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496. 어느 청년의 이야기
“흡!”
하얀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후! 하! 후!”
태권도인지, 합기도인지, 하여튼 어느 무술에나 있을 것 같은 고루한 정권지르기.
태화는 한참 동안 그렇게 주먹을 내지르다가.
“흡! 흡! 허! ……어라?”
근본적인 의문이 들어 주먹을 멈칫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징?’
자신은 마법사인데.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던 태화는 곧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다시 주먹을 지르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하는 거야.’
목표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니까. 쉬고 싶어도, 놀고 싶어도 오직 이것에만 매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정권을 지르던 태화는 다시 고개를 기우뚱했다.
‘근데 무슨 임무였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라, 이거 꿈…….’
그렇게 자각하기 직전.
하늘에서 무언가가 뚝 떨어져 태화의 앞에 처박혔다.
“끼아아악!”
“끄응, 망할…….”
거꾸로 박혀버린 상호는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빼냈다.
급하게 들어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뭔가 거칠다. 몸이, 아니 정신이 저릿저릿했지만 그는 서둘러 정신을 추스르고 태화를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태화야, ……아니, 너 뭐하냐?”
“정신일도 하사불성!”
“아니…… 아니 됐다. 어쨌든…… 태화야.”
“응?”
“눈 좀 줘봐.”
뜬금없는 말에 태화가 눈을 깜작였다.
“눈?”
“응.”
“아이즈?”
“어, 눈. 눈을 나한테 줘야 해.”
“어…….”
태화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어지럽게 굴렸다.
“……어떻게?”
“나도 몰라. 근데 악마는 그게 되나봐. 아마 주술이겠지. 네가 노력해서 그게 가능하게 만들어 줘야 해.”
“어…….”
갑자기 나타나서는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가만히 집중해보니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태화는 턱을 괴고 눈살을 찌푸리다가 한참 후에 표정을 풀고 손가락을 튕겼다.
“오케이. 감 잡았어.”
“그래? 벌써?”
“엉. 난 천재니까. 내 악마의 눈을 쌤 오른쪽 눈에 넣어달라는 거지?”
“네가 편한 곳에 넣어.”
“그럼 안대 벗어 봐.”
상호는 안대를 벗었다.
세로로 흉터가 진 눈꺼풀이 열리자 희끗하게 얼룩진 눈동자가 드러났다. 탁하게 흉이 진 회색 동공에는 태화도, 세상도,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았다.
태화가 그의 얼굴을 잡고 눈을 가까이 했다.
“가만히 있어.”
태화의 악마의 눈도 오른쪽.
이츠키에게서 옮겨 받아 검은색인 눈동자가, 상호의 다친 눈을 마주했다.
“가만히…….”
곧 그 눈동자의 한가운데에서 검은 방울이 똑 떨어져 나왔다.
그 뒤로도 점점이, 방울방울, 검은 기운은 조금씩 흘러나와 상호의 회색 눈동자까지 둥둥 떠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방울이 허공에서 멈췄다.
상호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태화야?”
“이상해.”
가느다란 손이 그의 멱살을 쥐었다.
“왜 갑자기 눈을 달라는 거야?”
“필요하니까…….”
“그게 이상하다구. 왜 진작 말을 안 했는데?”
“지금까진 몰랐어. 오늘 알게 된 거야.”
“이상해, 이상해.”
태화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쌤.”
“응.”
“뭐 숨기는 거 있지.”
“글쎄…….”
상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숨기는 거야 많긴 하지만.
“그래. 솔직히 말할게. 오늘 쌤 눈 베었던 악마를 만났어.”
“언제?”
“얼마 안 됐어. 불침번 서다가 만났어. 그래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놈이 나랑 거래를 하면 지 눈을 나한테 줄 수 있대.”
“무슨 거래였는데?”
“너를 달라고 했어.”
태화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나?”
“응. 당연히 거절했지. 애초에 믿을 수 있는 놈도 아니었고.”
상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치만 눈을 준다는 건 진짜인 것 같아서…… 너한테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았어. 그래서 온 거야.”
“쌤.”
“응.”
“더 숨기는 거 있지.”
“…….”
상호가 입을 다물자 태화가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다 알거든, 쌤이 뭐 숨기는 표정.”
“그래?”
“응.”
가슴팍에 얹힌 손이 서서히 늘어지며 그의 배를 쓸었다.
“내가 눈 주면 난 안 데려갈 거지?”
“……그렇게 되겠지.”
“알았어.”
태화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둥실 떠올라 상호와 거리를 두었다.
“딱 알았어. 쌤이 뭘 숨기고 있는지.”
“…….”
“난 확인해야겠어.”
빨간 눈빛이 그를 꿰뚫었다.
“쌤이 그놈하고 얼마나 열심히 싸울 건지.”
“너랑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증명해 봐. 쌤의 진심을.”
태화가 검지로 상호를 가리켰다. 그 끝은 정확히 상호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는…… 나도 내 눈, 진심으로 주지 못해.”
“……시간이 없는데.”
상호는 말과는 달리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스승의 일.
“네가 그렇게까지 한다면…… 나도 대답해 줘야겠지.”
“진심으로 하는 거야.”
“그래.”
진심으로 공격하고, 진심으로 막는 것.
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들어와.”
태화가 손을 까닥였다. 팔을 쭉 내밀고 당당하게.
더 이상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던 상호는 사양하지 않고 선공을 잡았다.
콰악……
땅을 박차는 발과 검을 뽑는 손.
두 행동이 동시에, 생각의 속도만큼 빠르게 이뤄져 태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태화의 빨간 눈동자에 검푸른 불꽃이 비쳤다.
“흐읍!”
콰아아앙
붉은 섬광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꼭 화약이 터진 것마냥 매캐한 흑연이 퍼지고, 그 사이로 그림자가 튀어나와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큭!”
상호는 당황하며 땅을 짚었다. 분명 태화가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는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태화가 말했다.
“여긴 내 마음속이라구.”
꽉 움켜쥔 손에 뭉쳐진 붉은 번개가 쩌적, 쩌적 소리를 내었다.
“이 안에선 뭐든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헌터를 이기는 것도…… 꿈속에서라면, 꿈이 아닌 거야.”
“……그래.”
상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떨궜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네.”
요즘 들어 제자들에게 자꾸 한 방씩 먹는 느낌이 들었다. 아르게스로 출발하기 전에 세희에게 당했던 것도 그렇고.
그는 몸을 일으켜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면 태화야.”
“응.”
“딱 한 방으로 끝낼까?”
태화는 대답이 없었다. 비스듬하게 그를 향해 서 있을 뿐.
그러다 빨간 뿔 사이에 보라색 마나가 조금씩 모여들었다.
“……좋아.”
상호는 피식 웃고 검을 들어 올렸다.
곧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잡은 검에서 강기가 그 형태를 바꿔갔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꽃에서, 잔잔한 촛불로.
“간다.”
“응.”
붉은 뿔 사이에 모여든 보랏빛 기운이 주변에 검은 번개를 뿌리며 크기를 불려 나갔다.
이윽고 태화의 뿔 사이보다 한참 커져, 머리 위에 집채만한 크기가 되었을 때쯤.
태화가 검은 연기를 남기고 사라졌다.
“흐야아압!”
기합이 들려온 곳은 머리 위.
그를 겨눈 두 개의 뿔. 그를 향해 날아오는 굵직한 광선.
상호는 그 광선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후우.”
숨을 짧게 들이켜고, 온몸의 근육을 흔들리지 않게 단단히 굳히고.
광선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올려쳤다.
‘이제는…….’
상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조준 잘 하네.’
곧 폭음과 충격이 그의 몸을 때리고.
시야가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 * *
“……으.”
쓰러진 상호의 품 위에서 태화가 꿈틀거렸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은 태화를 내려다보았다.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퍼져나가는 정수리와 빨간 뿔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태화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내가 이겼쪙.”
“……그래. 맘대로 생각해.”
“내가 올라탔잖아!”
“착지를 못한 거지.”
그는 손을 들어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말에 태화가 몸을 올려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상호를 바라보는 빨간 눈, 검은 눈. 이츠키의 것이었던 검은 눈에서 검은 방울이 똑 떨어져 나왔다.
태화가 그의 코앞에서 속삭였다.
“줄게.”
방울진 기운이 상호의 눈동자에 닿았다.
“대신에…… 나랑 약속 하나 해.”
“어떤 약속?”
“최선을 다해서 싸우겠다고.”
태화의 두 손이 그의 양 뺨에 얹혔다.
“어떤 순간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게 내 눈을 주는 조건이야.”
“……그럴게.”
“가져가.”
방울이 상호의 눈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약속 꼭 지켜…….”
동공에 남은 회색 흉이 검게 물들고.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오른쪽 시야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
그는 멀쩡해진 두 눈을 끔뻑였다.
두 개의 눈으로 무언가를 보는 게 퍽 생경했지만, 다리를 고쳤을 때도 그랬듯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익숙해질 수 있었다. 상호는 까만 두 눈으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태화를 올려다보았다.
태화가 실쭉 웃었다.
“눈이 두 개인 쌤도 나쁘지 않네.”
“괜찮아 보여?”
“응. 그래도 내 취향은 안대 쪽인가봐.”
“그건 좀 아쉽네.”
상호는 쓰게 웃으며 태화의 등에 손을 올렸다.
“꼭 지킬게. 약속.”
“……응.”
눈을 감은 태화가 그의 품에 축 늘어졌다.
그들은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안았다. 현실의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남은 꿈이 끝날 때까지, 허락된 시간이 끝날 때까지 쭉.
곧 꿈속에서 찾아온 잠이, 둘의 눈꺼풀을 덮었다.
* * *
“오늘은 날이 맑네~.”
동굴 입구에 선 예경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웃었다.
한 손은 뒷짐. 한 손은 눈썹에 붙여 햇살을 가리며. 예경은 멀리 솟은 설산을 바라보다가 상호를 향해 돌아섰다.
“산이 낮아졌어!”
“신기루였나 봐요.”
“상호가 날린 거 아냐?”
“신기루라고요.”
상호도 예경의 곁에 서서 그 산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꽤나 높은 산이었지만, 어제 본 것처럼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도 없는 높이는 아니었다. 아마 눈보라에 산의 그림자가 비쳤던 것일 테다.
그는 그 산을 바라보다가 예경을 돌아보았다.
“저기까지가 50킬로겠죠?”
“그치.”
“그럼 저 산이 지도의 하얀 부분의 끝인 거죠?”
“그치.”
예경이 상호의 손을 잡았다.
“다시 눈 오면 가볼까?”
“네.”
둘은 걸음을 돌려 동굴로 들어갔다.
* * *
어스름도 올라오지 않은 새벽.
상호는 허리에 찬 칼을 확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비 다 됐어요?”
“응.”
해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출발해도 돼. 그치, 얘들아?”
“네.”
“므앙.”
“좋아.”
상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쓰고 있었던 안대를 벗은 채였다. 지금 그의 오른쪽 눈동자에는 태화의 심상에서와 다르게 회색 흉이 남아 있었다. 시야도 돌아오지는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까만 어둠 속에, 희미하게 하얀 실 같은 것들이 엉킨 게 보였다.
그 실은 아이들과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모습이 바뀌고 있었다.
“계획은 이거야.”
상호는 태화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옆에 세웠다.
“지금 태화한테 있던 악마의 눈을 나한테 옮긴 상태거든?”
“네?”
아이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해련의 얼굴에도, 도현의 얼굴에도.
“어떻게요?”
“므아앙?”
“그런 방법이 있어. 하여튼 지금 나한테 악마의 눈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야. 이걸 악마들은 모르잖아.”
“그렇죠.”
“아으아으.”
“태화를 미끼로 쓰는 거야.”
상호는 검지를 들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까딱였다.
“태화랑 다른 사람들은 지금 오고 있는 악마들을 유인하고, 나랑 세희는 그 틈을 타서 마신을 죽이러 가는 거지.”
도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악마들이랑 마신이 합류하지 못하게?”
“그렇지. 우린 악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마신의 앞에 은율을 데려갈 수도 없으니까. 차라리 대악마와 싸우게 하는 편이 나았다.
설명을 마친 상호는 사람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더 좋은 의견 있어? 어때요?”
“글쎄…….”
도현이 해련,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없는 것 같네. 그런데…… 얼마나 걸리겠어?”
“내일 아침에 싸우기 시작할 거니까, 내일 저녁까지는 억지로라도 붙들고 있어줘.”
“세희랑 바로 가는 거냐?”
“그래야지.”
그렇지만 출발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상호는 나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빛아, 잠깐만 와봐.”
“아, 네…….”
나빛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상호의 앞에 섰다.
동그란 연회색 눈동자 속에는 상호의 모습과 궁금증이 동시에 비치고 있었다. 상호는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빛의 손을 잡았다.
“잠깐 둘이서 이야기하자.”
“네…….”
“갔다 올게. 잠시만 기다려.”
둘은 사람들을 뒤로하고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상호는 나빛의 손을 잡고 아직 어두운 숲속으로 깊게 들어갔다. 둘이 뭘 하는지 동굴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그가 말없이 걷기만 하자 나빛이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선생님?”
“응?”
“저희, 어디까지 가요……?”
“조금만 더.”
“너무 멀지 않아요……?”
나빛이 뺨을 붉히며 헤헤 웃었다.
“이렇게까지 멀리 오면 두근거려져버려요…….”
그 말에 상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나빛을 향해 돌아서자 나빛의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꺼내서 굴리면 또르르 굴러갈 것처럼.
“선생님?”
“나빛아.”
상호는 두 손으로 나빛의 얼굴을 감쌌다.
큰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얼굴. 꼭 해바라기 한 송이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색은 달라도 빛이 퍼지는 모습이 꽃잎과 같아서.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니, 나빛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선생님……?”
“으응.”
“왜 그러세요……?”
“그냥, 나빛이 보고 싶어서.”
아마 또 보고 싶을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보고 싶을 것이고, 오늘 밤에도 보고 싶을 것이고, 아마 내일 아침에도, 분명히 그 후에도 보고 싶을 것이다. 너무 보고 싶어서, 사무쳐서, 죽을 만큼 가슴이 아프고, 제발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게 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상호는 마음을 다잡고 나빛과 눈을 마주쳤다.
“눈 좀 고쳐 줄래?”
“네…….”
“고치면서 들어줘.”
나빛이 황금빛이 나는 손을 들어 그의 눈에 가져갔다.
상호는 오른쪽 눈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못 돌아오게 될지도 몰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빛이 성력을 거둬 버리고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를 바라보는 연회색 눈동자에 원망이 가득했다.
“그런 말 할 거면 안 고쳐줘요.”
“나빛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기다리고 있으라고만 하세요. 그러면 얼마나 걸리든 용서해드릴 테니까…….”
연회색 눈동자. 연회색 머리카락.
상호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하얗다. 그게 상호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 덕분에 그나마 이쯤에서 끝난 건지, 상호는 알지 못했지만 후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나빛의 손을 잡아 오른쪽 눈에 가져다 대었다.
“만약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그런 말 하지 말라구요…….”
“혼자서 잘할 수 있다고, 약속해줄 수 있지?”
“…….”
나빛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떼를 쓰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서 그러지 못하는 아이처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입술 아래에 힘을 주고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상호에게 쥐인 왼손에 성력을 불어넣었다.
“당연히 혼자서도 잘할 순 있어요…….”
“그치?”
“그치만 선생님이 없으면 안 돼요……. 아시잖아요, 당연하잖아요……. 저한테 왜 그러시는 거예요…….”
“만약일 뿐이야, 만약에. 선생님이 당연히 노력하겠지만 잘 안 될 수도 있잖아.”
상호는 나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만약, 선생님이 못 돌아와도…… 어쩔 수 없구나, 그렇게 받아들여 줘. 너무 속상해하지 말고. 그냥 다 잊어버려. 그런 사람 애초에 없었다고.”
“싫어요…….”
“다 잊어버리고, 수녀님도 만나지 마. 아예 새 삶을 사는 거야. 네가 진짜로 빠져 살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어떻게 그래요……. 말이나 돼요, 그게…….”
“그렇게 울면 안 돌아올 거야.”
그 말에 나빛이 더욱 울상을 지었다.
“제가 앤 줄 알아요……!”
“애 아니잖아. 그니까 그만 울어. 네가 웃고 있으면 언젠가는 돌아올게.”
그러는 동안 눈의 치료가 끝났다.
상호는 완전히 멀쩡해진 두 눈으로 나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웃는 모습 보여줘.”
“……안 돼요.”
나빛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웃는 거 안 보여줘요. 지금은 못 보여줘요. 보고 싶으면 돌아와서 보세요.”
“못 웃겠어?”
“네. 안 웃어요. 절대 안 웃어 줄 거예요.”
“그러면 잠깐만 눈 감아 봐.”
그래도 나빛은 반항하듯 눈을 빤히 뜨고 있다가, 이내 기운을 꺾고는 살며시 눈썹을 내리깔았다.
“네.”
“감았어?”
“네.”
상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대로 있어.”
그리고 눈을 감은 나빛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 * *
“므아.”
다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든 세희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상호와 나빛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응.”
아이들과 도현, 해련과 수호부대원은 동굴 앞에 서 있었다. 상호는 나빛의 등을 토닥여 그들에게 밀어 보내고 세희에게 손짓했다.
“가자, 세희야.”
세희는 그를 향해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태화, 은율, 다혜. 셋은 아무 말도 없이 제각각의 눈빛을 세희에게 보내고 있었다. 태화는 삐딱한, 은율은 믿는, 다혜는 걱정하는 눈빛을.
세희는 그 모두를 태연하게 흘려 넘겼다.
“갔다 올게.”
“므아…….”
“걱정 말고 유인이나 잘 하고 있어.”
“아으아으.”
“태화 넌 괜히 나대다가 뒤지지 말고.”
“니가 할 말이냐? 참내…….”
세희는 태화의 툴툴거림을 뒤로하고 상호에게 걸어갔다.
곁을 스쳐 지나는 나빛의 걸음이 살짝 비틀거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희는 아이들에게 걸어가는 나빛을 흘끗하고 상호의 곁에 섰다.
“가요.”
“응.”
상호는 사람들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갈게, 형. 갈게요, 교장선생님.”
“그래.”
“다녀와요.”
“얘들아.”
그의 손이 느리게, 살짝 들려 올라가 흔들렸다.
“갔다 올게.”
“……응.”
“므아.”
“다녀오세요.”
“…….”
아이들의 곁에 선 나빛은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호는 세희와 함께 돌아서서 동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돌아서서 걷다가 또 뒤를 돌아보고. 이젠 가나, 할 때쯤에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고.
보다 못한 세희가 상호의 소매를 잡았다.
“얼른 해치우고 오죠.”
“……응.”
그제서야 상호는 돌아보는 것을 멈추고 멀어져 갔다. 굳이 걸어서.
도현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일행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할 일 해야지. 해가 뜨면 온댔나요?”
“응.”
“좋아. 성대하게 유인해 보죠.”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나빛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얀 머리카락을 얼굴 주변에 커튼처럼 드리우며.
태화는 뚱한 표정으로 나빛을 바라보다가 등을 두드렸다.
“야, 우냐?”
“…….”
“언제까지 울게? 슬슬 정신 차려. 이제 싸울 준비해야…….”
“헤헤…….”
“……엉?”
태화는 눈을 끔뻑였다.
머리카락 아래로 살짝 드러난 입이 미소를 짓고 있어서.
“뭐야, 울지도 않았으면서…….”
“헤헤헤…….”
“쌤이랑 뭘 했는데 그렇게 웃냐?”
“헤헤…….”
“됐어, 멍청아. 계속 그렇게 바보처럼 웃고나 있어.”
“헤…….”
나빛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푹 떨궜다.
하얀 머리카락 아래, 새하얀 눈썹 속에서 흘러나온 뜨거운 눈물이 턱까지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시작했나 보네.”
상호는 오른쪽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실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악마를 유인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놈들의 주의는 온통 태화에게 쏠려 있을 터.
여기서부터는 감시하는 눈이 없을 것이다.
“이제부턴 경공으로 가자.”
“선생님.”
“응?”
세희는 발치에 조금씩 묻어나는 눈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눈으로 뒤덮인 평야와 산맥을 바라보았다.
“여기 지나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500킬로미터. 쉬지 않고 날면 여섯 시간 정도겠지. 하루 자고 가는 거 알고 있지?”
“네. 들었어요.”
운기조식으로 내공도 최대한 쌓고, 잠도 푹 자고 놈과 싸우러 갈 것이다.
상호는 손을 들어 세희의 어깨에 얹었다.
“갈까?”
“네.”
둘이 밟고 있던 땅의 흙이 위로 튀었을 때, 둘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히 먼 하늘을 날아가고 있었다.
* * *
예상대로 그들을 감시하는 눈은 없었다.
악마들은 태화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할 터. 상호 혼자서는 악마의 심장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래서 설원에는 아무런 생물도, 영혼도 볼 수 없었고, 그와 세희는 마지막 산맥의 코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상호는 산맥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서쪽 하늘에서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곧 어두워지려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동굴로 들어갔다.
절벽 아래에 조그맣게 난 구멍. 안쪽은 밖에서 보이는 것보단 넓었다. 바람이 들지 않아 바깥보단 나았지만, 그렇다고 따뜻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쪽에는 세희가 바닥에 정좌해 눈을 감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구나.’
상호는 찬바람이 들지 않도록 동굴 입구에 앉아 세희를 바라보았다.
가장 일찍 교실에 앉아 있었던 소녀. 진 것이 분해서 눈물을 흘렸던 소녀. 막무가내로 심법을 내놓으라 조르고, 그래서 줬더니 끝내는 그를 이겨버린 소녀.
결국은 마지막까지 함께 왔다.
‘통계적으로 생존율은 반반…….’
둘이 가면 한 명은 죽는 곳.
상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죽는다면 스승이어야 한다.’
스스로 택한 인연이니, 책임을 갖고 성의를 다해야 하기에.
그때 세희의 나직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운기조식 끝났어?”
“네.”
“들렸어?”
“네.”
이젠 내공이 안 닿아도 생각이 다 들리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멋쩍어서 뒤통수를 긁적이며 바닥에 누웠다.
“세 시간 뒤에 깨워줘.”
“네.”
세 시간 잤다가 세 시간 불침번 서고, 또 세 시간을 잤다가 세 시간 불침번 서고.
그리고 세희가 일어나면 그때 출발. 저 설산을 넘어서 마신이 있는 심장부로.
‘……자야겠다.’
세 시간짜리 쪽잠을 자야 하니.
그는 눈을 감고 서둘러 잠을 청했다.
* * *
“상호야.”
하얀 눈보라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호야, 조금만 더 가면 돼. 응?”
“……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눈을 밟는 발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 살이 터질 것만 같은 추위가 가시처럼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짓누르는 듯도 하고, 쥐어짜는 듯도 하고. 발이 무겁고 굼뜬 것이 꼭 물속을 걷는 느낌이었다.
“으…….”
턱을 덜덜 떠는 그의 곁에 예경이 다가섰다.
“저기. 저기까지만 가자. 저 동굴에서 쉬면 되겠다.”
“네…….”
상호는 몸을 한껏 움츠리고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설원의 마지막 산맥. 이전까지의 산들보다 조금 더 갈라짐이 많고 모양이 울퉁불퉁했다. 바위 사이에 난 구멍들도 그들이 묵었던 곳보다 더 넓었다.
난방이 최악이란 뜻이었다.
“으…….”
“누워, 누워.”
예경이 그를 끌어안고 바닥에 누웠다.
품에 안겨 있으니 조금은 따뜻해진 느낌이 들었다. 사시나무 같던 몸의 떨림도 점차 잦아들었다.
상호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 애썼다.
“누나, 이제 다시 출발해도…….”
“아냐. 시간이 늦었어.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자.”
“……네.”
예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다. 피곤하기도 하고.
그는 예경의 품에 안긴 채로 눈을 감았다.
* * *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
잠에 든 모양이다. 예경은 눈을 감은 상호를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품에서 빠져나왔다.
“……으음.”
그녀가 일어나는 걸 느꼈을까. 상호가 움찔하며 몸을 뒤척였지만 다행히 눈을 뜨지는 않았다.
예경은 동굴 입구로 걸어 나갔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지나갈 입구 너머에는 아직도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으…….”
뒤에서 상호의 신음이 들려도 예경은 계속 걸었다.
입구 앞쪽에는 낮은 바위가 두 개 있었다. 둘이 나란히 선 모습이 꼭 산중턱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연인과 같아 보였다.
예경은 오른쪽 바위에 앉아 서쪽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보라.
그들이 지나온 길은 하얀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어렴풋한 그림자만이 이따금씩 보였다가 사라질 뿐. 그리고 사실, 그 눈보라를 걷어내고 나도 어차피 눈으로 뒤덮인 세상뿐일 것이다.
예경은 검을 품에 끌어안아 어깨에 걸치고 백지 같은 세상을 바라보았다.
동굴 속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추워요…….”
예경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조그맣게 흐느끼는 울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 마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린 병자의 곁을 지키는 연인처럼, 상호는 숨을 가쁘게 삼키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제발 혼자 두지 마요…….”
그래도 예경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머잖아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둘의 사이를 채웠다. 느리고, 고요하게.
다시 잠에 든 모양이다. 예경은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거칠던 눈발이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휘이이……이……
바람이 멎어가던 때에 등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저벅저벅, 소년의 것보다 조금 무거운 걸음으로.
“누나.”
한 청년이 예경의 곁에 앉았다.
“이 뒤는 안 보여줘도 돼요.”
예경보다 머리 반 개는 더 큰 청년.
예경은 청년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어떻게 지냈어?”
“그냥, 뭐…….”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누나 쓰러진 후로 악마 잡고. 세희랑 애들이랑 데리고 전쟁하고……. 그러고 지냈죠.”
“세희?”
“네, 세희랑…….”
그 순간 상호의 몸이 굳었다.
옆을 돌아보니 예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슬처럼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을 깜빡이며.
‘……아.’
그는 뒤통수에 망치를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 고개를 푹 숙였다.
“누나.”
“응.”
“나 학교 선생님 됐어요.”
그 말에 예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정말?”
“다들 누나처럼 놀라요. 도현이 형도, 민정이 누나도, 효은이도……. 아, 그리고 효은이랑은 잘 지내요. 조금 많이…….”
“사귀어?”
“네.”
“아하하하! 어머, 어머…….”
예경이 깔깔거리며 상호의 어깨를 쳤다.
“그러게 말했잖아. 효은이한테 잘하라니까~.”
“그래도, 다시 생각해도…… 제가 더 잘못하지는 않았던데요.”
“그치만 행복하게 살려면 져줘야지~.”
“글쎄요…….”
상호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자꾸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이 무너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누나.”
“응.”
“죽는 건…… 많이 아파요?”
예경이 씩 웃었다.
“그건 네가 정하는 거야.”
그가 생각했던 답과 같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키득키득 웃었다.
“어릴 때였으면 무슨 소리냐고 했을 거예요.”
“그치. 아프면 아픈 거고 안 아프면 안 아픈 거지, 정해져 있는 게 어떻게 달라질 수 있냐고 따지고 들었겠지.”
“푸흐흐…….”
“선생님 이야기나 해 줘. 그건 좀 많이 궁금한걸.”
몸을 들썩이며 웃던 상호는 그 말에 헛기침을 하고 가슴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입가에 비질비질 새어 나오는 웃음까지 어찌하진 못했다.
“도현이 형이, 헌터협회라고 있는 곳에 부협회장이 됐거든요.”
“출세했네~.”
“내가 누나 죽은 후로 몇 년 동안 폐인처럼 살고 있었는데, 그게 안쓰러웠는지 형이…….”
“잠깐만, 뭐라구? 너 지금 몇 살이야?”
“스물다섯이요.”
“나보다 많네!”
“그쵸. 누나 죽을 때 스물넷이었으니까…….”
“오빠네! 상호 오빠네!”
“누나는 영원히 누나죠. 어쨌든 들어 봐요. 형이 저한테 여고 선생하라고 낙하산을 태워준 거예요.”
“낙하산?! 안 돼!”
“아니 들어 보라니까……. 하여튼, 저도 낙하산은 싫고, 애들 잘 가르칠 자신도 없어서 거절을 하려고 했는데…… 하필 그 학교 여학생을 만난 거예요. 길을 가다가……. 나뭇잎 베는 수련을 하고 있길래, 잠깐 가르쳐 줬는데, 얼마 후에 몬스터한테 죽었다고 뉴스가 나왔어요.”
“아이구…….”
“죽은 사람이 걱정하지 마요. 그리고 안 죽은 거였긴 했어요. 하여튼 그 애를 잘 가르쳤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서…… 그 낙하산 받게 됐죠.”
“낙하산은 안 된다구!”
“그래도 애들 1등 여러 번 시켜 봤어요.”
킥킥거리는 상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뜨거운 열기가 묻어 있었다.
전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았다.
“첫 제자들이랑 내 나이 차가 누나랑 내 나이 차랑 똑같아요. 처음 보고 느꼈죠. 와 진짜 애구나. 누나가 보는 나도 이랬을까. 내가 옳다고 따지고 들었을 때 얼마나 같잖았을까……. 그래서 누나가 더 대단하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누나는 항상 웃었으니까…….”
“응? 너는 그럼 어떡해. 애들 때리니, 설마?”
“설마요……. 가끔 애들이 감당이 안 돼서 울고 싶을 때는 있지만요. 때린 적은…… 수업 말곤 없어요.”
“학생을 때려?! 안 돼!”
“헌터인데요…….”
“흐히히…….”
히히 웃던 예경의 미소가 점점 잔잔해졌지만, 상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신난 듯 이야기를 이었다.
“진짜 감당이 안 돼요. 저한테 한 방 먹이려고 교무실 책상 아래에 숨어 있구요, 참치를 잡는다고 낚시를 갔다가 섬에 갇혔는데 열이 나서 속을 태우기도 하고, 크리스마스에 집에 놀러오래서 갔더니 검을 빼앗아버려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고생이네~.”
“실습 나가서 만난 몬스터를 키우겠다고 학교 뒷산까지 데려오지를 않나, 학교 축제에서는 우리 반 장사 잘돼야 한다고 다른 반 교실을 부수러 몰려가질 않나……. 한두 명이 아니에요. 단체로 다 그래요.”
“상호야.”
“네?”
“많이 즐거워 보이네.”
그 말에 상호는 멈칫하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게요.”
부정할 수 없었다.
부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게 된 사람들. 그를 바라볼 때면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교실을 환하게 채우는 웃음소리. 하루도 빠짐없이 그의 정신을 쏙 빼놓는, 가히 악랄하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장난들.
그 순간만큼은 예경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게요…….”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웃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를 이루는 것은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예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잊으려 했다는 것부터가, 아직 그의 마음에 누가 남아 있는지를 반증했다.
“상호야.”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에게 예경이 나직이 물었다.
“아직 춥니?”
“……아뇨.”
더는 춥지 않았다.
“누나랑 늘 같이 있잖아요.”
당신이란 불꽃이 내 마음을 지키고 있으니.
상호는 예경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이젠 괜찮아요.”
“……그렇구나.”
예경은 하얀 앞을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그럼 됐어.”
둘은 말없이 눈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염없이. 오랫동안. 어깨에 눈이 소복이 쌓일 만큼.
가슴에 피어오른 불꽃이 어떤 색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둘 모두가 알고 있었다.
* * *
검은 땅.
새까맣게 타 버린 이 땅의 심장부. 가끔 틈새로 보이는 용암이 꼭 피처럼 시뻘건 색으로 느리게,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상호는 산맥의 능선에 서서 그 땅을 내려다보았다.
“도착했네.”
“네.”
곁에 선 세희가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땅과 설원의 경계는 지나치게 뚜렷했다. 꼭 누군가 일부러 선을 그어 놓은 것처럼. 색깔이 희고 검어서 특히나 더 눈에 띄었다.
세희는 그 선을 내려다보며 떠올렸다. 이기기 위해, 살기 위해 수없이 넘어왔던 선들을.
그러다 상호를 돌아보았다.
“갈까요.”
“푹 쉬었지?”
“네.”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자.”
이루지 못했던 단 하나의 임무를 끝마치기 위해.
그는 검은 땅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