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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25화 (25/837)
  • <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5화>

    *  *  *

    그 이후 소영과 도착한 수호의 동네.

    달동네라 불리는 곳답게 허름한 동네다.

    높이 올라가는 계단들도 보이고, 양옆으로도 옛날에 지어진 듯 상태가 썩 좋지 못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종혁아! ……에이. 넌 왜 왔어?!"

    퍼억!?

    소영의 작은 주먹이 수호의 작은 배에 꽂혔다.

    "밤톨. 다시 말해 봐. 누나가 와서 기쁘지?"

    "네에……."

    "까불고 있어."

    탁탁 손을 턴 소영은 만족한다는 듯 웃었고, 수호는 이를 갈았다.

    "이, 이 마녀."

    갈수록 성격과 손버릇이 나빠지고 있다.

    이젠 진짜 마녀 같았다.

    수호는 종혁이 방콕에서 금메달 따고 오면 꼭 운동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러다 정분나겠다, 이놈들아.’

    둘을 흥미 있게 바라보던 종혁은 왜인지 망설이는 수호를 보곤 의아해했다.

    "그런데 어쩌지? 지금 아빠 있어서 집에서 놀지 못하는데……."

    "뭐? 야, 그런 건 빨리빨리 말했어야지!"

    십 대에게 아버지란 이런 존재였다.

    언제나 무섭고 거북한 사람.

    "나도 깜빡했어……."

    종혁은 안절부절못하는 수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잘됐네. 이번 기회에 인사드리면 되겠네."

    "응?"

    "안 그래도 드릴 말도 있었고."

    "할 말? 우리 아빠한테?"

    종혁은 찜질방 이야기를 꺼냈고, 수호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정말? 우리 찜질방 가?"

    작년부터 생기기 시작했단 말은 들었지만, 단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찜질방. 동네 목욕탕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고 했다.

    "소영이 부모님과 이모님도 함께 가기로 했어."

    "에헴. 아, 설마 눈치 없이 오려는 건 아니지?"

    "이씨! 나도 갈 거거든! 따라와!"

    그들은 달동네가 아니라 그 입구에서 옆으로 꺾었다.

    수호의 집은 종혁의 반지하 방보다는 낫지만,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주택의 2층집이었다.

    "엄마! 아빠!"

    "왔니? 친구들은?"

    국민학교 이후 처음 데려오는 친구들에 기뻐서 기대했던 수호의 어머니는 종혁과 어여쁜 소영을 보곤 눈이 동그래졌다.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최종혁입니다."

    "안녕하세요, 김소영이에요."

    "그래. 어서 와. 춥지? 얼른 안으로 들어오렴."

    어젯밤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쳤는데도 집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종혁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찔린 건지 어머니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춥지? 방금 막 보일러 틀었으니까 곧 따뜻해질 거야."

    "누가 왔어?"

    끼익 안방 문을 열고 메리야스에 점퍼를 입은 작은 체구의 40대 후반 남성이 나왔다. 그도 수호가 친구를 데려온다는 말에 기대를 했다.

    종혁과 소영은 다시 인사했다.

    "어? 어어어? 최, 최종혁 선수?"

    큼직한 잠자리 안경 속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가 말했잖아요! 종혁이가 제 친구라고! 씨이, 진짜!"

    "……어흠. 누가 뭐랬냐? 어이구, 경기 잘 봤어요. 자기보다 덩치 큰 사람들은 아주 휙휙! 터엉! 크으! 박찬오, 박세리만큼 훌륭해! 아주 칭찬해요! 방콕에서도 금메달 부탁해요!"

    "하하. 감사합니다. 말 편히 하십시오, 아버님!"

    "아, 그래도 될까? 허허. 어서 들어와. 뭐해, 애들 왔는데 과일이라도 내오지 않고!"

    "알았어요!"

    종혁과 소영은 거실에 앉았는데, 소영은 방실방실 웃는 수호의 아버님 때문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수호의 어머님이 곧 먹을거리를 내왔다.

    "미안해. 어제 시장에 갔어야 했는데, 깜빡했네. 오늘은 이거 마시고, 이 시기 한 집에 하나둘씩은 꼭 있던 델몬트 유리병.

    ‘와, 저 안에 보리차 말고 진짜 주스가 있는 건 또 처음 보네.’

    "거 사람 기억력 하고는! 수호가 애써 데려온 친구들이구먼!"

    하지만 그의 호통은 이어지지 못했다.

    말없이 노려보는 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

    "허험. 마셔, 마셔."

    "예. 잘 먹겠습니다!"

    "아, 맞아. 아빠! 엄마! 우리 찜질방 가요! 종혁이랑 소영이 둘 모두 가족들이랑 같이 간대!"

    "……그러니? 어이구. 그럼 마시고 놀다 가."

    "호호. 놀고 있으렴. 나는 나가서 너희 먹을 것 좀 사 올게."

    "아, 아뇨! 이 정도면 충분……."

    감히 수고를 끼치는 것 같아 화들짝 놀라는 소영의 어깨를 토닥인 수호 어머님은 어두워진 낯빛으로 지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고, 수호는 벌써부터 찜질방 갈 생각에 희희낙락거렸다.

    그 사이에서 종혁은 씁쓸해진 입안을 주스와 함께 가져온 물로 씻었다.

    "집 구경 안 시켜 줄 거야?"

    "아, 응!"

    집이 작았던 만큼 구경할 거리는 별로 없었다.

    있다면 거실 TV 아래에 있던 게임보이, 연예인 브로마이드뿐이었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그들은 근처 슈퍼에서 동그란 원통에 쪄서 파는 호빵을 사서 평상에 앉았다.

    "하 뜨! 하 뜨!"

    곱게 갈린 팥이 입천장에 달라붙자 소영과 수호는 몸부림을 쳤다. 그 귀여운 모습에 흐뭇하게 웃던 종혁 아차 하며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선물."

    "응? 이거 뭐야?"

    내용물을 꺼낸 수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등유…… 교환권? 한 장 두 장…… 천 리터? 백화점 상품권?"

    "나 후원받는 거 알지? 정확히는 소영이 이모님 회사가 후원해 주는 거."

    수호와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크리스마스라 선물이 들어왔는데, 쓸 곳 없다면서 준 거야."

    아니다. 종혁이 따로 산 거다.

    IMF로 인해 서민들이 지갑을 닫으며 다시 연탄으로 돌아설 기미를 보이니 정유 회사들은 발 빠르게 이런 상품권을 내놓았다.

    어떤 보일러를 쓰는지는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이래서 아까 어떤 보일러 쓰냐고 물어봤구나.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어이구, 이 무심한 놈아.’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수호의 집에 가장 필요한 게 난방이다. 실제로 이 시기에 연탄 한 장 살 돈이 없어서 동사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다.

    백화점 상품권은 올 겨울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라 구매한 거다.

    혹여 본인들은 안 입어도 수호 겨울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사 주지 못하면 그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까.

    "날짜를 봐. 내년 3월까지잖아. 우리 집에선 아무리 써도 다 못 쓰니까 너 쓰라고 가져온 거야."

    "아. 응! 고마워! 역시 종혁이가 최고야!"

    그러며 은근히 바라보는 수호의 시선에 소영이 발끈했다.

    "나도 등유랑 백화점 상품권 받았거든?! 이게 진짜!"

    "쯧!"

    "그래. 그러니까 꼭 부모님 가져다드리고."

    ‘이젠 찜질방 같이 갈 수 있겠지.’ 힘든 와중에 웃음꽃이 필 수호의 부모님들을 생각하니 절로 흐뭇해졌다.

    "걱정 마! 꼭 전해 드릴게!"

    "그래. 꼭 그렇게 해야 하는데…… 너흰 누구세요?"

    "꺄악!"

    수호와 소영도 이제야 그들을 발견하고 다급히 평상 위로 도망쳤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 앞에 나타난 세 명은 도망치지 않고 각자 한 곳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종혁, 수호, 소영의 손에 들린 호빵에 집중되어 있었다.

    "헤이. 학생들. 맛있어?"

    ‘뭐야, 이 외국인 거지는? 음?’ 외국인처럼 보이는 남자 거지.

    그리고 쓸데없이 훤칠하고 잘생긴 거지 둘.

    ‘분명 어디서 본 얼굴들인데…… 어?’

    종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떠올랐다.

    이 시절에 십 대, 이십 대를 보냈다면 결코 모를 수 없는 얼굴들, 정확히는 가수 그룹이었다.

    "그런데…… 애들 꼬라지가 왜 이따위야?"

    족히 일주일은 못 씻은 듯 떡진 머리에 냄새나는 몸.

    영양 결핍의 대표적인 특징인 입가의 버짐까지.

    이래서 거지로 오해했던 거다.

    움찔!?

    세 남자의 어깨가 축 처졌다.

    종혁은 아차 했다.

    "어? 백수 형들이다."

    종혁과 소영이 급히 수호를 봤다.

    "아는 분들이야?"

    "동네 백수 형들이야. 가수 지망생이었던가? 맞죠? 형들 어디 갔다 와요? 꼴은 왜 이렇고요?"

    "헬로, 브로. 수도꼭지 물 안 나와. 똥간도 터졌어. 이주일 못 씻었어."

    "엑? 누나는요? 형들 먹여 살리는 누나는?"

    ‘누나는 또 누구야?’

    "선아 아파. 호영이도 아파. 콜록콜록 해. 어제 피 뱉었어."

    종혁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결핵?’

    "근데 그거 맛있어? 따뜻해?"

    꼬르륵!?

    장정 셋이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니 그렇게 한심하면서도 짠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 그 최고의 딴따라 소속 아니었나?’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인성이 되지 않는다면 안 뽑는다는 철학이 있던 고릴라 닮은 사람. 지금은 최고의 딴따라가 되겠다고 공공연히 말하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사람. 남녀 간의 문제는 있을지라도 마약이나 성범죄는 일으키지 않는 기획사를 운영하던 사람이다.

    ‘허. 그 가수 좋게 봤는데. 사람을 이리 방치하나?’

    이는 종혁의 오해였다.

    "가수 지망생이라면 소속사가 있을 텐데,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

    종혁은 알아차렸다.

    ‘버려졌구나. 아, 이때가 그때구나.’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다.

    데뷔 전 2년간 소속사에게 잊혔던 시기가 있었노라고.

    소속사 사람도 다 돌아간 줄 알았다고.

    워낙 대단한 그룹이었기에 기억하고 있다.

    ‘아이고, 이 미련한 사람들아.’

    하지만 이해한다. 이들은 이것밖에 할 줄 모르기에 한 줄기 희미한 희망에 매달리는 거다.

    이제 겨우 20대이기에 더욱더.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으니까.

    형사로 살며 참 많이 보아 온 모습이다.

    훗날 쭈니 형이라 불리는 이는 지금도 나이가 많겠지만, 이 당시 미국인.

    꼴을 보니 돌아갈 비행기 값도 없는 듯하다.

    ‘일용직이나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면 모르겠지만, 그쪽 시장도 얼어붙었지.’

    부모에게 손을 벌리고 싶어도 실패한 게 들킬까 봐, 혹시라도 소속사에서 사람을 보낼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다.

    소속사는 소속사 나름대로 IMF 때문에 힘들 테고.

    ‘후. 이들도 IMF의 희생자구나.’

    종혁은 그들 손에 들린 검은 봉지를 봤다.

    "그건 뭐예요?"

    "아. 주인집 아줌마가 콜록콜록에 좋다는 거. 저기 산에서 뽑아 왔어!"

    ‘어쩐지 손에 흙이 많이 묻었다 했더니!’ 세 사람 모두 흙투성이였다.

    ‘하긴 병원 갈 돈도 없는데 약 살 돈이라고 있을까.’

    "후우. 아주머니! 여기 호빵 다 주세요."

    호빵기 안에 있는 호빵을 모두 산 종혁은 그들을 보았다.

    "갑시다. 당신들 사는 집에."

    "응? 왜? 너 우리 알아?"

    "사람은 살려야 할 거 아니에요."

    "사, 살려? 누구 죽어?"

    "피 토했다면서요? 그거 방치하면 죽습니다."

    "선아, 호영이 죽어?!"

    하얗게 질린 준형이 종혁의 손을 잡았다.

    "살려 줘!"

    *  *  *

    다행히 폐결핵은 아니었다.

    잦은 기침에 의해 목과 폐가 상해 피를 뱉은 것뿐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더 방치됐다면 폐결핵으로 발전될 뻔했다.

    목이 상했다는 말에 선아와 호영이란 사람은 세상을 잃은 것처럼 절망했다.

    "괜찮아. 선아, 호영이 노래 못해. 목 나빠도 오케이."

    "야이! 콜록콜록!"

    "형!"

    복도에 선 종혁은 병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들으며 피식 웃었다. 그들의 미래를 알기에 걱정은 되지 않았다.

    ‘누나란 사람이 김선아였구나.’

    그리고 준형이 생각이 깊은 것도 알게 됐다.

    생각 없이 말하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아니, 그들 여섯은 모두 착한 사람들이었다.

    ‘자, 그럼 나도 움직여 볼까?’

    12월. 곧 크리스마스다.

    이르지만 산타 아닌 산타가 되어 볼 생각이었다.

    종혁은 걱정하는 소영과 수호의 등을 떠밀었다.

    "가자. 찜질방 가야지."

    ‘아시안게임 끝나고 또 봅시다.’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흐른 후, 아차 하며 다급히 나왔던 준형과 세 명은 병실이 있는 층뿐만 아니라 병원 전체를 뒤지고 나서 다시 모였다.

    "……갔어. 고맙다는 인사도 못 했는데."

    "누굴까, 형? 이름도 못 들었잖아."

    난생처음 본 사람을 위해 거금의 병원비를 내준 고마운 사람.

    그런 사람이 소리 없이 사라지자 그들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 잔상을 쫓던 그들은 이내 한숨을 내뱉으며 집으로 향했다.

    차라리 밖에서 자는 게 나을 정도로 추운 그 끔찍한 집으로.

    "그래도 선아 누나랑 호영이는 좋겠다."

    추울 겨울처럼 적막한 골목. 준형과 둘의 시선이 한 소년에게 향한다.

    "병원에선 밥 나오잖아."

    셋은 잠시 멍해졌다.

    "……야이 씨!"

    빠아악!?

    한 사람이 열아홉 소년의 뒤통수를 때렸다.

    "죽을 뻔했다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그렇게 밥 먹고 싶으면 네 고향으로 돌아가!"

    움찔!?

    돌아가라. 그들 사이의 금기어다.

    소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는데! 나도 이런 말하기 싫은데!"

    "enough! 그만해.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 그렇지, 데니?"

    "흐윽. 미안해, 형. 그런 말 하면 안 됐는데……."

    데니의 뒤통수를 때린 청년은 빌어먹을 눈을 질끈 감으며 하늘을 봤고, 준형은 데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호빵 받았으니까 그거 먹자. 아껴 먹으면 삼 일 먹을 수 있어."

    "흐윽! 흐윽!"

    데니의 머리를 헤집은 준형은 씩씩하게 걸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이젠 정말 그만둬야 할까?’

    누군가에게 동정을 받을 만큼 무너진 삶.

    꿈을 계속 이어 가기엔 너무 지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생각하는 건 준형뿐만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내면 정말 그렇게 될까 무서워서 차마 못 꺼낼 뿐이다.

    "자! 더 식기 전에 얼른 가서 먹자!"

    "……응!"

    그렇게 달려 반 지하 숙소에 도착한 그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아이고, 이거 수도도 맛이 갔네. 교체해야겠는데?"

    "비키세요! 쌀 들어갑니다!"

    우글우글, 시끌시끌.

    거실 한구석에 쌀 포대가 놓이고, 전기가 끊긴 냉장고 안에 반찬이 들어간다. 보일러가 있는 뒷문에도 사람들이 있고, 화장실에서도 뚱땅뚱땅 뭔가를 하고 있다.

    "누, 누구세요?!"

    "아. 청년들이구나? 아까 어떤 청년이 와서 여기로 배달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수도랑 보일러 기사까지 불렀나 보네."

    ‘청년?’ 넷은 서로를 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동네 마트 사장이 그들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그 청년이 청년들한테 주라고 맡긴 거."

    준형은 재빨리 받아 계상에게 내밀었다.

    그가 지금 네 명 중 가장 똑똑했다.

    계상은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펴서 읽었다.

    "이, 이르지만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핑!?

    고작 서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오지랖을 부린 거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돈을 받지 못한 거라면, 일단 일했다는 것에 대한 녹음 증거를 모은 후 검찰에 고소를 해서……."

    이후로 어려운 말들이 이어졌지만, 준형은 깨달았다.

    ‘기적이 일어났다!’

    "크흐읍!"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다 잘될 거라고 낙천적으로 말하던 리더의 울음.

    셋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혀엉!"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싸늘한 냉기만이 가득했던 숙소가 뜨거워졌다.

    *  *  *

    유도 협회의 협회장 사무실에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하다.

    협회장의 급한 부름에 모였던 사람들이 심각한 그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회장님?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방금 전, 안기부, 아니, 국정원에서 왔다 갔어요."

    "헉?!"

    "무, 무슨 일로?"

    안기부는 그들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저승사자다. 협회장은 새 담배를 물었다.

    "푸후. 메달 따랍니다. 열 개 이상. 금메달은 다섯 개 이상."

    메달을 따라는 말에 겨우 메달이냐 생각했던 협회 임원들은 경악했다.

    "그 무슨! 금메달이 뉘집 애 이름도 아니고!"

    "아니면 각하 임기 말년 차를 우리들로 장식하겠답니다."

    ……꿀꺽!

    협회장은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렇게 됐으니 받은 거 있으면 모두 토해 내고, 이번 태극마크는 오직 실력으로만 뽑는 걸로 합시다. 그러려면 감독이나 코치진도 실력으로 뽑아야 할 텐데……."

    이번에 감독이 되기로 한 배불뚝이 장년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임 감독은 다음 아시안게임 때 하기로 합시다."

    "……예, 알겠습니다."

    "허흠. 양해해 줘서 고마워요. 내 임 감독 결단을 잊지 않을게요. 그러면 새 감독을 누구로 뽑아야 하냐는 건데……."

    "지금 한국에서 가장 실력 좋은 감독이면 그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협회장과 임원들이 이마를 쳤다.

    "아, 그 사람."

    이번 전국체전과 회장기를 쓸어버린 인재들을 배출한 감독.

    ‘새로운 훈련법을 도입했다고 했지.’

    그리고 결과를 냈다. 엄청난 결과를.

    "좋아요. 그럼 그 사람으로 하는 걸로 결정하는 겁니다?"

    "코치진도 그 감독이 뽑는 걸로 하시죠? 혹여 잘못 되도……."

    말을 다 하진 않았지만, 알아들은 협회장은 씨익 웃었다.

    "그럼 이의 없는 겁니다?"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유도 국가대표 감독이 정해졌다.

    *  *  *

    선수촌으로 향하는 언덕길.

    커다란 스포츠 백을 고쳐 쥔 종혁이 방금 전 받은 전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수호에게 번호 물어볼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그들이 감사 전화를 해 왔다.

    수호가 이제야 가르쳐 줬다고, 미안하다고.

    "미안할 건 없는데 말이지."

    마냥 그들이 불쌍해서 지원해 준 것이 아니었다.

    길가에 보물이 버려져 있기에 얼른 주운 것뿐이다.

    "그들을 통해 공기 반 소리 반 그 양반에게 투자한다면?"

    투자만 성공시킨다면 여기도 화수분이 되는 거다.

    연예계 사건에 도움이 될 라인도.

    "무작정 찾아가 투자를 하는 것보다 주위 사람을 공략해 들어가는 게 더 좋지."

    그러면 경계심도 누그러들어서 사기 치기가 쉽다고 했다.

    사기꾼들의 수법이지만 종혁도 입을 꾹 다무는 목격자를 공략하기 위해 자주 쓰는 방법이다.

    "그나저나 감독은 누가 되려나. 음?"

    종혁은 선수촌 입구에 모여 있는 기자들을 보곤 피식 웃었다.

    ‘부지런도 하셔라.’

    "어?! 최종혁 선수다! 최종혁 선수!"

    기자들에게 시달리다 겨우 풀려난 종혁은 선수촌의 진정한 입구가 가까워지자 낯빛을 굳혀 갔다.

    상비군으로 끝나냐, 아니면 태극마크를 다느냐는 감독이 어떤 성향이냐에 따라 갈린다.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종혁은 태극마크를 달고 싶었다.

    "부디……."

    "얼른 안 튀어와, 이 자식아?!"

    고개를 든 종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만났던 사람. 은사.

    "……감독님?"

    ‘이 양반이 여기 왜 있어?’ 종혁은 웃고 있는 신성일 감독을 멍하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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