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8화>
6. 봉사활동에서 생긴 일
정확히 30일이 되자 합숙은 끝났다.
대부분은 울며 내년을 기약하고, 소수는 웃었던 합숙.
옆 숙소에 여고가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못 한 것에 대해선 모두가 울었다.
-후, 통화하기 힘들다. 그쵸?
아직은 터지는 곳보다 터지지 않는 곳이 많은 기지국.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오랜만입니다, 권 PB님. 여의도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똑같이 안일하죠. 뭐, 그래도 슬슬 위험을 감지하는 것 같기는 해요. 극히 소수지만.
"홍콩 쪽은요?"
그들은 홍콩에도 사무실을 얻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다.
-그것에 대한 매입이 끝났어요. 제대로 터져 주면 여기서만 30배를 건질 것 같아요.
"호, 그게 아직 남아 있었습니까?"
일본, 홍콩, 월스트리트.
노무라 증권이나 JP모건 등 세계적인 증권사에서 다루는 한국 부도에 관한 도박성 투자 상품.
상승이 아니라 하락에 중점을 둔 상품이다.
위기가 가시화되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정말 아슬아슬했죠.
한국 부도가 가시화되자 세계적인 증권사들은 발행했던 상품을 가입 못 하게 하거나 수령액을 팍 줄이는 추세로 돌아섰다.
이런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지만, 가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는데 아슬아슬하게 터닝 포인트 전에 구매를 할 수 있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음, 그런데 우리의 플랜대로라면 기간을 좀 더 길게 잡았어도…….
"아뇨. IMF의 시어머니 짓은 길게 가지 못할 겁니다."
-……우리나라의 저력이 그렇게 대단했던가요?
‘국민들의 저력이 대단한 겁니다. 환란이 들이닥치면 분분히 일어서는 한국인의 힘.’
금 모으기 운동.
한국인의 단합된 힘이 세상의 시선을 바꿔 놓았다.
"그냥 믿어 주십시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휴, 알았어요. 내가 종혁 씨 안 믿으면 누굴 믿겠어요?
"하하."
-치, 아! 그보다 합숙은 좀 어때요? 레귤러는 됐어요?
"레귤러요?"
종혁은 책상을 보았다.
비닐에 싸여 있는 검은색 트레이닝 상의.
포효하는 백호 한 마리 위로 동일고라는 세 글자가 크게 박혀 있고, 그 밑에 regular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2일 하고도 한나절, 하루 30승.
종혁은 동일고 유도부의 그 누구보다 먼저 레귤러 자리를 차지했다.
"뭐, 껌이었죠."
잠시 수화기 너머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불편한 것인지, 기쁜 것인지는 오직 권아영만 알 것이다.
-와, 축하드려요! 이거 축하주, 아니 축하 파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종혁은 입맛을 다셨다.
"봉사 활동을 가야 해서요."
-네?
봉사 활동.
작년부터 서울과 다섯 대도시 초중고에서 시행했고, 올해부터는 대학들 모두 사회봉사 활동을 점수화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찰대나 한국대 법대를 노리는 종혁으로서는 결코 빼먹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우글우글 사람들이 가득한 남대문 시장.
그 입구부터 시끄럽다.
"골라골라, 잡아잡아! 골라!"
리어카 좌판 위에 올라가 랩인지 뭔지 모를 말을 빠르게 내뱉는 아저씨.
한 손에 장바구니를 움켜쥐고 조금이라도 예쁜 옷을 차지하기 위해 팔을 뻗는 아주머니들.
"거기 학생 이리 와! 싸게 해 줄게! 맛있어!"
"미군 워커 팔아요!"
잡채호떡을 파는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고, 저 먼 골목에선 십대 꼬마가 크게 외친다.
그렇게 걷는 와중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종혁아!"
소영과 수호가 우다다 달려온다.
"천천히 와. 넘어질라."
"흐히히. 아, 레귤러 된 거 축하해!"
"이제 금메달 따는 일만 남은 거야?"
‘똥강아지가 두 마리네.’ 한 달 만에 보니 그 꼬리가 더 잔망스럽게 흔들리는 것 같다.
"와, 여기가 남대문이구나."
"어? 소영이 너 안 와 봤어?"
"응, 난 주로 백화점 다녀서. 수호 넌 와 봤어?"
"난 많이 와 봤지. 여기엔 없는 게 없잖아."
"정말?"
‘그랬지. 이 시절에 남대문은 없는 게 없었지.’ 돈만 주면 탱크도 구할 수 있다던 청계천과 남대문.
참 아련한 추억이었지만, 종혁의 눈은 시장 전체를 훑고 있었다.
"때끼가 있으려나……."
"응? 때끼?"
"아, 아니야."
‘나 참, 시장 왔다고 소매치기가 있는지부터 찾네.’ 이래서 습관은 무서웠다.
"가자."
종혁이 그들을 이끈 곳은 남대문 파출소였다.
그 문 앞에 서자 소영이 머뭇거렸다.
"종혁아, 정말 여기서 해도 괜찮을까?"
파출소나 경찰서는 범죄자가 가는 곳이다. 그녀로선 어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그건 수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믿어. 이곳만큼 편한 곳도 없을 테니까."
‘세상 꿀 빠는 곳이지.’ 그리고 더 꿀을 빨 수 있게 만들 계획을 짜 왔다.
"저, 정말?"
종혁은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딸랑!
시선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전철역은 왼쪽으로 나가서……."
"김종두 강력반 반장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흡?!"
강력반 반장이란 말에 경찰들이 얼어붙을 때, 안에서 후덕한 덩치의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안경 낀 아저씨가 걸어 나왔다.
"아이고, 너희가 걔들이구나? 동일고?"
‘경정?’ 무궁화 셋, 파출소장이다. 까마득한 선배였다.
종혁은 반사적으로 올라가려던 손을 겨우 붙들 수 있었다. 대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소장님! 최종혁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 어…… 으하하하핫! 그래, 이 아저씬 소장인 박창도야. 봉사 활동 하러 왔다고? 아, 들어와. 성찬아, 여기 음료수 세 개! 난 커피!"
그들은 안쪽 회의실로 안내됐고, 곧 음료수가 나왔다.
‘흠, 종두 그 자식이 잘해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박창도는 신기해하며 회의실을 둘러보는 둘과 달리 너무 편하게 앉아 있는 종혁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동일고 학교 폭력, 송양자 사기 미수, 구로동 돈가스 납치.’
이 중 학교 폭력은 전국을 뒤집은 사건이다.
이후 전국 중고등학교에 조사가 이뤄졌고, 엄청난 피해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한국을 뒤집었다.
거의 학교 폭력과의 전쟁이 선포된 수준이었다.
이 때문인지 김종두는 본청 진급이 거의 확정된 상태였다.
본청은 아니라도 청에 들어가고 싶은 그로서는 미치도록 부러운 상황이었다.
‘똘똘한 놈이니 그냥 해 달라는 거 해 주는 게 좋을 거라고 했지? 어디…….’
"흠, 그런데 어쩌지?"
"네?"
"우리 파출소에서 너희가 할 일이 없는데……."
청소를 시키려고 해도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 하는 게 청소다.
‘알지, 알아.’
그놈의 보는 눈이 뭔지 순경들만 고생할 뿐이다. 솔직히 은행보다 깨끗한 게 바로 파출소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파출소를 선정한 거지.’
방 청소도 잘 안 하는데, 남의 회사 청소라고 하고 싶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너희보고 범죄자 조서를 받으라고 할 수도 없고."
"네에?!"
"으하하핫! 농담이야, 농담!"
종혁은 하얗게 질린 둘과 이쪽을 보며 입만 웃는 박창도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양반 봐라?’
뭔가 바라는 게 있다.
종혁은 그게 뭔지 대번에 눈치 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편하지!’
안 그래도 꺼내려고 했던 이야기.
"저흰 경찰 아저씨들처럼 순찰해 보고 싶습니다!"
"……순찰?"
"예! 그리고 길을 잃은 사람에게 길도 안내해 주고, 어려운 사람도 돕고 싶습니다."
"어이구, 힘들 텐데……."
순찰은 경찰의 영역이지, 이런 꼬맹이들에게 맡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다른 애들이 무서워서 안 오는 파출소도 보람차다는 것을, 경찰 아저씨가 친절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습니다."
움찔!
순간 박창도 소장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어? 정말? 정말로 무서워서 파출소에 안 오니?"
"예, 파출소는 무서운 곳이라는 느낌이 강해서요."
왠지 같은 청소를 해도 빡세게 청소해야 할 것 같고, 걷는 것도 눈치 보며 걸어야 할 것 같은 파출소.
이런 느낌 때문인지 실제로 먼 미래까지 파출소는 청소년 자원봉사 활동에서 꼴찌를 담당하고 있다.
"그치?"
종혁의 물음에 소영과 수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구 중에서도 파출소로 봉사 활동 간 애는 없어요."
"맞아요. 다 동사무소나 고아원에 갔어요! YMCA나요!"
"흠, 그렇단 말이지……."
‘애들에게 인기 없는 파출소라……. 내가 이 인식을 바꾼다면?’ 파출소의 소장이 진급하고 싶으면 실적도 실적이지만, 파출소를 어떻게 꾸렸냐가 중요하다.
그중 미담은 아주 좋은 소재다.
더욱이 종혁은 여러 사건에 도움을 주며 용감한 시민상까지 탄 아이. 제법 주목을 받게 될 터다.
거기까지 생각한 서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자식?"
"예?"
"예는 뭔 예야, 이놈 자식아. 아저씨 같은 경찰 앞에선 연기하는 거 아니다."
그제야 종혁은 씩 웃었다.
역시 금방 알아차릴 줄 알았다. 선수는 속일 수 없는 법이고, 어차피 속일 마음도 없었다.
그 미소에 박창도는 혀를 내둘렀다.
"요놈 시키. 아주 선수네, 선수야."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마치 구르고 구른 사람과 상대하는 것 같다.
"흐흐, 그렇다면?"
"그래, 네 말대로 해 주마. 봉사 시간도 팍팍 줄게! 20시간?"
"이왕이면 30시간이요! 감사합니다!"
"거참…… 성찬아!"
"예, 소장님!"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이놈들 조끼 입히고, 그 방범 순찰 완장 있지? 그것도 채워. 아니, 그냥 무전기까지 채워 줘."
할 땐 확실하게 해야 했다.
갑자기 휙휙 진행된 상황에 수호와 소영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종혁은 여유롭게 몸을 일으켰다.
"아, 그런데 내가 허락 안 했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냐?"
"그러면 아마…… 다른 파출소에 갔겠죠?"
진급을 원하는 소장이 있는 다른 파출소.
"능구렁이 같은 놈. 가 봐."
"옙! 아, 충성!"
"허허, 그래. 충성이다, 요놈아."
그렇게 종혁과 둘이 나가자 소장은 전화기를 들었다.
"어, 김 기자 난데?"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박창도 서장 선배님 아니세요.
"아직은 소장이야, 인마."
그의 위치와 나이쯤 되면 기자 한두 명은 아는 법이다.
그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 갔다.
* * *
"무전기가 무거우면 어깨끈에 걸어 놓는 것도 좋아."
"이, 이렇게?"
"음, 잠깐 이리 와 봐."
‘흡?!’ 요즘 부쩍 좋은 냄새가 나는 종혁이 다가오자 소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가슴의 무전기를 떼는 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걸 본 수호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종혁아, 나도! 무거워!"
"그래? 잠깐만?"
‘저게?!’
‘메롱!’
‘또 싸우냐.’
고개를 저은 종혁은 무전기 전원을 켜고, 복장을 점검했다.
삐리릭!
무전기 채널까지 확인하는 그 모습에 서성찬 순경은 입을 떡 벌렸다.
‘선배님?’
왠지 경찰 선배인 것 같은 능숙함. 청바지 위에 경찰 조끼를 걸쳤는데도 어울린다.
순경 반년 차인 그는 자신보다 능숙한 그 모습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모, 목단봉도 줄까?"
‘크, 목단봉.’ 오랜만에 듣는 단어다.
미래엔 삼단진압봉으로 교체되는 목단봉.
"아뇨, 괜찮습니다."
목단봉은 위험하다.
종혁이 아니라 수호와 소영이 위험했다.
무기가 있으면 써 보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
실제로 피해야 하는 순간에 무기만 믿고 달려들다 크게 다치는데, 주로 혈기 넘치는 초년 순경들이 그러는 경우가 많다.
어차피 사건 현장 근처는 가지도 않을 테지만, 혹시나 하는 상황은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자, 그럼 가시죠!"
"으응."
"야, 너희들도 그만 싸우고 가자!"
"싸, 싸우기는! 안 싸워!"
"맞아, 내가 밤톨 따위랑 왜 싸워?"
"뭐? 따위? 야, 전봇대!"
"이게!"
한숨을 쉰 종혁은 무시하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앗! 같이 가!"
그렇게 그들은 수많은 사람이 부대끼며 하루에도 참 많은 일이 일어나는 남대문 시장 안으로 향했다.
* * *
"여기가 다쉬락의 나라."
험한 뱃사람들의 간식, 다쉬락.
마요네즈를 뿌려 먹어도 좋고, 소시지와 함께 먹어도 맛있어 뱃사람이라면 출출할 때 가장 먼저 찾는 다쉬락.
한국어로는 도시락.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 손꼽히는 무역 회사에 다니다 그만둔 후 다쉬락 같은 아이템을 찾기 위해 한국에 온 금발 푸른 눈의 삼십대 중년인 빅토르는 김포 공항에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있을 거다. 나라가 어려워지니 좋은 것들을 싸게 주울 수 있을 거야."
얼마 전 거의 마지막 타이밍에 홍콩의 어느 회사가 대량의 투자 상품을 계약했다.
국가가 부도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저점에 포인트를 잡은 말도 안 되는 도박성 상품.
그걸 기점으로 모든 증권사와 은행들이 그런 류의 상품 가입을 막고 있다.
문제는 그 홍콩 회사의 주인이 한국인이라는 소문이 돈다는 것.
같은 나라 국민마저도 국가부도에 베팅한다?
정말 심각한 일이었지만, 그에게는 기회였다.
도시락 같은 좋은 상품을 싸게 계약해 유통할 기회.
나라가 망할 정도라면 기업의 상태는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릴 테지.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유통 판로가 나타난다? 그것도 외화를 벌 수 있는 판로가?"
이쪽이 유통을 맡을 생각이라 그들로서는 리스크도 없다. 어떤 기업이라도 환영할 테고, 빅토르는 러시아에서 통할 것 같은 상품만 주워 가면 된다.
어쩌면 도시락의 러시아 유통을 맡을 수도 있었다.
몸이 후끈 달은 그는 얼른 택시에 올랐다.
"어이고, 어서 오세요! 웰컴, 웰컴!"
"어……."
그는 얼른 품에 있는 쪽지를 꺼냈다. 몇 가지 회화 목록을 적어 둔 쪽지였다.
"아, 쉬장에 가?"
"가는 니미럴 반말이고. 하여튼 양키 새끼들은 위아래가 없어. 쉬장? 택시에서 쉬할 곳을…… 아, 시장?"
"Да! Да(그래, 그거)!"
그 나라를 알고 싶으면 시장에 가라고 했다.
어차피 두 달을 잡고 온 스케줄.
그는 천천히 밑바닥부터 훑을 계획이었다.
"어떤 시장? 남대문? 동대문? 용산? 청계천?"
"췌일 큰!"
"아, 제일 큰 곳? 그럼 남대문이지. 오케이, 오케이! 그럼 출발합니다!"
부르릉!
하얀색 대현 스텔라 택시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 여기! 아, 거 좀 내려 줍시다! 아줌마만 바빠?"
말도 않고 합석시킨 사람들이 내리자 겨우 내릴 수 있게 된 빅토르는 우글우글 사람이 내뿜는 활력으로 가득 찬 남대문을 보며 눈을 빛냈다.
"스파씨바!"
"뭐, 씨바? 이 씨벌놈이?"
"땡큐!"
"아, 오케이. 오케! 굿 빠이!"
빅토르는 신나게 음악까지 틀어 주며 친절하게 태워 준 택시 기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합석은 러시아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서 불쾌하지 않았다.
"한국 택시는 재밌네. 러시아 택시는 참 재미없는데 말이야."
이를 보이며 웃는 게 미덕이 아닌 나라, 러시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간 주먹이 날아온다.
빅토르는 이름 모르지만 꽤 중독성 있던 네 박자의 노래를 떠올렸다.
"음악도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야겠어."
고개를 끄덕인 그는 남대문을 보며 숨을 길게 내뱉었다.
"자, 그럼 가 볼까?"
그는 같은 한국인도 아차 하면 코 베이는 마굴, 남대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 * *
‘여긴 어디? 난 누구?’
어어? 하다가 양손에 들린 비닐봉지가 스무 개다.
바지, 셔츠, 양말, 속옷, 순대.
러시아와 다른 느낌으로 색상이 화려한 디자인이라 구매를 하긴 했지만, 마구잡이로 떠넘기는 그 행동은 정신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놈들은 또 뭐고?’
주위를 둘러싼 네 명의 남자.
"거, 좋은 거 있다니까. 이리 와요."
빅토르는 눈앞에 골목이 보이자 반사적으로 멈춰 섰다.
뒷골목에 함부로 가지 마라.
당연한 이야기다.
"어휴, 좋아. 여기서 봅시다. 이봐요, 나한테 아주 좋은 게 있거든? 당신 이런 거 좋아해? 내가 싸게 줄게."
‘비디오테이프? ……포르노?’ 그의 눈에 경멸이 들어찼다.
"어라? 이 양키 새끼 눈깔 봐라?"
"Убирайся с дороги(비켜)."
그들로서는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언어.
190cm 장신의 외국인이 노려보며 몸을 미니 그들은 순간 겁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에이, 이렇게 가면 곤란하지! 사람을 고생시켰으면 돈은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돈! 머니!"
턱!
가슴을 미는 손에 그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쳐 죽일까?’
아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사고 칠 순 없었다.
"Положить(놔)."
"뭐라는 거야! 한국어로 해!"
"어? 양아치다."
"어떤 새끼가?!"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들의 눈에 경찰이 보였다.
네 명의 사내는 굳었고, 빅토르는 의아해했다.
‘한국 경찰은 사복과 정복을 함께 입나?’
그리고 꽤 어려 보였다.
종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