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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33화 (33/837)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33화>

*  *  *

개막식처럼 폐막식도 화려했다.

그중 스타는 단연 종혁이었다.

"미안하다."

"예?"

종혁은 갑자기 찾아와 뜬금없이 사과하는 신권호 선수의 행동에 눈을 껌뻑였다.

"원래는 너희 유도 전체가 도핑테스트 받았을 때 찾아오려고 했는데……."

"왜요?"

"들어 보니 너희 중에 이런 일 당한 적 없다며. 운동 선배로서 잡아 주려고 했지. 그런데 잘하는 것 같아서 관뒀다."

"어…… 네."

종혁은 작은 거인 신권호를 멍하니 쳐다봤다.

‘이 양반, 이렇게 오지랖이 넓었나?’

"너 멘탈 좋더라. 한국 가서 연락하며 살자. 레슬링 훈련법 알려 줄게."

‘응?’

허리를 퍽 치고 돌아가는 신권호를 멍하니 보던 종혁은 뒤이어 다가오는 다른 이를 보곤 식겁했다.

"뜨헉!"

"오, 최종혁. 반가워. 나 알지? 박찬오야."

종혁은 귀를 막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박찬오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너희가 단체로 도핑테스트 받은 걸 보니 나도 내가 LA에 처음 입단했을 때가 생각나……."

온갖 사기꾼, 범죄자의 헛소리에 단련되다 못해 인이 박힌 종혁의 귀에서 피가 흘렀다.

이후 소장훈, 이현택 등 레전드들이 다가와 서로 사인도 주고받고 전화번호도 교환했다.

레전드들이 인정해 준다는 건 또 다른 기쁨이었다.

그 마지막은 라차논이었다.

"우리나라를 도와줘서 고마웠어. 덕분에……."

아시안게임,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이뤘다.

종합 성적 4위. 그것도 일본과 동메달 하나 차이로 4위였다.

미리 도핑테스트를 한다 통보받았기에 지킬 수 있었던 멘탈이 결국 이런 성적을 만들어 냈다.

개최국의 자존심을 지키다 못해 나라 전체가 축제를 벌였다.

"그저 밥을 대접해 줬을 뿐인데 무슨. 그렇게 따지면, 6.25 때 너희 태국 젊은이들이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린 게 더 고맙지."

라차논은 손을 젓는 종혁을 보며 울컥했다.

‘완전히 졌다. 실력, 마음 모두.’

"……다음엔 안 질 거야, 최."

"그런 말 하고 싶으면 몸이나 단련해, 인마. 몸이 온통 물렁살이잖아. 그렇게 재능만 믿으면 또 진다?"

"개자식."

혀를 찬 라차논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리며 돌아섰다.

"또 봐."

"그래, 또 보자."

"아, 전화번호 교환하자."

"하핫!"

손을 흔들어 배웅한 종혁은 어두운 밤, 하늘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폭죽을 보며 어머니 고정숙을 떠올렸다.

"끄으. 이제 가자, 한국."

참 다사다난했던 지난 14일.

방콕에 오기 전, 차가워지던 한국의 공기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그렇게 종혁을 비롯한 태극전사들은 당당히 목에 메달을 걸고 한국으로 향했다.

금메달 107개, 은메달 56개, 동메달 53개, 총합 216개.

종합 성적은 메달 수 219개인 중국보다 3개 적었지만, 금메달 1개 차이로 1등을 하게 됐다.

역사상 처음으로 1등.

언제나 중국보다 메달 개수가 약 2배 이상 적었던 한국이 세계를 놀래 주는 이변을 일으켰다.

세계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됐는지 조사에 착수했다.

‘도핑이 아니라면…… 설마 음식?’

그들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  *  *

한국뿐만 아니라 태국에게도 졌다.

제아무리 개최국의 편파 판정이 있었다지만, 대일본이 동남아시아 나라 따위와 메달 하나 차이라는 것에 일본 국가대표들은 역적이 되어 버렸다.

금메달 숫자도 차이가 별로 나지 않은 수준.

한국이 1등이 되어서 더 난리가 났다.

-일본이 반발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도 명예도 쟁취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달칵!

일본 체육계의 거물인 70대 노인이 방콕을 다녀온 위원들을 비릿한 눈으로 훑는다.

"아주 재미난 짓을 저질러 주셨더군."

한국을 건드린 걸로 뭐라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그로 인해 전체 도핑테스트가 이뤄졌고, 몇 선수가 금지 약물을 쓴 게 밝혀졌다.

그로 인해 전 종목 대표 선수 전원의 멘탈이 크게 흔들렸고, 역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체육계 정점을 노리는 노인에게 이보다 더한 명분은 없었다.

"여기에 우리가 공들인 짜뚜악 위원도 실각했고."

태국 4위 입상에 큰 영향을 끼친 짜뚜악 위원은 알아서 위원직에서 물러나며 자수했다.

종혁이, 그 뒤에 있는 KGB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직 영웅일 때 용서를 빌기로 한 거다. 그 녹음 파일을 반대 파벌에 보내 짜뚜악이 저지른 모든 죄를 파내려고 했던 종혁으로선 아쉬운 순간이었다.

"하시모토 의원, 할 말이 있나?"

이번 방콕 아시안게임의 대표 위원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  *  *

러시아 모라토리엄의 포지션을 2차로 정리한 날.

권아영과 박태규는 모니터에 나타난 숫자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전 증권사 직원이고, 재력가의 자산을 관리하는 PB인 둘조차 처음 보는 액수였다.

재력가, 권력가들이 맡긴 돈을 제외하고도 처음 보는 액수.

손발이 떨리고, 절로 담배를 찾게 되었다.

사무실에 뿌연 담배 연기가 퍼졌다.

뻐끔뻐끔.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끈 박태규는 흔들리는 눈으로 권아영을 보았다.

방금 전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말 후회 없습니까? 이 많은 돈을 포기하는데?"

"없어요. 이게 맞으니까요. 그리고 포기하는 게 아니죠. 원래 주인에게 주는 거예요."

"놀랍군요."

"……대체 날 어떻게 본 거예요?"

"세상 잘난 맛에 사는 여자?"

"이 남자가……."

얼굴이 구겨지던 그녀는 이내 웃었다.

영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몸으로 유학을 가다 못해 월 스트리트에서 근무했고, 한국에선 이름만 말하면 알아주는 재력가들의 돈을 관리하며 인맥을 쌓았다.

잘난 맛이 아니라 그냥 잘난 거다.

하지만.

"분에 넘치는 돈이에요. 이게 맞아요."

그녀는 타악! 엔터 키를 눌렀다.

그에 모니터의 숫자가 어딘가로 이동하는 듯 빠르게 줄어들었다. 권아영은 그걸 보자 후련해졌다.

"흠……."

권아영의 미소를 빤히 응시하던 박태규는 컴퓨터를 조작했다.

그리고 엔터 키를 눌렀다.

띠디디디딕!?

다시 한번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당신은 또 왜요?"

"원래부터 이러려고 했습니다. 당신이 먼저 선수를 친 거지."

권아영은 툴툴거리는 박태규를 빤히 바라봤다.

‘이 남자…… 제법이네.’

돈 냄새 맡는 걸 제외하면 영 쓸모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면모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준비한 걸 실행에 옮기지 않아도 될 듯했다.

활짝 웃은 권아영은 그가 무는 담배를 뺐었다.

"이봐요!"

"태규 씨, 우리 술 한잔할래요?"

이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속이 좀 쓰렸다.

"……권 PB는 내 취향이 아닙니다만?"

"이 남자가! 나도 아니거든요!"

"큭큭. 그래요, 갑시다. 안 그래도 속이 쓰리던 참이니까."

일어서는 둘은 동시에 생각했다.

‘놀랐으면 좋겠네.’

‘좋아해 주려나.’

그들은 종혁의 반응을 떠올리며 기대했다.

*  *  *

"역시 비즈니스야. 음식이 끝없이 나와."

‘아니다, 먹깨비들아.’ 소수만 럭셔리하게 상대하는 비즈니스 클래스의 음식 재고량이 밥을 코끼리처럼 먹는 운동선수들을 감당할 정도다?

말이 안 된다.

방콕으로 떠날 때 컵라면까지 아작 내 버려서 미리 준비한 게 틀림없다. 종혁은 내리기 전, 완벽하게 응대했다며 만족스럽게 웃던 승무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어흐흑!"

종혁은 갑자기 통곡하는 설동익을 보며 의아해했다.

‘설마 은메달 딴 게 지금 또 벅차오르는 건가?’

"결국…… 못 했어. 못 했다고! 연애를! 이런 것도 받았는데!"

종혁은 동익이 꺼내드는 콘돔을 보곤 얼굴을 구겼다.

"에라이."

‘콘돔 받았다고 다 사귀는 줄 아나?’ 종혁은 성인임에도 순수한 그들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 성에 보수적인 한국과 달리, 개방적인 여러 나라들.

신성일에게 듣기로 이런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때 콘돔 판매량이 엄청나게 증가한다고 한다.

즉, 콘돔은 혈기 넘치는 남녀들이 가볍게 즐기자는 신호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동익뿐만이 아니다.

그 외침에 꽤 많은 선수들이 동조하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종혁은 고개를 저었다.

‘에혀. 그런 식으로 따지면 난 몇 명과 사귀어야 하는데?’

숙소에 버리고 온 콘돔만 몇 박스인지 모른다.

그게 아쉽지는 않지만, 나탈리아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하지 못한 건 무척이나 아쉬웠다.

‘술 한잔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놈의 미짜 진짜! 얼른 성인이 되어야지 원.’

종혁은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치는 사람을 증오하는 거지 술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모두 조용! 곧 게이트를 넘을 건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모두 입을 다물자 고개를 끄덕인 신성일 감독이 눈을 부라렸다.

"처음으로 1등을 해서 기쁘다지만 표정 풀지 마라. 마무리까지 이 태극마크에 부끄럽지 않은 한국인이 되어라. 알겠어?!"

"예!"

눈에 힘을 준 그들은 입국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촤라라라라라라!

‘악! 내 눈!’

종혁은 눈에 더 힘을 주며 억지로 웃었다.

*  *  *

한국으로 금의환향한 그날부터 종혁은 굉장히 바빠졌다.

기자회견에 인터뷰, 대한체육회와 대한유도회와의 스케줄.

청와대까지 불려갔다.

그런 아들이기에.

"드르렁!"

"쩝쩝."

밥 먹고 자는 것만 반복해도 고정숙은 흐뭇이 바라봤다.

"엄마. 계속 그 지하철역 근처에서 장사할 거지?"

모든 스케줄을 마치고 이틀째 쉬던 날, 이상한 말을 할 때까지도 말이다.

웅성웅성.

고정숙이 일을 쉬는 일요일.

종혁과 고정숙은 그녀가 노점 천막을 펴는 지하철역 근처로 향했다. 고정숙은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가는 아들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쉬는 날에 여긴 왜 끌고 온 거야? 너 방송국 안 가? 그 임백천 씨 방송에 출연한다며!"

"그건 내일입니다."

‘임백천 월드쇼의 임백천.’ 이번에 아시안게임 주역을 위해 특집으로 토크쇼를 하는데 그가 MC가 된다고 했다.

‘전에는 이런 방송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 당시 TV에 관심이 없었던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체 왜 온 거야? 빨리 안 불어?"

어젯밤 이상한 걸 묻더니 오늘 아침 일찍부터 나가자고 채근하던 아들.

쉬는 날 제대로 쉬지 못해선지 그녀는 짜증이 난 상태였다.

종혁이 얼마 전 금메달을 따고 대통령과 무려 악수까지 나눈 것도 모자라, 곧 그 잘생기고 젠틀한 임백천 토크쇼에 출연해 사인을 받아 올 자랑스러운 아들이라고 해도 쉬는 날을 방해하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종혁이 철을 들면서 손이 덜 가게 되어 한 달에 겨우 한 번 쉬던 걸 두 번으로 늘렸다고 해도 말이다.

움찔!

어머니의 낮아진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움츠린 종혁은 혀를 찼다.

‘하여튼 성격만 급해서.’

하지만 툴툴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곧 변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니 종혁의 입가가 저절로 찢어졌다.

허흠.

목소리를 다듬은 종혁은 지하철역 근처 빌딩들을 주욱 훑었다. 대부분이 7층, 8층인 건물들.

"이 빌딩들 어때?"

"뭐가?"

"이런 데서 장사하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좋겠지."

그녀라고 노점 천막이 좋을까.

추울 땐 춥고, 더울 땐 덥고, 자동차 매연에 기침만 하는 지랄 맞은 천막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돈이 없었다.

‘잠깐, 돈?’

고정숙은 그제야 종혁이 왜 아침부터 치근덕거렸는지 알아차렸다.

"배당금 나왔니?"

"어. 정확히는 투자가 모두 완료돼서 그동안 번 돈까지 모두 돌려준대요."

순간 심장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친 고정숙은 매섭게 빛나는 눈으로 건물들을 살폈다.

‘저긴 주인이 지랄 맞고, 저긴 쪼잔하고…….’

어차피 세 들어 장사할 거면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게 좋았다.

종혁은 깊이 고민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힘들게 웃음을 참으며 말을 툭 던졌다.

"이왕이면 엄마를 나쁘게 대한 사람의 건물로 골라 봐요."

"……그렇게 이 엄마가 싫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을까? 우리 불효자님, 오늘부터 밥 혼자 차려 먹으실래요?"

"아니, 그 건물 사자고."

……끔뻑끔뻑.

"응?"

"빌딩을 아예 사 버리자고요. 그 정도 돈 벌었으니까."

잠시 뜻을 이해하지 못하던 고정숙은 이내 입을 떡 벌렸다.

종혁이 넘긴 통장을 빤히 보는 그녀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난생처음 보는 숫자가 찍혀 있는 통장.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이게 꿈이야. 생시야?’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이게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여유롭게 웃고 있는 아들만 아니라면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지금 통장에 찍혀 있는 액수는 종혁이 방콕으로 떠나기 전 오늘을 위해 만들어 놓은 흔적이란 걸.

돈은 건물을 매매할 때 들어올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나도 얼마나 벌었는지 모르네.’

종혁은 내일 권아영과 박태규의 사무실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이 통장이 정말이라고 해도 왜 그런 놈들 건물을 사? 그 나쁜 인간들이 돈 벌잖아."

종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어머니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배 아프라고."

"……응?"

종혁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하나하나씩 설명했다.

"지금 빌딩 시세가 거의 40퍼센트 정도 빠졌죠?"

"……그렇다고는 하더라."

40퍼센트가 뭔가.

역세권 10분 거리에서 벗어난 건물들은 거의 50퍼센트까지 빠졌다고 주위 상인들이 죽는소리하는 걸 들었다. 대출이 막혀서 잘못하다가는 파산하겠다는 소리도 나온다.

이런 빌딩을 가진 부자들이 말이다.

"엄마는 지금 이 시세대로 계속 유지될 것 같아?"

고정숙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아니란 거야?"

"5년 안에 최소 두 배는 오를걸?"

두 배가 뭔가. 20년이면 열 배 넘게 오르는 게 이런 역세권 빌딩이다. 더욱이 여기는 환승역, 유동 인구가 미치도록 많은 곳이다.

"박태규 사장님도 지금부터는 부동산에 투자한대."

아니다. 부동산 투자는 극히 일부다.

곧 두 배 따윈 아무것도 아닌 거대한 판이 열린다.

"……박 사장님이?"

통장을 멍하니 본 그녀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건 방금 전과 다른 의미였고, 종혁은 그걸 보며 낄낄 웃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몰랐다.

권아영과 박태규를 만날 때 무슨 일이 생길지 말이다.

*  *  *

다음 날 늦은 아침, 종혁이 여의도 공원 옆을 걷는다.

빵빵, 부르릉.

각진 승용차, 봉고차들이 시끄럽게 굴지만, 오랫동안 해외에 있어서 그런지 그조차도 정감이 있다.

이래서 고향이 최고라 말하는가 싶었다.

"이야. 여기도 이제 진짜 공원 다 됐네."

1997년, 박태규와의 만남을 위해 여의도에 왔을 때 스쳐 지나가듯 봤던 여의도 공원.

온통 펜스만 쳐져 있어서 얼마나 놀랐던가.

아직은 부분적으로만 개장했지만, 더 이상 아스팔트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를 모티브로 조성한다던 여의도 공원.

얼핏 보이는 벤치들에 양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한 가정 가장들의 모습이 입안을 씁쓸하게 물들인다.

아직도 한국은 혹독한 겨울을 겪고 있었다.

‘2002년이 돼서야 저 사람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지.’

빚을 모두 갚은 건 2000년 12월이지만, 숨 막히게 졸라맨 허리띠가 풀어진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부터이다.

전 국민이 열광하고, 우리도 해낼 수 있다라는 희망을 다시 가지게 된 축제.

"이번 아시안게임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네."

귀국한 지 벌써 나흘이나 됐지만 아직도 TV, 신문 모두 아시안게임과 희망을 말하고 있으니 부디 그러기만을 바랄 뿐이다.

괜스레 마음이 답답해진 종혁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도착한 작고 깔끔한 3층 건물.

권&박 홀딩스라는 간판만이 달려 있다.

종혁은 방금 전 어두웠던 감정을 잊고 피식 웃어 버렸다.

"여기가 그 두 사람의 사무실이라고 누가 믿을까."

IMF와 러시아 모라토리엄으로 제대로 털어먹은 그들.

하지만 둘에게 돈을 맡긴 재력가들 때문인지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이다.

아니었다면 벌써 신문에 났을 둘이다.

종혁은 증권가에서 이들을 뭐라 부를지 궁금해하며 건물로 진입했다.

"잠깐. 꼬마야. 여기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날카로운 외모를 지닌 40대 중년인이 막아선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눈빛이 가라앉았던 종혁은 이내 곧 하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경호원을 고용했다고 했지. 특임대인가?’

그가 형사 시절 본 특임대 출신 특채 형사들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종혁은 입술을 삐죽였다.

"이모가 불러서 왔는데요? 아영 이모요."

"아영? ……권 사장님?!"

"네. 친구 이모인데 기특하다고 용돈 준다고 해서요."

"친구 이모? 친구 이모가 왜 용돈을……."

"저 모르세요?"

"……최종혁?! 유도?"

"흐흐. 알아보시네. 그럼 저 들어가도 되죠?"

"스톱. 어딜. 네가 최종혁이건 뭐건 기다리려, 인마."

‘오호?’ 무전기를 통해 안으로 연락한 그는 곧 답을 받았다.

"오케이. 통과."

"수고하세요."

"아, 잠깐."

"네?"

"사인 좀."

종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안에 들어온 종혁은 권아영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사무실은 그녀의 화려한 면모처럼 골동품이나 미술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후다닥! 벌컥!

"종혁 씨! 갑자기 말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왔어요……?"

박태규의 사무실이나 화장실에 있었던 건지 급하게 달려온 둘을 본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온 피곤하고 푸석한 얼굴.

둘이 입은 옷은 마치 어제 입었던 걸 또 입은 듯 구겨지고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것도 술 냄새가.

박태규면 몰라도 권아영이 이런 꼴로 출근했다?

경호원에 대해 물어볼 마음이 쏙 들어간 종혁의 눈이 반짝였다.

"둘이 사귑니까?"

"무슨!"

"아닙니다! 제가 이런 여자와 왜 사귑니까!"

"뭐요? 내가 뭐 어때서요?! 내가 사귀자면 영광으로 알아야지!"

‘잤네. 잤어. 아니, 안 잤나?’ 뭐든 일단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종혁의 눈이 더욱 초롱초롱 빛났다.

그걸 발견한 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수익 점검하러 오셨죠? 여기 있어요."

갑작스레 돌아가는 화제에 입맛을 다신 종혁은 역시 속마음을 잘 읽는다며 엄지를 치켜들고는, 그녀가 넘긴 전표를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응? ……음?"

종혁은 눈을 끔뻑였다.

다시 봐도 말이 안 되는 액수다.

예상한 수익보다 수십 배 많은 돈.

"이게 대체 얼마야?"

종혁은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둘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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