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26화 (26/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6화>

    8. 방콕 시티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친 1997년도가 지나가고, 1998년이 왔다.

    이른바 ‘몸통-깃털’ 사건.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아들을 교도소로 보낸, 경제를 부르짖던 대통령은 IMF 사태를 초래했다는 이유로 실각하다시피 했고, 1997년도 대선은 마지막까지 각축전을 벌였다.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김 대통령이 40퍼센트를 넘기는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국민들은 이 힘든 고난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냐 하는 희망을 가졌다.

    우글우글! 웅성웅성!

    이제 겨우 1월 5일.

    아직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은행 앞.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다.

    죽은 남편이 선물한 금가락지를 꼭 쥔 할머니.

    아기 돌 반지를 들고 온 젊은 부부.

    결혼 예물 목걸이를 든 엄마아빠의 손을 꼭 잡고 놀러 온 아이.

    호호, 하얀 입김이 허공을 수놓고, 커다란 카메라들이 그 모습을 찍고 있다.

    -허, 이게 무슨.

    TV를 본 박태규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고, 종혁은 냉정하려고 애썼다.

    -이것 때문에 이 환란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말한 겁니까, 종혁 씨?

    "설마요. 제가 예언가도 아니고."

    -아니었습니까?!

    종혁은 태규의 장난기 섞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생각한 것뿐입니다."

    -음. 하긴 이 나라 국민들은 국가가 해 준 것도 없는데 나라에 환란이 닥치며 분분히 떨치고 일어나…… 으앗! 이봐요, 권 PB!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혼자 해요! 종혁 씨, 정말 이걸로 대한민국이 IMF를 이겨 낼 수 있다고 보나요?

    사람들을 둘러본 종혁은 씁쓸히 웃었다.

    "곧바로 이겨 낼 순 없겠죠. 하지만 오늘 이 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은 똘똘 뭉치게 될 테고, 국제 금융권의 시선은 바뀌게 될 겁니다."

    -와, 우리나라 국민성 진짜…….

    TV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하였지만, 권아영은 사람이 모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녀는 이런 상황마저 예측한 종혁에게 박수를 쳤다.

    -축하드려요. 오늘로써 대한민국 상위 1퍼센트의 자산가가 되셨네요.

    이제 겨우 30퍼센트의 포지션이 정리됐을 뿐인데 말이다.

    "……뭘요. 아직 멀었죠."

    종혁은 순간 치미는 함성을 겨우 눌렀다.

    박봉 월급 신세에서 상위 1퍼센트의 자산가가 됐다.

    인생 역전이라는 단어가 몸을 잠식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모자라다.

    올해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이쪽의 포지션이 정리되는 대로 투자될 예정이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후후. 아직 배고프다는 건가요?

    "하하."

    당연하기에 딱히 할 말이 없었던 종혁은 말을 돌렸다.

    "권 PB와 태규 씨도 남는 금 있으면 그냥 내놓도록 해요."

    -음. 알았어요. 생각해 볼게요.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네. 수고해요.

    전화를 끊은 종혁은 기쁨의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이 엄동설한에 아기와 돌 반지를 꼭 끌어안은 젊은 부부를 보며 피가 식는 걸 느꼈다.

    ‘……이들은 자신들이 낸 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까.’

    1998년 새해부터 시작된 금 모으기 운동.

    무려 300만 명이 넘게 참여할 정도로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이 나라가 나아지길 바랐지만, 국가는 다시 한번 그 기대를 배신한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지."

    그 역시 대한민국이 환란을 이겨 내길 바라는 한 명의 국민이기에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날 소매치기들도 장사를 접었다는 거다.

    ‘범죄자 새끼들이 양심은.’

    종혁은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비비는 어머니 고정숙을 보았다.

    허리 벨트에 마이마이를 차고, 귀마개까지 한 그녀.

    얼굴은 최신 패션인데, 옷은 시장 상인이 따로 없다.

    "엄마, 결혼반지 정도는 놔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고정숙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넌 여기까지 와서 그 이야기니? 됐어. 집에 있어 봤자 한숨만 나오는 애물단지. 이렇게 뜻 깊은 데 쓰게 되면 하늘에 있는 네 아빠도 좋아할 거야."

    그러며 그녀는 연애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다는 은반지를 보여 줬고, 종혁은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단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건 찾아야겠네.’

    결혼 예물 중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를 위해 꼭 찾아야 할 게 있었다.

    "허헛. 역시 생각이 훌륭하십니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한 자제분을 키워 내신 거겠죠."

    "뭘요. 얘는 지가 알아서 큰 거예요."

    "하하하."

    "감독님."

    종혁은 아내, 딸들과 함께 나온 신성일 감독을 보았다.

    그 뒤로 오늘 하루 특별히 휴가를 받은 설동익을 비롯한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들도 가족과 함께 줄을 서 있었다.

    종혁이 어머니를 따라 금 모으기 운동에 나간다는 말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그들.

    얼굴에 자부심 가득한 미소가 맺혀 있다.

    그런 그 모습이 방송국 카메라에 담기고 있다.

    덩치들이 워낙 범상치 않은지라 이 인파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 최종혁이다!"

    "허?"

    종혁은 슬그머니 모자를 눌러 썼고, 어느덧 종혁과 고정숙의 차례가 됐다.

    "최종혁 선수! 최종혁 선수도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온 건가요? 정말 그렇다면 현직 국가대표 선수 중 1호 선수가 되는 건데요! 그것도 최연소! 하실 말이 있을까요?!"

    ‘아, 1호였어?’ 그것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종혁은 주위에서 웅성거리자 약간 쑥스러워졌다.

    방송국 카메라가 있기에 각오를 하고 있던 그는 입을 열었다.

    "어리다고 해도 저 역시 이 나라의 국민이니까요. 제 돌 반지와 전국체전, 회장기 금메달을 내려고 왔습니다."

    "헉! 그 소중한 메달을요?!"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메달은 또 따면 되는걸요. 여기 저희 어머니는 사별하신 아버지와의 결혼 예물을 들고 오셨어요."

    "……와. 정말 힘든 결정을 내리셨네요."

    종혁의 가정사는 유명하다.

    아기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반지하 방에서 힘들게 살아온 어린 메달리스트와 어린 아들을 키우기 위해 헌신한 어머니.

    이런 가정사 때문인지 종혁은 벌써부터 국민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고, 고정숙은 신사임당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엄마, 엄마도 한마디 해."

    "당연히 해야 될 일을 가지고 말은 무슨. 얼른 내고 가자. 춥다."

    ‘하여튼.’ 그래도 카메라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는 게 귀여웠다. 사람들은 담담한 둘의 모습에 경의와 존경, 동질감을 느꼈다.

    "두 분께서 내놓으신 이 금들이 정말 좋은 곳에 쓰이면 좋겠네요."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저희 모자뿐만 아니라 여기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들과 감독님, 코치님들까지 함께 왔습니다."

    "네에?"

    "허허. 안녕하십니까. 유도 국가대표 감독 신성일입니다."

    "와! 안녕하세요!"

    종혁은 화제가 옮겨 가자 얼른 접수대 앞에 섰다.

    "접수 시작하겠습니다."

    어려운 이들이 어렵사리 내놓은 마지막 보류다.

    24K 금도 아닌 18K 금.

    은행 직원은 사명감마저 느꼈다.

    종혁은 그걸 보며 씁쓸히 웃었다.

    ‘누군가 내 재산을 알게 되면 뭐라고 말할까?’

    아마 욕을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금 모으기 운동은 금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을, 그리고 추억을 이 나라에 닥친 환란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는다는 게 중요했다.

    그러기 위해 이 많은 인파가 모인 거다.

    ‘어차피 따로 기부도 할 거고.’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털어 낸 후 금 판 돈을 넣은 통장을 챙긴 둘은 은행을 나섰다.

    "조심히 들어가."

    "어? 점심이라도 같이 먹지!"

    "얼굴 봤으니 됐어. 감기 걸리지 말고. 아, 맞아. 아들."

    "어?"

    "잘했어. 메달 땄을 때보다 오늘이 더 멋졌어."

    "응?"

    그렇게 말한 고정숙은 인파를 뚫고 지하철역으로 향했고, 종혁은 멍하니 그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 간질거리는 가슴을 문질렀다.

    "흐."

    별거 아닌 말임에도 왜 이리 기분이 째지는지 몰랐다.

    "어? 어머님은?"

    "장사하러 가셨어요."

    "어이구. 이런 날엔 쉬셔도 될 텐데."

    ‘그러게요.’ 남편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예물을 다신 찾을 수 없는 곳에 내놓은 날이다. 남편과 맺은 결실과 하루를 보내며 쓰라린 마음을 달래도 될 텐데, 어머니 고정숙은 너무 쿨했다.

    종혁은 마음이 쓰여 입맛을 다셨고, 그걸 본 신성일은 역시 효자라고 흐뭇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제 곧 2차 선발이네."

    종혁의 눈이 빛났다.

    국가대표 상비군은 1년에 두 번을 뽑는데, 그중 2차 선발이 다음 달에 치러진다.

    ‘누가 올라올까나.’

    누가 올라올지 몰라도 분란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싶었다.

    "흐흐. 그놈들 선수촌에 도착하면 놀라겠지?"

    "네? 왜요?"

    "왜일까?"

    신성일 감독과 상비군, 코치진은 알 것 같다며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제일 알고 있어야 될 놈이 모르네. 이래서 내가 널 좋아한다, 종혁아!"

    종혁은 얼굴을 구겼다.

    "그런 고백은 옆에 계시는 사모님께 하시죠."

    "호호호! 그렇지?"

    "어흠! 자, 밥 먹으러 갑시다!"

    그렇게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눈썹을 좁히던 종혁은 이내 피식 웃었다.

    저들이 하는 말을 왜 모를까.

    "고작 18살짜리가 국가대표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종혁은 머리를 긁다 아차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예, 박 기자님."

    박영일 기자. 먼 미래 종혁이 아는 기자이며 저번 학교 폭력 사태 때 인연을 맺게 된 사회부 기자다.

    -오! 너 나온 거 방금 봤다! 어머니가 대단하시던데? 이제 너만 방콕에서 금메달 따면 되는 거야! 그러면 국민 영웅 되는 거다!

    "아하하."

    -그런데 무슨 일이야? 혹시 선수단에 무슨 일 생겼어? 협회가 지랄해?

    "아뇨.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겨서요."

    -궁금한 점?

    "저희가 이렇게 모은 금을 나라에선 어떻게 할 건지 궁금해서요. 현재 한국 금 보유량이 22톤인가? 그렇잖아요."

    -아, 금을 팔 건지, 아니면 보유할 건지?

    "네. 국민들이 어렵게 내놓은 소중한 추억이고 없는 살림의 마지막 보류인데, 졸속 행정으로 날리지 않을까 싶어서요."

    -뭐? 에이 설마. 이번 당선자께서는…….

    박영일은 말을 줄였다.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사람 욕심은 누구도 가늠할 수 없다.

    기자로서 그런 꼴을 많이 봐 온 박영일은 심각해졌다.

    "제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네요. 끊겠습니다."

    -아니…….

    전화를 끊은 종혁은 핸드폰을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국민들이 어렵게 내놓은 추억을 헐값에 팔아 버린 회귀 전의 사건. 국민은 이번엔 다를 거라 믿었던 정부에게 배신을 당하고 가슴에 대못이 박힌다.

    "어디 이번에도 그렇게 해 봐."

    사납게 이를 드러낸 종혁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네! 신 기자님! 저 종혁인데요!"

    그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펜대를 부러트리지 않는 진짜 기자들. 종혁은 그들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작은 개인 사무실, 박태규의 한숨 소리가 크게 울린다.

    "웬 한숨?"

    "아, 권 PB."

    권아영이 내미는 머그잔을 받아 든 박태규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힐끔 그의 모니터들 중 하나를 본 권아영은 낯빛을 굳혔다.

    포지션이 정리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어마어마한 액수가 찍혀 있다.

    ‘설마?’

    "왜요? 이 나라가 망하는 걸로 돈을 버니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요? 이제 와서? TV 보니까?"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요?"

    "이렇게 돈을 벌어도……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돈을 많이 벌어도 괜찮냐는 겁니다. 안기부 말이에요!"

    "뭔 헛소리예요? 갑자기 정보부가 왜 나와요?"

    "권 PB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는……."

    "호호호호호!"

    "권 PB! 지금 이 상황 심각합니다! 우린 뒷배 없이 돈을 벌고 있어요! 분명 탈이 나도 크게 날 겁니다!"

    권아영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기를 지웠다.

    "누가 뒷배 없대요?"

    "……예?"

    "우리 회사에 꽤 많은 정재계 인사들의 돈이 묻혀 있는 거 알고 있지 않나요?"

    정부가 IMF를 선언함과 동시에 투자 제의가 물밀듯 밀려왔고, 권아영은 그중 믿을 만한 인사들의 투자를 받아들였다.

    "그건 알고 있지만 정말 그들이 방패가 되어 줄 거라고 믿는 겁니까? 돈 앞에서는 부모도 없는 게 이쪽 바닥입니다! 분명 정부에서……."

    한숨을 내쉰 권아영은 그동안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려 주기로 했다.

    ‘에휴.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나? 진짜 저 재능만 아니면…….’

    돈 냄새를 감지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박태규.

    풋 포지션의 마지노선을 정하는 데 그의 도움이 엄청나게 컸다.

    권아영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마침 한 사람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기 있네요. 우리 회사의 제일 큰 방패."

    "예? 제 눈에는 이번 대통령 당선인밖에…… 잠깐?! 서, 설마?"

    "네. 저분 자산도 우리 회사에 있어요. 이번 대선에 베팅도 했죠."

    "……맙소사."

    ‘어떻게’라는 의문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권아영은 그 표정이 귀엽게 느껴져 장난을 칠까 하다가 그만뒀다. 이건 그녀도, 그녀의 아버지도 마지막 순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누구겠어요?"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던 박태규는 입을 떡 벌렸다.

    "대체 어떻게……."

    마지막까지 접전이었던 이번 대선.

    박태규의 머리에 한 기사가 떠올랐다.

    상대적으로 당선 확률이 높았던 상대 후보를 몰락시킨 하나의 스캔들. 그로 인해 이번 당선인의 득표율이 치솟았다.

    "혹시 종혁 씨가 상대 후보의 결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아는 권아영은 명확한 근거와 그 근거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결코 도박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움찔!?

    권아영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설마 그 사람이 KGB였나?!"

    ‘KGB?’ 권아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뜬금없이 KGB라니?"

    박태규는 곧 있을 러시아 모라토리엄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종혁과 인연을 맺었다는 러시아 초고위층 친구에 대해 말했고, 이번엔 권아영이 입을 떡 벌렸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어? 제가 말 안 했습니까?"

    "안 했어요! 죽을래요?!"

    ‘이래서 러시아를 다음 목표로 삼았던 거야! 신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러시아를!’ 이는 아주 큰 오해였지만, 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잠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우리 보스는 천재적인 식견에 러시아 최고위층, 그것도 정보부에 있는 사람과 인연이 있는 거네요?"

    "……설마 멍청하게 러시아 쪽 비자금 조성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남자가!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권아영이 손톱을 세우자 박태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허. 진짜 열여덟 살 맞는 건가?’

    둘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천장을 봤다.

    이곳에 없는 종혁의 잔상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진짜 엄청난 보스를 얻었네.’

    ‘종혁 씨 정체는 절대 함구해야 돼! 종혁 씨만 있다면 내가 어떻게 돼도 죽지 않는 이상 다시 재기할 수 있어!’

    당시 제대로 인연을 맺은 것도 아닌 박태규를 위해 조폭들을 때려눕힌 종혁이다. 자기 울타리 안의 사람은 끔찍하게 챙긴다고 봐야 했다.

    그들은 어떻게든 종혁을 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잠깐, 그런데 종혁 씨가 왜 남은 금을 내놓으라고 한 겁니까?"

    종혁이라면 분명 이유 없이 말하진 않았을 거다.

    잠시 생각했던 권아영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 진짜 치밀하다, 치밀해. 진짜 열여덟 살 맞아?"

    "뭡니까, 좀 같이 압시다."

    "모르겠어요? 종혁 씨는 명분을 만들라는 거예요!"

    "명분?"

    "돈은 믿어도 사람은 믿지 말라고! 이렇게 돈 버는 우리가 금을 내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혹여 저 당선인이 우릴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해도, 어쩌다가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도 언론에서 공격하기가 애매해지겠군요."

    국가 위기에 돈을 벌었어도 국가 위기의 아픔에 공감했으니까.

    "That’s right!"

    종혁은 이걸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 강요하지 않겠다 말한 거다.

    자율 의사의 존중.

    종혁은 진짜 믿을 수 있는 리더였다.

    그러자 권아영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더 애매해지게 만들어야 하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녀는 얼른 핸드폰을 들었다.

    "어머. 이 주필님, 저 권 PB예요!"

    주필. 신문이나 잡지 등 정기간행물의 편집 방향과 기사 게재 결정 여부를 주관하는 최고 책임자다.

    "네. 오랜만이에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제가 돈을 좀 벌어서 기부를 하려거든요? 에이, 설마 그게 전부 제 돈이겠어요? 호호호, 그렇죠. 그분들께서 혹시 모를 상황에 세울 방패를 만드시겠다는 거죠. 네네. 그와 동시에 이번 유도 국가대표들에게도 후원을…… 네, 당연히 몰래 아닌 몰래죠."

    그녀는 상대가 하는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네. 그럼 이로써 빚 하나 까는 거예요."

    박태규는 전화를 끊는 권아영을 보며 의아해했다.

    "갑자기 유도 국가대표 후원은 뭡니까?"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국가대표를 후원해서 방패 하나 더 만들라는 거?"

    "……그 금 팔라는 말에 그런 뜻까지 숨어 있었다고요?"

    박태규로서는 그런 의도로 말한 종혁이나, 그걸 알아들은 권아영 모두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박 팀장은 나한테 안 돼요. 그러니 종혁 씨가 이런 일 안 맡기지."

    "뭐요?! 이 여자가!"

    혀를 베 내민 권아영은 도도하게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그동안 그게 좀 거슬렸던 박태규는 씨근덕거렸다.

    그렇게 유도 국가대표에 대한 막대한 후원이 결정되었다.

    *  *  *

    2월 국가대표 2차 선발에 뽑힌 선수들이 기자들의 질문 공세를 뚫고 선수촌에 입성했다.

    안내에 따라 짐을 풀고 체육관에 모인 그들은 마르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명장 신성일.’

    ‘성향이 어떨까?’

    어렵사리 뽑힌 만큼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곧 미팅 시간이 되자 감독과 코치진이 우르르 입장했고, 그에 2차 선발 대표들은 한 청년을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어? 쟤는?’

    그 신색을 확인한 신성일이 음흉하게 웃으며 나섰다.

    "자, 그럼 가장 나이 어린 사람부터 소개해 볼까?"

    종혁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기량 향상을 도울 수석 코치 및 무제한급 선수 최종혁입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웰 컴 투 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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