 인형도요."
"인형?"
눈을 빛낸 그녀는 종혁이 내민 걸 받아 들고서 포장지를 벗겼다.
"어머? 곰 인형이네?"
"버튼 누르면 소리도 나와요."
-달링 알러뷰!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종혁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이것도 가지세요!"
"또 주는 거야?"
그녀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종혁의 모습에 다시 웃었다.
"고마워. 예쁘게 잘 키울게. 그리고 떡 잘 먹을게! 아."
그녀는 옆 신발장에 둔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언제 한번 놀러 와요! 잘해 줄게."
"비너스…… 유흥 주점? 유, 유미?"
동그래지는 눈에 깔깔 웃은 여성은 문을 닫았다.
그러곤 슬그머니 안방을 나오는 한상원에게 떡과 인형들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한상원은 인형들을 뺏다시피 가져와 모두 배를 갈랐다.
"흡?!"
"쉿!"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그는 인형 안에 있는 모든 장치들을 빼서 눌러 봤다.
-달링 알러뷰. 달링 알러뷰.
모든 기기에서 똑같은 소리가 나자 그제야 한상원의 눈빛이 풀렸다. 그는 여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 느낌이 안 좋아서."
"……히잉. 오랜만에 받은 인형 선물이었는데."
"내가 더 좋은 거 사 줄게."
"……약속이에요!"
상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여성은 그제야 마음을 달랠 수 있었다.
인형 잔해를 쓰레기통에 넣은 둘은 다시 안방으로 향했다.
한편 떡을 다 돌리고 맨션을 빠져나온 종혁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남자 냄새.’
슈퍼 앞 아주머니들이 알려 준 방들 중, 유일하게 유미라는 가명을 쓰는 여성에게서만 희미하게 남자 냄새가 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하는 업소 여자에게서 남자 냄새가 난다? 무조건 기둥서방이 있는 거다.
"찾았군."
그의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맺혔다.
이제 남은 건 한상원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이다.
도청 장치가 든 인형은 둘의 방에 있을 터.
"오늘 안에 끝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