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94화 (494/501)

<494화>

494. 돌아가는

“아웅.”

전갈 한 마리가 다혜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다혜는 동굴 바닥이 식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쏙쏙 골라 입에 넣었다. 그럴 때마다 아작아작, 바삭바삭, 꼭 튀김을 씹는 듯한 소리가 조그맣게 동굴을 울렸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세희가 다혜의 등을 찰싹 쳤다.

“그만 줏어먹어!”

“므, 므앙?!”

“식량 먹었잖아! 벌레 좀 그만 먹어! 먹을 거면 눈앞에서 먹지 말든가!”

“꾸웅…….”

다혜의 옹알이를 들은 지윤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꾸웅이 보고 싶네.”

“잘 지내고 있을 거야…….”

나빛이 방긋 웃었다.

“오빠한테 꾸웅이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했으니까…….”

“느그 오빠야는 늘 고생이고마.”

지윤은 혀를 차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태화가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슬금슬금 엉덩이를 옮겨 앉으며 다가갔다.

그러다가 충분히 가까워졌을 때 태화의 꼬리를 확 휘어잡았다.

“니는 와 그래 꽁해 있노?”

“꺄악!”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튕기던 태화는 눈에 불을 켜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꼬리를 당긴 게 지윤이란 사실을 알아차리고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지윤의 눈이 빠르게 깜작였다.

‘이 가스나가 뭘 잘못 뭇나…….’

평소대로라면 칠공에서 불을 뿜으면서 바락바락 악을 썼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그러질 않는다.

지윤은 한 번 더 태화의 꼬리를 문지르며 장난을 걸었다.

“마, 와 그라는데. 느 머 잘못한 거 있나.”

“몰라, 멍청아. 손 치워.”

“와 암 말도 않고 그래 있냐고.”

“아이씨, 모른다니까! 나 잘꺼야.”

태화는 지윤의 손을 쳐내고 바닥에 누웠다.

지윤은 자신을 등진 태화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얘가 오늘 정말 왜 이러는지. 며칠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긴 이 가스나 이상한 기 하루이틀이가…….’

그래서 관심을 끊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구석에 정좌해 있는 골렘이 눈에 들어왔다.

골렘도 태화처럼 지윤을 등지고 있었다. 지윤은 골렘을 본 적이 많지 않았지만, 눈앞의 골렘은 무언가 다른 것 같았다. 돌이 다닥다닥 붙긴 했지만 꽤나 피부 같은 질감이고, 또 얼굴 표정도 너무 사람 같고.

돌아앉은 자세도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희한한 골렘이고마…….’

그렇게 여길 뿐이었지만.

지윤은 골렘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머리를 긁적이며 친구들을 향해 돌아앉았다.

“언니야는 또 뭘 그래 묵습니꺼. 내도 하나 줘 보이소.”

“느앙!”

“뺏어먹을 생각 하지 말래. 언니, 벌레에 목숨걸지 말고 하나 줘 그냥.”

“꾸웅…….”

“새우 맛이고마.”

골렘이 지윤을 힐끔했지만, 지윤은 전갈을 아작거리느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 * *

“……죽었다고?”

꾹 참다가 내뱉듯, 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앞에서는 상호가 눈을 질끈 감은 채 머리를 싸쥐고 있었다.

“어.”

“성철이…… 형이?”

“그렇다고.”

상호는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

“…….”

둥그렇게 둘러선 대원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장인 명욱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일 앞서 대원들을 이끌어야 할 그조차도 쉽게 위로의 말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작전은?”

“성공했어요.”

상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작전의 성패는 결국 알파 리자드의 생사에 달려 있으니,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반의 성공에 불과했다. 상호도, 명욱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명욱이 상호의 어깨를 잡았다.

“네 잘못 아니니 자책하지 마라.”

“…….”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가서 쉬는 데 집중해. 수고했다.”

“……예.”

상호는 터덜터덜 걸어 방을 나섰다.

찰칵……

문이 닫히자 대원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다들 이 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산전수전 다 겪었던 베테랑 헌터. 한솥밥을 먹던 전우가 죽는 일이야 다반사였고, 어제의, 오늘의 웃고 떠듦은 전장에서의 생사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애통한 표정을 숨기진 못했다.

“……영주.”

명욱이 영주를 흘겨보았다.

“네가 말한 땅의 보복이 이거냐?”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고사라도 지내볼 것을…….”

“…….”

명욱은 한숨을 쉬고 대원들에게 손을 내저었다.

“성철이 집에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모르겠군. 다들 가서 쉬어. 그리고 예경. 상호 잘 챙겨라.”

“네.”

예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 * *

예경은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침대 위에 이불이 둥그렇게 말려 있었다.

“상호야.”

이불에서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친 숨소리를 보니 잠에 든 건 아닌 듯싶었다. 예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괜찮아?”

“……네.”

대답과는 달리 상호는 몸을 더욱 웅크렸다. 꼭 추워하는 아이처럼 몸을 덜덜 떨면서.

예경은 그런 상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상호야.”

가느다란 손이 조그맣지만 거친 손을 잡았다.

“아저씨가 죽은 데에 네 잘못이 있어?”

“……뒤를 확인했어야 했어요.”

“경계를 실수한 거야?”

“뒤를…….”

이불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아래로 말려 들어갔다.

예경은 상호의 다른 손을 잡아 꽉 쥐고 있는 이불을 놓게 했다. 상호는 처음에는 그 손을 밀어냈지만, 이불을 놓고 난 뒤에는 오히려 자기가 먼저 예경의 손을 찾아 힘주어 움켜쥐었다.

깍지를 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었어요. 마지막 강에 마지막 기둥을 박아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우리 둘 다. 돌아가서 뭐 할지, 뭘 먹을지……. 그런데 창이…….”

“…….”

“더 제대로 확인했어야 하는데…….”

예경은 말없이 상호의 손을 잡고만 있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상호의 손에선 힘이 빠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손가락을 조여서 잡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예경은 상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상호가 움찔하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아팠어요?”

“아니야.”

그래도 상호는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겠다는 듯, 이불을 들어 예경과 눈을 마주쳤다.

예경은 이불 아래로 눈만 빼꼼 내민 상호를 보고 씩 웃었다.

“거짓말 같아?”

“자주 그러잖아요…….”

“나와 봐.”

그녀가 침대를 두드리자 상호가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붓거나 얼굴이 빨갛진 않았다. 그저 파리한 안색에 지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예경은 곁에 앉은 상호의 머리를 빗어 내리며 물었다.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더 꼼꼼해야 했어요……. 나는 누나처럼 감각이 날카롭지 않으니까. 만약 누나였다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달랐을까?”

“나는 아니어야 했어요…….”

예경이 피식 웃었다.

“그럼 널 투입한 대장님 잘못 아닐까?”

그 말에 상호의 눈이 끔뻑였다.

“……그건 아니죠.”

“널 더 강하게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 아닐까?”

“아니요.”

“그것도 아니면, 뒤를 확인하지 않았던 성철 아저씨는?”

“그것도 아니죠. 다 내 잘못이라고요. 내가 제대로…….”

“다 같이 잘못한 거야.”

가느다란 손이 상호의 허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삶엔 셀 수 없이 많은 경우가 있지. 만약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지만, 결국 의미는 없어.”

“…….”

“과거는 바꿀 수 없어. 더 나은 삶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 게임처럼 저장하거나, 다시 시작하거나, 입맛대로 조정하고, 없던 일처럼 지워버리는 것은…… 우리네 삶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걸 누가 모를까.

상호도 알고 있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러나 그는 후회하지 않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예경이 두 팔로 그를 끌어안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해.”

빈틈없이, 단단하게 힘을 주어서.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할 이유가 없으니까. 과연 최선을 다했는가, 스스로 한 번 묻는 것으로 끝. 더 자책할 필요도 없는 거야.”

“그치만 저는 최선을…….”

“충분해.”

예경의 손이 상호의 입을 눌렀다.

“너랑 아저씬 지쳐 있었던 거야. 그래서 놈이 창을 던진 걸 알아채지 못한 거고. 그건 어쩔 수 없어. 더 생각하지 마.”

“…….”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입이 막혀 있어서.

“다 같이 한 잘못이니까, 네 몫은 충분해. 이제 우리가 할게.”

상호는 등을 토닥이는 예경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진 못했다. 이번 일은 그의 탓이 맞았다. 설령 그들의 몫이 조금은 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태만과 방심을 절대로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짓누르는 이 피로가, 작전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라는 증명처럼 느껴져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누나.”

“응.”

“다시는…….”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후회하지 않을게요.”

* * *

그 말을 얼마나 지키며 살아왔는지는 머잖아 결정될 것이다.

상호는 어두운 숲을 바라보며 옛일을 회상하다가, 뒤에서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왜 안 자고.”

“잠이 안 와서.”

성철이 큼지막한 바위를 하나 들고 와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잠꼬대라도 했다가 애가 들을까봐…… 그냥 깨어 있으려고.”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지.”

상호는 곁에 앉은 성철을 째려보았다.

“형수한테도 숨길 거야?”

“너랑 도현이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게 해라.”

“애들을 안 보겠다고?”

“내가 없는 세상을 살고 있을 거 아니냐.”

성철이 입맛을 다셨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봤자 아빠 노릇도 남편 노릇도 못 한다. 이미 새출발을 했을지도 모르고…….”

“애들이 아빠를 찾는다니까? 그런데도 안 보겠다고? 지윤이가 알았으면 형 얼굴에 주먹부터 날아갔을걸.”

“너만 숨기면 돼.”

“이러려고 반지 줬어?”

상호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가족을 사랑한다던 양반이 왜 가족 앞에 나타나는 걸 두려워하는지.

“형. 형이 가족들을 사랑한 만큼 가족들도 형을 사랑한다고. 아기들은 형을 아예 못 봤겠지만…… 형 자식들을 아빠 없이 자라게 할 거야? 그리고 형수도 아직도 뼈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형 혼자 이렇게 편하게 도망칠 거야?”

“상호야.”

“아니 뭔 할 말이 있다고 아직도 따박따박…….”

“난 가족을 버리고 작전을 택한 놈이다.”

돌로 된 피부 사이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반짝였다.

“너 같으면 몇 년씩 가족을 버리고 웬 도마뱀이랑 싸우고 있었다는 아빠를…… 그저 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용서할 수 있겠냐?”

“하지!”

“하긴 뭘 해 임마. 용서 못 하지.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용서하진 못해. 처음에야 꾹 참고 반가워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애들이 클수록…… 응어리가 자라서 가시가 된다.”

“아니 그럼…….”

상호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무서워서 말을 못 하겠다는 거야, 정말? 형 갱년기야?”

“이 짜식이…… 너는 안 늙을 줄 아냐, 임마. 형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형보단 늦게 가겠지 뭐. 형. 형 나이를 생각해. 앞으로 몇십 년을 더 살 텐데 그동안 자식들하고 웃지도 못하고 아내도 없이 혼자 쓸쓸히 늙다가 벽에 똥칠하다 고독사해 뒈지는 삶을 택하겠다고? 그것도 형이 직접 선택해서?”

“꼴이 이래서 늙긴 하는지 모르겠다.”

성철은 자신의 돌로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름이 늘었는지 줄었는지도 알 수 없는 손. 세월의 흔적을 더는 가늠할 수 없게 된 손이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만약 늙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가족한테 돌아갈 수가 없어. 맞아. 무서워서 그런다, 상호야. 나는 이런 몸으로 돌아가서 살게 될 삶이 무서워서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

“최선을 다할 자신이 없다는 거 아냐?”

상호는 혀를 찼다.

“가족보다 본인이 중요하구만 그래. 반지도 그냥 팔아먹었어야 했어.”

“맞아, 너.”

성철이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지윤이는 어떻게 오게 된 거냐?”

“말 돌리지 마. 확 턱주가리를 돌려버릴라…….”

“아니 말 좀 해봐. 지윤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네가 가르친 거야? 너랑 예경이 심법이야?”

“그건 다른 애가 배웠고, 지윤이는 형이랑 똑같은 거 찾아서 가르쳤어. 반탄강기.”

“재능이 있어? 아니, 재능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온 건가? 지윤이 강하냐? 부대원들만큼?”

“글쎄, 우리만큼 정교하게 싸우지는 못하지만 내공의 집중력은…….”

상호는 대답하다가 무언가를 깨닫고 성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갑자기 끊어버리자 성철이 눈을 끔뻑였다.

“집중력은?”

“형.”

“엉?”

“되게 신났네.”

“……그러냐?”

성철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만약 피부가 돌이 아니었다면 뺨이 붉게 물들어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냥 궁금하니까 그러지. 딸이 헌터가 됐는데 얼마나 강한지 당연히 궁금하지…….”

“형.”

“엉?”

“그냥 내가 형수한테 잘 설명할게.”

“……얌마, 그러지 말라니까!”

“X랄하네, 지금도 가족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 있구만……, 응?”

그 순간 무언가가 어둠을 가르고 날아왔다.

상호는 잽싸게 손을 들어 그 무언가를 잡아챘다.

“……흥.”

물방울 모양의 날이 달린 단창.

“지난번처럼은 안 된다고.”

이건 독도 원혼도 없는 평범한 창일 것이다. 그는 창을 내던지고 검을 뽑았다.

숲의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창백한 리자드맨이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츠츠츳……

입술 사이에서 날름거리는, 끝이 두 갈래로 나뉜 혀.

상호는 알파 리자드를 노려보며 예경의 검을 들었다.

“장비빨로 싸우는 치졸한 새끼.”

츠츠츠……

“나도 좋은 거 하나 가져왔다.”

과연 효과가 있을지.

사실 주술사도 아닌 그가 알 길은 없었지만, 왠지 이번엔 먹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알파 리자드를 향해 검을 겨누다가 옆에 다가선 성철을 흘끗했다.

“형은 도현이 형 깨워. 도현이 형 깨워서 교장선생님이랑 세희 깨우라고 말 좀…….”

“난 저기서 말 못해.”

“아이씨……. 지윤이 한번 자면 깊게 자니까 가서 도현이 형 좀 깨우라고!”

“얌마, 너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때 알파 리자드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티격태격하던 상호와 성철은 그 낌새를 알아차리자마자 황급히 알파 리자드에게 집중했다.

“너 이 자식……. 이따가 말해.”

“아니라고! 담임인데 좀 알 수도 있지……. 에휴, 갱년기 아저씨 똥고집 때문에 개고생하게 생겼네.”

상호는 검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오랜만에 잡는 예경의 검. 그의 몸에 맞춘 검보다는 짧았지만, 키가 작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써 온 탓에 눈 감고도 그 길이를 가늠해 맞출 수 있었다. 길이야 강기로 보완하면 되는 일이긴 했지만.

그의 검에 검푸른 강기가 피어오르자 알파 리자드가 주변을 둥글게 돌았다.

‘단 한 번이면…….’

그는 검을 꽉 움켜쥐었다.

단 한 번이면 충분하다. 고하를 겨루는 데에는 단 일합으로 충분하다. 그와 예경의 내공으로 만든 초혼강기가 강한지, 수많은 리자드맨을 죽여 만든 알파 리자드의 초혼강기가 강한지.

수만 따지면 상호가 불리하겠지만.

그는 예경을 믿었다.

‘우리 둘보다 강할 리는 없으니까…….’

상호는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강검은 만들지 않았다. 검에 모든 힘을 끌어모아야 했기에.

근육도, 내공도, 마음도. 모두 한데 모아 하나로 합치고, 알파 리자드의 창끝에 집중했다.

그 창끝이 그를 향하는 순간.

‘지금.’

검과 창이 부딪혔다.

키기기긱, 철판 같은 것이 긁히고 우그러지는 소리.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검과 창의 옆에서 비명을 질러대는 듯한 소리가 수천 겹으로 겹쳐 들렸다.

둘 다 뚫리지 않았다.

상호는 더욱 강하게 검에 힘을 주었다.

쉬익……

알파 리자드의 옆으로 성철이 달려들었다.

성철의 손에는 부러진 단창이 들려 있었다. 단창이 머금은 하얀 강기가 알파 리자드의 옆구리를 향해 불꽃을 날름거렸다.

그토록 거대한 마나를 모를 순 없었으리라.

알파 리자드는 상호의 검을 쳐내고 재빨리 성철의 창을 막았다.

채앵

상호와 성철, 알파 리자드 모두 물러나 재차 자세를 잡았다.

뚫리지 않는다. 그의 강기도, 놈의 강기도. 상호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예경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안 부러지긴 했는데…….’

어제와는 달라졌으니 분명 성과는 성과인데, 그래도 놈의 창을 부수기를 기대했던 터라 기쁜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땅을 박찼다.

채앵, 챙강……

알파 리자드는 이번에도 그의 칼날에 창끝을 맞춰 막아냈다.

검을 아무리 휘둘러도 놈에게는 아무런 빈틈이 없었다. 마치 인간보다 시간을 느리게 느끼는 듯이. 심지어는 뒤에서 협공하는 성철의 공격조차 모두 막아내는 중이었다.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검을 계속 휘둘렀다.

‘그럴 리…….’

순간 그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찰나의 순간 알파 리자드의 근육들이 멈춘 것을.

‘……뭐지?’

마치 얼음땡을 하듯, 일시에 모두 굳어 버렸다.

말 그대로 찰나. 상호도 간신히 포착할 정도의 순간.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아주 잠깐의 시간.

상호는 온 힘을 다해 집중했다.

‘이놈…….’

빈틈이 있었다. 아주 잠깐 동안 몸이 멈추는 빈틈.

근육이 멈추는 게 아니다. 뇌가 멈추는 것이다. 지능이 낮은 생물들이 이따금씩 몸을 우뚝, 우뚝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는 것처럼.

신경은 예리하게 날이 서 있지만, 뇌는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강제로 휴식을 갖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놈은 그의 검을 반사신경으로 막고 있다.

놈이 뇌를 쓰게 해서 몸을 정지시키려면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 계산을 마친 상호는 검을 잡지 않은 손에 한껏 내공을 담았다.

그리고 성철을 향해 내쏘았다.

“형!”

“어, 어?!”

성철은 당황해서 얼을 타다가, 상호의 강기가 닿기 직전에 겨우 호신강기를 둘렀다.

콰아아앙

반탄강기가 그의 강기를 반사했다.

일반적인 강기의 부딪힘보다 훨씬 큰 폭발.

“얌마! 이게 무슨…….”

상호는 성철의 말을 씹고 알파 리자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예상대로 알파 리자드의 몸은 일시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듯 그대로 멈춰 있었다. 상호는 쾌재를 부르며 놈의 목에 검을 휘둘렀다.

그때.

푹……

알파 리자드의 창이 번개처럼 움직여 상호의 손목을 찔렀다.

‘……!’

상호의 눈동자에 당황이 깃들었다.

설마 이것까지 반응할 줄이야. 분명 멈춘 것을 확인하고 검을 휘둘렀는데.

‘……젠장.’

아무래도 놈의 반사신경은 인간을 한참 초월한 듯싶었다.

창에 찔린 손목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쳇.’

그는 바로 팔을 베어냈다. 창에 발린 석화독이 몸에 퍼지기 전에.

그리고 검을 내공으로 달궈 잘린 팔의 단면을 지졌다.

“크으…… X빨.”

욕이 안 나올 수는 없는 고통이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상호는 왼손으로 검을 잡았다. 좌수검은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없는 오른손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시선이 성철을 향했다.

“형.”

“얌마! 조준도 못하고 팔까지 찔리고…… 너 왜 이렇게 약해진 거야?! 그동안 학생들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치맛장난 치고 놀았냐!”

“염병하고 자빠졌네, 그건 형 국민학교 시절에나 있었지…….”

이제 뭘 따질 겨를이 없다. 상호는 동굴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려는데.

쉬익

알파 리자드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함을 치려는 순간. 아주 짧은 찰나. 이번에는 알파 리자드가 그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다.

‘……!’

역으로 당하게 되었다. 상호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어차피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

그의 왼손에 쥐인 검이 바람을 갈랐다.

꾸드득……

맞부딪힌 강기와 강기 사이, 무언가가 우그러지는 소리.

비정상적으로 밀집된 마나가 빛과 열을 간헐적으로 튀기고, 또 비정상적으로 밀집된 무언가가 공간을 아지랑이처럼 일그러뜨렸다.

상호는 더욱 힘주어 검을 밀어냈다.

‘네 창엔 네 영혼은 없다.’

주술사가 아닌 그도 느낄 수 있었다.

‘원혼 따위가 아무리 많아봤자…….’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죽은 자의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은 결국 살아있는 이의 몫인 것이다.

‘이길 수 있을 리 없어.’

그도, 예경도, 천색창염강기도 최강이니까.

둘이 함께라면 이길 수밖에 없으니까.

상호는 고함을 지르기 위해 들이쉬었던 숨을 힘으로 바꿨다.

“흐읍……!”

뿌드득……

검을 쥔 손에서 가죽이 마찰하고.

우지직……

알파 리자드의 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리자드맨의 온통 검은 눈에서는 구체적인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눈동자를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단 하나, 부릅뜨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상호는 알파 리자드의 부릅뜬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최선을 다했어야지.”

창의 파편이 허공에 비산했다.

* * *

성철은 알파 리자드가 도망간 숲속을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쫓을까?”

“아니.”

상호는 왼손으로 서툴게 납도를 하며 대답했다. 칼집도 왼쪽이라 넣는 모양새가 영 이상했다.

“형 발 느리잖아. 난 손이 날아갔고. 창은 부쉈으니까 그냥 도망치게 냅둬.”

“그래도…….”

“먼저 독을 푼 건 우리잖아.”

그 말에 성철도 납득했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긴 거냐?”

“그놈은 아무 생각 없이 반사신경으로만 싸우는 것 같더라고.”

그런 놈이 최선을 다해 싸웠을 리 없고, 그런 놈의 초혼강기가 그의 것보다 강할 리 없다. 상호는 그렇게 믿고 검을 휘둘렀고, 결국 그 생각이 맞았다.

상호는 바닥에 흩어진 창 파편을 발끝으로 쓸며 어깨를 으쓱였다.

“창에 진심이 없더라. 내 검엔 진심이 있었고. 그 차이지 뭐.”

“그런 헛소리는 누가 가르쳤어? 영주냐?”

“안 믿을 거면 말어.”

나빛에게 치료나 받아야겠다. 툴툴거리며 동굴로 들어가려는 상호의 어깨에 단단한 손이 턱 얹혔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철을 돌아보았다.

“뭐야, 왜?”

“아직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뭐가?”

“우리 큰딸.”

성철의 눈에 불꽃이 일렁였다.

“우리 딸 잠버릇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임마!”

“아오 진짜……. 여기까지 같이 온 거 보면 모르겠어? 작전하면서 같이 잤지, 당연히!”

“뭐, 뭐 임마? 같이 잤다고?! 야, 이 자식아! 아직 어린애잖아!”

“귓구멍에 돌멩이가 처박혔어? 잠만 같이 잤다고, 잠만! 그리고 지금 지윤이 내가 형 처음 봤을 때보다 한참 어른이야! 열아홉이라고, 열아홉. 난 그때 열여섯이었고!”

“아직 안 돼, 이 도둑놈아! 스물다섯은 돼야 적령기가 될 거 아냐! 나이부터 차야 교제를 하고 혼사를 논하고…….”

“X팔 돌겠네, 갱년기 돌대가리 때문에…….”

“얌마! 도망가지 마! 어른이 말하는데 어딜……!”

상호는 성철의 말을 씹고 동굴 속으로 내빼 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

“머라꼬예?”

지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돌아가라꼬예?”

“응.”

상호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윤이 넌 돌아가. 여기 이 골렘 아저씨랑.”

“…….”

지윤이 그를 노려보았다.

앙다문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했다. 원망, 의문, 불만, 욕, 혹은 그 모두. 그 수많은 말들을 잘근잘근 씹어 다시 내뱉을 때에는 딱 두 글자가 되어 있었다.

“와예.”

“골렘 아저씨가 발이 느려서 우리랑 같이 못 가. 네가 같이 가서 길안내 해줘.”

앞은 사실이었지만, 뒤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한반도로 돌아가는 건 성철 혼자서도 충분했다.

하지만 상호는 모르는 척 지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중요한 분이니까 너한테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그라믄 쩌그 언니야헌티 부탁혀도 되는 거 아입니꺼. 와 하필 진데예.”

“지윤이 너도 어차피 마신하고 싸우지 못할 건 알고 있었잖아.”

“…….”

그 말이 맞았다. 초강기만으로 싸웠다가는 저승부대원들처럼 죽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윤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전까지는 같이 갈 수 있잖아예.”

“너여야 해서 그래.”

상호의 양손이 지윤의 양 팔뚝을 잡았다.

“몬스터들한테 제일 편견 없는 게 너잖아. 네가 데려다줘. 선생님 부탁이야.”

“…….”

지윤이 새침하게 그를 흘겨보았다.

“갚으이소.”

“응.”

상호는 씩 웃고 지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모셔다 드려.”

“……예.”

아직도 입이 삐죽했지만, 지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철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성철의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아저씨예. 가입시더.”

“…….”

“쌤예, 이 아재 말을 못 하는데예.”

성철은 당황해서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상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꼴을 보니 지윤과 함께 가다가 정체를 들킬 것을 걱정하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 성철은 입을 열어 따질 수 없었다.

“아저씨예~.”

“…….”

“안 따라오믄 들고 갑니더.”

결국 성철은 지윤을 따라 걸었다.

상호는 비로소 걷기 시작한 부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지윤을 불렀다.

“지윤아.”

“와예~. ……웁.”

심통이 난 듯 심드렁하던 대답은 틀어막혀 입속으로 사라졌다.

지윤은 자신을 끌어안은 상호를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쌤예?”

“지윤아.”

그가 더욱 단단히 끌어안자 지윤의 뺨이 붉어졌다.

“남사시럽게 와 이러심꺼, 남들 다 보는디…….”

“넌 모를 거야.”

상호는 지윤의 머리 옆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널 가르칠 수 있었던 게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

지윤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넓은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그래 말해놓고 안 돌아오믄 쥑이삡니더.”

“그래, 그래.”

상호는 지윤을 다독이고 놓아주었다.

“살펴 가.”

“……꼭 돌아오이소.”

지윤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성철과 함께 걸어갔다.

이윽고 둘의 모습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상호도 돌아서서 자신의 일행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출발하……?”

아이들이 그를 향해 불타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해련까지.

그는 진땀을 흘리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왜 또 그러세요들…….”

“왜 쟤만 안아줘?”

“저희는요?”

“므앙.”

“……밤에.”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고 일단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뭐라 따지기 전에 도망치기 위해서.

다행히 아이들은 뾰로통한 표정만 지을 뿐,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밤이 걱정되긴 한데…….’

화를 잠시 뒤로 미룬 것뿐이니.

일단은 작전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상호는 도현과 해련을 흘끗했다.

성철도 찾았고, 알파 리자드도 사실상 처리했으니, 이제 부대를 다시 나눠 적들을 교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니…….’

기왕 여기까지 다 같이 온 이상, 다 같이 힘을 합쳐서 악마와 싸우는 게 나을지도.

그런 고민을 하며 걷는데 곁에 세희가 다가왔다.

“선생님.”

“응?”

“검은 선생님이 쓰실 거예요?”

“아, 맞다.”

상호는 예경의 검을 풀어 세희에게 건넸다.

“다시 바꿔. 그거 줘.”

“제가 이거 써도 돼요.”

“아냐, 바꿔. 내 내공이 더 많으니까.”

강검을 만들 수 있어도 무기가 있으면 그 길이만큼의 내공을 아낄 수 있다. 그에겐 예경의 몫이 있으니 그가 부러진 검을 쓰는 것이 나았다.

곧 세희가 그에게 부러진 검을 건네고 예경의 검을 허리에 찼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었다.

“그 칼은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선생님한테도요.”

“여자 칼이라 나한텐 좀 짧아.”

“여장하시면 되잖아요.”

“…….”

“아직 핸드폰에 곱게 저장되어 있어요.”

“…….”

둘은 말없이 동쪽을 향해 걸었다.

* * *

“아저씨예.”

“…….”

“진짜 말 못 합니꺼?”

“…….”

성철은 묵묵히 걷기만 했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지윤이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말을 몬 하믄 우리 쌤이랑 친구 묵었을 리가 읎잖아예.”

“…….”

“걍 지랑 말하기 싫은 거 아입니꺼?”

“…….”

“알았어예. 인자 말 안 할 깁니더.”

지윤은 툴툴거리며 돌부리를 걷어찼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도 근육과 신경의 발달 정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수준을 보아하니 아마 상호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았다. 거기에 가르침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내공까지.

감탄을 하고 칭찬을 하고 싶었지만, 성철은 지윤을 말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충분하지.’

성철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냥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목숨 걸고 싸웠던 이유는 하나뿐. 가족들을 지키는 것.

목표를 이뤘으니 그 이상은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돌아가면 어디서 지내야 하나……. 음?’

어디선가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수년 동안 느껴왔던, 이제는 아내의 기척보다 훨씬 익숙해진 기운. 성철은 그 기운의 주인을 알아차리자마자 지윤의 앞으로 불쑥 나섰다.

지윤은 앞을 가로막은 성철의 등을 바라보며 눈을 끔뻑였다.

“아저씨예?”

“…….”

“먼 일입니꺼?”

성철은 그 순간까지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가 느낀 기운은 그들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땅을 박차는 소리를 내면서.

이윽고 나무 사이로 새하얀 리자드맨이 튀어나왔다.

‘……!’

성철은 황급히 부러진 창을 들어 올렸다.

알파 리자드의 앞발에는 상호에게 부서졌던 창의 조각이 발톱처럼 박혀 있었다. 총 열 개의 조각 하나하나마다 저릿한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 위로 번득이는, 알파 리자드의 검은 눈.

‘이놈…….’

분위기가 다르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놈의 앞발이 성철의 창날에 닿았다.

촤앙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창날이 박살 났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얼이 빠진 성철은 자루만 한 뼘 남게 된 창을 버리고 물러나려다가, 등 뒤에 지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멈칫했다.

물러설 수 없다.

성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촤아악

제멋대로 깨진 금속 창날이 성철의 가슴을 후볐다.

‘크윽……!’

그래도 성철은 입을 열지 않았다.

굳게 다문 입 아래 가슴에서 검은 피가 흘렀다. 다닥다닥 붙은 돌멩이 밑 아직 남아있던 생물의 피부가 날카롭게 찢겨 있었다.

그는 이미 석화독에 중독되었기에 출혈 외의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만약, 지윤이 당하게 된다면.

‘…….’

끝까지 숨기고 싶었는데.

하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윤아.”

“……에?”

갑자기 나타난 리자드맨을 보고 당황하던 지윤은 골렘의 목소리를 듣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부지예?”

“도망쳐, 빨리.”

“아부지……?”

목소리처럼 덜덜 떨리는 손이 성철의 등에 얹혔다.

“아부집니꺼? 아부지예……?”

“도망치라고!”

“아부지…….”

지윤의 손에 힘줄이 확 솟았다.

“못 갑니더.”

“지윤아, 제발 아빠 말 좀 들어라…….”

“우예 만났는디예, 우예 찾았는디예……. 내는 못 갑니더. 못 가예.”

주먹을 쥔 지윤의 온몸에서 하얀 강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었다. 그 정도론 저승부대원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알파 리자드와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성철은 돌로 된 이를 갈며 알파 리자드를 노려보았다.

‘……안 돼.’

둘이서는 놈을 이길 수 없다.

상호도 간신히 깨뜨린 놈의 강기. 부대원들 여덟을 동시에 상대하는 신체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창날에 발린 석화독. 성철은 독에 당했어도 목숨은 부지했지만, 지윤에게도 그런 운이 따를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윤에게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다.

“지윤아.”

“안 간다꼬예! 비키이소! 지가…….”

성철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버럭 소리쳤다.

“가라고!”

“……윽.”

벽력같은 호통에 깜짝 놀란 지윤이 뒷걸음질을 쳤다.

원망이 그득 담긴 눈에 찰랑찰랑 눈물이 고여 갔다.

“아부지는…….”

“…….”

“우리 버리고 갔으믄서…… 인자는 아부지를 버리라꼬 합니꺼.”

“……가.”

성철은 주먹을 꽉 쥐고 자세를 잡았다.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거칠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미안하다.’

아버지 실격이라도 어쩔 수 없으니. 성철의 주먹에서 새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비록 강기 대 강기로는 놈을 이길 수 없지만.

“흐읍!”

휘두른 주먹에서 마나의 폭발이 일어났다.

콰앙, 콰앙,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일어난 폭압이 알파 리자드를 조금씩 뒤로 밀어냈다. 알파 리자드는 비틀거리면서도 땅을 박차고 달려들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세찬 폭풍이 알파 리자드의 중심을 흩트려 놓았다.

알파 리자드의 눈에 뜨거운 무언가가 비쳤다.

키이익

그동안과는 전혀 다른 모습.

시체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성철을 향해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생생하게 눈을 번득이며.

성철은 놈을 밀어내면서도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젠장.’

성철은 두 주먹을 부딪쳤다.

반탄강기 사이에서 수없이 튕겨진 마나가 힘의 소실 없이, 온전히 폭발했다.

콰아아앙

성철과 알파 리자드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알파 리자드가 처박힌 나무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성철이 부딪힌 바위는 박살이 나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둘 다 아무런 내상도 입지 않은 듯 금방 몸을 일으켰다.

성철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피해를 입힐 수가…….’

놈을 쓰러트릴 수단이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장력을 터트리는 건 내공 소모가 극심한데. 그걸로 피해조차 주지 못하고 밀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놈이 유리해지는 건 자명한 사실.

성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래.’

어차피 죽었어야 했던 목숨이니까.

등에 창을 맞은 순간부터 오늘 이날까지. 그는 죽은 듯 살아왔고 실제로 이미 죽은 게 맞았다. 사회적 인간으로서도, 생물학적 인간으로서도.

다만 아주 잠깐, 지윤과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살아버렸지만.

“흐읍……!”

사람으로 죽을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것도 딸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성철은 힘차게 발을 내딛고 주먹을 뒤로 당겼다.

쿠우웅……

주먹에 무게가 실렸다.

내공과 힘. 이제는 피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인 무언가. 몸이 돌이 되어도 여전히 그의 안을 뜨겁게 타고 흐르는 무언가가 그의 주먹에 가득히 담겼다.

그 손에 담긴 힘을 알아보았을까. 곧 알파 리자드도 그를 노려보며 모든 앞발가락을 펼치고 몸을 수그렸다.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올 듯이.

성철은 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콰지지직

주먹과 깨진 창날의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막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했던 정체불명의 강기를 따라잡은 것이다.

우지직 우지직, 공간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조금씩 둘의 사이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강기를 조금씩 뚫어내고 있었다.

성철이 희망을 갖고 조금 더 주먹에 힘을 주려는데.

창날이 성철의 질긴 살갗을 뚫었다.

‘……?!’

알파 리자드의 강기가 그의 강기를 뚫고 있었다.

이 정도론 부족했을까. 결심이 부족했을까. 이번에는 정말로 따라잡은 줄 알았는데.

문득 그의 시야에 알파 리자드의 까만 눈이 들어왔다.

‘이놈…….’

성철은 그 순간 깨달았다. 놈의 목적은 창을 되찾는 게 아니었다.

창이 부서진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놈의 목표는 처음부터 하나.

강에 독을 푼 자에게, 동족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는 것.

‘…….’

조금씩 다를지언정, 일념이란 것은 같았다.

성철은 포기를 하지는 않았으나.

‘……질 만도 하군.’

그런 생각을 했다.

곧 창날 발톱이 그의 팔을 파고들었다.

‘지윤아.’

성철은 우수수 무너지는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잘 해내라…….’

아비가 죽었다고 생각한 지금까지처럼.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잘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성철은 팔을 다 부수고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앞발을 지켜보다가 눈을 감았다.

빠직……

그 순간.

나뭇가지 밟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알파 리자드의 면상을 후려쳤다.

뻐어억

통렬한 소리와 함께 뱅글뱅글 날아가는 알파 리자드.

성철은 눈앞에 서 있는 지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윤아?”

“못 간다구예.”

성철을 등진 지윤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내는…… 아부지처럼 가족 버리는 호로새끼가 아입니더.”

몸에 두른 호신강기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쌤허고 약속했심더. 아부지 같은 헌터가 될 기라고……. 그거 다 취소입니더. 아부지 같은 인간 되믄 안되겠어예. 내는 기냥 내대로 살랍니더.”

“지윤아.”

지금이 기회다. 성철은 부서진 팔을 움켜쥐고 말했다.

“어서 도망…….”

“못 갑니더. 아니 안 갑니더.”

지윤은 땅에 처박혀 있는 알파 리자드를 마주했다.

성철의 공격에는 꿈쩍도 않던 알파 리자드도 방금의 일격은 예상 밖이었는지, 잠시 혼이 빠졌던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제는 눈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고.

성철은 다급히 지윤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윤아! 빨리……!”

“내는 내대로 산다구예.”

지윤은 성철의 손을 뿌리치고 주먹을 들었다.

알파 리자드가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앞발에서는 성철의 팔을 부쉈던 그 강기가 다시 넘실거리고 있었다. 성철은 그 모습을 보고 애가 타서 지윤의 앞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지윤이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컥!”

“지금 못 이기믄 어차피 쫓기가 뒤지는 깁니더.”

지윤의 주먹에서 강기가 눈부시게 빛났다. 찬란한 오색 빛으로.

성철은 한 번도 보지 못한 빛깔이었다.

“……!”

“내는, 아부지 같은 헌터는 안 될 기라예. 버리고, 도망치고, 숨는 인간은 안 될 기라고예. 내는, 당당허게 아부지 데리고 갑니더. 어무이랑 동생덜 앞에……. 내는.”

지윤의 발이 힘차게 땅을 디뎠다.

“……절대로!”

동시에 알파 리자드가 달려들었다.

오색찬란한 주먹과 흉흉한 기운이 서린 창날. 두 개의 강기가 부딪히기 전, 지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숲을 울렸다.

“버리지 않을 기라고오오오!”

하얀빛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 * *

쿠르르……

산이 고통스런 신음을 마저 뱉었다.

그 낮고 굵은 신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성철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피어오른 흙먼지도, 떨어지는 나뭇조각도.

저 거대한 구덩이를 가릴 수는 없었다.

“…….”

그 앞에 그의 딸이 우뚝 서 있었다.

세상을 날려버릴 듯한 강기를 손에 두르고, 태양처럼 뜨거운 기운을 온몸에 두른 채.

그리고 그 너머, 구덩이 한가운데에 알파 리자드가 대자로 뻗어 있었다.

“……지윤아.”

“…….”

“어떻게…….”

지윤은 대꾸하지 않고 구덩이로 내려갔다.

성철은 황급히 일어나 지윤의 뒤를 따랐다. 그가 도착했을 때에는 지윤이 알파 리자드의 앞에 서서 오색 강기를 두른 주먹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알파 리자드를 흘끗하고 지윤의 팔을 잡았다.

“지윤아.”

“놓으이소. 끝장은 봐야…….”

“끝났어.”

창 조각이 박힌 앞발가락이 돌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나한테 복수하려고…… 목숨까지 버렸는가 보다.”

“…….”

지윤은 그제서야 주먹을 내리고 강기를 거뒀다.

그렇게 전의를 내려놓은 것도 잠시, 성철을 돌아본 지윤은 갑자기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부지예.”

“……응?”

“와 말 안 하고 있었습니꺼.”

“그게…….”

상호에게 한 변명은 많았지만, 딸에게 할 변명이 많을 리가 있나. 성철은 진땀만 줄줄 흘리다가 다급히 다친 팔을 부여잡았다.

“아이고, 아이고 아프다……. 지윤아, 그 이야기는 나중에…….”

“뒤질랍니꺼?”

“담임이 어떻게 가르친 거야! 상호 이놈을 그냥…….”

“쌤은 잘못 없심더. 괜히 말 돌리지 마이소. 턱주가리를 돌리뿔기 전에…….”

“……미안.”

성철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지윤은 그런 성철을 진짜로 한 대 칠 듯이 노려보다가, 성철이 부여잡고 있는 팔을 보고는 슬며시 주먹을 내렸다.

“그 팔은 우짭니꺼.”

“돌 먹으면 돼……. 땅 파먹으면 나아.”

“그럼 패도 되겠네예.”

“아니……!”

지윤이 성철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정말로 턱주가리를 돌려버리려는 걸까. 성철은 식겁해서 뒤로 물러나려다가 등허리를 끌어안는 팔에 멈칫했다.

“……아부지.”

지윤이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째 지금까지 안 왔습니꺼…….”

“…….”

성철은 가늘게 들썩이는 지윤의 등을 토닥였다.

돌이 된 가슴으로도 지금 흘러내리는 눈물의 뜨거움은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해.”

“미안하믄 다입니꺼…….”

“미안해…….”

그 말밖엔 할 말이 없다. 성철은 지윤을 마주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용암처럼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같이…… 돌아가자.”

부녀는 서로를 안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던 님을 찾은 망부석처럼.

돌이 되어도 기뻐할 것처럼.

* * *

“지윤이는…….”

나빛이 상호가 까준 잣을 혁구에게 먹이며 중얼거렸다.

“잘 돌아갔을까요?”

“그럴 거야.”

긴 시간이 지났지만 상호는 아르게스의 지리를 기억하고 있었으니, 성철 또한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수천 번, 수만 번 그 길을 꿈꿔왔을 것이고.

상호는 잣을 하나 더 까서 나빛에게 쥐여주었다.

“혁구 그만 주고 너도 먹어봐. 맛있어.”

“네…….”

나빛이 잣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웃었다.

“맛있어요, 헤헤…….”

“그치? 여기서 부대원들이랑 잣 엄청 먹었…….”

“강 선생~.”

순간 상호의 어깨가 움찔했다.

“……네.”

“잣이 있으면 어른한테 먼저 자시게 하는 게 도리 아닌감~?”

“…….”

“강 선생~.”

해련이 씩 웃고는 입을 벌렸다.

“나한테도 하나 줘봐. 아~.”

“직접 까 드세요.”

“뭐? 잣이나 까잡숴? 아하~ 그래그래~. 함 먹어 볼까아~.”

“어딜 보는 거예요! 그 잣이 그 잣이 아니에요!”

“잣까~.”

“아니……!”

상호는 끈질기게 달라붙는 해련을 밀어내고 한숨을 쉬었다.

동쪽으로 한참을 걸어서 머무르게 된 동굴. 이제는 대놓고 추워져서 기온이 영하를 밑돌고 있었지만, 태화의 검은 불 덕분에 그럭저럭 따뜻하게 지내는 중이었다.

세희는 또 운기조식 중이고, 태화는 누워 있고. 다혜도 누워 있고, 은율도 운기조식 중이고.

상호는 은율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여자 헌터는 없었을까…….’

은율이 오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곳인데.

세희로 변장할 사람이 필요하긴 했지만, 또 그게 가능한 사람들 중에서 은율이 그럭저럭 강한 편이긴 하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악마들이 득시글거리는 아르게스 한복판에 은율이 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은율이, 눈하고 손은 빠른데…….’

강기만 좀 어떻게 하면 저승부대원들 무릎만큼은 따라올 수 있을 테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윤처럼 변장한 수호부대원과 도현이 앉아 있었다.

‘……흠.’

도현은 마법공학 통신장비로 바쁘게 문자를 보내는 중이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도현에게 다가갔다.

“뭐 해?”

“아, 어.”

도현은 살짝 당황하며 통신장비의 화면을 숨겼다.

“그냥, 전선 상태 확인하는 중.”

“방금 좀 웃지 않았어?”

“내가? 아냐 임마. 잘못 봤겠지.”

“그거 까봐.”

상호가 검지를 까딱이자 도현은 진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결국은 한숨을 푹 쉬고 상호에게 통신장비를 넘겼다.

“그래, 봐라 봐…….”

“뭘 했길래……. 응?”

상호는 화면을 확인하고 눈을 끔뻑였다.

-저 너무 외로워요... 서방님 언제 오세요...?

-금방 간다

-잘 지내고 있어?

-저는 잘 지내요... 외로운 것만 빼면...

-서방님 너무 보고싶어요...

-못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걸 못 기다려?

-뽀뽀해줄 테니까 참아

-네...

-쪽~

-쪽쪽~

“…….”

육갑을 떨고 있다. 상호는 통신장비를 꺼버리고 도현을 돌아보았다.

“깨를 볶네.”

“뭐 임마. 너도 신혼 해보면 알아.”

“부협회장은 좋겠네. 형수랑 직통으로 문자도 하고.”

“너도 효은이 부르든가.”

“…….”

대충 신혼 비슷한 걸 보낸 적은 있긴 한데. 그는 허리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슬슬 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씻을 사람 씻자. 태화야. 와서 저쪽으로 물총 쏘고 있어.”

“우씨, 또 샤워기 취급이야! 파업이야! 나 안 해!”

“하지 마라 임마. 꼬질~꼬질한 채로 너 껴안고 잘 거니까.”

“어디로 쏘라구?”

상호는 동굴 안 깊은 곳을 가리키고 그리로 향했다.

* * *

그렇게 씻고, 첫 불침번이 되었다.

그의 뒤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우비를 몇 겹으로 덮고 자고 있었다. 바위에 앉아 그들을 흘끗하던 상호는 다시 앞을 돌아보았다.

‘얼마 안 남았다.’

심장부까지 사흘, 빠르면 이틀.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설산의 산맥만 넘으면 그놈이 사는 땅이 기다리고 있다.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린,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진 땅이.

‘조금만 더 가면…….’

상호는 고요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과 별이 가득 수놓인 밤하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그가 열여섯일 때에도, 스물다섯이 된 지금에도. 검푸른 배경에 별들이 반짝반짝한 것이 마치 아이들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중심에 둥실둥실 떠 있는 보름달.

꼭 예경이 그를 향해 방긋 웃는 것 같았다.

‘…….’

상호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여서.

그렇게 예경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한 자락 마나가 그의 눈을 스쳤다. 안대로 가려진 눈을.

그는 가려지지 않은 눈을 떴다가 휘둥그렇게 부릅떴다.

“……뭐야.”

멀지 않은 곳, 탁 트인 벌판의 야트막한 언덕 위.

개 해골을 머리에 쓴 자가 홀연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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