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화>
497. 인연(因緣)
“땅이…….”
세희의 손아귀에서 검은 흙이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숯 같아요. 현무암도 아니고.”
“그러게.”
검은 땅에는 드문드문 나무가 솟아 있었다. 불에 탄 듯 비쩍 마른 모습으로.
상호는 가장 가까운 나무에 손을 얹었다.
“엄청 큰 숲이었나 봐.”
“그럼…….”
세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이 나무들은 서 있는 거예요?”
“……그러게.”
상호라고 알 리가 없었다.
다른 건 싹 다 타버렸는데. 다른 세계의 나무니까 불에 안 타는 뼈대가 있기라도 한가. 마법과 주술이 있던 세상이니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이쪽 세상 나무라면…….’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쓸데없는 생각에 너무 집중할 필요 없다. 상호는 그렇게 여기며 마음을 다잡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있을 리 없는 것.’
있을 리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기만의 악마가 그에게 했던 말.
상호는 주변에 있는 나무들을 유심히 둘러보다가 세희에게 말했다.
“잠깐만 둘러보고 가자.”
* * *
“……흐음.”
새빨간 눈알이 인간들을 훑었다.
검을 찼지만 손에는 마나의 창을 만들어 쥔 남자가 하나. 머리가 하얀 여자가 둘. 뿔과 꼬리 달린 여자가 둘. 갈색 피부 여자가 하나. 머리가 짧은 여자가 하나.
안대를 쓴 남자와 머리를 땋은 여자는 보이지 않는다.
지배의 악마의 고개가 아주 살짝 갸웃했다.
“인간.”
“뭐.”
“귀하들의 대장은 어디 갔습니까?”
도현은 코웃음을 쳤다.
“말하겠냐?”
“물론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귀하디귀한 악마의 눈을 두고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사정이란 것이 악마의 눈보다 중요치는 않을 것이다. 보나 마나 인간의 그 사소한 정이라는 것 때문일 터.
지배의 악마는 인간들을 둘러싼 악마들을 쓱 둘러보았다.
“뭐 됐습니다. 없으면 좋은 거지요. 우리는 우리대로 할 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무언가…… 남길 말이라도 있으신지?”
“그건 왜?”
“귀하들의 대장에게 전해드려야지요. 목소리도 똑같이. 최후의 단말마까지 덤으로.”
그때 하얀 머리 소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금색 날개를 펼치고, 온몸에 빛을 두른 모습. 지배의 악마는 소녀의 손에 들린 황금색 창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쳇.’
그 창이 허공에 수평으로 호를 그렸다.
소녀를 중심으로 황금색 기운이 둥그런 구체의 형태로 퍼져나갔다. 전후상하좌우 모든 방향으로.
기운이 악마들을 덮치자 악마들의 몸에 불이 붙었다.
키히이익……
악마들이 고통에 몸부림치자 지배의 악마의 영혼도 움찔했다.
하지만 저런 되다 만 천사의 힘에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악마들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인간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악마들 사이에서 붉은 갈기의 사자 수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애송이.”
적사자의 시선은 한 소녀를 향하고 있었다. 검고 높은 뿔과 검고 기다란 꼬리를 가진 소녀.
소녀도 적사자를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므앙.”
“우리는 우리끼리 놀아보도록 하지.”
적사자는 목과 어깨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인간들에게 다가갔다. 몸에 붙은 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백의를 두른 촉수가 홀연히 나타났다.
“…….”
촉수는 아무 말도 없이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나뿐만이 아니라 저릿저릿한 저주의 기운까지. 태화는 그걸 알아채고 손가락에 마나를 모으다가 해련이 앞으로 나서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교장쌤?”
“우리가 이쪽을 맡아야겠네.”
“……넵.”
신비의 악마를 향해 금색 강기와 보라색 광선이 쏘아졌다.
그리고 검붉은 강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야성의 악마에게 달려드는 다혜. 도현은 그들을 흘끗하다가 은율과 수호부대원을 돌아보았다.
“둘은 나빛이 근처에 있어.”
“네.”
대답이 들리자마자 그의 몸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도망칠 수는 없다. 여기서 놈들을 도륙 내 재생에 시간을 쓰게 해야 했다. 악마의 눈이 없으니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십 분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누런 창이 악마 한 놈을 꿰뚫었다.
키히익……
그 구멍에 성력의 불꽃이 닿자 악마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도현은 효은의 성창을 떠올렸다.
‘효과가 있군.’
마신과 처음 싸웠을 때도 성창으로 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었다. 마신에게도 그럴진대 이런 잡졸들에게야 훨씬 큰 효과를 보일 터였다.
행동을 굼뜨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재생까지 막고 있다. 나빛이 없었다면 은율은 죽었을 것이다. 도현도 크게 곤란을 겪었을 것이고.
도현은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창을 휘둘렀다.
퍼억
멀지 않은 곳에서 똑같은 소리가 들렸다.
다혜의 다리가 적사자의 머리를 걷어찼다. 팔과 다리가 어느새 검은 결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용의 비늘과 발톱처럼.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주홍색으로 번득였다.
“크르……!”
“……크흐.”
적사자가 손등으로 입을 쓱 닦고 주먹을 꽉 쥐었다.
콰아아앙
“……느욱!”
폭발에서 튕겨져 나온 다혜는 땅을 구르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먹을 막아낸 팔뚝에 얼얼한 고통이 남아 있었다. 다혜는 그 고통을 탈탈 털어버리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크아아!”
휘두른 궤적을 따라 검붉은 강기가 쏘아졌다.
강기는 악마들을 베고 적사자를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적사자는 코앞까지 다다른 강기를 보고는 코웃음을 치며 앞발에 발톱을 세웠다.
“아직도 애송이인가.”
검은 마나가 서린 발톱이 강기를 때렸다.
빠지직……
발톱은 강기를 긁으며 금을 내더니.
콰아아앙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규모의 폭발을 일으켰다.
폭압이 주변을 휩쓸자 공중에 떠 있던 나빛과 태화의 몸이 비틀거렸다.
“으……!”
“아잇, 짜증나게……!”
태화는 야성의 악마가 있는 곳으로 불덩이를 날리려다가, 신비의 악마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그쪽으로 불덩이를 날렸다.
하지만 이미 신비의 악마의 발치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늦었다.”
신비의 악마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악마를 향해 날아간 불덩이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태화는 텅 빈 허공을 보고 당황하다가, 그 불덩이가 어느새 나빛을 향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야, 하나빛!”
“……윽!”
나빛이 움찔하며 방어막을 쳤다.
콰앙
폭발과 함께 둥그런 방어막이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반응은 했지만, 나빛은 튕겨 나간 충격 때문에 방어막 안쪽에 쓰러진 채였다. 나빛이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으…….”
“……뭐야.”
분명 악마를 향해 쐈는데. 어안이 벙벙한 태화에게 나빛이 원망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태화가 나 때렸어…….”
“아니라고! 저놈이…….”
태화는 버럭 성을 내다가 신비의 악마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그 아래에 그려진 마법진을.
태화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야, 나빛.”
“응?”
“내 앞쪽으로 성창 최대한 많이 쏴봐.”
“왜?”
“빨리!”
나빛은 태화가 시키는 대로 했다.
태화의 앞으로 성창들이 날아가자 태화가 마법진을 그렸다. 신비의 악마의 발치에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곧 성창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퍼버버벅
신비의 악마의 몸에 수많은 성창이 꽂혔다.
뒤엉킨 촉수 사이에서 검은 피가 터져 나왔다.
“끄륵……!”
“헹, 어디 사람을 개무시하고 있어.”
마법사간의 싸움에서 마법진을 대놓고 보여주다니. 덕분에 태화는 놈이 설정한 공간마법의 좌표를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신비의 악마의 주변에서 잡졸을 상대하던 해련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흐읍!”
황금색 강기가 신비의 악마를 일도양단했다.
촤아악……
분수처럼 솟는 검은 피, 바닥에 나뒹구는 하얀 천조각과 촉수들.
해련은 그 너머에 착지해 뒤를 돌아보았다.
“죽었을까?”
“…….”
그 정도로 죽을 놈은 아니다. 하지만 태화는 대답하지 못하고 다른 악마들을 돌아보았다.
치고받고 싸우던 다혜와 적사자가 잠시 거리를 벌리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도현과 다른 잡졸들도 마찬가지였다.
‘쳇…….’
태화는 직감했다. 자신의 전투가 악마들에게 위화감을 느끼게 하고 있음을.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쳤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그래? 난 너흴…….”
“왜 안 죽였습니까?”
“…….”
지배의 악마는 한발 늦었음에도 선수를 치고 있었다.
“혹시 악마의 눈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
“없이 출발했던 건 아닐 테고…….”
악마의 머리가 옆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30도로, 90도로, 180도까지.
“중간에 만났을 때도 그 자에겐 없었으니…… 그 후에 옮긴 겁니까?”
“…….”
“호오…….”
거꾸로 돌아간 악마의 얼굴에서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렇다면 귀하들과 싸울 이유가 없군요.”
“…….”
“우린 이만 귀하들의 대장을 찾으러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둘 순 없다. 허공에 떠 마법진을 펼치는 태화의 아래에서 도현도 창을 치켜들었다.
반드시 저녁까지는 잡아둬야 한다.
“그렇겐 안 되지.”
“해보시렵…….”
그때 악마의 얼굴이 갑자기 확 찌그러졌다.
“……윽.”
“……?”
태화와 도현은 그런 악마를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저놈이 갑자기 왜 저러나.
다음 순간, 악마가 저 혼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키히익……?
다른 악마들도 비틀거리다가 고개를 흔들더니, 자기 몸에 붙은 불꽃을 보고는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완전히 제멋대로 날뛰는 악마들의 모습에 적사자도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적사자는 속으로 지배의 악마를 불러 보았지만.
‘혼령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는 적사자도, 태화도, 도현도 알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
태화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공격해!”
창과 검이 악마를 향해 날아들었다.
* * *
‘……크윽!’
희미한 빛이 느껴졌다.
빛이 닿을 리 없는 이곳에서 빛이 느껴진다. 혼령존은 필사적으로 몸을 꿈지럭거리며 달아나려 했다. 퇴화된 눈으로 빛이 없는 곳을 찾아서.
하지만 곧 주변이 바스러지고.
두툼한 무언가가 그의 몸을 집었다.
“찾았다, X새끼야.”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온 땅을 뒤져도 못 찾을 거라더니, 이딴 데 숨어 있으셨구만. 지배의 악마 나으리.”
“…….”
혼령존은 대답하지 못했다. 몸에 발성기관이 없어서.
굳이 만들려면 만들 수는 있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평범한 벌레인 척 몸을 꾸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상호를 속이지는 못했다.
“다 보여, 이 새끼야.”
“…….”
“몸통은 작은데 영혼은 드럽게 크네. 막 찔러도 다 맞겠어. 응? 구멍에 아무렇게나 쑤시면 그냥 다 맞겠다고.”
상호는 손가락에 강기를 세워 벌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찔러봐?”
“…….”
혼령존은 더는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벌레의 배가 갈라지며 모기 날개 소리만큼 조그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아냈군요.”
“그래.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임마. 섭섭할 뻔했잖아. 니랑 내가 얼마나 만났는데…….”
상호의 손가락에 난 불꽃이 벌레의 배를 향했다.
“기분이 어때?”
“……무엇이 말입니까.”
“지배하기만 하다가 지배당하는 기분 말이야.”
상호는 피식 웃었다.
“웃기지 않냐? 사람을 벌레로 알던 놈이 정작 세상에서 가장 벌레 같은 모습이라는 게…….”
“…….”
“결국 네 목숨도 파리 하나와 다를 바 없었던 거야.”
혼령존은 목구멍은 없지만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날 죽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엉?”
상호가 눈을 끔뻑였다.
“뭔 소리야?”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지배의 악마는 다급하게 말을 지어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우리 신은 심장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심장을 잡아드리겠습니다. 귀하는 그 심장을 찌르기만 하면…….”
“네가 영혼을 못 움직이잖아.”
“…….”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상호의 손가락이 천천히 벌레를 향해 다가왔다. 아주 느릿하게. 일부러 공포를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혼령존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럼, 그럼 적어도 몸으로라도 돕겠습니다. 제가 지배하는 악마들을 불러서…….”
“퍽이나 믿겠다, 이 새끼야.”
검푸른 불꽃이 경계를 넘어 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기운이 영혼에 닿자 벌레의 몸이 더욱 왕성하게 꿈틀거렸다. 죽을 때가 되자 더욱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 상호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제발…….”
“네가 죽여온 사람들도 지금 너랑 똑같았을 거다.”
상호는 나직하게 말하며 손가락을 서서히 찔러넣었다.
“너희한테 다음 생이란 게 있을진 모르겠지만…….”
“제발……!”
“있다면 거기서는…… 너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보도록 해.”
불꽃이 영혼을 꿰뚫었다.
구멍 속 붉은 기운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기운이 점점 작아짐에 따라 벌레의 꿈틀거림도 잦아들었다.
꿈틀, 꿈틀.
그리고 꿈틀.
“…….”
상호는 손바닥 위에 완전히 멈춘 벌레를 내려다보았다.
벌레의 몸에 난 검은 구멍이 점점 작아졌다. 그 너머에는 상호가 찔러넣었던 천색창염의 흔적과 악마의 영혼의 잔해가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이윽고 구멍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무언가 검은 기운이 구멍 너머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
지켜보고 있었는가.
어차피 지금 만나러 갈 것이다. 상호는 손에 쥔 지배의 악마의 몸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가자.”
“네.”
그와 세희는 검은 땅의 중앙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키에에……
키히익……
“…….”
쓰러져 몸부림치는 악마들.
그리고 토막 나 꿈틀거리는 천족수.
“……크륵.”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적사자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들과 눈이 마주쳤다.
태화와 도현, 해련, 다혜.
“…….”
“…….”
“므앙.”
다혜가 슬그머니 검을 들었다.
저마다의 무기를 들어 올리는 인간들. 적사자는 자신을 향한 인간들의 뜨거운 투지를 마주하고 입맛을 다셨다.
“일대일로…….”
“…….”
“……싸워줄 리는 없겠지.”
뻔한 걸 물었다. 적사자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고 고개와 팔을 축 늘어뜨렸다. 더는 싸울 의사가 없는 듯이.
하지만 목덜미에선 갈기가 일렁이고, 근육은 터질 듯 부풀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적사자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비쳤다.
“이젠 정말…… 죽을 때까지 싸울 수 있겠군.”
“……아으.”
다혜의 검에서 붉은 강기가 피어올랐다. 도현도 강기로 만든 창을 두 손으로 잡아 앞으로 겨눴다.
그리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소원이라면야.”
그 말을 신호로, 헌터들의 발이 땅을 박찼다.
* * *
그토록 높던 설산도 저 멀리 배경으로 남아, 이제는 찬바람 한 점 불어오지 않게 되었다.
상호는 조금 걷다가 또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이 몇 번째 돌아봄인지, 알 수 없었다.
‘…….’
저 산 너머에 모든 세상을 남겨두고 왔다.
저 산과 이곳까지의 거리만큼 세상이 멀게 느껴졌다. 마치 이 세상에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꼭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
상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세희를 보았다.
“세희야.”
“네.”
세희는 늘 같은 표정이었다.
날카로운 듯하면서도 그를 볼 때는 따뜻한 눈빛. 말이 많지는 않아도 의외로 움직임이 많은 입술.
지금도 그 눈빛은 따뜻하고, 입꼬리는 살짝 위를 향하고 있었다.
“고맙다.”
“뭐가요?”
“같이 와줘서.”
“제가 따라온 건데요.”
“그래도.”
이승의 끝까지 함께 와줘서.
저 멀리 검은 평야에 무언가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색이 온통 검은, 뿔이 여럿 난 인간을 닮은 그림자.
상호는 놈을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준비해.”
“……네.”
세희도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뽑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림자는 미동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직은 상호와의 거리가 꽤나 있었지만, 이 정도의 거리는 상호에게도, 놈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 사실을 둘 다 알았다.
그리고 그 둘 다 안다는 사실까지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상호는 검을 뽑은 채로 놈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 충성심 높은 놈은 아니었다.”
뜬금없는 마신의 중얼거림에 상호의 발이 멈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신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인간 태생인 걸 알고는 끊임없이 나를 의심했지. 내가 악마의 심장을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아마 네놈을 돕겠다는 말도, 마지막에는 진심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 내가 고맙겠구만.”
“그러나 쓸모 있는 부하였음은 확실하지.”
마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 땅의 법도를 알고 있나?”
“뭔데. 니가 정한 거냐?”
“너희 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 모든 일에는 그에 맞는 대가가 따르는 법.”
마신의 얼굴이 상호를 향했다. 이목구비가 아예 없던 지난번과는 달리 두 개의 눈이 새빨간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 목숨을 받아가도록 하마.”
“재밌네.”
상호는 입은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나도 네놈한테 뺏긴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나는 받지 않았다. 너희가 버린 거지.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말이다.”
“한마디를 안 지는구만.”
사실 둘의 목적과 관계를 생각하면 지금 대화는 오히려 진중한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안 돼.”
이번에는 그에게서 그 무엇도 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전부 걸었으니, 전부 잃거나, 전부 지킬 뿐. 상호는 검을 늘어뜨린 채로 마신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도 말이야, 어차피 오늘 둘 중 하나는 죽을 텐데…… 피차 궁금증이나 풀어보는 건 어때?”
“무엇이 궁금하지?”
“왜 악마가 된 거냐?”
저쪽 세상의 다른 이야기는 베르멜로에게, 드카노스에게, 기만의 악마에게 들을 수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본인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마신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이윽고 입이 없는 얼굴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한의 끝을 알고 있나?”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뭔 소리야, 갑자기.”
“어떤 존재가 무한하게 살면, 그 존재는 무한한 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마신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즉 영생이라는 것에는 필연적으로 전지전능이 따라붙는 것이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이 몸마저도 아직 모르지만…….”
“그래서?”
“전지전능해야만 진리가 진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를 발견해도 그게 진리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마신이 상호를 향해 돌아섰다.
오로지 눈만 자리한 얼굴과 온몸에 다닥다닥 돋은 뿔. 피가 묻은 듯 끝이 붉은 뿔들이 하늘을 향해, 세상을 향해 솟아 있었다.
“영생이 진리를 보장하고…… 영생하기 위해서는 늘 살아남아야 한다. 늘 강해야 한다. 그렇기에…… 악마들을 내 몸에 묶고 나를 신으로 끌어올리게 한 거다.”
그렇게 말하는 마신의 눈에서는 채 떨어내지 못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간의 마음을 버리고…….”
“그럼 그쪽 세상에서 그대로 살지 그랬어. 뭣하러 여기까지 온 건데?”
“신에게는 신도가 필요하지. 신도가 신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가 필요한 법이고. 그래서 세상의 문을 열었다. 내 신도들이 나를 필요로 해야 했으니까. 너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 누군가가 필요해?”
상호는 코웃음을 쳤다.
“신이라는 놈이 사람만도 못하구만 그래.”
“궁금증은 다 풀렸나 보군. 이제 내가 질문하겠다.”
“……네가?”
마신의 말에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벌레 취급하는 것들에게 궁금한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마신이 손가락으로 그와 세희를 가리켰다.
“너희 둘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인가?”
“아마도.”
“그렇다면 어째서 둘뿐이지?”
“……뭔 소리야?”
“왜 아무도 너흴 돕고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마신이 팔을 넓게 펼쳤다.
“이 세상에서 느껴지는 이 수많은 영혼 중에…… 너를 도와 나와 싸우는 이가 어째서 단 하나밖에 없느냔 말이다. 사실 네놈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뭐를?”
“너와 세상,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것.”
상호가 대답하지 않자 마신이 웃었다.
“다 안다. 너는 네가 세상을 용서한 줄 알겠지만…… 네 눈에는 아직 불신과 불안의 씨앗이 보이는군. 제 보신을 위해 나서지 않는 자들에게 너를 바치는 이유……. 정말로 찾았다고, 그리 말할 수 있느냐?”
“…….”
상호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뺐다.
그리고 고개를 이리 기웃거리고, 저리 기웃거리며, 눈동자를 도록도록, 다리를 건들건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마신을 바라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굳이 찾아야 하냐?”
“뭐?”
“굳이 이유를 찾아야 하냐고. 사람새끼면 말이야, 세상에 있는 무언가는, 아무리 적어도 단 하나만큼은 사랑하게 되어 있는 거야. 그걸 사랑하는 데에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너 연애 안 해봤지?”
“…….”
“진리니 뭐니 하는 것만 봐도 다 보인다, 임마. 너 증명 좋아하지? 그래서 진리를 찾고, 진리가 진리라는 증거를 찾고…….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뭔가를 사랑하는 데에는 증명이 필요 없어. 너처럼 굳이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지. 내가 좋으면 된 거야. 그걸 위해 싸우는 것도 당연한 거고.”
상호는 검을 들어 마신을 겨눴다.
“진리를 찾는다는 놈이 모르는 게 있으면 어쩌냐. 찾기는 글러먹었구만.”
“무한히 산다면 언젠가는 알았겠지. 그게 무한이다.”
마신이 목을 이리저리 돌려 뚜둑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꼭 적사자를 닮아 있었다.
“싸우기 전에 하나 더 알려주지.”
“뭐를.”
“그 녀석을 죽이지 않는 게 네놈들에겐 더 나았을 것이다.”
“무슨…….”
마신의 발이 땅을 내리쳤다.
그곳을 중심으로 땅이 갈라졌다. 쩌적, 쩌적. 거대한 과자가 바스라지듯이.
그 균열이 검은 땅의 끝에서 끝까지 닿았을 때, 땅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상호와 세희는 땅을 차고 뛰어올랐다.
아니, 무너지는 게 아니었다. 제멋대로 조각난 땅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젠장.’
괜히 신이 아니구나.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콰앙
부서진 땅이 쿠르릉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모든 땅이, 산보다 큰 바위들이 그와 세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골렘처럼.
바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온 그에게 세희가 소리쳤다.
“제가 부술게요!”
그리고 그 말대로 했다.
콰아앙
세희의 주먹을 맞은 땅이 산산이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상호는 안심하고 마신을 찾아 날았다.
그보다 앞쪽의 아래에, 가장 큰 땅의 조각 위에. 마신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놈의 가슴팍에 구멍이 보였다.
‘저긴가.’
인간이었다면 정확히 심장이 있을 위치.
자신이 심장이라고 인식한 곳에 구멍이 생기는 걸까. 상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구멍의 위치가 아니라 심장의 위치.
심장은 그를 기준으로 구멍의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마신을 기준으로는 오른쪽. 몸의 중심에 가까운 곳.
하지만 마신은 불사의 힘으로 심장을 움직일 수 있다.
‘숨겨야 해.’
놈은 제 구멍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어느 방향으로 진짜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게 해야 한다.
상호는 일부러 시선을 마신의 배에 맞추고 날아들었다.
“흥.”
마신이 콧방귀를 뀌며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검이 마신의 주먹에 닿기도 전에 폭발이 먼저 일어났다.
상호는 흐트러진 자세를 되잡기 위해 뒤로 물러나다가, 자신이 생각보다 훨씬 뒤쪽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강이…….’
줄어들었다.
강기를 썼으니 당연히 줄어들겠지만, 그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줄어 있었다. 그 텅 빈 공백의 헛헛함을, 상호는 이해하지 못해 잠시 멍하니 검을 내려다보았다.
마신이 그를 보고 웃었다.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군.”
“……뭐지?”
“세상에는 수많은 모양의 마나가 있다. 힘을 반사하는 마나, 영혼을 담는 마나, 연결을 끊어 내는 마나……. 마나를 잡아먹는 마나를 만드는 것도 내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
딱딱하게 굳은 상호를 마신이 검지로 가리켰다.
“네놈은 신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
“신을 우습게 보지 마라.”
마신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호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마신의 공격을 쳐냈다. 하지만 그렇게 방어를 성공했음에도 그의 강기는 한 뭉텅이가 줄어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마신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큭!”
힘이 되돌아 나왔다.
지윤과 성철의 반탄강기처럼. 공격을 성공했음에도 충격은 오히려 그가 받았다.
방어를 해도 공격을 당하고, 공격을 해도 공격을 당한다. 상호는 이보다 더욱 부조리한 전투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강해졌다.’
지난번보다도, 그 먼젓번보다도.
상호는 잠시 계획을 짜내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 했다.
“어딜!”
마신이 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낸 강기를 손에 쥐고서.
피할 수가 없다.
상호는 검을 들어 놈의 강검을 막았다.
촤악
강검이 그의 검을 베었다.
‘…….’
상호는 허공에 흩어지는 검푸른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검에서 끊어져 나와 사라지는 천색창염강기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강기를. 그의 영혼이 담긴 강기를.
“네 그 연결을 끊는 마나도 예외는 아니다.”
마신이 그렇게 말하며 강검을 휘둘렀다.
상호는 그 검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기만 했다. 머리가 굳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저 검을 어찌 막아야 하는지.
그때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선생님!’
상호는 정신을 퍼뜩 차리고 뒤로 굴렀다.
퍼억
그가 있던 자리에 강검이 꽂혔다.
그는 뒤늦게 날뛰기 시작한 심장을 부여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세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땅을 박살 내고 있었다.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포기하지 마요.’
‘…….’
‘제가 이렇게 뛰고 있는데 그러기에요?’
‘……미안.’
큰 잘못을 했다.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움켜쥐었다.
그를 향해 마신의 강검이 날아들었다.
채앵
이번에는 깨지지 않았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비록 마신보다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부족할지라도 초혼강기만 똑바로 만들면 적어도 부서지지는 않는다. 상호는 검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고 마신을 향해 휘둘렀다.
퍼억
이번에도 힘이 반사되고, 한 뭉텅이의 강기가 날아갔다.
‘젠장…….’
영혼의 힘은 밀리지 않는다지만, 내공이 점점 말라가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직 한 시간 정도는 전력으로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한나절을 싸우기 위해 준비했던 내공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줄어드는 속도가 빠른데, 앞으로 더 빨리 줄어들기라도 하면 그때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상호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그때 마신의 등 뒤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쿠웅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한껏 몸을 수그린 세희.
어느새 하늘에 떠 있던 땅들이 전부 무너져 용암에 진창을 이루고 있었다.
“……!”
마신이 움찔하며 뒤로 도는 순간, 세희의 발이 땅을 박차고.
번개처럼 휘둘러진 검이 마신의 어깨를 베었다.
촤아악
“……크윽!”
당황한 마신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상호와 세희 양쪽에게 거리를 두면서.
잘린 팔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놀란 건가.’
놈은 팔이 베이는 것 따위에 겁을 먹을 이유가 없다. 역시 심장을 찔리는 줄 알았던 것이다.
확실히 겁이 많다. 상호는 그렇게 확신하며 마음속으로 세희를 불렀다.
‘세희야.’
‘네.’
‘내 생각, 볼 수 있겠어?’
상호가 마음속으로 마신의 구멍과 심장의 위치를 떠올리자 세희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앞이면 네가 뒤. 내가 왼쪽이면 네가 오른쪽. 서로 정반대로 돌아가면서 공격하는 거야.’
놈의 반응속도, 인지하는 속도만은 그들과 큰 차이가 없으니. 둘이서 빈틈없는 연수합격을 이룬다면 분명히 가능성이 있다.
심장을 움직일 수 있다는 변수가 있지만, 놈은 구멍의 위치는 모르니, 살초를 지긋하게 숨기다가 정확한 순간에 정확하게 찌른다면.
죽일 수 있다.
‘가자.’
‘네.’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마신의 눈이 흔들렸다.
얇은 방어막 따위로는 저들을 막을 수 없다. 마신은 몸에 두텁게 마나를 두르고 양손에 마나의 검을 쥐었다.
뒤쪽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큭!”
소녀의 검이 등에 닿았다.
두텁게 만든 마나의 장벽을 뚫지는 못했지만, 마신은 확신하지 못했다. 이 마나의 갑옷이 악마의 구멍을 제대로 막고 있는지.
의심이 순간 정신을 굼뜨게 했고.
어느새 옆에서 날아든 사내의 검이 그의 목을 반쯤 베었다.
촤아악
‘젠장……!’
더 이상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몸이지만, 그의 의식은 결국 인간을 기초로 하고 있었기에 머리에 그 자리를 두고 있었다. 머리가 잘리기라도 하면 몸의 반응이 늦어지고, 그 사이에 심장을 찔릴 터.
마신은 팔로 목을 감싸고 뒤로 물러났다.
『……이 버러지들!』
오랫동안 입 밖에 내지 않았던 고향의 욕이 튀어나왔다.
마신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광선이 되어 직선으로 쏘아졌다. 상호는 땅을 녹이며 다가오는 광선을 피해 뛰어오르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세희야!’
‘네.’
마신이 당황한 지금이 기회.
세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기를 뿜어내며 검을 휘둘렀다.
‘……!’
한낱 인간 소녀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흉흉한 살기. 마신은 소녀의 검이 자신을 죽이러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
그 여자의 검.
“크으……!”
마신은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 검을 부숴버린다는 일념으로.
그때 등 뒤에서 엷은 바람이 느껴졌다.
‘……뭣?’
마신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어안이 벙벙했다.
상호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검에 있던 마나도, 몸에 두른 마나도 전부 거둔 채.
그가 서 있던 자리엔 검푸른 마나의 검 하나가 덩그러니 떠 있었다.
‘……!’
마나로 기척을 속였다.
아무런 갑옷도 없이, 그 어떤 신비의 도움도 없이, 죽음을 각오하며 오직 검 하나만 들고 인간의 힘으로 달려든 것이다.
칼끝은 마신의 왼쪽 옆구리를 향한 채였다.
“크으윽!”
마신은 본능적으로 거기가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비틀었지만, 이미 칼끝이 피부에 닿고 있었다.
뾰족한 금속이 그의 피부를 누르고.
상호의 손에서 피어오른 검은 불꽃이 칼끝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끝이다.”
상호의 중얼거림과 함께 칼날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 * *
뚝……
방울.
뚜욱……
핏방울.
붉은 방울이 검은 땅에 떨어지며 왕관 모양을 만들었다가, 더 작은 방울로 뾰족하게 튀며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피가 흐르는 오른눈에 손바닥을 얹고서.
숨을 몰아쉬던 마신이 그를 바라보며 간신히 웃었다.
“잃었군.”
“…….”
“모든 것을.”
상호의 눈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그를 바라보는 세희의 눈에도, 똑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희는 떨리는 마음으로 상호를 불렀다.
‘선생님…….’
이번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