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7화>
* * *
어려운 시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태극마크들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모인 기자들은 포부를 묻기 바빴고, 일부 선수의 팬이 응원의 함성을 질렀다.
야구, 농구, 태권도, 배구, 탁구.
메이저 스포츠와 금메달 효자효녀들.
지난 13개월과 10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을 한 유도 태극마크들도 우르르 김포공항에 내렸다.
야구의 거포 선수들보다 더 큰 덩치들이 공항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 선두에는 신성일 감독을 위시한 종혁이 있었다.
"휘유, 몸들이."
"저번 올림픽보다 더 커지고 위협적인데?"
눈썰미가 좋은 기자들이 선수들의 몸을 꿰뚫었다.
종혁의 진두지휘 아래 NFL을 기본 바탕으로, 종혁이 공부한 미래의 선진화되고 과학적인 육체 훈련으로 발끝부터 바뀐 선수들.
무제한적인 후원이 그걸 가능케 했다.
몸이 풍기는 기세만 놓고 보면 거의 역전의 용사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학적이라고 해도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과학적일수록 세밀하게 골고루 힘들었다.
"저 중 제일은 최종혁 선수네."
"……그러게. 엄청 컸네."
‘성장기라서요.’ 종혁은 가슴을 폈다.
지난 13개월 동안 체계적으로 훈련을 하고, 회귀 전 지식을 바탕으로 한 균형 잡힌 식단으로 배를 채워서인지 키가 193센티미터까지 자랐다.
회귀 전의 키를 살짝 넘겼고, 몸무게는 126킬로그램이다.
이 중 체지방률은 고작 8퍼센트.
병기라고 말할 수준이다.
‘이러다 2미터 넘기는 거 아냐? 아, 그건 좀 그런데.’
훗날 잠복이나 잠입 수사 때 애로 사항을 겪을 수 있다.
"신성일 감독님! 이번 아시안게임에서의 목표가 뭡니까?"
"최대한 많은 금메달을 국민들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다 돼서 이만."
"최종혁 선수!"
상념을 접은 종혁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직시했다.
‘나도 태극마크란 말이지.’
지난 13개월간의 노력의 결실을 맺으러 가는 자리다.
전교 5등을 겨우 유지하며 매진한 1년.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금메달 따고 오겠습니다."
종혁은 당당히 돌아서며 게이트를 넘었다.
차라라라락!
빛의 산란이 그의 커다란 등을 적셨다.
* * *
"와와와! 이게 비행기구나!"
"비행기 신발 벗고 타야 된다는 놈 나와!"
승무원들은 귀여운 그들의 모습에 웃음을 겨우 참으며 신기하다는 듯 보았다.
탑승구 앞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을 정도로 순진한 선수들.
‘임원을 맞이한 적은 있어도 선수를 맞이한 적은 없는데.’
그것도 프로 리그가 있는 야구나 축구, 농구가 아닌 유도.
어찌 된 영문인지 베테랑 승무원들도 의아할 따름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곳은 비즈니스 클래스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내 곧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착석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 네네."
이런 미녀들의 응대가 익숙하지 않기에 버벅거리는 남녀 선수들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귀여워라.’
집에 있는 동생들이 생각날 만큼 귀엽다.
그런데.
‘응? 저 선수는?’
비즈니스 클래스에 비치된 신문을 모두 한 부씩 들고 자리를 찾은 종혁. 영자 신문, 독어 신문, 불어 신문.
승무원들은 눈을 빛냈다.
신성일 감독도 마찬가지다.
"그거 읽을 수는 있냐?"
"독일어나 프랑스어 익히는 거 아시잖아요."
표면적으로는 강국 독일이나 프랑스를 조사하기 위해서지만, 진실 된 이유는 머릿속 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정세를 짚어 내기 위해서다.
또 이렇게 여러 언어를 할 줄 알면, 훗날 큰 메리트가 된다.
‘이래야 외국인 사건을 하나라도 더 맡지!’
종혁은 그냥 엘리트가 아니라 압도적인 엘리트가 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태국어도 익혀 놓았다.
"독해력을 기르려면 신문 읽는 게 최고예요."
그 유식한 발언에 베테랑 승무원들의 눈이 빛났다.
‘나이가 어리다는 게 좀 흠이지만…….’
"대단한 놈."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기량이나 두뇌뿐만 아니라 후원까지.
이렇게 비즈니스를 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전국체전 때 종혁을 후원하던 그 투자사가 유도 국가대표를 무제한 후원해 줘서다.
"저놈들은 이게 어떤 호사인지 알까."
"와와! 뒤로 넘어가!"
"넉넉한데? 비행기 좁다고 했는데 잘 수 있겠다!"
"에라이. 똥개 같은 것들. 마냥 좋다지."
"하하하."
웃은 종혁은 독어 신문을 펼쳤다.
‘역시 러시아 모라토리엄에 대해 다루고 있네.’
일방적인 지불 유예 통보 이후 러시아는 마굴이 됐다.
소련이 부활했다며 전 세계가 성토하는 중이다.
‘이로써 러시아는 자금을 확보하겠지.’
소니 등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포 이후 지사를 철수시킨 해외 기업들만 엿 먹었다고 봐야 했다.
‘덕분에 난 돈을 벌었고.’
기억이 너무 늦게 떠올라서 발만 살짝 담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돈벌이가 쏠쏠했다.
덕분에 태규와 권아영도 사원을 늘렸다고 했다.
‘이 다음은 닷컴 버블이지.’
지금 올라타도 엄청난 돈을 벌게 될 터다.
순서가 착착 이어졌다.
물론 그 전에 고생한 어머니를 위한 선물을 드려야겠지만 말이다. 선물의 종류를 떠올린 종혁은 흐뭇하게 웃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구먼."
"그렇지. 이제 메달만 따면 된다."
"예? 하하. 예, 그래야죠. ……당연하죠."
종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는 손을 들었다.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혹시 회의실이나 비디오를 틀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희 여객기에는 미팅 룸이 따로 없습니다."
"아, 그런가요."
‘음. 없었나…… 쯧. 뭐 언제 비즈니스를 타 봤어야 알지.’ 비즈니스 클래스는 너튜브나 블로그로 본 게 전부다.
"기대에 보답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곧 이륙할 테니, 안전벨트를 착용해 주십시오."
옆에 와서 무릎을 꿇듯 시선을 마주친 승무원의 말에 종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벨트를 맸고, 비행기는 하늘을 향해 이륙했다.
"오오, 뜬다, 떠!"
"기분 이상해!"
종혁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선수들을 보며 흐뭇이 웃었다.
‘그래. 마음껏 즐기고 금메달 따자!’
"아, 그런데 음식은 충분하려나?"
그렇지 않아도 소처럼 많이 먹는 게 운동선수인데, 유도 선수들은 거의 씨름 선수처럼 먹는다.
먹는 양에 한계가 없는 이들.
소수만 상대하던 비즈니스 클래스에 음식이 충분할지 걱정이 되었다.
"어쩌지?"
방콕 수완나품 국제공항.
"우와!"
"와! 외국인이닷!"
종혁은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그들을 슬그머니 외면하며 인솔했다.
"자기 짐 잘 찾고, 앞 사람 놓치지 마세요!"
"응!"
"종혁이 너만 믿을게!"
‘자식이 몇 명인지.’ 신성일 감독도 고개를 젓는 종혁을 고맙다는 듯 보았다.
솔직히 종혁이 아니었으면, 탑승 수속부터 애를 먹을 뻔했다.
기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종혁이 먼저 나서서 기내식은 다 먹을 수 있냐, 또 먹을 수 있냐, 따로 음식도 시킬 수 있냐 하고 승무원에게 묻지 않았다면 지금쯤 모두 주린 배를 쥐고 있을지 몰랐다.
‘쩝. 언제 비행기를 타 봤어야 알지.’
오히려 이런 걸 서슴없이 물었던 종혁이 이상한, 아니, 대단한 거였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수들이 짐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한 종혁은 그들을 끌고 입국 게이트로 향했다.
곳곳에 태국어와 영어 안내판이 있기에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
"입국 목적은 아시안게임 참가입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의 눈이 빛났다.
"오? 우리나라 말이 유창하군요. 혹시 태국을 존경……."
종혁은 짓궂게 웃었다.
"이 나라를 이기러 왔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빠직!?
직원이 쥔 볼펜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이번엔 우리 태국이 이길 겁니다."
아시아권 스포츠에서 한중일, 카자흐스탄 다음가는 강국으로 꼽히는 태국.
한국보다 못할 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NEXT!"
히죽히죽 웃으며 입국 게이트를 나선 그들은 한자리에 모였다.
신성일 감독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숙소로 이동하면 꽤 많은 해외 선수들과 마주치게 될 거다. 개중엔 강국 중공도 있을 거고 일본도 있을 거다. 하지만 잊지 마라. 너희들이 흘린 피와 땀을! 너흰 자랑스러운 태극전사다. 언제나 그걸 명심하도록. 이동!"
선수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한번 가슴에 박힌 태극마크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하지만 태극마크를 달았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어깨를 활짝 펴게 했다.
그들은 보무도 당당히 공항을 가로질렀다.
웅성웅성!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후덥지근한 공기와, 한국과 전혀 다른 태국의 풍경.
종혁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11월인데도 덥네."
그래도 전에 와 봤던 것보다는 시원하기에 컨디션에 큰 영향은 없겠다 생각하던 종혁은 순간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굳었다.
"Excuse me."
"음? 아, yes."
고맙다는 듯 웃으며 스쳐 지나가는 금발의 미녀.
푸른 눈과 보조개가 심장을 두드린다.
그렇게 그녀가 멀어지고 나서야 종혁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휘유. 살벌하네."
코끝에 남은 꽃향기가 오금의 힘을 뺏고 있었다.
"……종혁아."
"왜요?"
종혁은 당당히 -90킬로그램 출전 선수가 된 설동익을 보았다.
지금은 동일고를 졸업해 용인대학교 소속이 된 그.
왜인지 뒷말이 예상되었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지금 쫓아가면……."
"에라이."
"뭐? 야!"
"감독님! 동익이 형이 헌팅하고 싶답니다!"
"뭐? 야, 설동익!"
그들은 버스를 타고 숙소인 호텔로 향했다.
한편, 종혁을 스쳐 지나갔던 미모의 금발 여성은 멀어지는 선수단 버스를 보며 핸드폰을 들었다.
"Был установлен первый контакт.(1차 접촉했습니다.)."
딱딱한 러시아어.
마치 군인처럼 싸늘하고 엄정한 기운이 흐른다.
그녀는 수화기 너머에서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я буду двигаться(이동하겠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그녀는 택시 기사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 * *
카오산 로드.
랏차다 롯파이.
짜뚜짝 시장.
어두운 밤, 꼬부랑 태국 글씨의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코끼리가 페인팅된 반팔 티셔츠, 플립플랍 따위를 홍보하는 상인들.
"야이 얄 라이!"
여러 사람들이 무어라 외쳐 대는 소란스러움, 온갖 음식점들에서 풍겨 나오는 맛있는 냄새, 하수 시설이 없어 거리로 흘러나오는 구정물이 만들어 내는 습한 냄새, 취객들과 관광객들의 떠들썩한 소리…….
생생한 방콕 현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택시만 잡아타면 어디든 갈 수 있는데, 못 간다.
관광의 나라 태국까지 왔는데, 숙소를 벗어날 수가 없다.
호텔의 푹신한 침대와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침구, 레스토랑에서 저녁으로 먹은 태국 음식이 이국적인 느낌의 전부.
모든 여행 중 가장 흥분이 되는 게 여행 온 첫날인데, hahahaha 경박하게 웃는 태국 연예인들의 예능이나 보는 게 전부다.
‘팟타이! 쌀국수! 무삥!’
회귀 전, 직원들과 워크숍을 왔을 때 먹은 태국 요리의 기억이 되살아나 혀를 농락한다.
하지만 나갈 수 없다.
현지 음식을 먹고 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라 철저하게 단속하는 중이다.
"에이씨."
종혁은 리모컨을 던지며 일어섰다.
"어? 어디 가게?"
"마사지 받으러요."
"마사지?"
멍하니 천장 무늬만 바라보던 설동익이 눈을 빛내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도 마사지 받을 수 있어?"
종혁이 스포츠 마사지를 훈련 후 정식 커리큘럼으로 등록을 하면서 맛을 들인 그.
"원래 여기 태국이 마사지의 본고장이에요."
"진짜?! ……어, 그런데 감독님이 호텔 나가지 말랬는데."
특히 아래층에 일본 선수들이 있으니까 더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다. 단순히 물 마시는 것도 지면 안 되는 한일 관계.
오늘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가볍게만 운동하려고 호텔 헬스장에 갔는데, 일본 선수들이 전세를 냈다며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식사 때도 시끄럽게 떠들며 방해했다.
원래는 대표 숙소도 그들의 아래층이었다.
앞으로 이 호텔에서 얼마나 충돌을 할지 뻔히 보였다.
‘썩을 것들.’
"호텔 안에 있어요."
눈이 동그래진 그는 날듯이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가자!"
* * *
"……흐흐흐."
‘거기서 뭔 짓을 한 거야? 호텔이면 철저할 텐데?’ 의아해하던 종혁은 이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설동익이 솔로 2년차에다 이제 겨우 20살 남자라는 것.
"종혁아, 나 앞으로 마사지는 꼭 여자에게 받을 거야. 느낌이 어후, 어후으!"
종혁은 만족스럽게 기지개를 펴는 설동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는 역시나였다.
그냥 여성 마사지사가 작은 손으로 몸을 눌러 주니 마냥 좋은 거였다.
"그래요. 태국에 있을 때 많이 받아요. 한국에선 불법이니까."
어차피 자주 받다 보면 무감각해지기 마련이다.
"어? 왜?"
"법이 그렇습니다."
아니다.
‘한국은 퇴폐가 대다수지.’
괜히 ‘마사지’란 간판만 보고 갔다가는 자칫 쇠고랑을 찰 수도 있다.
‘어? 커피숍이네?’
"먼저 들어가요. 난 저기서 커피 한잔하고 갈게요."
"커피 마시면 잠 못 자는데…… 뭐, 알았어. 좀만 마시고 와."
장기간 비행과 이동에 의해 쌓인 피로가 마사지를 받아 확 풀린 건지, 동익은 하품을 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걸 보던 종혁은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췄다.
"어?"
푸른 눈에 금발 머리,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던 미녀.
한번 만나면 우연이고, 두 번 만나면 필연이다.
마침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에 종혁의 입가가 주욱 벌어졌다.
‘이야. 최종혁. 해외에서 먹히네.’
회귀 전엔 너무 비쩍 말라 누구도 접근하지 않았다.
‘너 많이 컸다.’
종혁은 보무도 당당히 그녀에게로 걸어가 허락 없이 그녀의 맞은편에 털썩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재밌어하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꽃뱀? 아니 gold digger인가?"
"What?"
갑작스러운 욕에 불쾌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종혁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왜 이래, 선수끼리?"
한 번 만나 각인시키고.
두 번 만나 경계심을 무너트리고.
세 번 만나면 작업 시작.
꽃뱀의 전형적인 작업 방식이다.
"선수끼리 수 쓰지 말자."
세상살이에 연속으로 반복되는 우연은 없다.
우연을 가장한 수작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