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5화>
5. 합숙
"종혁아."
‘내 보물!’ 유도부 감독실을 울리는 끈끈한 부름에 종혁은 엉덩이를 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약 두 달 전 기사가 난 이후 네가 그렇게 싸움 잘하냐며 당한 무한 업어치기. 척추가 으스러질 것 같고, 끝 모를 체력이 바닥을 드러낸 날이었다.
체력이 부족한 감독이 주장에게 바톤 터치하고 주장이 부주장에게 바톤 터치하며 하루 온종일 넘겼기 때문이다.
용감한 시민상을 타면서 유도부 주가가 올라간 이후, 시한폭탄을 보는 듯한 시선이 사라졌다지만 그 트라우마의 잔재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니 우리 종혁이 힘들지 않나 해서. 음료수 줄까?"
"힘들긴요. 다 끝났는데요."
"다 끝났어?! 드디어?"
길고 길었던 번역이 드디어 모두 끝났다.
당초 한 달로 잡았던 것보다 두 배 이상이 더 든 시간.
박태규와 권아영을 신경 쓰고, 기말고사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을 더 소비하게 되었다.
기말 고사 성적은 평균 93.5점.
반에서 5등을 했다.
유도부원들도 중간고사 때보다 최소 평균 2점씩 오르며 등수를 지켰다.
그렇게 어렵게 번역하기는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게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
‘입이 방정이지!’
컴퓨터 오류라며 지워 버릴까, 말까.
깊이 갈등하던 종혁은 신성일의 눈빛에 결국 판도라 상자를 열기로 했다.
"잠시만요."
달칵! 찌직! 찌직!
프린터에서 뽑힌 자료를 읽은 신성일은 의아해했다.
"오오? 음? 뭐야."
"그게 암 워킹이에요.
‘사람 잡기 딱 좋은.’ 놀랍게도 이 시기에도 암 워킹이 있었다.
"아, 이게 암 워킹이야?"
신성일은 어이없어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뭐가 다르나 했더니 여기도 네 발 걷기를 하네."
네 발 걷기.
양발, 양손으로 계단이나 등산로를 걷는 훈련인데, 운동부라면 거의 다 하는 훈련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뒷장도 넘겨 보세요."
"……오호?"
신성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렇지! 이래야 선진국이지!"
네발 걷기를 변형시킨 훈련법들이 있었다.
팔과 허벅지 안쪽 근육을 골고루 발달시킬 수 있는 자세들.
그중 하나가 종혁이 아는 암 워킹이다.
팔로 걸어 팔 굽혔다 펴기.
이 원형 그대로 써도 될 것 같았다.
"그 뒤에 있는 자세가 버핏 테스트예요."
일반인은 50번 정도 하면 저승사자와 면담을 하는 버핏 테스트.
"이건 엎드려 뛰기랑 비슷하네."
"그리고 마지막 70페이지가 크로스핏이고요."
정확히는 크로스핏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걸 종혁이 적절하게 개선한 것이었다.
효과는 장담할 수 있지만, 그만큼 고될 것이 확실한 훈련법들이다.
신성일이 진중한 눈으로 자료를 살폈다.
"흠. 크로스핏은 따로 해 봐야겠지만, 암 워킹이나 버핏 테스트는 지금 당장 해도 되겠군."
손가락을 까딱인 신성일이 밖으로 나가자 종혁은 미소를 지었다.
창밖으로 곧 비가 오려는 듯 흐릿한 날씨가 보였다.
"거 죽기 딱 좋은 날씨구만."
하지만 자업자득.
금메달을 떠올린 종혁은 이를 악물며 밖으로 나갔다.
‘동일고 유도부원 최종혁 용감한 시민상’이란 플랜카드 아래 하앗 핫 쿵쿵 대련을 하는 이들.
다른 학교와 대련을 할 때 자랑하겠다고 걸어 놓은 거다.
"모두 주목!"
"주목-!"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원들을 둘러 본 신성일 감독이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새 훈련을 도입시키려고 한다."
유도부원들의 눈이 빛났다.
종혁이 미국의 선진화된 훈련법을 번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부원은 없었다.
메달, 혹은 명문 대학 진학이 목표인 그들.
이전에 번역되어 훈련 커리큘럼에 포함된 스트레칭이나 근력 훈련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기에 더욱 기대가 되었다.
"기존에 하던 훈련과 큰 차이는 없으니 빨리 적응할 거다. 숙달된 조교 앞으로."
"앞으로!"
"암 워킹 준비 자세!"
"암 워킹 준비 자세! 하나둘!"
재빨리 엎드린 종혁이 엉덩이를 뾰쪽 들었다.
"2번 자세 시작!"
"시작! 하나둘 셋 핫!"
세발자국 걷고 왼팔과 오른다리를 들어 몸을 비튼다. 이때 오른 다리는 고개를 트는 방향인 왼쪽으로 비튼다.
우두둑!
방금 전까지 의자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허리에서 큰 소리가 울렸고, 유도부원들의 얼굴은 하얗게 변했다.
‘저, 저거!’
초등학교부터 유도를 한 그들은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게 얼마나 흉악한 훈련인지.
최소 70킬로그램 몸뚱이를 지탱하는 한쪽 팔과 한쪽 다리.
"팔 더 구부려, 인마! 직각으로! 숙달된 조교가 왜 그래!"
‘그냥 네 발 걷기도 힘든데!’
‘저게 왜 선진화야!’
‘미안혀! 죄송혀요!’
"둘, 둘, 셋! 핫!"
우두둑!
지옥으로 향하는 특급 열차 티켓이 모두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이었다.
* * *
"나 지금 떨고 있니?"
"닥쳐. 말할 힘도 없어."
저녁 6시.
단 3시간 만에 유도부원 전원이 매트 바닥에 엎어졌고, 신성일 감독과 박상묵 코치는 흐뭇하게 웃었다.
"애들이 이렇게 뻗은 게 얼마 만인지."
고등학생쯤 되면 그 체력이 일반인을 월등히 상회한다. 그렇다 보니 훈련 시간과 방식이 정해진 유도부 기본 훈련으로는 이렇게까지 체력을 방전시키지 못한다.
하루 온종일 집중 훈련만 하는 합숙은 다르지만.
"역시 선진국이라 그런지 신통방통하네요. 음, 그런데……."
박상묵 코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쉰 명이 넘는 애들을 마사지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신성일은 혀를 찼다.
"한두 달하면 애들도 익숙해질 거야. 부탁해."
마음 같아선 전문 마사지 사를 고용하고 싶지만 예산이 부족하다.
"쯧. 알겠습니다. 그럼 전 애들 마사지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박 코치 믿는 거 알지? 허허. 합숙이 기다려지는구만!"
종혁을 못마땅하게 쳐다본 박상묵은 안쪽으로 향했고, 부원들은 그 시선을 쫓았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소리 없이 기고 있는 덩어리.
종혁이었다.
‘합숙에서도 이 짓을 해야 된다고?’
"저 새끼 잡아."
"……넌 뒤졌다."
유도부원들이 종혁을 향해 기기 시작했다.
"악! 억!"
푸닥거리는 소리가 유도부실을 울렸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종혁을 감싼다.
소중한 부위를 제외하고 골고루 맞은 몸이 스륵 풀리는 기분.
"이제 여름이구나."
해가 온전히 저문 밤, 아직 7월 중순임에도 바람이 후덥지근하다.
"올 여름은 덥겠네."
방금 전까지 에어컨 아래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더 덥게 느껴진다. 운동을 하다 보면 에어컨이 있건 없건 똑같이 덥지만.
에어컨, 이 시기 부자가 아니면 엄두도 못내는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을 떠올린 종혁은 한숨을 뱉었다.
"엄마 힘들 텐데."
쨍쨍 내려쬐는 햇빛에 달아오를 아스팔트.
불 앞에 앉은 어머니 고정숙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이동식 에어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른 가게를 얻어 드리던가 해야지, 원."
그러려면 투자를 성공시켜야 한다.
국민을 생각하면 IMF가 오질 않길 바라지만, 개인이 난리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재앙이 아니다.
그리고 이미 늦었다.
그럴 바에는 이득을 취하는 게 나았다. 합법적인 선 안에서.
어머니를 위해.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힘들어할 사람이 마음 쓰이는 건 그가 공직자이기 때문일 터였다.
"복잡하구만."
"읏챠!"
"읍?!"
종혁은 갑자기 목을 걸며 체중을 싣는 누군가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주장."
주장 설동익.
대회에 나가면 무조건 메달을 따는 초특급 고교 선수다.
3학년이다 보니 현재 용인대를 비롯한 여러 체대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선수.
밤송이 머리임에도 제법 잘생긴 외모가 인상적이다.
"뭐가 복잡한데?"
"하하. 저녁 뭐 먹을까 걱정이죠, 뭐."
설동익은 대충 둘러댄 티가 너무 나서 눈을 가늘게 떴다.
"……수고했어. 합숙 전에 모두 번역해 줘서 고마워."
‘합숙!’ 유도부원이 합법적으로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다.
일반 학생들은 소풍이다 수학여행이다 수련회다 1년에 최소 두 번은 서울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지만, 유도부는 합숙만이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날이다.
5월 중간고사 이후 다른 학생들은 모두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땀내 나는 남자들과 하루 종일 유도를 해야 됐던 일을 떠올린 종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교 진학 이후 처음 가는 합숙훈련이라서 그런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어디로 갈까나. 산? 바다?’
이왕이면 에어컨이 있는 곳.
부디 그러길 바랐다.
투욱!
묵직한 주먹이 종혁의 가슴을 쳤다.
"종혁아."
"예, 주장."
"여태껏 부를 위해서 희생했으니까 이젠 너만 생각해. 선배들이 뭐래도, 누가 발을 걸어도."
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이번 합숙에서 레귤러되길 바란다. 간다."
종혁은 멀어지는 설동익의 넓은 등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레귤러.
전국체전, 회장기, 청풍기, 총장기 등 메이저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정예 멤버.
그런 레귤러는 여름 합숙과 겨울 합숙에서 정해진다.
"그러네. 메달을 따기 전에 레귤러부터 돼야 하네."
요새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50명 유도부원 중 레귤러는 고작 다섯 명.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백업 멤버도 다섯 명을 뽑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뿌드득!
"운동 빡세게 해야겠네."
몸을 푼 종혁은 가볍게 발을 굴렀다.
집까지 러닝.
종혁의 몸과 정신이 스탠바이에 들어갔다.
* * *
방학까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걱정 마세요, 성오 어머니. 이제 성오도 2학년인데 레귤러돼야죠."
-믿어요, 박 코치. 이번에 친가에서…….
"아이고, 뭘 또 그런 걸 다."
좀 더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박상묵은 저 멀리 버스 앞을 서성이는 종혁을 보았다.
"저 자식이 가장 큰 문제인데."
하지만 1학년이다.
외국어도 잘하고, 학교도 뒤집으며 영악한 모습을 보였지만 고작 17살.
테이핑법 등을 번역해 주긴 했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다. 문제는 없었다.
띠리링! 띠리링!
"예, 경주 어머니!"
레귤러 선발을 위한 합숙.
50여 명 어머니의 치맛바람이 휘날렸다.
한편 종혁은 버스 근처 핸드폰으로 어머니 고정숙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권아영이 빠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장만해 준 애니콜 디지털.
고정숙에게는 고액 투자자에게 주는 선물로 두 대를, 요금까지 내준다고 변명했다.
-괜찮겠어? 엄마가 학교 한번 갈까?
"하지 마. 오지 마."
‘아들이 형사인데, 촌지가 말이 돼?’
"아들 못 믿어?"
-믿을 수 있어야 믿지. 너 또 저번 같은 사고 치면 정말 죽는다.
"산골이나 바다 같은 오지에 갈 텐데 사고는 무슨. 끊어요. 선풍기 팍팍 돌리고, 얼음 떨어지면 사고."
-다치지 말고. 밥 잘 먹고.
무려 한 달. 이런 합숙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걱정이 들었다.
"엄마도요."
-주전 못 된다고 실망하지 말고.
"걱정 마요."
전화를 끊은 종혁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접니다. 박태규.
돈 벌 이야기.
종혁은 활짝 웃었다.
"상황은 좀 어때요?"
부르릉!
드디어 버스가 출발한다.
-나도 가고 싶은데! 나도!
소영과 수호의 칭얼거림을 뒤로한 종혁을 태운 버스는 서울을 빠져나와 강원도로 향했다.
길고 긴 시간.
어느 순간 푸른 수풀이 사라지며 쪽빛 바다가 펼쳐졌다.
"바다다!"
"우와! 바다!"
‘바다구나!’
"이야, 이게 몇 년 만에 와 보는 거야."
범인 잡느라 바쁜데 한가로이 바다 갈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친목 도모로 겨우 계곡에서 고기 구워 먹는 게 다였다.
종혁은 거의 10년 만에 보는 것 같은 바다에 작게 흥분했다.
그러나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린 버스는 다시 산으로 향했다.
"아니, 왜!"
"기사님,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시끄러워, 이놈들아! 합숙하러 왔지, 놀러 왔어?!"
레귤러 선발을 위한 합숙이지만 아직 십대다.
그들의 입술이 비죽 삐져나왔다.
그렇게 달린 버스는 청해 수련원이란 허름한 간판이 걸린 수련원 안으로 들어갔다.
"자, 내려! 얼른 내려!"
우르르 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기지개를 켜며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오, 크다!"
"숙소도 좋아 보여!"
체육관으로 보이는 시설이 무려 두 개에다 3층 숙소 건물 외관도 유스호스텔처럼 좋아 보인다. 그런 건물이 세 개나 있었고, 운동장도 트랙을 연상시키듯 넓었다.
아무래도 운동선수들을 위해 지어진 수련원 같았다.
"뭐해! 어서 짐들 빼!"
종혁도 얼른 달려가 버스 짐칸에 실린 짐을 뺐다.
앞으로 한 달간 입을 옷가지와 속옷. 약간의 간식들.
그 순간이었다.
부르릉
‘음?’
버스가 한 대 들어오고 있다.
옆 숙소 건물 앞에 선 버스.
아, 다른 학교구나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의 눈이 곧 동그래졌다.
"꺄르르."
"호호호."
제법 떨어진 거리임에도 꽃향기가 날리는 것 같다. 체육복을 입었는데도 숨이 멎는다.
"어?"
"어어어?"
여자. 여학교다.
이윽고 그들의 눈이 마주쳤고, 시간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신성일은 이마를 잡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저쪽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짐을 들고 건물로 들어가는 종혁이 있다는 점이다.
‘이 못난 자식들!’
"동일고 유도부!"
"예!"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대답.
여학교건 뭐건 일단 짐부터 옮기고 한 바퀴 둘러볼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던 종혁도 멈췄다.
숲속에서 즐기는 삼림욕. 어쩌면 바다까지도 갈 수 있었다. 다만 첫날만 휴식이라 놀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
좀 급했다.
그러나 신성일은 운동장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길 따라 해변까지 뛰어! 선착순 열!"
"……?"
"이런 씨!"
종혁은 가방을 벗어 던지며 몸을 날렸고, 이내 정신을 차린 다른 부원들도 식겁하며 몸을 날렸다.
그렇게 동일고등학교 유도부 합숙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