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95화 (495/501)

<495화>

495. 어느 소년의 이야기

“……너.”

상호는 가까이 다가온 그 존재를 얼이 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

너무도 익숙한 모양의 개 해골.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해골뿐, 그 해골을 쓰고 있는 자는 처음 보았다. 황금과도 같은 금발을 늘어뜨리고 새파란 눈동자를 그윽이 들어 올리는 청년.

고운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상호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이 정도는 알아보겠지?”

“……네놈이냐?”

상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그 모습은 뭐야?”

“이제 약한 척 숨어있을 필요가 없어서…… 이전 세상에서 쓰던 모습으로 돌아와 봤다.”

“무슨 뜻이냐?”

“별거 아냐. 말 그대로다. 너희가 모아 준 불사의 악마의 힘 덕분에 더 이상 너절한 졸개인 척 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기만의 악마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을 이었다.

“싸우러 온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

“…….”

상호는 그 말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놈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놈은 그런 놈이니까. 비록 기만의 악마와 다른 대악마들은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긴 하지만, 다시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떻게 찾은 거냐?”

“너와 나는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기만의 악마가 상호의 안대를 가리켰다.

“네 안에서 내 인자를 전부 없애도…… 한번 이어진 연결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네가 어딜 가든 나는 늘 알 수 있지.”

“……용건은 뭔데.”

“거래다. 다만 그 전에…….”

악마의 하얀 손이 동굴 안쪽을 가리켰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군. 물러나 있을 테니 네 대타를 깨우고 따라오도록 해라.”

“널 어떻게 믿고, 이 새끼야.”

“멀리 안 간다. 네 목소리 크기만큼 멀리 가게 되겠지. 아니면 내 피를 받아들이면 생각만으로 대화해도 될 텐데. 그리하겠느냐?”

“미쳤냐? 꺼져. 내가 따라가면 애들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그 의심은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군. 다만 내가 여기 온 건 정말로 네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믿지 않는다면…… 너도, 네 제자들도. 마신에게 모두 죽게 되겠지.”

“…….”

마음을 흔드는 데에는 정말로 통달한 놈이었다.

상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놈을 노려보다가, 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뒷걸음질을 쳐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세희의 어깨를 흔들었다.

“세희야.”

“……으음.”

세희는 잠에서 깨자마자 주변을 둘러보고는 눈을 깜작였다.

“제 차례예요?”

“아니, 선생님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잠시만 네가 서고 있어줘.”

“네.”

더 묻지 않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

상호는 살짝 웃고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지키고 있어.”

“네.”

세희가 자기 뺨을 짝짝 두드리고는 생생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가 밖에 나왔을 때에는, 기만의 악마가 저 멀리에 서서 손을 아래로 까딱이고 있었다.

‘……쯧.’

믿고 자시고를 떠나서 맘에 안 드는 놈이다. 그는 혀를 차고 기만의 악마를 향해 걸어갔다.

동굴과 충분히 거리가 멀어지자 악마가 입을 열었다.

“들을 준비가 됐나?”

“일단 말해봐.”

“간단하다.”

악마가 검지를 들었다.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면, 네가 마신을 죽이는 걸 도와주지.”

“……너.”

상호는 악마를 꿰뚫어버릴 듯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네놈이 왜 날 돕는 거냐?”

“내게도 마신이 죽는 게 이득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나를 죽이려는 건 아니고?”

“물론 너도 죽일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내겐 천년만년 살아가는 마신보단 백 년이면 죽는 인간이 이기는 게 더 이득이지. 그리고 애초에 널 죽일 생각이었다면 여기 올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듣기에는 그럴듯해도 빛 좋은 개살구. 그는 검을 들어 기만의 악마를 겨눴다.

“안 믿어, 이 새끼야.”

“신뢰란 건 참 얻기가 힘들군.”

악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믿든 말든 계획은 들어봐라. 네놈도 이제 우리의 구멍과 심장은 알고 있겠지?”

“그게 뭐.”

“궁금하지 않은가?”

금발 청년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걸렸다.

“어째서 나만이 심장을 움직일 수 있는지.”

찌르려 했으나 찌르지 못했던 그때.

상호는 혈석 봉인소에서의 일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

“표정으로 다 보인다. 그래, 다 설명해주마. 거래를 하려면 신뢰를 먼저 얻어야겠지. 내가 악마의 심장을 움직일 수 있는 이유는 불사의 악마의 힘 때문이다.”

기만의 악마가 바위에 털썩 앉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면세계에서는 불사의 악마만이 생물이고, 다른 악마들은 무생물이다. 생명의 반전…… 아, 이건 네가 이해하긴 어렵겠군.”

“말해봐, 새끼야.”

“그럼 한번 들어 봐라. 물질세계와 영혼세계 사이의 벽을 넘으면 생명은 반전된다. 그러니까 물질세계에선 생물로 보이는 것들이 영혼세계에선 무생물이고, 물질세계에선 무생물로 보이는 것들이 영혼세계에선 생물이란 뜻이지. 물질세계의 물과 불은 무생물이지만, 영혼세계에선 생물인 것처럼.”

“…….”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악마가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아먹지 못해서.

“뭔 소리야? 물질이 무생물이고 영혼이 생물인 거 아냐?”

“이해하지 못하겠으면 이해하지 마라. 그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일단 계속 말해봐. 그래서 그 무생물이고 생물이고가 왜 중요한데?”

“영혼세계에서 무생물인 악마들은 심장을 움직이고 싶어도 못 움직이는 것이고, 나는 불사의 악마의 힘을 이어받아 생물이 된 것이고…… 심장도 움직일 수 있게 된 거지. 다만 또 한 명, 영혼세계에서도 생물로서 움직일 수 있는 악마가 있다.”

악마가 실쭉 웃었다.

“누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지.”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

“요는 마신이 심장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봐라. 네가 검을 찔러넣어도 마신이 피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게 아니냐?”

“그건 해봐야 아는 거지.”

“내가 놈의 심장을 잡아주마.”

그 말에 상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

“이면세계에서 움직일 수 있는 건 나와 그놈뿐. 네가 그놈을 확실히 죽일 수 있도록 내가 붙잡아 주겠단 말이다.”

악마가 손을 까딱였다.

사실이라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사실이기만 하다면. 하지만 상호는 눈앞에 있는 이놈을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의심 가득한 눈을 본 악마가 눈썹을 치켰다.

“거절할 셈이냐? 나는 진심이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놈을 죽이는 게 훨씬 쉬워진다. 사사로운 감정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현명히 판단해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상호는 검을 겨눴다.

“증거가 있냐? 니가 하는 말들에 하나라도 증거가 있냐고. 없잖아. 영혼세계니 반전이니 하는 것들…… 그런 걸 믿고 거래를 하라고? 개가 웃겠다, 이 새끼야.”

악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네놈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뭐?”

그 순간 상호의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스쳤다. 하얗고 하얗기만 한,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수녀의 모습.

굳어버린 그를 보고 악마가 웃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나? 생물이 무생물로 변해가는 현상.”

“…….”

“천사도 원리는 같다. 물질세계의 생물을 영혼세계의 무생물로 바꿔 가는 것이지.”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적어도 영혼세계에 관련된 내용만은 사실인 듯했다. 기만의 악마가 효은의 천사병에까지 관여한 게 아니라면.

그리고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그래도.”

“아직 부족한가?”

상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악마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좋은 걸 알려주지. 놈은 인간 태생이다.”

“…….”

그건 상호도 염두에 두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상호는 일단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악마의 여섯 요소…… 다 가짜다. 악마의 요소는 다섯이다. 야성, 신비, 기만, 불사, 지배. 본래 인간이었던 마신은 악마가 되어 영혼세계로 넘어오면서 가장 뛰어난 악마들과 자신을 연결시켰다. 그게 우리, 악마 태생 대악마들이지.”

기만의 악마가 검지로 스스로의 가슴팍을 톡톡 두드렸다.

“마신은 그렇게 우리 다섯의 힘을 동시에 공유하며 가장 강한 악마가 되려 했으나…… 한 가지 요소가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악마나 천사, 정령에게는 없는. 오로지 물질세계의 영혼만이 가진 단 하나의 요소…….”

“욕망?”

“그렇다.”

악마는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듯이. 한편으로는 하대와 조롱이 담긴 비웃음이기도 했다.

“마신은 자신에게서 욕망을 떼어냈다. 식욕, 색욕. 그동안 인간으로서 누려온, 오감에서 기인하는 모든 욕구를……. 그 떼어낸 욕구를 담아둘 그릇이 필요했고, 마신이 선택한 것이 바로…….”

“……혈마녀.”

“잘 이해한 모양이군.”

악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혈마녀는 딱히 강해지지도 않고 약해지지도 않는다. 힘도 다른 다섯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지. 마신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죽인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죽이면 어떻게 되는데?”

“마신의 영혼의 힘이 약해지겠지.”

악마의 파란 눈이 반짝였다.

“주술도 약해질 것이고, 영혼의 마나도 약해질 것이고, 심장을 움직이는 속도도 느려질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혈마녀를 죽이는 것은 어떠냐?”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베르멜로와는 이미 약속을 했다. 한쪽이 먼저 배신하지 않는 한은 절대 배신하지 않기로.

상호는 혀를 차고 검을 한 번 내저었다.

“하여튼 그 마신 놈이 인간 태생인 건 알겠어. 나도 그렇게 의심하긴 했거든. 근데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좋은 걸 알려준다고 하지 않았나?”

“놈은 악마의 구멍을 볼 수 없다.”

악마가 검지로 허공에 원을 그렸다.

“오직 악마 태생의 눈만이 구멍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틈을 볼 수 없고. 놈은 자기 악마의 구멍이 어딨는지도 몰라. 그저 심장만 움직일 뿐이다.”

“그렇단 말은…….”

“마신은 네 모든 공격을 경계할 것이다. 반대로 네 입장에선……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기회를 만들 수 있겠지.”

마신은 어디를 방어해야 하는지 모를 테니까.

허초를 충분히 섞다가 단 한 번의 정확한 살초를 날린다면, 그리고 기만의 악마가 마신의 심장을 붙잡아둔 상태라면.

분명히.

마신을 죽일 수 있을 터였다.

“물론 네가 정말 마신과 호각으로 싸울 실력이 된다면 말이다.”

“……좋은 정보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대가가 뭔데?”

“그 아이.”

악마가 검지를 들어 동굴 쪽을 가리켰다.

“네 제자인 악마 융합체. 그 아이를 내게 넘겨라.”

“왜?”

상호의 눈에 살기가 비쳤다.

“왜 하필 그 앤데?”

“불사의 악마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아이니까.”

“왜 그게 필요한데?”

“불사의 악마의 힘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놈의 심장을 확실히 붙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지. 지금의 불완전한 힘으로는 느려터진 골렘과 다를 바 없다.”

검지를 들었던 손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를 완전한 생물로 만드는 것. 그게 거래의 조건이자 네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다.”

“……네 말이 전부 진짜인지는 모르겠다만.”

특히 뒷부분이 의심스럽지만, 상호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네놈이 도와주면 일이 훨씬 쉬워진다…… 그것까진 이해했어.”

“여태 한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그러니 그 아이를…….”

“근데 그래도 안 돼.”

상호는 눈을 번득이며 검을 들이밀었다.

“그 누구도 네놈한텐 줄 수 없어.”

“먼 곳을 봐라, 인간. 고작 아이 하나와 세상을 맞바꿀 셈이냐?”

“나한텐 그런 말은 안 통해, 이 새끼야. 이미 질릴 만큼 들어 봤거든. 그리고 애초에 걔가 있어야 마신의 심장을 볼 거 아냐.”

“악마의 눈만 따로 떼어 주면 될 것 아니냐?”

악마가 그의 안대 쓴 눈을 가리켰다.

“내 눈을 빌려주마. 아니, 한쪽뿐이라면 아예 네게 주겠다. 그 아이만 넘긴다면.”

“필요 없어.”

상호는 검을 악마에게 겨누다가 칼집에 집어넣고 돌아섰다.

“전부 걸었으니, 전부 잃거나, 전부 지키겠지. 좀스런 거래는 안 해. 그것도 네놈하고는.”

“그런가.”

악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멍청하고 고집 센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 그래도 말을 들으면 이해할 줄 알았건만.”

“이해는 했어. 네놈 도움이 필요 없을 뿐이지.”

그렇게 톡 쏘아붙이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악마의 말이 그의 발을 붙잡았다.

“기다려 봐라.”

“또 뭔데?”

“첫 만남이 좋지 않았다고 작별까지 나쁠 필요는 없지. 비록 거래는 파토났지만…… 선물을 주도록 하마.”

“무슨 선물?”

“두 가지 일러줄 게 있다.”

악마가 검지를 들었다.

“네가 가려는 땅, 그 땅에 있을 리 없는 게 있다.”

“그게 뭔데?”

“그건 네가 알아서 찾아라. 거래도 안 하는 놈에게 알려줄 의리는 없으니. 사실 마신과의 전투에는 쓸모없지만…… 찾고 나면 내게 고마워할 거다.”

“…….”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다.

있을 리 없는 것을 찾아라. 상호는 악마의 말을 곱씹고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악마들이 여기로 오고 있다.”

기만의 악마가 빙긋 웃었다.

“동이 틀 때쯤이면 도착하겠군.”

“……!”

상호의 눈 밑이 꿈틀했다.

“네 짓이냐?”

“아니, 놈들이 알아서 찾아낸 거지. 나도 슬슬 도망칠 거다. 놈들이 날 보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악마가 바위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번 생에서 다시 볼 일은 없겠지. 이게 마지막 작별 인사다.”

“…….”

“수고해라.”

기만의 악마는 그 말을 남기고는 킬킬거리며 돌아서서 걸어갔다. 평범하게 자박자박 자갈을 밟으며.

상호는 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동굴 쪽을 돌아보았다.

아까 했던 걱정과는 달리, 아무 일도 없이,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기만의 악마가 마신의 심장을 잡아 준다면, 또 그에게 악마의 눈을 준다면, 마신을 죽이는 일이 지금보다 배는 쉬워진다는 것은.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목숨을 거래할 순 없었다.

누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기에.

‘……그래도 성과는 있었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동굴로 들어섰다.

구석에서 숨을 죽이고 주시하던 세희가 상호를 확인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다녀오셨어요?”

“응.”

“뭐 하고 오셨는지는 말씀 안 해주실 거예요?”

“으응, 별거 아냐. 그냥 주변 지형 둘러보고 왔어.”

상호는 씩 웃고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세희는 무언가 다른 낌새를 느낀 것 같았다.

“선생님.”

“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그냥…….”

세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뭔가…… 후련해 보이세요.”

그 말에 상호의 웃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래?”

“네. 꼭 고민이 사라진 것처럼…….”

“그래 보여?”

“네.”

마음이 조금 드러났을까.

상호는 다시 살짝 웃어 보이고 세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희야.”

“네.”

“선생님이 잠을 좀 자야 될 것 같거든.”

“네.”

“다섯 시 반에 전부 깨워야 한다고 다음 사람한테 전해 줘.”

“다섯 시 반이요?”

“응. 조금 일찍 출발해야 될 것 같아.”

그 말에 세희는 시계를 흘끗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제대로 전할게요.”

“응. 부탁해.”

상호는 그 말을 남기고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동굴의 그늘에 잠겨드는 그의 얼굴은 깨달음을 얻은 듯 잔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날카롭고 명료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 * *

“대장님.”

“아.”

명욱은 동굴 입구로 들어오는 상호와 민정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와라. 추격은?”

“따돌렸어요.”

“잘했다.”

상호와 민정은 동굴 안쪽에 둘러앉은 부대원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둘이 자리를 잡자 명욱이 부대원들 한가운데에 지도를 놓았다.

“우리가 주파한 게 약 100킬로미터다.”

명욱의 검지가 지도의 하얀 부분을 가로지르다가 멈췄다. 반의반이 조금 덜 되는 지점이었다.

“앞으로 400킬로 가량을 더 가야 해. 이게 다 눈밭이다.”

날이 좋을 때 발자국을 남기면 추적당하기 딱 좋으니, 앞으로는 눈이 내리는 날에만 나아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눈이 오는 날은 대부분 눈보라가 치는 날이었다.

“추격이 다시 따라붙으면 곤란하니 앞으로는 천천히 전진하자. 그럼 제일 큰 문제는 식량인데…….”

명욱은 대원들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오면서 동물을 본 적이 있냐?”

“……없었죠. 몬스터 빼고는.”

재훈이 입맛을 다셨다.

“늑대 놈들은 좀 잡아먹을 만한 것 같긴 한데…….”

“몬스터와의 접촉은 최소화한다. 민정, 상호. 너희도 본 적 없어?”

“네. 집중해서 찾아보진 않았지만요.”

“그러면 이렇게 하자.”

명욱의 검지가 다시 뒤로 되돌아갔다.

“일단 다 같이 돌아가서 식량을 구해.”

“네.”

“그리고 효은, 영주, 민정을 뺀 여덟 명이서 두 명씩 4개조를 지어. 1조는 방금 말한 세 명하고 합쳐서 2조에게 식량을 조달한다.”

검지가 전진하다가 우뚝 멈추고, 다시 전진하다가 우뚝 멈췄다.

“2조는 150킬로를 전진하고 거기서 3조에게 식량을 전달한다. 3조도 150킬로를 전진해서 4조에게 식량을 전달하고, 4조도 150킬로를 전진해서 지역을 확인하고, 전달된 식량을 저장하고, 안전이 확보되면 3조에게 보고해. 그러면 3조가 다시 2조에게, 2조가 1조에게 보고하고, 그러고 나면 1조가 다른 조들과 합류하면서 4조에게 간다. 그리고 다 같이 그라운드 제로에 도착하는 거지.”

“그러려면…….”

민정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식량이 좀…… 많아야겠는데요. 돌아올 것까지 생각하면…….”

“그래서 4조에게 저장시켜야지. 전달하고 전달하는 방식으로.”

“4조가 식량을 잃어버리면요?”

“그 정도로 실패했으면 은폐고 나발이고 그냥 날아서 돌아와야지. 추격이 얼마나 몰려오든.”

“…….”

민정이 말없이 시선만 굴리자 명욱이 다른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좋은 생각 있나?”

“없습니다.”

“좋아. 영주. 이번엔 느낌이 어때. 촉이 오나?”

“제 생각엔…….”

영주가 눈을 감았다.

“식량은 생각보다 넉넉할 겁니다.”

“그래? 한…… 열한 명이서 나흘 먹을 정도면 될까? 돌아올 때까지 생각해서?”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좋아.”

명욱이 손뼉을 짝 쳤다.

“조를 정하자. 일단 4조가 가장 멀리까지 가니까 가장 강한 대원을 넣어야겠는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예경에게 몰려들었다.

예경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빙긋 웃었다.

“저랑 상호가 갈게요.”

“그래라. 상호도 이제 많이 강하니까.”

명욱과 대원들의 눈에는 단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효은이 별생각 없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명욱이 대원들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나랑 재훈이가 1조. 도현, 진구가 2조. 경준, 태현이 3조. 이렇게 간다. 뭐 더 의견 있어?”

“없습니다.”

“좋아. 바로 시작하자.”

대원들은 명욱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여긴가 보다.”

경준이 손에서 깜빡거리는 돌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같은 마법으로 연결된 돌을 땅에 박고, 그 돌에서 10km만큼 멀어지면 깜빡거리기 시작하는 아티팩트였다.

이번이 3조 캠프에서부터 열여섯 번째 돌의 깜빡임.

“민정인 진짜 천재다. 어떻게 이런 걸 다 만드냐……. 하여튼 예경이, 상호. 4조 캠프는 어디가 좋겠어?”

“저기가 딱 좋겠는데.”

예경이 가리킨 곳은 설산 옆구리에 난 절벽이었다.

절벽의 구석자리에는 틈이 갈라지며 생긴 조그만 동굴이 하나 나 있었다. 마침 주변에 하나 나 있는 조그만 나무가 기억에 남기기 딱 좋았다.

위치를 확인한 경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상호에게 식량이 든 가방을 넘겼다.

“그래. 잘 지내고 있어. 나중에 보자.”

“응. 오빠들도 조심히 가.”

예경은 돌아서는 경준과 태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그 둘이 희끗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자 예경이 손을 내리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도 위치 기억했지?”

“네.”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 확인할까?”

“그러죠.”

“가방 나 줘.”

“됐어요.”

상호는 가방을 둘러메고 걸음을 옮겼다.

평야와 산, 절벽과 봉우리. 수많은 지형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지만 그 색은 한결같았다. 눈이 시린 흰색. 살을 에는 흰색. 그저 흰색뿐.

둘은 널리 둘러보기 위해 캠프로 점찍어 두었던 절벽이 있는 산의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야…….”

꼭대기의 높은 바위에 올라선 예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웃었다.

“하나도 안 보이네!”

“눈이 오니까요.”

상호는 예경의 곁에 다가서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펄펄 내리는 눈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았다. 이런 날씨이기 때문에 발자국을 지울 수 있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긴 했지만, 주변을 정찰하기는 영 꽝인 날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일 다시 올라와야겠어요, 누나. 가서 밥이나…….”

“상호야.”

“네?”

“저기 봐.”

예경이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의 한쪽을 가로막고 있었다. 흐릿해서 모양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산이라기엔 너무, 지나치게 컸다.

꼭 세상을 벽으로 막아놓은 것처럼.

“…….”

상호는 그 크기에 압도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산이에요?”

“그런가 봐.”

그와 달리 예경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오르는 데만 한참 걸리겠네.”

“한참으로도 부족할 것 같은데요…….”

“정 안 되면 날려버리지 뭐~.”

“그게 말이나 돼요…….”

그는 한숨을 쉬고 그 산을 올려다보았다.

고고하다. 주변에 견줄 것 없이 홀로 초연하게 우뚝 서 있는 모습이 꼭 왕보다도, 황제보다도 으뜸인 존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범접할 엄두조차 도저히 낼 수 없는 무언가가 저기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저 산을 오른다는 게 가능하긴 할까.

도저히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너무 커요……. 식량이 훨씬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영주는 충분하댔잖아.”

“형도 저딴 산이 있는지는 몰랐겠죠.”

“그래도 영주가 점 하나는 신통한걸.”

예경은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 산 너머에 그라운드 뭐시기가 있는 거지?”

“그라운드 제로요. 네.”

“거기에 뭐가 있을까?”

“몬스터들한테 계시를 내리는 뭔가가 있겠죠.”

사실은 없을 수도 있지만.

있다고 믿고 가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증거는 하나도 없어도.

“그놈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뭔가가 있겠죠. 아마…….”

“그놈을 쓰러트리면 모든 게 끝날까?”

“그렇겠죠.”

“그렇게, 모든 게 끝나면…….”

예경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우리 진짜 행복하게 살자.”

“……네.”

상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럴 거예요.”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그 목표가 아무리 저 산꼭대기처럼 아득해도, 반드시 올라서 보이고 말겠다고,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그의 배에 얹힌 예경의 손을 꼭 잡았다.

시간도 얼어붙은 이 세상의 벽 앞에서.

* * *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다짐.

몇 번을 떠올려도 질리지 않는 사람.

몇 날 며칠이고, 영원히 그 안에 파묻히고 싶은 기억들.

하지만.

‘……으음.’

상호는 침음하며 몸을 꿈지럭거렸다.

‘지금은 안 돼요, 누나…….’

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 말고 다른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아까 기만의 악마에게서 얻어낸 정보를 이용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얼른 다시 잠에 들어야 했다.

‘보여줄 게 남았다면…… 나중에 보여줘요.’

그는 품에 안은 태화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달콤하면서도 뭉근한 향기가 코를 가득 채웠다. 팔에 닿는 살결이 차가운 동굴 바닥과 대비되어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대로만 있으면, 금방 다시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도와줘야 해.’

동이 트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길어야 두세 시간.

그는 감각을 닫고 서둘러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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