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8화>
* * *
여성은 당황했다.
‘들켰다? 어디서?’
하지만 이런 그녀의 동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불쾌하군요."
Gold digger. 금을 캐는 자.
사랑이란 감정으로 이성을 속여 돈을 빼내는 사기꾼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그녀가 하려고 했던 행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허락 없이 앉더니 그런 무례한 말을 하는 건가요?"
경멸과 수치심이 가득한 눈빛.
그러나 종혁에겐 통하지 않았다.
‘수 쓰지 말라니까. 너같이 예쁜 여자가 왜 나한테 접근하냐고.’
그가 검거한 꽃뱀만 몇 트럭이다.
아주 판에 박힌 반응들이다.
종혁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사이즈를 보니 혼자는 아닌 것 같고."
이건 그냥 촉이다.
"배후가 어디야? 누가 사주한 거냐?"
유망주를 일찍이 탈락시킬 스캔들이다.
단순 성 스캔들일 수도 있고, 마약일 수도 있다.
관광의 나라지만 뒷골목의 어둠이 깊은 나라, 태국.
"태국이야? 아님 일본? 중국? ……설마 카자흐?"
촤악!?
종혁은 물이 뿌려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의아해했다.
‘아니라고? 맞는데?’
종혁은 일어서서 부들부들 떠는 그녀를 보며 확신했다.
‘맞잖아?’
보통 일반인은 이런 말을 들으면 뺨 한 대 날리고 가 버린다.
이렇게 남아 있다는 건 용무가 있다는 소리이다.
원래는 아래층 일본이나 그 아래층의 이란을 노리나 싶었지만, 이로써 그녀가 한국 유도 대표 중 메달에 근접한 사람을 노린다는 게 확실해졌다.
‘하. 어떤 새끼들인지 몰라도 진짜 지랄이네. 아시안게임이 이 정도로 비중이 높았어?’
그렇다면 중국과 일본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태국 아니면 카자흐라는 건데…….’
특히 태국이 유력하다. 아시안게임의 개최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촉이 그쪽으로 서지 않았다.
‘뭐냐.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종혁은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갈 테면 가. 안 막아."
"……."
"가라니까!"
또각또각!
종혁과 여성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짝! 짝! 짝!?
느릿하게 박수를 치며 등장하는 40대 중년의 서양 여성. 눈앞의 여자가 화려한 장미라면, 지금 등장하는 여성은 여왕벌이다. 그것도 남자 수십은 잡아먹은.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급이 튀어?’
"камрат!"
‘동지? 러시아?’
하얗게 질리는 여성을 본 종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식견이 놀랍군요. 반가워요.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예요."
‘……?’ 종혁은 일어나 그 손을 맞잡았다.
"빅토르가 제법 돈을 벌었나 보군요. KGB가 제게 접근한 걸 보니."
‘와, 진짜 이 양반 정체가 뭐야? 그리고 얼마를 번 거야?’
"대체 어디서 들통이 난 거죠?"
그녀는 뻔뻔하게 물어 왔다.
하지만 종혁은 그 모습을 이해했다.
‘정보국 놈들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몇 번 공조를 한 국정원 요원들도 눈앞의 사람처럼 어떤 상황이건 절대 사과를 하지 않았다.
"솔직히 KGB인 줄은 몰랐습니다. 수법이 평범했으니까요."
"흠. 여태껏 잘 통했는데요."
남자에게는 백 퍼센트였다.
"Gold digger라고 했을 때 바로 뺨을 때리고 갔다면, 의심을 거뒀을 겁니다. 차라리 앱, 아니, 제 주소로 몇 번 편지나 메일을 보내는 걸로 시작을 했다면 이런 의심도 안 했을 테지만."
미래에 제법 쓰이는 꽃뱀 수법이다.
모르는 번호로 톡을 보내는 걸로 인연을 만들고 사기 치는.
"호. 참신한 수법이네요. 참고하죠."
종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중년 여성 나탈리아는 눈을 빛냈다.
"제가 왜 접근했는지 아나요?"
"제가 모라토리엄에서 재미를 봤던 것 때문 아닙니까?"
그래서 놀랍다.
박태규와 권아영 뒤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정보력이.
역시 KGB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아시아에선 CIA보다 더 정보력이 높다고 평가받는 정보 단체.
‘이거 국정원도 알고 있는 거 아냐?’
"빅토르와 연결점이 없었다면, 이렇게 KGB의 레이더망에 걸리지도 않았을 테고요."
짝! 짝! 짝!
"훌륭해요."
‘하, 이거 된통 걸렸네. 쓰불. 얼마 먹지도 못했구먼.’ 종혁은 미간을 구겼고, 나탈리아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놀라워. 정말 놀라워. 이래서 천재는 다르다는 건가?’
조사 결과를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고작 17살에 한국의 IMF를 예견한 천재.
그 빅토르와 접점이 없었다면 지금도 몰랐을 천재.
그러면서 지금처럼 모든 상황을 의심하고 통제하며 주어진 단서로 결론을 내 버리는 천재.
나탈리아는 입술을 핥았다.
"러시아 사람이 될래요?"
종혁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약을 팔아?’
국정원 요원과 공조를 몇 번 해 봐서 알지만, 이런 요원들의 표정 변화는 결코 믿어선 안 된다. 믿을 건 오직 직감뿐이다.
"한국을 사랑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뱉어 내면 되는 겁니까?"
"동지. 나 커피 좀."
"네."
‘에라이, 씨부럴.’ 종혁은 애태우기 수작을 부리는 나탈리아의 모습에 혀를 차며 테이블에 놓인 볼펜과 메모지를 들었다.
"하. 이게 얼마 짜린데."
훗날 재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주려고 했던 아이템.
종혁은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메모지를 내밀었다.
"SPA? ……GAP?"
"아시네. 빅토르에게 전해 주십쇼. 제법 돈벌이가 될 겁니다."
GAP는 미국의 의류 브랜드로서 SPA, Speciality retailer(전문점), Private label(자사 상표), Apparel(의류)의 패스트 패션을 창시한 곳이다.
‘유니끌로처럼!’
유니끌로가 성공한 이후 SPA 창업 사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일단 동대문에서 의류를 떼는 걸 시작으로 해서 각 세대와 성별 간 좋아하는 디자인의 통계를 내고…… 쩝. 뭐 그건 빅토르가 더 잘하겠죠."
아쉬워하는 종혁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탈리아는 SPA 세 글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숙인 고개에 숨겨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라고?’
모라토리엄 선언은 최고위층에서만 은밀히 진행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내로라하는 헤지펀드들도 ‘혹시나’ 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였지, 종혁처럼 ‘모라토리엄이다’라는 걸 확신하진 않았다.
1997년 한국의 IMF 때문이다.
세계 기업들의 러시아 지사 철수는 오직 종혁만 예견했다.
이는 즉 로마노프 가문과 끈이 닿은 어떤 최고위층이 정보를 흘린 거라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고, 그 내막을 알아내기 위해 이런 작전을 펼친 거였다.
종혁은 한국 대통령과 한국 정재계 인사들의 자금을 운용하지 않던가. 세계 기업들의 지사 철수까지 짚어 냈다면, 그들과도 어떤 커넥션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종혁의 뒤에 있을 초고위층을, 반역자를 쫓으려 한 거다.
종혁은 최종 결론에 닿기 전 위치한 방패.
IMF를 예견한 천재기 때문에 디코이로서도 더없이 완벽하다.
빅토르와 만나기 전 러시아와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는 건 이미 조사한 일이고, 더 잘난 사람이 있는데도 굳이 권아영과 박태규를 휘하에 둔 것도 우연한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러시아 시민권, 별장 20개, 거액의 연금을 보장하겠어요. 여기 동지 같은 미녀도 매주 보내 드리죠."
종혁은 코웃음을 쳤다.
"됐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다면 반영하겠어요."
"해야 될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탈리아는 종혁의 눈을 살폈다.
"……돈이 목표가 아니었군요."
"돈은 수단이죠. 내 손으로 해내기 위한 수단."
‘그 개새끼들을 잡기 위한!’ 경찰청장마저 움직이게 만드는 그 세력을 잡기 위해선 종혁 본인 또한 그에 준하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
경찰청장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기에.
놈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어 둬야 했다.
‘최대한 많이!’
그녀는 살기가 들어차는 종혁의 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렵네.’
"그럼 친구가 되는 건 어떨까요?"
"KGB랑요?"
눈을 껌뻑이던 종혁은 이내 눈썹을 좁혔다.
"기브 앤 테이크 친구입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안 믿겠죠."
"뭐 악명이 자자하니까요."
"호호. 그럼 악수할까요?"
종혁은 그녀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피식 웃으며 잡았다.
‘이야. 빅토르를 도운 게 이렇게 연결…… 윽?!’
쪽!?
다급히 고개를 젖힌 종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애하는 친구를 위한 러시아식 인사예요. 나이 든 아줌마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요."
그러며 고혹적인 눈빛을 보내는 그녀에, 종혁은 혀를 내둘렀다.
"휘유. 젊었을 적에 기밀 정보 많이 빼내셨겠네요."
"호호호호호! 칭찬 고마워요. 그러면 다음에 또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내일 친구가 된 기념으로 작은 선물을 보낼 테니까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며 그녀는 종혁이 준 메모지를 흔들었고, 종혁은 피식 웃었다. 그는 여성 요원과 멀어지는 나탈리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치명적인 여자야."
회귀 전의 자신과 나이도 비슷해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쁜 남자나 나쁜 여자에게 왜 빠지나 싶었는데…… 푸후."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종혁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살의였다.
"그놈들 쫓는 게 훨씬 수월해지겠군."
악명이 자자한 KGB이다. 꼬리만 잡으면 몸통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건 금방이라고 봐야 했다.
"도중에 끊어 버리면 또 찾아서 잡으면 돼. 언제까지 끊을 수 있는지 보자."
자신들의 뒤를 쫓는다고 지능범죄수사대 팀장을 제거한 미친놈들. 꼬리가 밟혔는데 뭔가 이상하면 분명 끊어 버릴 거다.
"어디 끊어 봐. 알뜰살뜰 주워서 예쁘게 재활용해 줄 테니까!"
종혁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러다…….
"빅토르는…… 뭐. 부자 친구 한 명 뒀다고 생각하자."
기브 앤 테이크 친구 외에 사적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저 아가씨 말을 들어 보면 빅토르 가문도 제법 잘나 보였고."
그게 아니라면 일개 무역상을 KGB가 주목할 리 없었다.
천만 달러를 쉽게 말할 때부터 알아봤다.
"물어보면 말해 주려나."
머리를 긁은 종혁은 몸을 돌렸다.
"음?"
종혁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동양인들에 의아해했다.
일본인이었다.
"뭐, 이 자식들아. 뭐?"
한편, 호텔을 나선 나탈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부우웅! 빵빵!
매연을 뿜으며 도로를 달리는 태국의 오토바이 택시 툭툭과 버스인 붉은색 쏭테우. 그 사이를 가득 누비는 오토바이들.
쏭테우에 탄, 피부가 까만 작은 동남아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있다.
러시아에선 보기 힘든 노동자 계급들의 미소에 나탈리아는 담배를 물었다.
"네게 기회를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입술을 깨문 여성 요원.
나탈리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사상 교육은 다시 받지 않아도 되겠군."
심장을 찌르는 비수에 요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콧방귀를 뀐 나탈리아는 차를 향해 발을 뗐다.
"잘못된 메일을 보내는 걸로 시작을 한다라……."
꽤 참신한 방법이다.
메일이 대중화되는 요즘 시대에 제법 먹힐 것 같았다.
"써먹을 수 있겠군."
‘그런데 앱은 무슨 뜻이지?’ 아직은 나오지 않은 미래의 용어에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 * *
한국 유도 국가대표들이 머무는 호텔 최상층.
그래서 일본 선수들이 분루를 삼키며 아래층을 구해야 했던 최상층.
그 끝에 위치한 감독의 방.
신성일 감독은 종혁이 가져온 수십 개의 비디오테이프와 600페이지가 넘는 종이 뭉치에 눈을 껌뻑였다.
"이, 이거 뭐냐?"
"……중국 일본, 태국, 카자흐스탄 등 대회에서 만날 나라 선수들의 자료요."
경기 자료, 선수 개인의 자료 등, 선수의 자료는 이 선수가 주로 쓰는 손이나 기술부터 어떤 음식을 싫어하고 어느 발에 무좀이 있는 지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메디컬 테스트 자료, 그리고 지금 누가 배앓이를 하는가까지도.
종혁은 허허 웃었다.
‘이게 작은 선물이라고? 이걸 하루, 아니, 반나절 만에 알아냈다고?’
역시 KGB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걸 어떻게?"
"……저희를 후원해 주시는 곳에서 보내 준 거예요."
‘KGB가 보내 줬다고 어떻게 말해!’
"유도뿐만 아니라 태권도나 탁구, 메이저 경기도요."
KGB는 유도만큼 세밀한 자료는 아니지만, 다른 종목도 꽤 유의미한 자료를 보냈다.
메이저 대회의 상위 성적 국가대표들의 자료.
종혁과 동익의 방이 서류 천지였다.
"뭣?!"
너무 놀라면 멍해진달까.
신성일 감독이 눈을 껌뻑였다.
"우리 후원사가 투자사가 아니라 안기부였냐?"
"그 투자사에 거금을 맡긴 어느 분께서 태극마크의 금메달 달성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보내 주신 거래요."
"그분이 안기부 국장?"
더 이상 거짓말하기 힘든 종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 네가 보물이다, 보물."
종혁이 국가대표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자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하실래요? 미팅 룸 예약할까요?"
"당연히!"
한국이 이기라고 보낸 귀중한 선물이다.
선수가 상대 선수에 대해 공부를 안 한다는 건 자격 미달.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모두 불러 모아!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았는데도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열 개 못 따면 아주 다 죽는 거야. 아니 내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종혁은 흥분하는 신성일 감독의 모습에 동감이라는 듯 웃으며 방에 비치된 전화기를 들었다.
방콕 아시안게임의 금메달들이 정조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