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8화>
498. 인연(刃戀)
“어떻게 할 셈이냐?”
새까만 손가락이 그를 가리켰다.
위에서 아래로. 깔아보듯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에 질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색으로.
상호는 지금 놈의 모습이 그렇게 같잖을 수가 없었다.
“여기인가?”
마신이 스스로의 왼쪽 가슴을 검지로 콕콕 두드렸다.
상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하나 남은 눈으로 조용히 노려볼 뿐.
“고맙다.”
마신이 오만하게 웃었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던 내 구멍의 위치를…… 바로 네놈이 알려주었군.”
“…….”
“다른 누구도 아닌 네놈이…….”
마신의 뒤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세희는 반격해 들어오는 마신의 손을 쳐내고 상호의 앞에 착지했다. 처음부터 살초가 아니라 상호의 곁에 다가오기 위한 공격이었다.
세희는 마신과 상호의 사이에 서서 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선생님.’
‘…….’
‘뭐든 시켜주세요.’
검을 부여잡은 손아귀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다 해내 보일 테니까…….’
아무리 불가능한 임무라도.
그러나 불가능했다. 악마의 눈 없이, 구멍 속 움직이는 심장을 찌르기는.
상호의 시야가 자꾸만 흐릿해졌다.
‘……누나.’
이번에는 회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초점을 다잡으려 애쓰며 생각했다.
‘누나라면…….’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당연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천재 중의 괴물, 괴물 중의 천재인 당신이라면.
‘……난 모르겠어요.’
그는 천재가 아니었다.
괴물도 아니고, 영웅은 더더욱 아니고. 그저 은인이 걷는 길을 쫓아 달리고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린, 지극히 평범한 한 명의 사람일 뿐.
상호는 피가 흐르는 오른눈에서 손을 떼어 검을 잡았다.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겨우 이런 것밖에 없어요…….’
죽을 때까지 찌른다.
운을 바라며 수백 번, 수천 번을 찌르고 또 찌르는 것밖엔.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고작 그런 물러터진 작전뿐이었다.
그래도 그것밖에 몰라서.
상호는 세희의 곁에 서서 같은 자세로 검을 들었다.
‘목을 베자.’
‘목이요?’
‘응, 목을 벴을 때 당황했으니까……. 일단 베고, 구멍이 있었던 위치를 다른 한 명이 최대한 많이 찌르는 거야.’
‘네.’
세희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신호로 둘의 몸이 동시에 앞으로 튀어 나갔다. 상호는 오른쪽으로, 세희는 왼쪽으로.
마신은 침착하게 팔을 들어 상호의 검부터 막았다.
터억
막았다.
뒤이어 날아든 소녀의 공격도.
퍼억
막지 못했다.
‘……!’
마신은 목을 노리는 소녀의 검을 피해 뒤로 물러나 잘린 팔을 수복시켰다.
동시에 두 곳에서 공격이 날아드니 영혼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꼭 한 명의 인간이 두 개의 몸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생각을 연결하기라도 한 건지.
반쪽짜리 심력으로 두 개의 영혼을 상대하려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마신과 저들의 영혼은 격이 달랐다.
‘하찮은 것들이……!’
한 놈씩 처리하면 충분하다. 마신은 눈에 불을 켜고 마나의 검을 만들어 휘둘렀다.
콰앙
“……윽!”
상호의 검에서 강기가 한 뭉텅이 잘려나갔다.
뒤이어 마신의 등에서 뻗어난 검은 기운이 상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세희보다는 상호를 먼저 죽이기로 작정한 듯싶었다.
상호는 검으로 그 촉수 같은 기운을 쳐냈지만, 그러는 동안 또 한 덩이의 강기를 잃고 말았다.
‘쳇…….’
상호의 이빨이 부드득 갈려 나갔다.
마신의 뒤에서 세희가 달려들었지만, 마신은 등에서 수많은 촉수들을 뻗어내 세희를 공격했다.
“크으……!”
마구잡이로 달려드는데다 영혼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세희는 촉수를 베면서도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상호에게 달려든 마신이 주먹을 꽉 쥐었다.
콰앙
“……커헉!”
상호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복부에 깊이 틀어박힌 주먹이 단전과 혈맥을 흐르던 마나를 앗아갔다. 당장 다시 끌어내지 않으면 마신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단전을 쥐어짰다.
‘제발……!’
흘러나온 한 줄기 기운이 손바닥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바로 앞까지 다가온 마신이 그를 향해 강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시커멓게 이글거리는 영혼의 마나를 가득 담아서.
‘……!’
급한 대로 손바닥이라도 들어 올렸지만, 거기엔 제대로 된 초혼강기가 맺혀있지 않았다.
‘젠장……!’
틀렸다. 그래도 상호는 내공을 뻗는 것을 포기하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그렇게 검은 강검이 그를 내려치려는 찰나.
푸욱
예경의 검이 마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왔다.
“……크윽!”
마신이 크게 당황하며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촉수를 다 베고 달려든 세희가 마신의 뒤에서 검을 찌르고 있었다. 세희는 타오르는 눈동자로 마신을 노려보며 초혼강기를 더욱 강하게 피워 올렸다.
검에 찔린 틈이 지글거리며 새카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으……!”
“죽어.”
하늘색 불꽃이 마신의 몸을 휩쌌다.
마신이 몸을 수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곧바로 검을 잡아 놈의 구멍이 있는 곳에 검을 찔러 넣었다.
마신이 움찔하며 눈을 부릅떴다.
“헉……!”
제발, 제발.
상호는 빌고 또 빌며 마신의 왼쪽 가슴팍에 검을 찌르고 또 찔렀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위로, 아래로.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지 않은 방향으로 찌르고 찔렀던 방향도 또 찌르고.
근육이 비명을 질러도 상호는 멈출 수 없었다.
‘제발……!’
그렇게 찌르고 찔렀는데도.
마신은 오히려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실패했군.”
굳어버린 그에게 마신이 낮게 속삭였다.
“너희 세상의 운이란 것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
“행운이든, 운명이든…… 결국 세상이란 틀 바깥에 사는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지.”
멍하니 선 상호의 귀에 마신의 웃음소리가 닿았다.
“이제 죽도록 해라.”
마신은 그렇게 말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터억
“……음?”
마신은 자신의 주먹을 잡은 상호의 손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뭐냐?”
“…….”
“미친 거냐?”
이렇게 잡고 있으면 마나만 빼앗길 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지금도 마신의 마나가, 마나를 잡아먹는 마나가 상호의 손에 둘러진 천색창염강기를 빨아들이는 중이었다. 인간이라면 성질이 다른 내공을 흡수해보았자 제 몸만 다치겠지만, 마신은 모든 종류의 마나를 흡수해서 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마신은 상호가 자신의 주먹을 놓지 않자 헛웃음을 쳤다.
“완전히 미쳤군.”
“…….”
“너도, 네 제자도…… 부서져 버린 건가.”
마신의 가슴팍에서는 아직도 세희의 검이 꽂혀 초혼강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마신에게 더는 타격을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그저 마나를 낭비하고만 있는 것이다. 마신은 킬킬거리며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놈들의 마나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것도 같다. 마신은 당황하며 가슴팍에 튀어나온 칼날을 눌러 빼려 했지만, 이전보다 강해진 불꽃이 그의 손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신의 손을 잡은 상호의 손에서도 검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네가 내 사람을…….”
상호는 놈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내 눈을, 내 마나를,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하나 남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 마음만은…… 빼앗지 못해.”
마음의 불꽃에는 연료가 필요하지 않으니.
상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동치는 심장을 느끼며, 텅 빈 단전 대신 심장과 혈관과 근육의 힘으로 검에 초혼강기를 불어넣었다.
뜨거운 피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이건…….’
마신은 눈앞의 인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느끼고 움찔했다. 살기도 아니고, 투기도 아닌. 신인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기운.
한낱 인간에게서 이런 기운이 나올 수 있다니.
‘아니…….’
이 인간의 너머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이미 세상을 떠났어야 할 그림자.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어쩌면 수백.
‘원귀인가?’
원한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연고 없어 세상에게 버려진 영혼들. 분명 원귀가 되고도 남았을 이들이 놈에게 영혼의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신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영혼으로 일갈했다.
‘이런 세상을 위해 살고 싶으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너흴 죽인 세상에 복수하고 싶지 않으냐? 그렇다면 너희는 천치다. 억울하게 죽어 놓고 아무것도 바꾸려 하지 않는……. 너희 죽음을 정말로 아무 의미 없게 만들 셈이냐? 이런 세상 따위를 위해서?’
이번에도, 당연히.
마신은 이를 갈며 상호의 손을 뿌리치고 마나를 터트렸다.
콰아아앙
“……큭.”
세희와 상호는 각자의 반대편으로 밀려났다.
연기가 걷히자 마신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팔을 상호를 향해 뻗고 있었다. 곧 열 개의 손가락이 제멋대로 비틀리며 열 개의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에서 뿜어진 열 개의 기운이 한데 묶이더니 상호를 향해 쏘아졌다.
촤악
상호는 검을 들어 그 기운을 갈랐다.
더 이상 마나에 관련된 힘은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 마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갈았다. 이제는 마나를 잡아먹는 마나도, 힘을 반사하는 마나도, 연결을 끊는 마나도, 그 어떤 마법도 쓸모가 없었다.
더욱 좋지 않은 소식은.
화르륵……
소녀의 검에서도 비슷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금 더 살기에 가까운 결의. 하지만 죽이겠다는 마음이 아닌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소녀는 마신을 향해 검을 휘둘러 들어왔다.
뒤는 하늘색 불꽃. 앞은 검푸른 불꽃.
마신은 어느 쪽을 막아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다가, 커다란 검을 만들어 발악하듯 휘둘렀다.
‘이 벌레 같은 놈들이……!’
격이 다르다.
자신과 이 벌레들은 격이 다르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자신에게 맞먹으려 드는가. 이놈들은 몰랐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신이 되었는지. 신이 되기 위해 무엇을 버렸는지. 이놈들은 알지 못했다.
그래놓고 어찌 신에게 맞먹는 힘을 휘두르려 하는가.
마신은 검을 마구 휘둘러 놈들을 밀어냈다.
‘버러지들이……!’
어차피 심장만 지키면 된다.
놈들이 아무리 강해도 결국은 인간. 계속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쓰러질 때가 올 것이다. 마신의 몸은 양분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 시간만 끌 수 있다면 마신이 훨씬 유리했다.
마신의 검이 상호의 검을 후려쳤다.
우지직……
두 검의 칼날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으스러졌다.
콰득
뒤에서 날아든 소녀의 검도, 마신은 주먹을 휘둘러 막았다.
‘소용없다.’
놈들의 공격은 그에게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마신의 눈에서 새빨간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 상호의 검이 마신의 얼굴에 틀어박혔다.
‘……!’
이럴 리 없는데.
격이 같을 리 없는데.
그렇게 마신이 당황하는 사이, 이번에는 세희가 마신의 가슴팍에 검을 찔렀다.
“흐읍……!”
스승처럼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내장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듯이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그러나 세희 또한 마신의 심장을 찾지는 못했다.
“……크흐.”
마신은 얼굴에 칼이 박힌 채로 웃었다.
“너흰…… 절대로…… 날 죽일 수 없다.”
세희는 포기하지 않고 검을 계속 쑤셨지만, 마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용없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고 해봤자…….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 같아 보기 추하군.”
“으……!”
“포기해라.”
마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붉은 안광이 상호를 향해 쏘아졌다.
상호는 호신강기로 안광을 버텨내고 마신의 목을 잘라버리려 했으나, 마신이 얼굴로 토해낸 촉수들이 그의 몸을 밀어냈다.
“큭……!”
상호는 들러붙은 촉수들을 불태우고 착지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필사적으로 검을 쑤시던 세희도 더는 그러지 못하고 마신에게서 떨어졌다. 상호와 세희는 같은 편에 서서 같은 자세로 검을 겨누고 마신을 노려보았다.
둘 다 숨이 조금 거칠어져 있었다.
“슬슬 지치지 않나?”
마신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아무리 벌레라도 놀라운 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
“…….”
“그래도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나? 너희가 날 이길 방법은 없다. 아무리 강하고, 아무리 빨라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것을 벨 수는 없지 않느냐.”
상호도 실감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기만 한다면, 하다못해 마나로라도 느낄 수 있다면 어떻게든 베어 볼 텐데. 전혀 느낄 수가 없는데다가 위치까지 바뀌니 찔렀던 방향을 기억해도 의미가 없었다.
‘정말…….’
방법이 없는가.
‘정말로…….’
말없이 땅을 내려다보는 그를 세희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
‘…….’
‘제가 다리를 노려볼게요.’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이.
‘선생님은 목을 노리세요. 아니면 심장을 다시 찔러보거나. 그러면 일단 다리는 확실히 자를 수 있을 테니, 그때 같이…….’
‘세희야.’
‘……네?’
상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찔러야 한다.’
‘네?’
세희의 눈이 끔뻑였다.
무엇을 말인가. 아니, 아마도 심장이겠지만. 생각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밑도 끝도 없는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제가 찌를까요? 알았어요. 그럼 선생님이…….’
‘네가 해줘야 해.’
상호는 계속 당연하면서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꼭 찔러야 한다, 세희야. 꼭…….’
‘……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아무리 불가능한 임무라도 해내 보일 테니.
검을 움켜쥐는 세희를 보며 상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갈게.’
‘네.’
상호의 발이 땅을 박찼다.
마신은 살짝 당황했다. 상호가 땅을 박차는 모습이 어째 확신을 가진 듯 보여서. 꼭 그를 죽일 방법을 찾은 것처럼.
그러나 그럴 리는 없었다.
‘헛수고를…….’
마신은 평정을 되찾고 인간들에게 집중했다.
지금까지와 같았다. 한쪽은 주변을 돌며 목을 노리고, 한쪽은 심장을 노리고. 이제는 빤히 보이는 수법에 오히려 편안하기까지 했다.
‘특별히 다른 전법은 없나 보군.’
마신은 마음을 놓았지만 방심은 하지 않았다.
사내가 마신의 오른쪽 옆구리를 노리고 검을 날렸다.
‘이건 가짜.’
마신은 검이 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검이 옆구리를 파고들었지만 어차피 오른쪽. 깊이도 얕아서 그의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신은 사내를 무시하고 소녀에게 집중했다.
‘음?’
소녀는 마신에게 달려들고 있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처음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멀거니 마신을 바라볼 뿐.
마신도 소녀와 같은 표정이 되었다.
‘……?’
그렇게 잠시 생각이 멈춘 순간.
등 뒤에서 두 팔이 튀어나와 마신의 양 팔뚝을 붙들었다.
‘……!’
함정이다.
마신은 반사적으로 팔을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사내의 팔이 단단하게 마신의 팔뚝을 조이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힘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이런……!’
등에 촉수를 만들어 찌르려 해도, 초혼강기가 너무 두터워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상호의 외침이 마신의 귓전을 때렸다.
“찔러!”
“……크으윽!”
마신은 이를 갈며 뒷발로 상호를 걷어찼지만, 그 또한 의미 없는 발버둥이 될 뿐이었다.
혹시 모른다.
이번에는 모른다.
수많은 방향 중에서 올바른 하나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그 불안감에 마신의 영혼이 터질 듯 날뛰기 시작했다.
‘크으……!’
마신의 버둥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오래 버틸 수 없다. 상호는 세희에게 마음속으로 찔러야 할 곳을 보여주며 외쳤다. 목과 이마에, 온몸에 힘줄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다.
‘찔러!’
‘하지만……!’
‘찌르라고!’
세희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을 본 마신은 깨달았다. 눈앞의 소녀가 주저하고 있음을. 수많은 방향 중에서 단 하나의 방향만은 절대로 찌르지 못할 것임을.
마신은 그 방향으로 영혼을 옮겼다.
‘네년은…….’
여기만은 찌를 수 없을 것이다. 마신의 영혼은 상호의 심장이 있을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소녀는, 애초에 뛰어들지조차 못했다.
‘……하!’
마신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결국 나약한 정 따위에 얽매여 사는 존재인데.
심장은커녕 다른 곳도 찌르지 못하는 모습이라. 마신은 참지 못하고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크하……?”
그때 소녀의 발이 땅을 찼다.
세희는 검을 움켜쥐고 앞으로 달렸다. 앞만 보고 뛰었다. 상호가 마음속으로 알려준 위치, 상호의 심장을 향해서.
검을 드는 순간까지 마음이 흔들렸지만.
‘찔러.’
목소리가.
때로는 엄하고, 때로는 날카로워도, 늘 다정하고, 늘 따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다잡아서.
“으…….”
세희는 비명을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
하늘색 불꽃을 두른 칼날이 마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마신은 자신의 구멍은 보지 못했다. 영혼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칼날이 정확한 위치로 날아오고 있음은 알았다. 그 칼끝의 방향 또한 정확하다는 것도.
그러나 검이 영혼보다 빠를 리 없다.
무게 있는 검이 무게 없는 영혼보다 빠를 리 없다. 마신은 영혼을 움직여 검을 피하려 했으나.
‘크윽……!’
어느새 다가온 칼날이 가슴팍에 꽂히고 있었다.
검에 둘러진 영혼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사라졌다. 마신은 그곳이 바로 악마의 구멍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아직 피할 수 있다.
피하기만 하면 이 칼은 뒤에 있는 사내의 심장을 찌를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소녀의 영혼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고, 그는 더 싸울 필요도 없이 승리하는 것이다.
마신은 영혼을 옆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뭣?!’
영혼이 움직이질 않았다.
무언가가 영혼세계에서 그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대체……!’
마신은 입을 떡 벌리고 당황하다가, 이게 가능한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빠드득 갈아붙였다.
‘네놈……!’
‘거래는 거절당했지만…….’
기만의 악마가 킬킬거렸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어서 말이지.’
‘네놈이……!’
‘나를 죽이려는 두 놈을 동시에 죽일 수 있는 기회라……. 하찮은 인간 녀석이 감히 내 머리 위에 있었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는다만…… 이런 식이라면 몇 번이고 기쁘게 이용당해 주지.’
이제 칼날은 마신의 영혼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절대로. 마신은 사색이 되어 몸과 영혼을 버둥거렸으나 둘 다 자신을 죽이려는 놈들에게 붙잡혀 있었다.
기만의 악마가 그의 영혼에 속삭였다.
‘진리를 알고 싶은가?’
‘이…… 개자식……!’
‘그럼 내가 알려주마. 모든 이는 언젠간 죽는다. 예외는 없지. 아무리 신이라 해도 말이야. 이제…… 네가 그토록 찾던 그 진리란 것을 몸소 체험해 보도록 하여라.’
그 말을 끝으로 기만의 악마는 마신을 놓아주었다.
마신은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영혼을 움직이려 했으나.
‘……컥.’
칼날이 영혼을 꿰뚫었고.
단 하나의 진리가 그를 덮쳤다.
* * *
퍼억……
마신의 몸이 뒤로 철퍼덕 넘어졌다.
세희는 다급히 마신을 꿰뚫은 검을 뽑아내고 마신의 몸을 들어 올렸다. 손이 벌벌 떨려서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마신을 옆으로 치워버리자 상호가 쓰러진 채로 웃고 있었다.
입과 가슴에서 피를 흘리면서.
“선생님…….”
세희는 떨리는 손으로 상호의 가슴팍을 눌렀다.
그래도 피는 멈추지 않았다. 콸콸, 울컥울컥. 그렇게 피가 쏟아질수록 손바닥 아래의 맥박이 점점 여려져 갔다.
세희는 떨리는 숨을 토해내며 떠듬떠듬 간신히 말을 이었다.
“왜…… 왜…….”
“방법이 없었어.”
이것밖에 없었다.
늘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기만의 악마를 이용하는 것밖에. 상호는 흐르는 피와는 달리 평온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나도 너한테 날 찌르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더라. 미안해.”
“알면 이러지 말았어야죠…….”
세희는 이제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목소리부터 손끝까지, 떨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상호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미안해서 자신의 상처를 막은 세희의 손에 손을 얹었다.
“미안.”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나한테 왜 그래요? 나는 선생님이 시킨 대로 다 했는데…….”
“미안해.”
“나는 선생님이랑 돌아가고만 싶었는데…….”
세희의 다른 손이 힘없이 상호의 가슴팍을 때렸다.
“세상을 구하느니 뭐니, 그딴 거 아무 상관없었는데…… 왜 그랬어요? 꼭 그랬어야 했어요? 나한테 이러면,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이런 기억을 갖고서……?”
“살아줘.”
피 때문에 쿨럭거리느라 자꾸 말이 끊겼다.
“그게 내가 너희한테 남기는…… 전부야.”
“필요 없어요…….”
세희가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죽는 날까지 미워할 거예요. 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1초의 마지막까지 저주할래요. 다시는 칼 따위 뽑지 않을 거예요.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이 칼을, 잡지 말았어야 했어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줘.”
상호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공을 전해주고 싶지만 싸울 때 다 써버렸다. 그래서 영혼을 남겨줄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세상이든, 아무도 버림받지 않는 세상이든…… 네가 살고 싶은 세상, 그 칼로 만들어. 그러다 보면…… 먼 훗날, 아주 먼 훗날…… 네 마음속에 이미 내가 있을 거야.”
“필요 없다구요…….”
“애들한텐 말하지 마.”
상호의 손이 세희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냥 싸우다 죽었다고 해. 아무한테도 미움받지 않게……. 세상을 구한 영웅이 미움받는 이야기, 너까지 물려받을 필요는 없잖아.”
“내가 어떻게 말해요. 선생님이 전해요. 선생님 여기서 죽으면 나도 배 찔러서 자살할 거예요. 그러니까 일어나서 직접 전하세요…….”
세희의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발…….”
“……가야겠다, 세희야.”
눈앞이 침침해져 왔다.
상호는 조금씩 가빠지는 숨을 느끼며 세희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떡하냐, 세희야. 벌써 애들 보고 싶어서…….”
“그럼 일어나라고요…….”
“나빛이랑 태화랑 다혜…… 네가 잘 챙기고. 다른 애들은 알아서 잘 할 거야. 아리가 많이 놀랄 것 같으니까…… 아리한테는 잘 말해 주고. 효은이는 신경 쓰지 마라. 소식만 전하면 그다음부터는 뭐라 말해봤자 소용없는 여자니까. 에이, 이서는 사람 만들고 싶었는데…….”
“그럼 일어나라고…….”
정말 그러고 싶다.
한 번만이라도 일어나서 학교까지만 걸어가 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텐데.
상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충분할지도.’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전부를 걸어서 전부를 지켰다. 비록 지켜낸 전부에 그는 없을지라도.
그리고 끝에는 그를 뛰어넘은 제자가 곁을 지키고 있으니.
‘충분하고말고.’
이 정도면 성공한 삶이 아닌가. 그는 후련한 웃음을 지으며 하늘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색을 평생토록 그리워했다.
죽는 순간 눈에 담을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그래도.’
한 줌 미련은 남았다.
역시 아이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눈꺼풀이 무거웠다.
더는 버티기가 힘들다. 세희의 손을 붙잡은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쉬고 싶었다. 눈을 감고 편하게.
상호는 손을 축 늘어뜨리고 눈을 감았다.
‘편하네…….’
드디어 당신을 만나러 간다. 꿈에도 그리던 당신을. 그 어떤 삶보다도 행복한 꿈을 꾸게 해준 당신을.
그런데 눈을 감기 직전.
푸르른 하늘에 노란 점이 보였다.
‘……어라.’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리던 상호는 몰려오는 깊고 달콤한 잠의 파도에 떠내려, 어둠 속으로,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멀리. 또 멀리.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물의 너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