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4화>
* * *
딱딱하게 굳은 종혁의 얼굴.
권아영과 박태규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딱 원하던 반응이라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오늘 아침 일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미쳤지! 내가 미쳤지! 권아영 이 미친년아!’
‘저 여자랑 왜…… 아오!’
"사랑싸움은 나중에 하시고요."
움찔!
종혁은 둘의 반응을 무시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거 대체 뭡니까? 혹시 저 몰래 범죄를 저지른 겁니까?"
종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부자거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수익은 말이 되지 않는다.
거의 예언서처럼 정보를 줬던 IMF 때와 달리, 러시아 모라토리엄은 ‘모라토리엄을 선포한다’라는 말 외에는 다른 정보를 주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니, 혹여 그렇더라도 이 정도면 거의 러시아에 들어가 있던 모든 기업과 내부거래를 한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설마 나탈리아가 정보를? 왜?’
시기상 맞지도 않았다.
종혁의 머릿속이 복잡해졌고, 권아영과 박태규는 그런 그를 보며 순간 서운함을 느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고, 그들이 준비한 서프라이즈 선물은 불발로 끝났다.
하지만.
오싹!
‘저, 저 눈은?!’
마치 유리알처럼 시리도록 투명해진 종혁의 눈동자.
‘안 돼!’
권아영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제 수익금의 70퍼센트예요, 종혁 씨."
"저도 70퍼센트입니다."
"……예?"
종혁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왜?’였다.
"왜요?"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둘은 이해하지 못하는 종혁의 반응에 당황했다.
그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권아영이었다.
‘이 사람,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어! 우리 돈이 자기 돈이라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거야! 그래서 돈을 왜 준 건지 이해를 못 하는 거라고! 뭐, 이런!’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니, 종혁은 권아영과 박태규 본인들을 부품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방금 전 추궁을 했던 것 때문에 생긴 설움이 봄날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 버렸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남은 걸로도 투자금의 몇 배인데, 여기서 더 욕심내면 그건 정말 욕심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제겐 너무 과분한 돈이었습니다."
"……허어."
‘이런 미련한 사람들 같으니. 더 영악해져도 될 텐데.’ 하지만 이게 이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다.
‘회사의 주인은 나’라는 생각에 일개미보다 더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쥐꼬리만 한 월급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이 시절 사람들.
종혁은 이런 그들의 마음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웠다.
"후회 없습니까?"
"난 여태까지 살면서 한번 내린 결정에 후회한 적이 없어요, 보스."
"하하. 어차피 돈이야 또 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벌게 해 줄 거잖습니까, 보스."
실제로도 종혁이 가진 미래의 정보라면 이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종혁을 믿고 작은 도박을 하는 것이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도박을.
사람을 믿는 최고의 도박을.
"보, 보스?"
종혁은 후회 없다며 콧대를 세운 권아영과, 어서 정보를 내놓으라고 능글맞게 웃는 박태규의 모습에 다시 한번 탄식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웃음이 튀어나왔다.
보스란 단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둘의 마음이 참 기꺼웠다.
"하하.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아자! 태규 씨!"
"예!"
짜악!?
종혁은 하이파이브를 했다가 황급히 외면하는 둘을 보며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다 낯빛을 굳혔다.
"보스라 불리게 됐으니 정말 보스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겠군요."
‘벌써?!’
‘이렇게 빨리?’
깜짝 놀란 둘은 진지해진 종혁의 눈빛에 집중을 했다.
종혁은 권아영 책상 위의 컴퓨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닷컴에 투자하십시오."
권아영과 박태규가 미간을 좁혔다.
"우리나라는 아닐 테고……."
한국의 닷컴 시장은 현재 그들이 가진 돈을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작다. 1997년 컴퓨터 보급화에 의해 현재는 컴퓨터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이지만 말이다.
"설마 미국의 닷컴을 말하는 겁니까?"
종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지금 닷컴 기세가 무섭기는 하더군요."
"맞아요. 제 월가 친구들도 닷컴 열풍은 계속된다고 했어요. 투자하려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거기다 보스도 투자하라잖아?’ 둘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몇 배나 벌 수 있을까. 그 짜릿한 손맛이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했다.
그걸 본 종혁은 혀를 찼다.
"뭔가 착각하시는군요."
"네?"
"우린 하락장에 투자를 할 겁니다."
"예?"
"……에엑?! 왜요?"
"자, 잠깐!"
박태규가 반발하는 권아영의 입을 막았다.
뭔가를 깨달은 듯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서, 설마 버블입니까? 저 일본 부동산처럼?"
"……헉!"
종혁은 박태규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잘 구했다니까. 이래서 미래에 그런 업적을 이룬 거겠지.’
대한민국 천만 개미들의 우상, 박태규.
"당연히 버블이죠. 개나 소나 닷컴만 달면, IT와 전혀 상관없는 회사도 기업명에 닷컴이란 글자만 달았을 뿐인데도 수백, 수천만 달러를 법니다. 이게 과연 정상적인 흐름인 걸까요?"
"아닙니다. 보스의 말을 듣고 나니 더 아니라고 느껴지는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의문……."
"투기."
종혁과 박태규의 시선이 생각에 잠긴 권아영에게로 향했다.
"그래! 묻지마 투기였던 거야! 그 많은 미국 국민들 전체가 묻지마를 하니까 깨닫지 못했던 거라고! 규모의 차이가 너무 크니까! 전 국민이 묻지마 투기를 할 거라고 어떤 미친놈이 생각하겠어?! 이거 맞죠? 내 생각이 맞는 거죠?!"
‘휘유. 권 PB도 만만치 않은데?’ 정말 든든하다.
이들이라면 믿을 수 있어서.
"권 PB 친구들이 있는 월가에서 그렇게 떠들어 댔는데, 누가 이걸 버블이라고 의심하겠습니까."
"맞아요! 그런 거예요! 월가가 국민들을 투기꾼으로 만든 거라고요!"
"그, 그래서 보스는 기간을 얼마로 보십니까? 버블이 터질 때까지!"
종혁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일 년."
철렁!?
흥분하던 그들의 몸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하늘이 높고 무서운지 모르고 날아오르는 닷컴은 2000년부터 금이 가기 시작해 2001년이 되면 와르르 무너질 겁니다. 저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도 상폐 직전까지 몰릴 테죠."
상장폐지. 대한민국 모든 컴퓨터에 깔려 있는 윈도우 97의 그 마이크로소프트가 상장폐지까지 몰린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종혁은 IMF 때 예언서에 가까운 포트폴리오를 만든 존재다.
"Holly Jesus…… 맙소사."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게 진실입니다.’ 끔찍한 고난을 겨우 이겨 냈다 생각했을 때, 다시 한번 이 나라 경제를 주저앉힌 악몽.
이때 사기꾼들이 참 득세했었다.
‘흠, 그러고 보니 연락할 곳이 많네.’
종혁은 그들 중 후에 범죄 사실이 드러나는 사기꾼 몇 명을 김종두 반장에게 넘길 생각을 가졌다.
‘그 개새끼들은 무조건 잡아야지.’
종혁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흠. 나탈리아에게도 연락할까?’
방콕에서 많은 도움을 준 나탈리아.
너무 큰 사업 아이템을 넘기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라는 단어가 목에 걸린다.
‘음. 당시 나스닥 지수가 80퍼센트 날아갔지.’
여러 사건이 겹친 결과 피해 규모가 나스닥에서만 무려 약 5조 달러, 한화로 5000조 원이 넘는 돈이 날아갔다.
한 주당 80센트도 안 하던 야후가 108달러 고점을 찍었던 이 당시의 닷컴 버블.
‘여기에 한 나라가, 그것도 러시아가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나스닥 자체가 폐지될지도 모른다.
종혁은 규모를 축소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정도로 하고 연락해 보…….’
띠리링! 띠리링!
움찔 놀란 종혁은 맹렬히 울리는 핸드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누군지 예상이 간 까닭이다.
방콕에서 참 필요했을 때 연락했던 그녀.
"Алло(여보세요?)?"
-……조, 종혁이 핸드폰 아닌가요?
"아."
소영과 수호다. 오늘 임백천의 토크쇼에 출연한다니까 방송국 구경을 하고 싶다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만나기로 했다.
"아, 미안. 곧 갈게."
작게 실망하며 전화를 끊은 종혁은 시간을 보곤 일어섰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권 PB."
"네!"
종혁은 화들짝 놀라는 그녀에게 어떤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
"이 지번 건물주 좀 파 보세요. 은행 빚이 얼마나 있는지, 사채는 얼마나 썼는지. 그 외 빚진 게 얼만지."
어머니가 찍은 10층 빌딩이다.
돈이 많다고 하자 꼭 저걸 사야겠다고 눈을 붉혔다.
"그리고……."
종혁은 손가락을 들어 빙빙 저었다.
"사무실을 좀 더 큰 곳으로 옮기시고요. 때론 보여지는 게 전부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 돈으로 구입하세요."
어머니는 10층 빌딩을 살 텐데 둘은 이런 작은 3층 건물에서 일한다. 그게 마음에 걸렸다.
상큼하게 웃으며 손을 저은 종혁은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둘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보여지는 게 전부?"
"하아. 진짜 모르겠어요? 닷컴 버블에 대비해 내실과 외실을 키우라는 거잖아요. 어차피 우린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만! 수익 일부는 부동산에 투자도 하고!"
"……그걸 이해하는 당신이나 보스가 이상한 겁니다!"
"뭐예요? 이상? 내가 미친년이라는 거예요?!"
"이야기가 왜 그렇게 튑니까! 그리고 이상한 건 맞잖습니까! 그러니 어제 모텔로……."
"아아악! 닥쳐요! 누가 먼저 가자고 했는지 모르잖아요! 당신이 끌고 갔을 줄 누가 알아요?!"
"내가 당신 같은 여자를 왜 끌고 갑니까! 나도 눈이 있어요!"
"그럼 나는?! 나는!"
술 마시고 깨어나 보니 모텔.
다행히 옷을 입고 있어 선을 넘지 않은 것 같았지만, 깨어나니 옆에 둘이 있다는 것에 그들은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이 악악거리는 둘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흐흐. 곧 국수 먹겠네."
‘그런데 대체 어쩌다 저렇게 된 거야?’ 그게 굉장히 궁금해지는 종혁이었다.
* * *
"종혁아!"
수호와 소영이 높다란 건물을 뒤로한 채 손을 흔든다.
‘어이구. 내 강아지 새끼들.’
"이야. 방송국 온다고 힘 빡 줬는데? 특히 소영이 너는……."
이 시절은 연예인 외모도 싹 다 죽여 놓는 도깨비 화장이 유행이다. 갈색 립스틱에 진한 색조 화장.
얼어 죽으려는지 미니스커트에 코트만 입고 있다.
수호는 힙합 바지에 더듬이처럼 길게 늘어트린 앞머리, 녹색 브릿지를 하고 있다.
"왜? 예뻐?"
‘우!’ 웨이브 진 긴 머리를 틀어 올리며 입술을 쭉 내민 그녀.
"입술을 확 잡아 뜯어 버릴라. 안 집어넣냐?"
"야!"
애써 큰맘 먹고 자세를 취했던 소영은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절로 시선이 고정된다.
‘더 커졌어.’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해 보이는 건 여전하지만, 매력 포인트인 눈매와 턱선이 더 날카롭게 변했다.
소영은 본인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종혁은 옆을 봤다.
"그런데 형이 왜 여기 있어요?"
1997년 겨울에 인연을 맺은 준형.
훗날 대한민국을 주름잡는 그룹의 멤버가 되지만, 아직은 수호가 사는 동네의 백수 형이다.
"요, 브로! 롱 타임 노 씨! 파이트 잘 봤어! 멋지던걸? 쪽바리 작살낼 때 나 까까 먹다가 목에 걸려 뒈질 뻔했잖아!"
"쪽바리 아니고 일본. 그러니까 여긴 왜 왔냐고요. 아직 소속사에선 연락 없어요?"
"하하. 바쁘겠지."
종혁은 혀를 찼다.
‘아직도? 못쓰겠네, 정말.’
상황을 모르고 있는 종혁으로선 또 한번 현재의 이들과 관계가 없는 JYK, 감진영을 떠올리며 오해를 하게 됐다.
못마땅한 시선을 오해한 준형은 어깨를 움츠렸다.
"요 맨. 나도 방송국 구경시켜 줘. 묵찌빠 이겼단 말야."
그러며 그는 옆에 선 얼굴선이 굵은 사내, 정혁의 뒤에 숨었다.
‘이 형이?!’
졸지에 시선을 받게 된 정혁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
뒤로 한 발 물러선 정혁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배 곯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걸걸한 목소리가 울리자 종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훗날 ‘언년아!’로 유명해지는 그.
이후 형사 드라마에서 이기적인 역할로 나오기에 실제 성격도 그럴 줄 알았던 종혁으로서는 의외였다.
‘예의가 바르구나. 그런데…….’
"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잘 살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정혁의 눈이 꿈틀거렸다.
‘우리를 살려 준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매달 엄청난 양의 쌀과 반찬, 옷을 보내 주는 은인.
올 겨울 역시 따뜻하게 보내는 것도 눈앞의 종혁 덕분이다.
하지만 익명의 독지가를 표방하고 있었다.
충분히 자랑할 수 있음에도, 그럴 나이임에도 아닌 척한다.
혹시라도 이쪽이 부담을 가질까 이러는 게 분명했다.
‘나 같은 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종혁은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정혁의 시선에 볼을 긁적였다.
"뭐, 저렇게 힘준 수호를 발견해서 어디 가냐고 물었다가 자랑하는 걸 졸라서 왔겠죠."
정혁과 준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확했다.
"히히. 내가 말했잖아요, 형들. 종혁이 엄청 똑똑하다니까요?"
"정말 그렇구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보니 입에서 ‘안 돼.’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구경 정도야.’
"큼.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죠. 들어가시죠."
"브로! 넌 진짜 천사야! 오 마이 엔젤!"
‘미국 본토 사람의 발음이 왜 저렇게 저렴한지.’ 종혁은 고개를 저으며 방송국 안으로 향했다.
"와아."
"홀리. 요주니, 수호, 저기 봐. 연예인이야! 어? 슈퍼 할무니가 좋아하는 배우다! 사인 받을 수 있을까?"
로비를 가로지르는 길은 참 시끄러웠고, 종혁의 눈도 쉴 틈 없이 돌아갔다.
‘저 양반은 뇌물, 저 양반은 음주에 갑질에 폭언. 이야, 이건 뭐 노다지구먼?’
방금 본 사람들만 체포해도 진급은 따 놓은 당상이다.
방송국 관계자가 얽힌 사건 중 조용히 넘어간 적이 있던가.
물론 그전에 언론에게 두들겨 맞고 지방 한직으로 좌천될 테지만 말이다.
범죄자들이 눈앞을 지나는데도 잡을 수 없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풋. 너도 신기하구나? 그렇지?"
소영이 의외의 면모를 발견했다고 키득키득 웃는다.
"……뭐 그렇다 치자."
‘내가 취조한 연예인이나 관계자가 몇 명인데 신기할까.’ 그 본인이 저지른 범죄도 있지만, 우연히 범죄에 휘말려 은밀히 조사받게 된 이들도 꽤 된다. 주로 마약 사건이었다.
"헉헉! 최종혁 선수?"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고, 숨을 거칠게 쉬며 달려온 20대 중반 여성의 얼굴이 밝아진다.
"반갑습니다. 오늘 특집 토크쇼 작가 이영희예요."
"아."
‘새끼 작가인가?’ 나이로 보면 막내 작가쯤 되어 보였다.
‘나중에 스타 작가가 되나 보네.’
연예계 일이라고는 연예인이나 연예계 관계자의 마약, 성상납, 폭행, 음주 등 범죄에만 관심 있는 종혁으로서도 어디서 본 듯한 외모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종혁입니다. 이쪽은 저를 따라온 지인들이고요."
"안녕하세요!"
"요 미스! 하이!"
종혁은 준형의 앞을 가로막았다.
"혹시 너무 많이 데려온 건가요?"
오늘 토크쇼는 아시안게임 주역들과 함께하는데 박찬오, 이봉수, 소장훈, 신권호, 그리고 종혁, 이 다섯 명이 게스트이다.
"아, 아니에요. 다른 분들도 지인 분들을 많이 데려오셨는걸요.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그녀가 안내한 곳은 작은 회의실이었다.
녹화 때 쓸 아이템을 뽑기 위한 사전 인터뷰였다.
"요, 브로! 난 방송국 구경 좃빠지게 할게! 하드 사다 줘?"
"아, 진짜 형!"
"읍?! 읍?!"
"큼큼. 그래요, 형. 잘 놀다 와요. 너희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사전 인터뷰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기에 이영희는 출입증을 넘기며 그들에게 방송국 구경을 권했다.
그들이 나가자 종혁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형이 미국에서 왔는데, 한국어를 주인 집 할머니와 슈퍼 할머니에게 배워서요. 아시죠? 할머님들 입담."
"……풋!"
그녀는 배를 잡고 웃었다.
"하아. 재밌는 분이시네요."
"굉장히 유쾌한 형이죠. 가수 지망생이고요."
"네에? 진짜요?"
"랩을 좀 하는데, 소속사 사정이 어려운지 한 이 년 정도 방치됐어요. 데뷔만 바라보고 미국에서 날아온 형인데."
종혁은 이 작가를 통해서라도 방송가에 소문이 좀 퍼져서 얼른 그 사람이 준형과 다른 멤버들을 데려갔으면 싶었다.
‘분명 Y2K다, 밀레니엄이다로 떠들썩했을 때 데뷔했던 것 같은데…….’
Y2K, 밀레니엄 모두 올해 1999년.
아직까지 방치된 게 기이할 따름이었다.
"아, 저런……."
"이것도 IMF 영향 때문이겠죠. 연예계라고 경제 한파를 비켜 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인터뷰를 시작할까요?"
"……아, 네! 음료수는 어떤 걸로 드실래요?"
그렇게 사전 인터뷰가 시작됐다.
* * *
"거기서 좃 빠지게가 뭐야, 좃 빠지게가! 방송국 작가님들 파워 대단하니까 만나면 말 잘해야 한다고 내가 몇 번 말했어?!"
"zealously. 좃 빠지게 아니야?"
"열심히! 빡세게! 이런 순한 말도 있잖아, 형!"
"오우, 용주니. 넌 역시 똑똑해. 오케이. 아이 가릿. 이해했어."
"제발 사고 좀 치지 말자. 알았어?!"
수호와 소영은 둘이 똑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한쪽을 보고 놀라 복도 벽에 몸을 붙였다.
저벅저벅!
멀리서 떼를 지어 걸어오는 십여 명의 사람들.
수호와 소영은 그들이 준형과 정혁의 대화를 듣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우뚝!?
사람들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서며 그들을 보았다.
눈이 커다란 중년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 얘들아? 이 아저씨랑 이야기 좀 할까?"
네 명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