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24화>
* * *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건지 열기가 남아 있지만, 경기가 모두 끝나면서 어수선해진 체육관.
분 냄새를 가득 풍기는 여자 아나운서가 빠르게 다가와 마이크를 내밀었다.
"경기 잘 봤습니다, 최종혁 선수! 고등학생인 최종혁 선수가 성인들만의 경기인 일반부에 출전해 우승을 하기가 정말 힘들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더 값진 우승이 아닌가 싶네요! 지금 소감이 어떠신가요?"
"기쁩니다!"
처음엔 대학 진학을 위한 스펙 때문에 출전했던 대회들.
그렇기에 한 번 한 번의 승리에 백 퍼센트 기뻐하진 못했다.
마음 한구석은 언제나 냉정했다.
하지만 방금 전은 달랐다.
가슴속에서 울컥 뜨거운 게 솟았고, 그동안 불완전연소된 채 쌓여만 있던 마음속의 장작이 한꺼번에 타오른 듯 포효했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감독님의 세심한 지도와 선배님들의 보살핌, 동기들의 열정적인 응원 덕분에 우승을 한 것 같아서 더 기쁩니다! 엄마! 금방 메달 들고 갈게! 저녁에 고기 구워 먹자! 냉삼!"
"호호호!"
방금 전 거세게 포효하며 남자다운 면모를 뿜어 댔던 종혁이 갑자기 엄마라고 외치자 여자 아나운서는 귀여워 웃고 말았다.
"와, 이제야 열일곱 살 소년 같아 보이네요. 그런데 냉삼이 뭔가요?"
‘아차. 이거 지금 쓰는 말 아니지!’
"하하. 냉동삼겹살이요. 친구들끼리 쓰는 줄인 말이에요."
종혁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런가요?"
카메라맨이 손가락을 들고 빙빙 돌렸다. 신호다.
여자 아나운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혁 선수 하면 뛰어난 성적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운동하면서 공부하는 게 힘들지 않나요?"
순간 종혁의 흥분이 빠르게 식었다.
"그건 의지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뜻이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듣고 있냐, 현석아? 너 머리 좋은 놈이야, 인마!’ 회귀 전 모든 면모에서 최종혁 열화판이라는 소릴 들었던 현석.
순경에서부터 시작해 결국 경감의 직위에 올랐다.
순경에서 시작하는 대부분의 경찰들이 경위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하지만 키는 작아도 그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외치던 현석은 치열한 경쟁을 이겨 내고 경감이 되어 지능범죄수사대의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했다.
지금부터 공부를 시작하면, 충분히 경찰대에 갈 수 있을 것이다.
종혁은 그러기를 바라며 간절히 말했다.
"뜻…… 그렇죠. 어떤 일을 하든 해내겠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하죠."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종혁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면 최종혁 선수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당연히 내년에 열릴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입니다!"
립 서비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 후에 경찰대나 법대에 가고 싶습니다!"
종혁은 카메라 앞에서 한 번 더 다짐했다.
아나운서와 카메라맨, 시청하는 국민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 금메달도 힘드실 텐데 너무 욕심 부리시는 거 아닌가요?"
"할 수 있다면, 해낼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욕심이 아니라고 봅니다."
"아."
자못 거만해 보일 수 있는 말이지만, 지금껏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정말 해낸 종혁이기에 신비하게 들렸다.
‘어머. 얘 좀 봐?’
아니, 갑자기 애처럼 보이지 않았다.
17살인데도 성인 남성 같아 보이는 모습에, 아나운서는 문득 찾아든 사심을 입에 옮기려고 했다.
"종혁아! 시상해야지!"
"네!"
"아!"
아나운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고 계실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국민…….’ 순간 가슴이 무거워졌다.
‘지금 국민들은 얼마나 무서운 게 다가오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것이다.
아니라고 애써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힘들어했을 것이다.
종혁은 진지하게 카메라를 응시했다.
"앞으로 힘들고 괴로워도 옆에 있는 사람을 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은 뜬금없이 찾아오지만, 함께 똘똘 뭉치면 이겨 낼 수 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그럼."
"최종혁 선수!"
종혁은 다급한 아나운서의 외침을 뒤로하고 단상에 섰다.
급격하게 다가오는 겨울.
싸늘하게 식은 체육관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 * *
"허. 뉘집 새끼인지 몰라도 말을 저라고 잘하노."
일곱 가족 겨우 몸을 뉘일 만한 작은 집의 거실.
가족들이 둘러앉은 거실, 작은 키에 차돌 같은 분위기의 40대 후반 남성이 담배를 뻐끔 피우며 혀를 내둘렀다.
"자는 그럴 거라고 했잖아예! 하이고, 진짜 말 잘하네. 자 엄마는 밥 안 무도 배 부르겄다!"
실력 증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종혁의 가정사도 밝혀졌다.
거리에서 떡볶이와 김밥을 파는 홀어머니와 반 지하에서 힘들게 살면서도 전국 상위 1퍼센트의 성적과 금메달을 거머쥔 종혁.
그래서 더 좋게 보이는지 몰랐다.
정미자가 침을 튀기며 말하자 강철선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짜 건달 아이가?"
"이래 금메달도 땄는데 건달처럼 보여예?! 이 사람이! 그러다 벼락 맞아예!"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그나저나 법대라…….’
"허헛. 걸출한 후배가 들어오려는 갑네."
이왕이면 검사가 됐으면 싶다.
네 살 난 잠든 여동생을 품 안에 안고 있던 현석은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힐끔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부지요, 후배 이 지랄 말고 집안일이나 신경 쓰이소.’
아버지 강철선은 검사다. 그런데도 이렇게 작은 집에서 일곱 가족이 지지리 궁상으로 사는 것도 모자라, 어머니가 어시장에서 좌판을 깔다 일수 양아치들에게 욕을 보이게 만들 만큼 무능하다.
‘월급 받아서 힘든 후배, 힘든 피해자들한테 돈 퍼 주지 말고! 여기 동생들이, 당신 자슥들이 눈에 밟히지도 않는교!’
자식만 강현석 본인을 포함해 줄줄이 다섯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 가족이 아닌 사람을 신경 쓴다.
그래서 언제나 가난한 집안.
그렇기에 움츠러드는 어깨.
일수 양아치들에게 ‘우리 아부지가 검사다.’ 하고 말하지 못한 것도, 가족이 아닌 타인부터 신경 쓰는 아버지가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종혁이 혹여 건달이라고 해도 그렇게 멋져 보였는지 몰랐다.
홀로 당당하게 빛났으니까.
그런데 사정을 모두 안 지금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의지의 차이. 뜻이 있다면…… 저 행님은 왜 공부를 저라고 박 터지게 했지? 공부가 그리 중요한 기가?’
힘들게 사시 패스했는데도 지지리 궁상인 아버지를 보면 딱히 공부할 생각이 들지 않지만, 종혁이 공부를 열심히 하니 생각이 많아졌다.
‘음. 나도 공부 함 해 볼까? 저 행님이 저리 공부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겄나? ……그래. 함 해 보자.’
선생들이, 어른들이 말하길 가장 중요하다는 공부.
가난하고 힘들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종혁이 있기에 현석은 한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하이고 뉘집 아들은…… 니 어디 가노?"
"방에 공부하러예."
"뭐? 공부?"
"방해하지 마이소."
"오, 옴마야. 아, 알았다. 과일 주까?"
"됐슴더."
쿵!?
작은 쪽방 문이 닫히자 정미자와 강철선은 서로를 보았다.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랑가 봅니더."
"……자도 이제 중학교 올라갔다고 정신 차리는 거 아니겠나."
강철선은 유도 경기가 지루했는지 잠든 자식들을 따뜻하게 바라봤다. 이제 곧 겨울이라서 그런지 볼이 발갛게 트기 시작하는 자식들. 이대로만 잘 커 주길 바랐다.
"집안엔 별일 없나?"
"별일은 무슨. 당신은 나랏일이나 신경 쓰소. 내 새끼들 쪽팔리게 하지 말고."
"……알았다. 소주."
"찌짐 좀 더 부치까예?"
"어."
강철선은 빈 소주병을 들고 일어서는 아내의 굽은 등과 다 해진 옷을 빤히 보았다.
‘좀만 참아라. 내년에 서울 가면 사정 좀 필 끼다.’
그라고 왜 애들이 못 입고 못 먹는 걸 모르겠나.
다만 자신 가족들보다 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기에 주머니를 열게 되는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진 그는 진지한 얼굴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종혁을 보았다.
"법대, 아니, 검사를 꿈꾼다고?"
그의 마음속 종혁은 이미 검사였다.
법대 하면 검사, 검사 하면 법대였다.
그의 머릿속엔 그런 공식이 있었다.
위에서는 쉬쉬한다지만, 나라가 작살이 나는 와중이라 검찰도 분위기가 어두웠다.
나라가 망하면 벌이가 불확실한 변호사보다 공무원인 검사로 말뚝 박을 놈들이 많아지겠다고 벌써부터 밥그릇 싸움을 벌이려고 한다.
일부는 망하기 전에 한몫 챙기겠다고 생난리를 치고 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거늘. 쯧. 저런 얼라도 나라 꼴이 요상타는 걸 눈치챈 거 같구마."
곧 검찰의 비리 사건들이 다뤄지지 않을까 그는 내심 걱정하였다.
"흠. 설계 함 해 볼까? 저놈아 정도모 마서코트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를 상황에서 일종의 눈 돌리기 및 분위기 환기용 마스코트. 아마 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검사들이 꽤 있을 것이다.
머리 굴리는 걸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게 검사니까.
그들과 연계하면 제법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서울 입성 첫 작품으로 괜찮겠네.’
"점마가 이대로 공부 좀 해가 한국대 족보만 가지면……."
대학 이름은 곧 조직 생활의 근본.
그도 한국대를 나왔기에 이런 시골에서 서울로 영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종혁은 한국대생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윈윈 좀 하제이. 기자들 때문에 좀 귀찮겠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훨씬 좋은 일일 기다. 이 아저씨도 많이 챙겨 줄게."
그는 컵에 남은 소주를 들이켜며 눈을 빛냈다.
* * *
그렇지 않아도 추워지는 날씨에 난방 기름 값 걱정, 연탄 값 걱정을 하는 11월 22일.
대한민국의 겨울은 생각보다 더 일찍 찾아왔다.
-현 시간부로 우리 대한민국은 IMF의 자금 원조를 받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
쿠쿵!
경제대국, 선진국을 향해 가열 차게 나아가던 대한민국이 주저앉는 순간이었다.
"저게 무슨 말이니?"
고정숙은 노점 천막과 아들, 좁았던 그녀의 세상처럼 작은 TV를 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믿지 못하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아이고!"
"나라가 망하다니!"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태반이 거리에 내놓은 스피커 앞에 주저앉았고, 한 가정의 가장은 하늘을 보며 담배를 물었다.
"망하지 않는다며! IMF 지원은 없을 거라며!"
"믿으라고 했잖아. 이 개새끼들아!"
한순간 지옥으로 변해 버린 거리.
종혁은 띠리리! 띠리리! 다급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어머니의 노점 천막을 빠져나왔다.
-종혁 씨!
다급한 권아영과 박태규의 부름.
지난주부터 벼랑 끝에 몰린 듯 위태로웠던 한국은 결국 벼랑 아래로 떠밀렸다.
종혁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시작합시다."
* * *
혹독한 겨울, 매서운 한파가 들이닥쳤다.
빚으로 쌓아 올린 거짓된 성공에 샴페인을 터트리던 기업들이 무너지고, 해외 은행들에게서 빚을 져 돈놀이를 하던 종금사들이 파산해 갔다.
그런 종금사에 휘둘리면서도 세상 가장 아래서 이 악물고 살아가던 중소기업과 소상 공인들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속절없이 스러졌다.
은행들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생명, 아니, 존속의 경각을 다투는 상황에 돌입했다.
그에 시장에서는 콩나물 값부터 치솟고, 등유 기름보일러로 옮겨 탄 사람들은 막아 버렸던 연탄 아궁이를 다시 뚫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국이 처참해져서인지 국가대표 소집은 예정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어디 가게? 내일 새벽에 선수촌 가야 하잖아."
"수호네 집이요. 짐은 다 쌌어요."
김소영의 이모 권아영을 통해 박태규가 돈가스 김창득에게 납치된 걸 알게 되고, 구한 이후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가지 못했던 박수호의 집.
‘수호네 집이 달동네였지.’
소영의 집에 가기 전 어디로 오면 된다고 수호가 말했던 동네는 흔히 달동네라 부르는 곳이었다.
"선수촌 들어가면 잘 나오지 못할 테니까 들어가기 전에 작별 인사 겸 수호 부모님도 뵈려고요."
"그래?"
고정숙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쉬워했다.
곧 멀리 떠날 종혁과 오늘 하루를 보내기 위해 자체 휴가를 냈기 때문이다.
귀신같이 그걸 캐치한 종혁은 얼른 입을 열었다.
"대신 오늘 저녁엔 찜질방 가요. 된다면 수호네 부모님과 소영이 부모님도 다 같이!"
"찜질방? 사우나?!"
고정숙은 그녀 본인도 모르게 지갑을 찾았다.
"찜질방은 아들이 상금 받은 걸로 쏩니다!"
"하이구. 네가 뭔 돈이 있다고. 네 돈이라고 해 봐야 내가 준 용돈……."
고정숙은 잠깐만 하고 방에 들어갔다 온 종혁이 내미는 통장을 보곤 깜짝 놀랐다.
"상금이…… 많네?"
그동안 아들 돈은 아들 돈이라고 신경 쓰지 않았는데, 신경 쓰지 않기에는 액수가 많았다.
"흐흐. 요새 왜 용돈 달라고 안 했겠어."
고정숙은 이 큰돈을 받았음에도 입을 싹 닦은 아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오케이. 엄마의 잘난 아들이 경락까지 쏜다! 우리 엄마 예쁜 얼굴 더 예뻐져 봅시다!"
"……이번 한 번만 봐주겠어. 다시 이랬단 봐라. 확 그냥!"
"흐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 날 추우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네!"
그렇게 집을 나온 종혁은 쓸데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선물을 사야겠네."
그는 현재 수호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