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500화 (500/501)

<500화>

500. 졸업 (완결)

“뺙.”

가슴팍에 앉은 혁구가 부리를 빠끔거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상호는 병상 옆 탁자에 놓인 통에서 잣을 하나 꺼내 혁구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혁구는 잣을 콕콕 쪼아서 꿀떡 삼키더니.

“뺙.”

온몸에서 은은한 황금색 빛을 뿜어냈다.

혁구의 치료를 받다 보니 점차 심장의 통증이 덜해졌다. 아주 조금씩은 남아 있었지만. 아마 그의 심장을 찔렀던 세희의 검에 마신의 피가 묻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태까진 딱히 문제가 없었다.

상호는 혁구를 바라보다가 손에 든 것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이걸 하나하나 다 썼네.’

종이학을 접은 소원권에 글귀가 쓰여 있었다.

빨리 나으라는 말, 그러지 않으면 각오하라는 말. 애정과 걱정과 다소의 협박이 담뿍 담긴 내용들이었다.

-하루 더 누워있을수록 칼빵 한 대 추가예요

‘이건 세희고…….’

-ㅗㅗ

‘이건 이서네…….’

상호는 펼친 소원권을 유리병에 넣고 다른 종이학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펼치기 시작하는데 어째 종이가 휑했다.

‘응?’

그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종이학을 마저 펼쳤다.

내용을 적는 칸에는 짤막하게 한 마디가 쓰여 있었다.

-얼른 나으세요

이름을 적는 곳은 비어 있고.

그러나 잘 보니 이름을 적었다가 지운 흔적이 보였다. 상호는 그걸 보고 소원권을 작성한 아이가 누군지 깨달았다.

‘……가은이구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학교에 빨리 돌아가고 싶게 된 이유가 하나 늘었다. 그는 그 소원권도 유리병에 넣고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에는 오래된 문자가 쌓여 있었다.

-선생님...

-일어나면 꼭 바로 연락주세요...

가장 오래전부터 가장 최근까지, 똑같은 내용으로 그를 찾은 나빛의 문자.

하지만 상호는 나빛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내일이면…….’

2월 12일, 졸업식.

몰래 찾아가서 아이들을 깜짝 놀래켜 줄 생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효은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해 두었고. 덕분에 효은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상호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다 나은 것 같네.’

내일이면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때 병실 문이 벌컥 열리고 효은이 들어왔다.

“야.”

“어, 왔어?”

상호는 효은이 던진 과일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누구한테 말 안 했지?”

“내가 넌 줄 아냐?”

효은이 탁자에 그의 양복을 놓으며 혀를 찼다.

“애들이 불쌍하다. 담임이란 놈이 신나 가지고는 지 걱정하는 애들 놀려먹을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뭘 놀려먹어. 놀래키는 거지. 더 큰 감동을 위해.”

“됐어, 새끼야. 언제 철들래?”

“응애.”

“이 X발…….”

효은이 질색팔색을 하며 상호의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지만, 상호는 낄낄거리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났다.

“야, 효은. 너 성철이 형 봤어?”

“봤지.”

“지금 어떻게 지내?”

“집에 갔어.”

“잘 지낸대?”

“그런가 본데. 지윤이 표정 보니까.”

다행이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사과를 마저 먹기 시작했다.

가만히 먹다 보니 궁금해지는 게 많았다.

“어떻게 됐어? 몬스터들이랑 헌터들이랑…… 이제 안 쳐들어와?”

“너 쓰러진 동안은 한 번도 안 쳐들어왔어. 오빠도 이제 헌터들 소집해제 시켰고. 대신 대악마 두 놈은 도망쳐서 살아있다던데.”

세 놈이다. 한 놈은 따로 다니지만. 그것도 아마 한동안 보이지 않을 것 같고. 어쩌면 평생.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또 물었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 마신 죽은 거랑, 전쟁 끝난 거?”

“알지.”

“누가 죽였는지는?”

“알리진 않았는데, 모르겠냐. 겨우 1년 지난 일을 잊지는 않았겠지.”

효은이 어깨를 들썩이고 과일바구니에서 바나나를 집었다.

“근데 너 몸은 다 나았냐?”

“응. 이제 멀쩡…….”

하다고 말하려던 상호는 효은을 보고 멈칫했다. 효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며 바나나를 입에 넣었다 뺐다 하고 있어서.

“……하진 않아. 약간…… 남아 있네. 쪼금…….”

“언제 나을 거 같은데?”

“이……이틀, 정도려나……. 그리고 좀 격렬한 운동 같은 거 하고 나면 사흘은 쉬어야 할 것 같네…….”

“그래?”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나흘에 한 번은 괜찮다는 거네?”

“……아……마도.”

“흐음…….”

효은의 앞니에 바나나가 잘려나갔다.

상호는 그 토막 난 바나나가 자신의 미래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괜히 심장이 욱신거리는 척 몸을 옆으로 웅크리고 사과를 깨작였다.

‘일주일로 할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

다음 날.

상호는 차창 밖에 있는 예현여고 정문을 바라보았다.

‘진짜 돌아왔네.’

결국에는.

생각보다도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하나 남은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차를 몰아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9시.

학생들은 교실에 모여서 강당으로 이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선생들은 교실이나 강당에서 한창 준비하느라 바쁠 테고, 학부모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조용히 들어갈 수 있었다.

‘빨리 가서 놀래켜 줘야지.’

그는 서둘러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나왔다.

주차장에서 본관 현관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길면서도 짧을 수가 없었다. 상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교실을 향해 달렸다.

바람처럼 달려 도착한 3층 서쪽 끄트머리.

교실 앞에 다다른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짜잔’이 좋을까, ‘왁’이 좋을까.

아니면 조금 색다르게, 태연히, 아무 말 없이 평소처럼 교탁까지 걸어가는 것은 어떠려나. 상호는 선물상자의 리본을 잡은 아이처럼 마음껏 상상을 펼쳤다.

‘그래. 교탁까지 바로 걸어가는 거야.’

그러기 전에 미리 염탐해 두는 것이 좋겠다. 그는 창가로 가서 슬그머니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이 움찔했다.

‘……?’

교탁 앞에 태화가 서 있었다.

손에 흰 장갑을 끼고 그의 영정사진을 들고서. 상호는 자신의 얼굴 옆에 쳐진 두 개의 검은 줄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뭐지?’

왜 생사람의 장례식을 하고 있나. 고민할 새도 없이 태화가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담임선생님을 보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눈물까지 글썽이며.

“저희는 마지막 인사를 고하려 합니다.”

“…….”

“선생님은 늘 저희만 생각하셨습니다. 바보처럼 저희만 보셨습니다. 하해와 같은 선생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적이 없었지만, 바보 같은 저희는 받은 사랑을 갚아드리지 못했습니다…….”

다혜가 코를 훌쩍였다.

“크웅…….”

“선생님은 최고의 헌터이자 최고의 교사셨습니다. 헌터로서는 세상에 헌신하여 평화를 선물하셨고, 교사로서는 학생에게 헌신하여 가르침을 선물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받은 저희는 더없이 축복받은 사람들이지만, 저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선생님 가시는 길에 손 한번 잡아드리지 못했습니다…….”

태화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이제 저희는 선생님을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멍…….”

단비가 침울하게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진땀을 흘렸다. 이거 장난이 맞는 걸까. 분명 아이들은 그가 일어난 줄 모르고 있을 텐데.

그때 태화가 주머니에서 리모컨을 꺼내고.

“그럼 지금부터…….”

TV를 켰다.

“고인의 생전 개쩌는 영상 보고 가시겠습니다.”

화면에는 건장한 사내가 조악한 금색 가발을 쓰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부끄러워 죽겠다는 듯이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그 영상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눈을 부릅뜨는 상호의 귀에, 태화의 진지한 목소리가 틀어박혔다.

“강상호 여장 매드무비…….”

“……으아아아아악!”

강검이 TV를 향해 날아갔다.

* * *

“알고…….”

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있었다고…….”

“그럼예.”

“어떻게……?”

“수녀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헤헤…….”

나빛이 방긋 웃었다.

아마 아르게스로 가는 것을 알리지 않았던 게 괘씸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아이들에게 알려놓고는 그에게 말해주지 않은 것이고.

상호는 교탁에 이마를 박았다.

“제발 영상 좀 지워줘…….”

“안 돼요, 멍.”

“저희 후배들한테도 보여줄 거예요.”

“제발…….”

“이젠 우리 반의 귀중한 역사적 사료예요.”

“공공재라는 거죠. 멍.”

단비와 미래가 척척 말을 맞췄다.

뭐라 말해도 듣지 않을 건 알고 있었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아이들을 쓱 둘러보았다.

이미 효은에게 들었을 때 안도하고 기뻐한 다음 이런 장난을 꾸몄겠지만, 지금도 아이들의 눈은 그를 향해 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꾸 콧물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얘들…….”

“쌤.”

“응?”

뭔가 말하기도 전에 태화가 선수를 쳤다. 태화의 손에는 두툼한 책자가 하나 들려 있었다.

딱 봐도 졸업 앨범.

“이거, 얼마 전에 받았는데.”

“응.”

“쌤 쓰러진 뒤에 만든 거라 쌤이랑 우리랑 찍은 사진이 없어.”

“응.”

“찍어줭.”

“그래야지.”

상호는 태화에게 다가가서 앨범을 받아 쓱 훑었다.

그의 반이 있는 부분을 찾아 펼치니 태화의 말대로 단체 사진에 그가 빠져 있었다. 옆에 둥글게 그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을 뿐.

‘강당 가기 전에 찍어놔야겠다. 부모님들 오실 테니. ……응?’

단체사진 위쪽을 확인한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얘들아.”

“웅.”

“급훈……이…….”

-아내가 너무 많다

말을 잇지 못하고 돌이 되어버린 그에게 태화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내가 지었쪄.”

“…….”

“우리 급훈 없잖아. 대충 짓지 뭐.”

“……남들이 다 보잖아, 임마!”

“그치만 팩트인걸.”

“아니…….”

“선생님.”

“응?”

어느새 교실 앞에서 세희가 교탁을 치우고 있었다.

“얼른 찍고 강당 가죠.”

“응…….”

상호는 눈물을 삼키며 졸업 앨범을 닫았다.

곧 의자 끄는 소리가 시끄럽게 바닥을 울리고 아이들이 모두 교실 앞에 섰다.

“멍, 사진 어떻게 찍지?”

“태화 언니가 타이머 맞춰놓고 순간이동으로 와.”

“누구 핸드폰이 제일 좋아?”

“내 걸로 해라. 아부지허고 새로 샀디.”

지윤이 핸드폰을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는 지윤의 핸드폰을 들고 교실 뒤로 쪼르르 달려가더니, 핸드폰을 가로로 들고 들여다보다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야, 칠판이 휑해. 뭐 좀 써봐.”

“아, 오케이.”

손가락을 튕긴 이츠키가 물백묵으로 글씨를 썼다. 바르면서도 묘하게 삐뚤빼뚤한 필체로.

제 1기 아내 후보생 수료식.

“……이츠키?”

“신경 쓰지 마는 겁니다.”

“아니, 이건 안 돼……!”

앨범은 변명이라도 하지, 핸드폰 사진은 두고두고 아이들의 무기가 될 터였다. 아까 TV에 나온 여장 동영상처럼.

상호는 칠판지우개를 잡으려 했으나.

“지우지 마세요!”

동그랗게 눈을 부릅뜬 나빛이 금색 각목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지우개를 놓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내 팔자야…….’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어깨에 힘이 빠져 축 처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어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김치~.”

“치즈~.”

“므앙…….”

“언니 침 좀 그만 흘려.”

세희가 핀잔을 날리고는 상호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었다.

키가 큰 은율은 상호의 오른쪽 어깨 뒤쪽에 붙었고, 키가 작은 나빛은 상호의 오른쪽 앞에 붙었다. 지윤은 깨금발을 들고 상호의 왼쪽 어깨에 팔꿈치를 올려 손에 턱을 괴었고, 이츠키는 상호의 왼팔에 팔짱을 끼었고, 다혜는 상호의 뒤에서 폴짝폴짝 뛰고. 마지막으로 나디아가 상호의 왼쪽 앞, 나빛의 곁에 섰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핸드폰에서 얼굴을 들어 소리쳤다.

“야, 나디아! 비켜! 거긴 내 자리야!”

“왜 나한테 그런다!”

나디아가 눈물을 펑펑 흘렸다.

“나 축제 때 아파서 없었는데 선생님이 찾지 않아! 동생들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다고래! 나 완전히 공기가 되어버려! 사진이라도 가운데 찍게 해 주는……!”

“…….”

담임은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듣고 보니 처지가 딱했을까. 태화도 입맛을 다시다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럼 나빛이 니가 옆으로 땡겨.”

그래서 나빛이 조금 옆으로 밀려났고, 나디아가 가운데, 태화가 왼쪽 자리.

자리가 잡히자 태화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거리를 잡다가, 곧 손가락을 딱 튕기고 상호의 앞에 순간이동으로 나타났다.

주변에 서 있던 2학년들이 조금 더 가운데로 모여들었다.

“찍는다!”

“김치~. 치즈~.”

“므아아아…….”

“아잇, 언니이이!”

사진을 찍는 순간까지도 소동이 멈추지 않는다. 상호는 한숨을 꾹 참으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그의 귀에 조그만 중얼거림이 닿았다.

“그때 그는 알지 못했다.”

태화가 내레이션을 읊듯이 말했다.

“이 사진이 그의 안방 가족사진이 되리란 것을…….”

“야, 임마!”

빠악

“……갸악!”

청량한 꿀밤 소리가 교실을 울리는 그 순간.

핸드폰 셔터 소리도 함께 교실에 울려 퍼졌다.

* * *

“……이상으로, 제 6기 예현여고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해련이 고개를 꾸벅 숙이자 좌석에 앉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쩍쩍쩍쩍……

좌석 한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흩날렸다.

단상에 서 있던 상호는 그쪽을 돌아보았다가 정애에게 등짝을 맞고 있는 성철을 발견했다.

박수를 막 치다가 주변에 폐를 끼친 모양이었다.

‘잘 지내는가 보구만…….’

상호는 피식 웃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학부모와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을 찾아갔고, 담임이 아닌 교사들은 의자를 치웠다. 상호를 향해서도 3학년 학부모들이 다가왔다.

정애와 성철, 봉진과 유연과 나로, 우송과 그의 아내, 블라디미르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이츠키의 부모로 추정되는 부부.

전쟁이 끝나서 외국에 오기가 편해졌을까, 아니면 평범하게 딸의 졸업식이라 온 걸까. 어쨌든 상호는 고개를 꾸벅이고 그들과 악수를 했다.

다들 각자의 딸을 대동하고 있어서 통역에 어려움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편이라고 소개드려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

조금은 있었을지도.

나빛 가족의 차례가 되자 봉진이 상호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이제 학부모가 아니게 됐구만.”

“그렇죠.”

“얼굴 안 볼 건 아니지?”

“……나빛이는 자주 보게 될지도.”

“지금 우리 동네에 매물이 나왔거든?”

“…….”

“사려면 빨리 사야 되니까 결정을 빨리 내리라고.”

그 옆에서 환하게 웃는 나빛과 딸을 흘끗하며 한숨을 쉬는 유연, 그리고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상호에게 술잔 까딱이는 시늉을 하는 나로.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나빛의 가족을 지나쳤다.

“……짜식.”

그의 앞에 선 성철이 피식 웃었다.

“진짜 선생인가 보네.”

“그럼 안 믿었어?”

“네가 애들 돌볼 성격이 아니었잖아. 이야, 진짜 웃기네. 그 꼬맹이가…….”

상호는 성철을 째려보고 정애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형수님.”

그를 바라보던 정애가 나직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네?”

“전부 다.”

상호는 어깨를 으쓱이고 씩 웃었다.

그때 지윤이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쌤예. 다 인사했으믄 그만 가보이소. 딴 아덜 기다린다 아입니꺼.”

“그치.”

다른 아이들이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학부모들을 둘러보았다.

사정을 알고 있는 정애, 유연, 봉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선생님.”

“볼일 보세요.”

“어차피 또 볼 거잖아?”

“……그럼.”

상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은율의 가족, 나디아의 가족, 이츠키의 가족을 향해 웃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교실로 뛰었다.

* * *

“야.”

창밖을 보던 태화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란히 창가에 기대어 있던 세희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뭐.”

“밥 뭐 사달라고 할까?”

“……먹는 것밖에 모르지?”

뭐 진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가 했더니. 세희는 혀를 차고 팔짱을 끼었다.

“너도 이제 너 먹고 싶은 건 니 돈으로 먹어. 선생님이랑은 선생님 드시고 싶은 거 먹고.”

“참나, 지는 쌤이랑 입맛 똑같다고……. 어차피 쌤 돈이 내 돈이지 뭐.”

“뒤져 그냥.”

“에베베베~.”

혀를 낼름거리던 태화가 빨간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자신 없냐?”

“뭐가.”

“쌤이랑 통장 합치기.”

세희는 코웃음을 쳤다.

“하긴 니가 뭘 알겠어.”

“뭐? 뭐가. 뭔데 너만 아는데.”

“됐어. 너한텐 설명해도 이해 못 해.”

상호의 마음속을 차지한 게 누구인지. 말해봤자 태화가 알아먹을 리 없었다.

그때 교실 앞문이 열렸다.

“기다렸어?”

상호가 씩 웃으며 창가로 다가왔다.

“우리도 점심 먹으러 가야지.”

“쌤.”

태화가 교실을 쓱 둘러보았다.

“이제 교복 입고 여길 올 일은 없겠지?”

“그렇겠지.”

“되게 묘하네, 기분이.”

상호는 피식 웃었다.

“아쉬워?”

“아쉽다……는 아닌데.”

태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립다고나 할까……. 이미 교실에서 수업한 지 꽤 됐잖아?”

“그치.”

상호도 같은 마음이었다.

이제 이 아이들을 가르칠 일은 없을 것이다. 19살의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성취를 이뤘으니까. 어쩌면 지금의 그보다도 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태화와 세희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도 졸업하면 또 다른 인생이 시작되는 거니까.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지. 그치?”

“응.”

“네.”

“수고했다.”

세희와 태화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선생님도요.”

“쌤도…… 수고했어.”

셋은 그렇게 잠시 안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복도에서 다다다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도 학부모도 다 떠난 학교의 적막한 복도에서 이렇게 달릴 사람은 단 한 명.

곧 문이 벌컥 열리고 다혜가 달려 들어왔다.

“아으!”

“뷔페래요.”

“그래, 가자. 밥 먹으러 가자. 다혜 건흠 선생님한테 인사 잘 드리고 왔어?”

“므아으앙.”

“잘했어.”

상호는 다혜의 등을 토닥이고 차 키를 주었다.

“가서 차에 타. 난 교실에 조금만 있다가 갈게.”

“갱년기처럼 청승떨지 말고 빨리 와!”

“얌마…….”

태화는 깔깔 웃고는 연기와 함께 사라졌고, 세희와 다혜는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늘 느끼지만 참 평범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졸업시켰나 몰라.’

그는 피식 웃고 교실을 쓱 둘러보았다.

세희의 자리. 태화의 자리. 그리고 다른 졸업생들의 자리. 이제 저 자리엔 신입생들이 앉게 될 것이고, 온 교실에 새로운 흔적이 덧씌워질 것이다.

그러나 저 자리에 아이들이 앉았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충분하지.’

상호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익숙한 복도. 앞으로도 계속 걷게 될 복도. 공간은 끝나지만 시간은 끝나지 않는 학교의 복도를 지나, 상호는 현관으로 나왔다.

하늘이 유난히 파랬다.

‘상호야.’

마음속에서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졸업했어?’

‘네.’

상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졸업했어요.’

과거, 의무, 추억, 사랑.

그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돌려놓은 사내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발을 뻗었다.

앞으로, 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 아이들을 향해서.

<헌터 여고의 남선생>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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