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499. 인연(人連)
“……그러니까.”
헌터 기지의 앞마당.
이츠키는 눈앞의 바위 인간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뻑였다.
“이 아저씨가…….”
“아부지디.”
지윤이 실쭉 웃으며 성철의 등짝을 팡팡 때렸다.
“듬직허제?”
“…….”
이츠키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별의별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도 많이 겪어온 탓에 이제는 뭐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금방 평정을 되찾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으응. 지윤이…… 친구니?”
“일본에서 온 강이츠키라고 합니다.”
“강……?”
이번에는 성철이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이츠키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었다.
“어쩌다 보니 선생님과의 사이에 아기가…….”
“……이 자식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이, 농담입니더. 농담…….”
지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성철을 말리다가, 순간 고개를 흠칫하고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이츠키를 흘끗했다.
“농담이제?”
“…….”
이츠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지윤이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리며 주먹을 꽉 쥐려는 때.
그들이 서 있는 마당에 빛이 번쩍였다.
“엇……?!”
갑자기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지윤과 이츠키는 마당에 나타난 이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했다.
“민정쌤예?”
“응?”
민정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둘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아, 너희구나……. 상호하고 다른 애들은?”
“마신 쥑이러 갔어예.”
“뭐? 언제…….”
당황한 민정의 시야에 지윤의 옆에 서 있는 바위 인간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골렘인 줄 알았는데 어째 눈코입이 똑바로 달려 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기도 하고. 한참을 고민하던 민정은 그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고 숨을 헉 들이켰다.
“……설마.”
“이야…….”
성철이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엄청 컸구나.”
“……성철 아저씨?”
“엉. 나다. 잘 지냈나 보네.”
“아니…….”
민정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지윤을 돌아보았지만, 지윤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이래 됐심더.”
“아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저씨는 어떻게 여기 있고, 지윤이 너는……. 아니, 그래서 다들 어디 있는데? 도현이 오빠는?”
“부협회장 아재도 마신 쥑이러 갔고예.”
“언제?”
“좀 됐는디…….”
지윤은 동쪽을 돌아보았다. 겹겹이 겹친 산줄기 너머를.
“아마 지금쯤이믄 싸우고 있을지도.”
“어디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너도 같이 갔었니? 그럼 아저씨는? 둘은 왜 돌아온 거야?”
“설명하려믄 참 긴디…….”
그때 이츠키의 입에서 당황성이 튀어나왔다.
“……어?”
전혀 이츠키답지 않은 목소리.
그 목소리에 지윤도, 민정도 덩달아 당황하며 이츠키를 돌아보았다.
“와 그라노.”
“이츠키?”
“…….”
이츠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지윤이 이츠키의 어깨를 덥석 붙잡고 눈썹을 치켰다.
“뭔 일 있나? 말을 해 바라 마.”
“…….”
“일이 있으믄 말을 하라꼬!”
그래도 이츠키는 대답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볼 뿐.
그 눈동자 속에는 끊어진 실의 끝자락이 담겨 있었다.
* * *
날이 지나 3월 2일. 드디어 입학식이었다.
상호가 배정받은 교실은 본관 3층 서쪽 끄트머리. 입구가 남쪽에 있으니 입구 기준으로는 왼쪽 끝.
그는 교실을 향해 걸어가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제자와의 첫 만남.
솔직히 좀 떨렸다.
‘먼저 와 있으려나.’
드르륵
상호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녹색 물칠판. 나무로 된 교탁. 그 앞으로 휑한 교실에 책상 세 개.
모든 것이 흐릿했다. 수채화나 파스텔로 그린 그림처럼. 경계가 희미하고 색이 연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자리에 벌써 학생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아.’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을 굵게 땋아 어깨 앞으로 늘어뜨린 소녀. 책상 옆에 걸린 가방에는 익숙한 검이 끈으로 묶인 채였다. 하얀 얼굴의 무표정한 눈은 지금 상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소녀가 앉은 창가 쪽 책상으로 다가갔다.
“네가 세희구나.”
“네.”
소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상호는 세희의 옆 책상에 걸터앉았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의 시선이 세희의 검을 향했다.
“그거 한 번 만져봐도 될까?”
“네.”
그는 소녀의 검을 들고 칼집에서 꺼냈다.
평범한 검. 개벽 이전에 만들어진 지극히 평범한 검. 그래서 개벽 이후에 만들어진 다른 검들보다 무디고, 손이 많이 가는, 평범하다 못해 오히려 어리숙한 검.
상호는 그 검의 옆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세희야.”
“네.”
“미안하다.”
눈을 깜작이던 세희가 빙긋 웃었다.
“괜찮아요.”
“너한테 너무 많은 짐을 지웠어.”
상호의 시선이 검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네가 다 해내서 다행이지만…… 도중에 언제 꺾여도 이상하지 않은 짐들이었지. 그래도 결국은 내 몫을 함께 짊어주고, 나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주고, 내 생의 끝까지 따라와 줬는데도…… 내가 겪었던 상처보다 훨씬 더 큰 상처만 남겨 버렸어.”
“괜찮다니까요.”
세희가 그의 무릎에 손을 얹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저는 이제 다 용서했으니까……. 쓸데없이 스스로 상처 주지 마세요. 다 제가 좋아서 선택한 거예요.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둘의 사이에 가늘고 흰 새끼손가락이 올라왔다.
“선생님이 포기하기 전까진 저도 포기하지 않고.”
“……내가 포기하기 전까진 너도 포기하지 않고.”
상호는 쓰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엮었다.
“그래. 그런 거였지.”
“네.”
세희도 활짝 웃었다.
1학년 때에는 자주 보여주다가, 마신을 죽일 후계로 키워지기 시작할 때부터는 점점 사라지더니,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화사한 미소.
상호는 그 미소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세희야.”
“네.”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지?”
그 말에 세희의 미소가 흔들렸다.
화사했던 미소가 아픈 미소가 되고, 엮인 새끼손가락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그러나 상호가 새끼손가락을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어.”
그것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언젠간 죽고…… 학교에 입학하면 언젠간 졸업을 하지. 우리는 서로 선택한 인연이니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 했지만…… 그 끝도, 결국은 오는 거야.”
“싫어요…….”
“난 다 가르쳤다.”
상호는 검을 칼집에 집어넣고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새로운 선생을 만나러 가야지.”
“싫다구요…….”
세희는 이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굵직한 눈물을 하염없이. 그대로 두면 온 교실을 채울 것처럼. 고운 얼굴을 무너뜨리며 입술을 깨물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애타게 울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안 돼요. 저는 못 견뎌요, 선생님……. 견디는 방법을 안 가르쳐 줬잖아요…….”
“다른 애들 졸업하는 것도 보고 싶었는데.”
상호는 아쉬움과 안도가 함께 섞인 한숨을 쉬었다.
“우리끼리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선생님…….”
“자.”
그가 예경에게 물려받은 검이 세희의 앞에 들이밀어졌다.
“졸업장이야.”
“이게 왜 졸업장인데요…….”
“어딜 가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겠지?”
그 말에 세희는 울다가도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예요, 그게…….”
“아니야?”
“당연히…….”
눈물에 젖은 손이 검을 잡았다.
“당연히 자랑스럽죠…….”
“그래.”
상호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엔 웃는 모습을 보고 떠날 수 있게 되어서.
그때 교실 앞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예경이 문지방을 밟고 서서 씩 웃고 있었다.
이젠 정말로 가야 할 때가 됐다. 상호는 세희의 어깨를 토닥이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갈게.”
“선생님.”
“응?”
세희가 밝게 웃었다.
“고마웠어요.”
상호는 씩 웃고 손을 한 번 쓱 들어 보였다.
그의 곁으로 다가온 예경이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세희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오호…….”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교실 뒷문으로 잡아끌었다.
“가요.”
“저 애가 세희야?”
“네.”
“예쁘네.”
그렇게 말하는 예경의 눈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뭐가요…….”
“아냐, 아냐.”
곧 가늘지만 강한 손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갈까?”
“……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끝. 상호는 담담히 받아들이고 예경과 함께 문가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불룩 튀어나오더니.
콰아아앙
박살난 문이 그들을 덮쳤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예경을 끌어안고 바닥을 구르다가, 문지방을 밟고 서 있는 소녀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세희야?”
“누구 맘대로……!”
세희의 온몸에서 하늘색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방금 예경이 예쁘다 했던 얼굴은 아수라상처럼 일그러져 있고, 빼어 든 강검에서는 그들을 향한 살기가 풀풀 흘렀다. 상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눴던 세희는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라?”
“누구 맘대로 간다는 거야, 이 멍청아!”
세희가 이를 갈며 강검으로 그를 겨눴다.
“누구 맘대로! 기분 나쁘게 사람을 흉내내서! 이딴 곳에 처박혀서 딸딸이나 치고 있느냐고!”
“아니, 세희야. 난 몰랐…….”
“닥쳐!”
상호가 감당할 수 없는 소녀의 폭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깜짝 놀란 예경이 입을 뻐끔거리며 상호의 품에 꼬옥 안긴 채였다. 그 모습을 본 세희의 눈에서 불꽃이 확 타올랐다.
“꺼져!”
“저, 저기…….”
“큰사부고 나발이고 이게 말이 돼?! 모든 걸 바친 사람이 모든 걸 잃는다고? 절대 안 돼, 그렇게 안 놔둬. 그런 이야기는 아줌마 하나면 충분하잖아!”
“아줌…….”
예경의 눈이 핑핑 돌았다.
“아줌마래……. 어떡해, 상호야. 나 처음 들어봐…….”
“운명이 반복돼? 스승이 책임지고 죽어야 해? X랄하지 마. 세상에 반복되는 건 없어. 그게 뭐든지 간에 조금씩은 달라지고, 조금씩은 나아진다고.”
강검을 움켜쥔 세희의 손아귀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런데도 운명을 반복해? 그럼 당신들 인생이 틀려먹은 거야. 발전 없이 제자리만 걷는 게 어떻게 옳은 인생이야? 웃기지 마. 운명도 인생도, 절대 반복되지 않아.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아. 내가 이 칼로!”
예경의 검이 아닌, 세희의 검.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고!”
그 검에서 불꽃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뜨겁다. 너무 뜨거워서 온몸을 그을릴 것만 같았다. 상호는 얼굴에 닿는 열기를 손으로 막으며 진땀을 줄줄 흘렸다.
“세희야, 일단…… 선생님 말 좀 들어봐.”
“닥쳐, 이 패배자 인생아!”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상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선생이니까. 세희가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쳐 줘야 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세희를 불렀다.
“세희야.”
“뭐!”
“모든 일에는 끝이…….”
상호의 눈앞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억
“……컥!”
“가르치지 마!”
세희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기껏해야 꼴랑 몇 년 더 산 주제에!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그렇게 가르치기만 하는 건데! 당신 머리 나쁘잖아!”
“그래도 내가 선생…….”
“선생도 학생한테 배우는 거야!”
그렇기도 하다.
상호는 세희를 달래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맞장구를 치면서 진정을 시켜야 할 것 같아서.
“그래. 맞아. 나도 많이 배웠고…….”
“아니!”
“…….”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나를 알아?! 내 모든 걸 알아?! 몸 좀 바뀌어 봤다고 내 마음까지 알 거라 생각하지 마! 당신이 내 표정을 알아? 당신이 자고 있을 때, 당신을 보면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아?!”
거침없이 말을 토해내던 세희가 가쁘게 숨을 들이켜고 코를 훌쩍였다.
상호는 그제서야 세희의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내 차례야.”
세희가 울먹이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제 내가 당신한테 날 가르쳐줄게. 그러니까…….”
“…….”
“떠나지 마…….”
눈을 감는 상호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사랑을 증명받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항상 그가 먼저 증명해야 했기에. 예경에게도, 효은에게도. 늘 그가 먼저 표현해 왔기에.
그게 퍽 새로워서 가슴속이 간질거렸다.
“그래도 안 돼.”
“제발…….”
“가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당신 가면 나 또 혼자야, 제발 가지 마…….”
“왜 혼자야. 친구들 있잖아. 같이 잘 지내고…… 힘들 땐 서로 도와줘. 그러면 나도 편하게…….”
눈앞에 또다시 주먹이 날아들었다.
“……악!”
“아니 X발, 가지 말라고! 가지 말아 주세요가 아니잖아! 가지 마! 가지 마! 귓구멍이 틀어막혔어? 가지 마, 명령이잖아!”
“커헉, 억! 세, 세희야, 제발 가는 길이라도 덜 아프게…….”
“시끄러워!”
상호를 두들겨 패던 세희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둘의 싸움에 밀려난 예경이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당신.”
세희의 눈이 번득였다.
“당신 때문이구나.”
“어어…….”
“당신 때문에 이 멍청한 인간이 자꾸 죽으려고 하는 거야.”
예경은 그 눈빛을 받자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곧 상호의 위에서 일어난 세희가, 의자에 인형처럼 앉아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 다가갔다.
“답을 정하려면…….”
예경의 검이 예경에게 던져졌다.
“이것밖에 없겠지.”
세희가 강검을 겨눴다.
칼끝이 향한 곳은 예경. 예경은 손에 쥐인 자신의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순하던 눈빛이 점차 서늘해졌다.
“그러네.”
예경은 검을 뽑았다.
천천히 드러나는 시퍼런 칼날에서 하늘색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여기서는 물러날 수 없겠는걸.”
“누나…….”
대체 둘이 왜 싸워야 하는 건가. 상호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손을 들었지만, 예경과 세희는 그를 무시하고 교실 한가운데에서 대치했다.
둘의 걸음이 둥글게 돌기 시작하고.
예경이 나직이 말했다.
“알고 있니?”
“…….”
“네 선생님은 나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거…….”
눈앞의 예경은 진짜 예경.
내공에 담겨 옮겨진 복사본이나 상호의 상상이 아니라, 정말로 예경. 원조 백예경. 천색창염의 시초이자, 천재이며 괴물인 단 한 명의 최강.
그리고 세희도, 아마 진짜 세희. 아르게스로 떠나오기 전에 기어코 그를 넘어섰던 아이.
상호는 어느 쪽이 이길 거라 도저히 장담하지 못했다.
“알아.”
세희가 짤막하게 답했다.
“기억을 읽었으니까.”
“그렇구나.”
예경이 검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그럼 너도…… 손 없이, 다리 없이. 싸울 수 있겠니?”
“아니.”
“……응?”
“난 아무것도 잃지 않아.”
세희의 강검이 점점 커졌다.
“그 무엇도 잃지 않아. 왜 내가 잃을 거라 생각해? 난 안 잃어. 절대 안 잃어. 내가 그렇게 정했어.”
예경의 검보다, 훨씬 밝게 빛나며.
“난 당신들과 달라. 난 제자리만 걷지 않아. 난 당신들 운명이란 거 반복하지 않을 거고, 내 미래 내가 만들 거야. 그 너머를 보여줄게.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아줄게. 당신이 질투할 만큼……. 그러니까, 내 선생님…….”
푸르른 불꽃이 확 타오르고.
“내놔아아아!”
세희가 예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밝다. 뜨겁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환하고 열렬한, 맑고 찬란한, 하늘색보다 더 희고 푸른 불꽃의 색.
그 불꽃이 교실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이야…….’
상호는 그에게로 쇄도하는 불꽃을 바라보며 웃었다.
‘엄청나네.’
이젠 정말 가르칠 게 없겠다. 무엇 하나 그에게 꿇리는 게 없으니.
곧 푸른 화염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 *
자박……
바위와 돌을 밟는 소리.
완전히 무너진 학교의 폐허 위를 한 사내가 걸었다.
자박……
그 걸음의 끝에는 쓰러진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곁에 다다른 사내는 뒷짐을 지고 서서 여인을 불렀다.
“예경.”
예경은 슬쩍 눈을 떠 명욱을 올려다보았다.
“네.”
“상호는?”
“제자가 끌고 갔어요.”
“상호네 제자? 그 애한테 진 거야?”
“네에……. 어쩌다 보니.”
명욱이 헛웃음을 쳤다.
“대단하구만.”
“그러게요…….”
예경도 킥킥 웃었다.
명욱은 폐허를 쓱 둘러보았다. 무너지긴 했어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잔해. 그리고 주변에 남아있는 다른 건물들.
“여기가 상호 일하는 학교냐?”
“그런가 봐요.”
“좋아 보이네.”
명욱의 눈이 예경을 흘끗했다.
“남을 거냐?”
“네.”
예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아직 포기할 수 없어서.”
“그런가.”
명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럼 다음엔 상호랑 같이 보게 되겠군.”
“그렇죠.”
“알겠다.”
교문을 향해 걷던 명욱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예경.”
“네?”
“마지막 임무다.”
“……임무요?”
예경은 눈을 말똥말똥 떴다. 영혼뿐인 그녀에게 맡길 임무가 뭐가 있는지.
그런 그녀에게 명욱이 등을 보인 채로 말을 이었다.
“상호랑 꼭 행복하게 살아라.”
“……아하.”
예경은 그제야 씩 웃었다.
“물론이죠.”
대답을 들은 명욱은 손을 슬쩍 들어 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교문 밖에는 네 개의 흐릿한 인영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명욱이 다가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가 명욱과 함께 학교에서 멀어져 갔다.
예경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어렴풋이 들었다.
“남는대요?”
“음.”
“에이, 간만에 상호 녀석 보나 했더니……. 어떻게 지낸대요? 그 성격은 고쳤대요?”
“몰라, 임마. 오면 직접 물어봐.”
“쭈그렁 할아범 될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에휴.”
부대원들은 그렇게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예경은 그들이 사라진 교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대자로 폐허에 누웠다.
푸른 하늘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녀의 불꽃과는 살짝 색깔이 달랐다.
‘흐으음…….’
아무래도 바람을 맞은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세상의 하늘을 차지하는 싸움은.
“푸후훗…….”
예경은 웃음을 터트리고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지끈.
지끈, 지끈.
지끈지끈, 욱신욱신.
심장이 쥐어짜는 듯 아팠다.
‘으…….’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뒤척였다.
세희에게 찔린 심장이 자꾸만 아파왔다.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누워 있는 침대의 촉각도, 코끝을 스치는 약 냄새도.
몸의 감각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으.”
입 밖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청각이 돌아왔다. 입천장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붙은 혀의 미각까지도.
마지막으로 돌아온 감각은 눈꺼풀의 무게.
상호는 힘겹게 눈을 떴다.
“끄……응……응?”
“…….”
효은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누운 병상의 옆에서, 바보처럼 입까지 벌린 채로. 오른손에는 방금까지 빨던 담배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져 연기를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상호는 그 담배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는 아픈 사람이 옆에 있는데 담배를 피고 싶냐…….”
“너.”
“엉.”
“너…….”
몸을 바들바들 떠는 효은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피운 거잖아! 왜 사람 걱정하게 하고 지랄인데! 엄마 없는 새끼, 으헝헝…….”
“……넌 진짜 한결같구나.”
10년이 지나도 하는 말이 똑같은 걸 보니.
그때 가슴팍 위에 가벼운 무언가가 얹혀 있는 게 느껴졌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몸을 내려다보았다.
혁구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뺙.”
“…….”
상호가 설명을 구하는 눈으로 효은을 바라보자 효은이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휴지를 뽑아 코를 팽 풀었다.
“푸헤엥! 크응…….”
“…….”
“쿨쩍…….”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원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계속 코만 풀 뿐.
결국 상호는 굳이 입을 열어 물었다.
“나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그 새 때문에.”
“혁구?”
“혁군지 꾸꾼지 뭔지. 하여튼 그 새가 너 살렸대. 세희가 그러던데.”
“그래……?”
상호는 다시 혁구를 내려다보았다.
나빛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존재. 대체 정체가 뭘까. 기만의 악마의 말을 떠올려보면 분명 천사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무생물인 영혼은 아니니까.
아니, 어쩌면 나빛이 만들어 낸 새로운 종류의 천사일지도.
‘나빛이가 신이 됐다거나……?’
새로운 법칙을 만들었다거나.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상호는 곧 고개를 흔들며 헛된 생각을 떨쳐냈다.
‘그럴 리가 없지.’
아마도 말이다.
그는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다가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다시 쓰러졌다.
“끅……!”
“등신아, 뭐해! 그냥 누워 있어! 어딜 또 쳐 싸돌아다닐려고…….”
효은의 손바닥이 그의 뺨을 철썩철썩 쳤다.
어째 이게 더 아픈 듯도 하지만 상호는 따지지 않았다. 따지면 별 시답잖은 이유를 들어가며 더 때릴 게 뻔해서. 대신에 다른 것을 묻기로 했다.
“다들…… 괜찮아?”
“괜찮지.”
효은이 툴툴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다 무사해. 다들 잘 돌아왔어. 오빠랑 교장 할머니도 다친 데 없고. 언니도 멀쩡하고. 애들도 학교 잘 다니고 잘 지내지.”
“다행이네…….”
“멍청한 담임이 세 달 넘게 누워 있던 것만 빼면.”
“……응?”
상호의 머릿속이 순간 정지했다.
“세 달?”
“어.”
“세 달?”
“맞다고. 잠깐만, 너. 너 설마 뇌에 문제…….”
“아니! 아니, 멀쩡해. 정신과 신경과 다 필요 없어. 그래서…… 오늘이 며칠인데?”
그 말에 효은이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화면에 뜬 날짜는, 2월 11일.
‘……진짜네.’
정말로 세 달을 누워 있었던 것이다. 상호는 멍하니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효은을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효은이 눈을 흘겼다.
“뭐.”
“걱정 많이 했어?”
“뒤져.”
했구나. 상호는 흐흐 웃으며 창가를 돌아보았다. 효은을 계속 마주하기엔 조금 쑥스러워서.
그런데 창가에 무언가가 놓인 게 보였다.
“……야.”
“뭐.”
“저거…… 저거 좀 가져와줘.”
“너 내공 못 쓰냐?”
“지금 안 나와.”
효은은 더 따지지 않고 그 물건을 집어 그에게 들고 왔다.
둥그런 유리병이었다. 위쪽을 널찍한 코르크로 막은 유리 단지. 효은의 작은 얼굴보다 약간 더 큰 크기였다.
상호는 효은에게서 그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꼭 선물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그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자 효은이 혀를 찼다.
“좋은가봐?”
“응.”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유리병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안에 담긴 것을.
가슴이 간질거려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무 좋아.”
유리병 속에는 종이학이 들어 있었다. 수백 마리가 빼곡하게. 그에겐 익숙한 알록달록한 색깔로.
재료는, 그동안 그가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소원권이었다.
* * *
‘……으음.’
그는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느껴진 것은 차가운 나무 마룻바닥. 그리고 저 멀리에 우뚝 솟은 회색의 거대한 무언가.
주변을 둘러보던 마신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여긴……?’
누군가의 방.
꺼진 촛불이 죽 늘어선 제단. 그 앞에 놓인 방석. 그 위에 앉아 제단을 바라보는 사람. 그 모든 게 기이할 정도로 거대하게 보였다. 마치 개미의 시선처럼.
마신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그 거인을 알아보고 눈을 부릅떴다.
“네놈……!”
“그래. 나다.”
영주는 마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영혼도 다 헐어 무너지고 파리만큼밖에 안 남았구나. 어쩌다 그런 꼴이 된 게냐?”
“너희가 바치지 못하는 것을 바쳤지.”
“뭔데?”
“욕망.”
마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탐욕, 영혼을 좀먹고 지성을 흐리게 하는 오감의 욕구들. 나는 그 모든 걸 버려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영혼이 되었고, 나아가 진정한 영원을 얻을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그러냐?”
영주가 피식 웃었다.
“욕망을 버리면 주술을 어떻게 쓰게?”
“욕망을 버려야 인간이 자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자연이 되려는 욕망에 빠져 있는 거 아니냐? 자연이 되긴 글렀구만 그래.”
“이건 욕망이 아니라 의무다!”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놈 같으니.
마신은 눈앞의 주술사를 향해 일갈했다.
“고등한 지능을 가진 생명이라면 응당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법! 너희 같은 미물이 이해할 리…….”
“누가 미물인지 다시 잘 봐라.”
영주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 굵은 목소리의 힘이 마신을 짓눌러서, 마신은 더 따지지 못하고 움찔해 버리고 말았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너는 내 박수 한 번이면 죽는다.”
“…….”
그동안은 박수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마신이, 이제는 박수 한 번이면 죽는 초라한 벌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마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네놈 따위가? 나를?”
“나는 따위가 맞지만 네놈도 다르지 않지.”
거대한 어깨가 한 번 들썩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뤄질 턱이 있나. 그래도 마침 내가 방법을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네가 가려는 길이 내가 지나온 길과 같아서…… 어떠냐, 가르침을 받아볼 테냐?”
“겨우 네놈 따위가……!”
마신은 온몸에 핏대를 세우고 이를 갈았다.
“신을 가르치겠다는 것이냐? 욕망도 버리지 못한 인간 따위가?”
“별것 아냐. 주술에 대한 일반론이야. 나 따위도 가르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내용이지.”
영주는 마신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주술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얕은 앎으로 지껄이지 마라! 나와 네놈은 비교조차……!”
“세상과 마음의 작용이지.”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가 방을 온통 울렸다. 겨우 그 정도의 진동조차도 지금의 작디작은 마신에게는 지진처럼 느껴졌다.
“세상은 물이고 마음은 노다. 노를 버리고 물에 배를 맡긴 사공은 물이 된 줄 착각할지언정 물이 되지는 못한다. 사공이 물이 되는 방법은 하나. 배도 버리고 물에 빠지는 것이지.”
“크으……!”
마신은 반박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뼛속까지 울리는 지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주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자기가 바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신 따위, 한낱 어린아이의 꿈만도 못한 것이다.”
마신의 손이 덜덜 떨렸다.
공포가 아니었다. 분노였다.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을, 세상의 이치를 전부 꿰뚫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
그 이면에는 영주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마신의 너절한 자격지심이 자리했다.
“……아니!”
마신의 눈에서 시뻘건 안광이 번득였다.
“네놈은 틀렸다.”
“…….”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겪지 않은 자가 어찌 겪어본 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냐? 하찮은 인간 따위가, 벌레가…….”
검은 몸에서 저릿저릿한 기운이 풀풀 흘러나왔다.
그 몸이 아무리 작아도 격이 다르다는 듯이, 방을 가득 채울 것처럼 파도치며 서서히 영주의 몸을 잠겨 들게 하고 있었다.
마신은 눈을 부릅떴다.
“오직 나만이 벽을 넘은 유일한 인간이고! 너흰 진리를 깨우치는 데에 쓰일 소모품에 불과해! 나는 신이다. 세상 모든 것은 신을 위해 존재하고. 어디 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지? 꿇어라! 너의 신 앞에……!”
퍼억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던 혜소는 움찔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거사님.”
“으응.”
“죄송해요. 벌레 밟아 버렸어요…….”
“괜찮아.”
발이 완전히 디뎌지기 전에 가느다란 찍 소리를 들었다. 영주는 혜소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벌레도 못 되는 녀석이었단다.”
* * *
동그란 눈이 깜작였다.
“……으응.”
뭔가 꿈을 꾼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침대에 누워 있던 혜소는 몸을 일으켜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으음…….’
기억을 더듬는 중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왠지 떠올려내고 싶어서. 그러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바닥에 요상한 감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뭐였지…….’
뭔가를 밟은 것 같은데.
혜소는 조그맣고 통통한 발을 잡고 요리조리 둘러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하고 매끈한 민머리를 긁적였다.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잠이나 자야지.’
좋은 꿈이었던 것 같다. 그리운 듯도 하고. 포근한 듯도 하고.
혜소는 그 꿈을 이어서 꾸기 위해 눈을 감았고, 곧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창가에서 내려온 햇살에 누운 채로.
“쿠울…….”
새근새근, 평화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