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 경찰의 리셋 라이프 14화>
"왜 포기하시는 겁니까?"
그는 급해졌다.
‘난 당신 말곤 모른다고!’
박태규는 한국 투자계의 전설이라 불렸던 인물.
그를 대체할 만한 이는 어디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이제 외환 위기까지 남은 시간도 많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왜 구했는데, 이 양반아.’
물론 형사로서 피해자를 구한 것이지만, 이만한 인물을 찾을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 같은 놈은 자격이 없습니다……."
종혁은 이마를 잡았다.
‘거, 세상 착한 양반일세.’
참 답답하지만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승부사가 한 번의 실패로 링을 내려간다라……."
종혁은 꽉 쥐어지는 박태규의 주먹을 힐끔 보았다.
"태규 씨, 전에 말했습니다. 보여 드린 건 겨우 절반뿐이라고."
움찔!
흔들리는 그를 보는 종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정말 이렇게 똥만 밟은 채로 끝내실 생각입니까? 다시 여의도 월급쟁이로 돌아갈 생각이냐는 말입니다."
"저, 저는……."
‘옳지! 그렇지!’
"내가 할게, 소영이 친구. 아니지. 내가 할게요, 종혁 씨."
식겁한 종혁은 애써 무심히 권아영을 보았고, 그녀는 박태규를 향해 코웃음 치곤 빛나는 눈으로 종혁을 보았다.
"이 사람이 놓치는 기회, 내가 잡을게요. 나한테 줘요. 최종혁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부자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
‘이 아이였다니! 무조건 잡아야 해!’ 아직도 믿지 못하겠지만, 간절한 그녀는 도박 수를 던졌다. 눈앞에 보물이 아른거리는데 놓칠 수 없었다.
"권 PB님!"
"왜요? 꼬리 내린 개처럼 포기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권아영의 얼굴에 한가득 번진 비웃음.
"패배자가 될 거라면 빠지세요, 박 팀장."
‘이 여자가?!’ 박태규는 이를 악물었다.
분명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양보하려 했는데, 직접 눈앞에서 그 상황이 벌어지니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솟는다.
그는 종혁을 보았다.
‘이건 내 거야!’
"말을 번복해서 죄송합니다. 하겠습니다. 하게 해 주십시오!"
"이봐요, 박 팀장!"
"왜요!"
종혁은 아옹다옹 다투는 둘을 흐뭇이 바라봤다.
‘허, 권 마담이 보물이었네.’
종혁은 두 눈에 애정을 담아 권아영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를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쩐주.’
사채업자에게 돈을 대 주는 주인.
이번 사건, 권아영은 1대 쩐주 겸 조력자였다.
아까 듣기로 그녀가 이 일에 묻은 돈만 30억.
일반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하는 PB치곤 동원한 돈이 무척이나 적지만, 그건 아마 1차 투자금일 터였다.
‘이런 판은 돈이 많을수록 좋다.’
종혁은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머리채를 잡을 뻔했던 둘이 종혁을 보았다.
종혁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모님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시고, 박태규 씨는 인력과 노동력을 투자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전 아이디어를."
"어? 그건?"
"오늘 일, 아니 이번 판에서 돈가스만 빠지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이러면 명쾌하지 않습니까?"
종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박태규와 권아영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한 수호, 소영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자, 이제 돈 법시다!’
뺏긴 시간은 사흘.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물론 종혁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 * *
정원수가 심어진 넓은 마당을 지난 권아영은 커다란 한옥 집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들어가기 싫다."
"지금 도망가시면 잡혀 오실 겁니다."
"알아요. 도망갈 이유도 없고요. 아니, 매달리려고 왔죠."
권아영은 품에 안은 종이 뭉치를 꼭 끌어안았다.
‘칫, 시간만 많았다면.’
"음."
"오늘 고마웠어요, 삼촌."
생긋 웃으며 허리를 숙인 권아영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고, 노인은 혀를 찼다.
"부디 잘되셔야 할 텐데……. 음, 그런데 정말 이 나라가 부도나려나."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삐걱삐걱.
관리는 잘됐지만 오래된 저택이라 그런지 소리가 나는 나무 바닥을 밟으며 안방 앞에 선 권아영은 심호흡했다.
쿵쿵!
"아빠."
"들어와."
덤덤한 목소리.
‘쯧, 엄청 화나셨네.’
문을 연 그녀는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칠십대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작은 다과상 앞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아버지.
"저 왔어요."
노인 권회수는 대답 대신 사진 몇 장을 다과상에 던졌다.
"골라라. 잘생기고 소심한 놈들로 추렸다."
‘아, 진짜!’ 그녀는 화가 솟았지만 애써 누르며 그 위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읽어 보세요."
"이번엔 볼 것 없다. 어디 계집이 경찰서를 드나들어! PB인지 피똥꾸멍인지 할 생각 접어!"
"보세요. 보시고 이야기해요."
"내가 이번에도 속을 줄 아냐!"
"마음에 안 들면 선볼게요."
흠칫!
"……정말이냐?"
"선보고 마음에 들면 6개월 안에 결혼할게요. 됐죠?"
권회수의 눈이 그 진의를 따지기 위해 가늘게 떠졌다.
"네가 뭔 일이냐?"
"이 판, 못 먹으면 차라리 시집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마름 짓도 그만두고?"
"……봐서요."
말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이젠 시간이 정말 부족했다.
‘돈도!’
이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권회수의 얼굴이 기쁨으로 일그러졌다.
"그래, 잘 생각했다. 자고로 여자는 네 언니처럼……."
"한마디만 더 해 봐요. 진짜 바보 온달한테 시집갈 거니까."
"……허흠."
A4 뭉치를 집어 든 그는 피식 웃었다.
"거 이름은 거창하구나."
<외환 위기>
그는 느긋이 한 장 뒤집었다.
그러다 이내 곧 허리를 세웠다.
사락! 사락사락사락!
권아영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는 아버지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텅!
포트폴리오를 내려놓은 권회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눈빛이 서늘해지고, 그 몸에서 서릿발 같은 기세가 풍겼다.
"돈 주기 전에 하나 묻자. 이거 누구 거냐."
"어느 어린 천재요."
마음 같아선 숨기고 싶지만, 이미 삼촌 이영창이 종혁과의 대화를 들었다.
"그 박태규라는 소작농?"
"오늘 절 구한 고등학생이요."
"뭬야?! 고작 고등학생 사탕발림에 넘어간 거냐?!"
"그 보물이 고작 사탕처럼 보인다면, 그냥 이자 물고 돈 빌릴게요. 얼마 빌려주실래요? 시간 없어요."
"……."
한때 명동을 주름잡았지만, 93년 금융 실명제로 인해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강제 은퇴한 사채업자 권회수.
그는 장고에 들어갔다.
돈 냄새가 너무 진하게 풍긴다.
그러나 고등학생이란 게 마음에 걸린다.
"연결해."
"왜요!"
"누가 상품도 안 보고 값을 치러!"
입술을 깨문 그녀는 핸드폰을 꺼냈다.
-예, 고정숙 씨 댁입니다.
"최종혁 씨, 저 권아영인데……."
권회수는 핸드폰을 뺏듯 가져왔다.
"아빠!"
"나 진짜 쩐주일세."
종혁은 몸을 굳혔다. 좁은 반지하 방이 더 좁게 느껴질 만큼 숨이 막혔다.
하지만 예상했던 범위다.
종혁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권 PB가 가져간 자료에 모두 적혀 있습니다. 투자하시겠습니까, 마시겠습니까?"
-얼마를 원하나?
"제 전 재산은 1억입니다. 전 몰빵입니다."
-잘됐군. 팔게. 값은 넉넉하게 쳐주지. 큰 거 2장 어떤가.
"흥. 푼 돈 벌자고 만든 밥상 아닙니다. 황금알 낳는 거위, 배 따시겠습니까?"
-재밌구만. 끊지.
전화가 끊기자 종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별일 다 하네."
돈 벌기 참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모든 능선은 넘었다고 봐야 했다.
펼쳐진 대로만 달리면 끝.
"딱 20배만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20억.
종잣돈이 1억이라 많이 벌어야 그 정도일 테지만, 이건 앞으로 있을 일들의 종잣돈이다.
그걸 생각하니 배가 불렀다.
종혁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런데 큰 거 2장이라니, 쩐주라는 양반이 통이 작네."
통상 큰 거 1장이면 1억, 2장이면 고작 2억이다.
물론 2억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종혁이 알고 있는 정보로 벌어들일 수 있는 돈에 비하면 푼돈이다.
그 돈 벌자고 이런 굴곡을 겪은 게 아니다.
"진짜 쩐주라는 말도 허세 아냐?"
딱히 상관없다.
권아영과 박태수가 움직일 자본, 추정 몇 십억이란 자본에 1억을 담근다는 게 중요할 뿐이다.
한편 전화를 끊은 권회수는 피식 웃었다.
"20억을 마다 한다라……."
고등학생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배포가 크다.
"욕심 그득한 놈 같으니."
그러나 그렇기에 마음에 든다.
사사삭!
권회수는 옆에 놓인 메모지에 숫자를 적어 내밀었다.
"2년, 60퍼센트."
"아빠!"
생각했던 것보다 배는 많은 액수.
"당연히 복리다."
기뻤던 그녀는 이내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돈은 아빠 재산의……."
"어차피 나중에 네가 낳을 손자에게 줄 돈이다."
"하지만 이젠 돈놀이 안 하시잖아요."
"그래서 받을 거야, 말 거야!"
"받을게요! 사랑해요!"
"어이구, 엎드려 절 받기지. 됐어, 오늘 욕봤다. 나가 봐."
"사랑해요! 내일 아침 같이 먹어요!"
콧방귀를 뀐 그는 몸을 돌렸고, 권아영은 헤죽 웃으며 일어섰다.
‘실탄 장전 완료!’
어차피 아는 사람만 먹으려는 판이다.
투자금이야 이 나라가 뒤집어지면 자연스럽게 모일 터. 이 돈은 그때까지 판을 깔기 위한 1차 판돈이었다.
그녀의 두 눈에 전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쿵!
급히 닫힌 문을 보던 권회수는 한쪽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이 변호사, 날세. 둘째랑 연결된 고등학생에 대해 알아보게."
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 * *
그 시각 경찰서.
1차 진술을 마친 김종두 반장은 담배를 톡톡 책상에 찍었다.
"용감한 시민상."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암, 받게 해 줘야지."
그것도 화려하게 받게 만들 생각이었다.
형사로 만들어야 하는데 뭐든 못할까.
그는 책상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어, 박 기자. 나 김종두 반장인데?"
* * *
"정말 확실한 거야?"
"리스크 없이, 그러니까 원금 보존을 원칙으로 투자를 한대."
고정숙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려 1억이다.
그녀가 살아오며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 거금.
은행도 아닌 생전 모르고 지낸 주식이라는 것에 그런 거금을 맡기려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아들이 피를 흘린 값이기에 망설임은 깊었다.
"믿어요, 믿어. 반 친구 이모도 그분한테 돈 맡겼대요. 10억이나."
"어머! 세상에, 정말?"
1억도 손이 떨리는 데 10억.
새된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돈은 10분의 1도 안 되는 액수란 걸 말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런 거액을 움직이는 사람이 사기를 칠까.
"그런데 반 친구? 아들 친구 생겼어?"
"응. 제법 좋은 애들이에요."
"혹시 여자니?"
"여자긴 여자지."
"그으래?"
‘이상한 생각하시네.’ 그러나 변명을 하면 오해가 더 깊어질 부류의 이야기이기에 종혁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한번 만나 봐요. 미팅 날짜 잡을 테니까. 전 재산에 가까운 돈 투자하는데 사람 얼굴은 봐야지."
"……그래, 그렇게 하자."
아들이 이렇게 호언장담하는데 믿어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고정숙은 한 줄 한 줄 힘들게 김밥을 싸는 아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컸을까.’
어느 순간 투정 한 마디,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공부도 열심히 하더니 어느새 엄마도 모를 세상의 이야기를 한다.
참 낯선 변화였지만, 이젠 그 덩치만큼 커 보였다.
마치 옛날 제 아빠처럼.
‘여보.’
태풍이 불어도 지켜 줄 것 같은 듬직한 등에 반해 결혼한 나이 많은 남편.
찔끔 흐르려는 눈물을 훔친 고정숙은 이런 날만 계속되면 좋겠다며 하늘에 기도했다.
종혁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순간.
찰칵!
고개를 든 둘은 사진기를 목에 건 웬 남성을 발견하곤 의아해했다.
"실례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전 이런 사람입니다."
그가 내민 명함을 살핀 고정숙은 화들짝 놀랐지만, 종혁은 피식 웃었다.
‘오랜만이네, 영일 형님.’
사회부 기자 박영일.
20년이나 젊어진 모습이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잠깐?’
뒤늦게 그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눈치 챈 종혁은 기겁했다.
"기자님이 여긴 왜……."
"어이구, 모르셨어요? 어제 아드님께서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내셨거든요. 조폭 7명에게서 사람을……."
휙!
"조폭?"
살기가 가득 맺힌 목소리.
종혁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짝! 짝짝!
등짝이 터지는 소리를 뒤로하며 돌아선 박영일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새벽부터 나와서 엄마를 돕는다라……."
거기다 유도 유망주.
숫제 드라마다.
제목도 기가 막히게 뽑힐 것 같았다.
지독한 가난에서 피어난 정의(正義)의 꽃.
점점 요지경 세상이 되어 가는 사회에 제법 훈훈한 미담이 될 것 같다.
"크, 좋고."
‘또 보자고, 소년.’ 그는 만족스러워하며 지하철로 향했고, 종혁은 그런 그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저, 이씨! 따로 만나면 될 것 가지고!’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애들 안 팬다고 좋아하니까 조폭을 패? 너 진짜 죽을래-!"
종혁은 몸을 마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다신 저 양반이랑 인터뷰하나 봐라!’
그건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