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492. 이 땅의 주인들
“그럼 지금…….”
나빛이 그를 품에 안은 채 속삭였다.
“교장선생님이랑, 다혜 언니랑, 부협회장 아저씨가…… 저희인 척 도망 다니고 있는 거예요?”
“응.”
상호는 조그만 손으로 통신장비의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오늘만 지나면 된다. 오늘만 지나면 멈추지 않고 이 땅의 심장부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는 화면의 버튼을 눌러 지도를 최신화시켰다.
일본보다 동쪽에서 붉은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무사한가 보다. 조금씩 움직이네.”
“이거예요?”
“응.”
나빛이 그에게서 통신장비를 받아들었다.
상호는 나빛의 품에서 빠져나와 움집을 쓱 둘러보았다. 세희는 검을 무릎에 올린 채 정좌해 운기조식을 하고 있고, 지윤은 가방을 베개 삼아 누워 있고.
태화는 웬일로 잠을 안 자고 말똥말똥하게 깨어 지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다 물었다.
“태화야.”
“응?”
“뭐 해?”
“……아무것도 아냐.”
태화가 말을 우물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더 궁금해진 상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태화와 지윤의 상태를 살폈지만, 평소와 달라 보이는 건 찾지 못했다.
“너희 싸웠어? 나 없을 때 무슨 일 있었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태화는 이번에도 시원스레 말을 해주지 않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 말을 들은 지윤이 고개를 들어 상호와 태화를 돌아보았다.
“이 가스나 또 뭔 짓 했어예?”
“아니. 태화가 뭐 보고 있는 것 같길래. 아닌가 보다.”
상호는 조그만 어깨를 으쓱였다.
“세희 곧 일어나겠다. 밥 먹고 잘 준비 하자.”
“같이 씻는 거지?”
“……선택권이 있긴 해?”
“없엉.”
“…….”
“일루와!”
“야, 밥부터 먹자고! 밥부터…….”
그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 준비를 했다.
* * *
“X발창X…….”
상호의 중얼거림에 곁을 걷던 예경이 화들짝 놀랐다.
“상호야?”
“아니…….”
목소리가 너무 컸을까. 예경이 들을 줄 몰랐던 상호도 덩달아 놀라 얼굴을 붉혔다.
“혼잣말이에요! 혼잣말…….”
“누나 심장 떨려, 상호야…….”
“안 할게요, 안 할게요. 안 하면 되잖아요…….”
“뒤에 두 글자만 하지 말아줘……. 앞쪽은 밤에는 해도 돼…….”
“안 한다고요, 다 안 해요.”
그는 한숨을 푹 쉬고 복도를 걸었다.
저승부대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반년째가 된 겨울. 오늘도 기지에 복귀한 첫날부터 급양관과 대판 싸웠다. 부식으로 주는 과일의 개수가 다섯 개나 비어서.
덕분에 아침부터 기분이 퍽 더러웠다.
‘고생도 안 하는 년이 관리도 못 하면 처맞아야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생활관 문을 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효은은 환자를 치료하라며 국군병원에 반강제로 끌려갔고, 민정은 명욱과 함께 오크에 관해 보고 중일 터.
지금이 기회였다.
‘이번엔 안 걸리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리라.
안 그래도 기분이 나빴는데 잘 됐다. 상호는 예경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닫았다.
그가 문을 잠그자 예경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너무 빠르잖아요.”
“두근두근!”
“제가 두근거리게 만들 기회를 주세요…….”
예열이 너무 빠르다. 상호는 커튼을 치기 위해 창가로 걸어가며 한숨을 폭 쉬었다.
그런 그를 예경이 뒤에서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콩닥콩닥.”
“……발딱발딱.”
“응?”
예경이 깜짝 놀라 입을 가리며 그에게서 물러났다.
“어머, 어머……. 상호야?”
“아니 어느 장단에 맞추라고요……!”
“상호가 그렇게 받을 줄 몰랐어…….”
“진짜…….”
사람 무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상호는 눈길을 옆으로 돌리며 뺨을 시뻘겋게 붉히다가, 어느새 다가온 예경의 손길에 허리를 움찔했다.
예경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조금 더 두근두근 하러 갈까?”
“…….”
그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 * *
“후아…….”
민정은 샤워장을 나서며 수건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기지로 복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은 뜨거운 물로 씻어줘야 몸도 마음도 소독이 된다. 노곤했던 몸의 피로가 싹 씻겨나가고 기분 좋은 나른함만 남은 채였다.
‘낮잠이나 잘까…….’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생활관을 향했다.
휘파람을 불며 가벼운 걸음으로 생활관에 도착했는데, 문고리를 돌려 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민정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뭐지?’
옷이라도 갈아입는 걸까.
그렇다면 열고 들어가도 괜찮을 것이다. 민정은 주변을 쓱 둘러봐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으로 자물쇠를 땄다.
짤깍……
“예경아~. 상호야~. ……어?”
민정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상호……야?”
“누, 누나.”
깜짝 놀란 상호가 이불을 급히 끌어 올렸지만, 이미 볼 장 다 본 후였다.
상호와 함께 이불을 덮은 예경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어, 언니…….”
“예경……아?”
“그, 그게 있잖아…….”
이불 아래로 삐져나온 상호와 예경의 맨다리.
민정은 그 모습을 보고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 * *
“그러니까…….”
명욱이 탁자에 둘러앉은 예경과 상호, 민정을 쓱 둘러보았다.
“친남매가 아니었다?”
“……네에.”
예경이 어색하게 웃었다.
“속여서 죄송해요.”
“으음…….”
명욱이 팔짱을 끼고 입맛을 다셨다.
상호의 옆에서는 민정이 아직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하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밖으로 튀어나오려 한다는 듯이.
그래도 설명을 듣고 난 후엔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남매……가 아니었구나.”
“으응.”
“사귀는…… 거야?”
“응. 제자이기도 하고, 애인이기도 하고……. 뭐 그런 사이.”
“그랬구나…….”
민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너희가…… 정말로 선을 넘은 줄 알고…….”
“아하하……. 숨긴 우리 잘못이긴 해~.”
“몰랐어…….”
“몰랐겠지~.”
예경이 씩 웃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쳇.’
이제 예경과 같은 방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남매가 아닌 게 들통났으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입을 삐죽이는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명욱이 돌연 물었다.
“그럼 누가 성을 바꾼 거야? 상호냐?”
“네.”
“원래 뭐였는데?”
“강상호요.”
명욱이 피식 웃었다.
“훨씬 어울린다.”
“……네.”
“하여튼 그래서, 남매가 아니었다……라.”
상호와 예경의 몸이 움찔했다.
“부대원끼리의 연애는 그닥 반갑지 않은데 말이야. 그래도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사귀는 사이였다니. 이제 와서 헤어지라고 할 수도 없군.”
“그렇죠. 헤헤…….”
“상호. 예경.”
둘은 허리를 꼿꼿이 펴서 자세를 바르게 했다.
예경을, 이어서 상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명욱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둘이서만 쓸 방이 필요한가?”
그 말에 상호는 한숨을 쉬었고, 예경은 씩 웃었다.
“그럼 좋죠.”
“부대장한테 말해 보마. 그리고 부대원들한테 말해도 되나?”
“네. 말하셔도 괜찮아요.”
“알겠다.”
명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 예경. 너희는 가봐.”
“넵.”
둘은 부리나케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둘이서만 하고픈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에.
문이 닫히자 명욱은 민정을 돌아보았다.
“민정.”
“네.”
“아쉽나?”
민정이 엷은 한숨을 쉬고 쓰게 웃었다.
“처음부터 사귀고 있었다니까…… 나이 탓을 할 수도 없네요.”
“일찍 접는 게 나아.”
“물론이죠. 그냥…….”
이어지지 못한 말을 명욱이 맺었다.
“상호가 너무 치명적이냐?”
“…….”
“이놈은 여자를 얼마나 꼬시고 다니는 건지 모르겠군.”
명욱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도 가서 쉬어라. 둘이 또 뭐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꼭 노크하고.”
“네에…….”
곧 민정도 터덜터덜 걸어 방을 나섰다.
* * *
『가는 건가?』
『어.』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죽이러 가야지. 머물게 해줘서 고맙다.』
『별것도 아닌 걸 고마워하는군.』
드카노스는 툴툴거리고는 마을 어귀에 선 그들을 쓱 둘러보았다.
신을 죽이러 간다는데 여린 소녀 넷만 있는 게 영 미덥지 않았을까. 오크의 초록색 얼굴이 뚱한 표정을 짓다가 세희를 향했다.
『이 아이.』
드카노스는 세희의 검을 흘끗했다.
『그때의 너와 비슷한 냄새가 나는군.』
『어떤 냄새?』
『우리 피 냄새.』
상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전투에서…… 잘 싸워줬지.』
『너 같은 전사가 되길 기원하마.』
주황색 눈동자가 이번에는 나빛을 향했다.
『이쪽이 소문의 주인공인가.』
『어떤 소문?』
『전쟁에서 돌아온 부족원들이 그러더군. 인간은 신이 함께 싸운다고…….』
『부러우면 너희 신으로 모시지 그래.』
『그렇지만 전사는 아닌 것 같군. 우린 오직 전사만을 섬긴다.』
드카노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도르노라.』
그곳에는 드카노스보다 더 복잡한 문양을 피부에 그린 여자 오크가 커다란 질그릇을 하나 들고 서 있었다. 상호는 그 질그릇에 든 게 지난번 잡은 사슴의 피라는 것을 깨달았다.
‘썩었을 텐데……?’
저걸 어따 쓰나, 의아해서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여자 오크가 그릇에 손가락을 담갔다. 검지와 중지 두 개를.
그리고는 손가락을 꺼내 상호에게 들이밀었다.
『잠깐만, 잠깐만…….』
상호는 그 고약한 냄새에 식겁해서 몸을 뒤로 뺐다.
『이거 뭔데?』
『피와 약초를 섞은 거다.』
『아니 그건 알겠는데……, 왜?』
『축복이지. 도르노라는 우리 부족 주술사다.』
상호가 물러나자 도르노라의 손이 가장 가까이 있던 나빛을 향했다. 나빛은 동글동글한 눈을 크게 뜨고 그 손을 바라보다가 상호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괜찮아. 축복이래.”
“네.”
나빛은 눈을 감고 얼굴을 내었다.
곧 도르노라가 나빛의 얼굴로 손을 뻗다가, 잠시 멈칫하고 상호를 돌아보았다.
『원하는 축복이 있나?』
상호는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한마디를 했다.
『건강.』
피 묻은 손가락이 나빛의 양 볼을 한 번씩 콕, 콕 찔렀다. 새색시의 연지를 찍듯이.
이어서 도르노라가 지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이 아이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도 가능한가?』
『가능하다.』
『가족이 다 함께 행복해지게 해줘.』
지윤의 얼굴에 붉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걍 낙서 아냐?”
“다음은 너야, 임마.”
상호는 태화의 등을 떠밀고 도르노라에게 말했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버림받지 않게 해줘.』
도르노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릇을 바닥에 놓더니, 두 손을 피에 담갔다 빼고는 태화의 얼굴을 덥석 잡았다.
솥뚜껑만한 양손 사이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갸아아악!”
“좀 참아, 임마.”
“내 피부! 내 우유푸딩찹쌀떡 피부! 갸아아아아악!”
다음은 세희.
이번에는 상호의 고민이 많이 길었다.
『……좋은 제자.』
『응?』
『좋은 제자 만나게 해줘.』
점점 주문이 어려워졌을까. 도르노라는 태화 때보다 더욱 길게 고민하다가 세희의 이마에 점을 하나 찍었다.
마지막은 상호.
도르노라가 그를 향해 돌아섰다.
『너는?』
상호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복수.』
아이들의 것보다 훨씬 짧은 내용. 도르노라도 이번에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호에게 다가와 피 묻힌 손가락을 들이밀다가, 갑자기 멈칫하고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드카노스를 돌아보았다.
『애꾸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한쪽만 해야 하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동생아.』
『에이 뭐, 팍팍 바르면 좋겠지.』
“…….”
둘의 대화를 들은 상호의 등에 진땀이 흘렀다. 이 축복이란 걸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어서.
곧 도르노라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복수가 너의 마지막 복수가 되기를.』
검지와 중지가 상호의 얼굴을 세로로 쓸었다.
눈 밑에서 시작되어 턱까지 이어진 두 개의 선. 상호는 그 길을 따라 흘렀던 수많은 눈물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떠 물었다.
『이거 언제 씻으면 되지?』
『맘대로 해라. 우리는 굳이 씻어내지 않지만 깔끔을 떠는 종족이라면 평소 살던 대로 살면 된다.』
『그런가…….』
그는 씩 웃었다.
『고마워.』
『네 스승에게 진 빚이지.』
도르노라는 툴툴거리며 돌아섰다.
그녀가 마을로 돌아가자 드카노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호 일행을 훑어보다가, 이내 상호와 눈을 마주쳤다.
『또 보자고.』
『그래.』
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술 한 잔 하자고.』
그와 드카노스는 동시에 돌아섰다.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상호는 아이들과 함께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제 아비의 도끼를 어깨에 진 드카노스가 움집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난 오크가 아냐, 드카노스.’
상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니 이해해라.’
사내끼리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놈이 되더라도.
그는 걸어가는 드카노스의 뒷모습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예경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마을을 뒤로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예경과의 ‘관계’를 민정에게 들킨 지 사흘째가 된 날.
“아 X발, 짜증나!”
국군병원에서 돌아온 효은이 바락바락 소리치며 침대에 엎어졌다.
“왜 나만 못 쉬고 끌려가서 뺑이쳐야 하는데!”
“효은이 네가 제일 성력이 강하잖아.”
침대에 앉은 민정이 타이르듯 조곤조곤 말했다.
“힘들어도 사람은 살려야지. 응?”
“왜 나야? 왜 나만 이렇게 강한 거지? 하, 진짜…….”
효은은 성력으로 집게를 만들어 탁자에 놓인 리모컨을 집었다.
그러고는 리모컨을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며 TV의 채널을 돌리다가, 맘에 드는 게 없었는지 리모컨을 내동댕이치고는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몰라, X발. 이제 나도 쉴 거야. 누가 나 찾으면 없다 그래.”
“에이, 그래도 누가 위급한 상황일지 모르잖아.”
“X까!”
상호는 이불을 뒤집어쓰는 효은을 째려보았다. 저 인간을 볼 때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 부대에 붙어 있는지.
“누나.”
“응?”
“쟨 대체 왜 우리 부대에 남아있는 걸까요?”
“답이 답을 찾네.”
“네?”
“상호는 답답이야, 답답이~.”
예경이 키득거리며 상호의 뺨을 문질렀다.
“으휴~. 이 답답이를 어쩌면 좋을까~.”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으니까 밥이나 먹으러 가죠.”
이미 때가 점심때였다.
“오늘 부식 조각케익이래요. 또 그놈들이 다 처먹기 전에 빨리 가요. 누나 케익 좋아하잖아요.”
“케익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예경은 상호를 따라 일어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효은이는 안 와? 잘 거야?”
“응.”
“케익인데?”
“귀찮아.”
“가져다 줄까?”
지가 알아서 먹게 놔두지 뭘 또 가져다 줄까. 상호는 혀를 차고 예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끼리 가요, 그냥. 저런 걸 뭐 이쁘다고 챙겨요.”
“그치만…….”
그때 효은이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나더니, 표독한 눈으로 상호를 쏘아보고는 어깨를 퍽 밀치며 그의 옆을 지나 생활관을 나갔다.
상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효은을 돌아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왜 저럴까요?”
“많이 힘들었나 봐.”
“참나, 성력 좀 쓰고 오는 게 힘들면 얼마나 힘들다고…….”
“글쎄.”
예경은 고개를 젓고 상호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가자. 누나도 케익 먹을래.”
* * *
“가다가 교장선생님네하고 잠깐 합류할 거야.”
상호는 통신장비 화면에 선을 그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아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이 지역에서. 이 땅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합류하고…… 끝나면 다시 떨어질 거야.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딱히 뭔가 달라지는 건 없긴 한데…… 그냥 알아두라고.”
“네.”
“어떤 볼일인데요?”
나빛이 물어도 상호는 얼버무렸다.
“그냥…… 하나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사람이 많아야 하는 일이라. 가보면 알게 될 거야.”
“네…….”
“출발하자.”
그들은 통신장비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 * *
“……진짜 X발!”
상호는 분통을 터트리며 생활관 문을 걷어찼다.
그의 뒤에는 엄한 표정을 지은 예경이 있었다.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딱 붙어서.
“상호야. 아무리 그래도 전우를 때리면 어떡해.”
“누나도 봤잖아요!”
상호의 이가 부드득 갈렸다.
오늘따라 효은이 까칠했다. 국군병원에 출장을 가서 일하느라 피곤하고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상호에게 X랄을 해도 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효은은 자꾸 상호의 부모를 건드렸고.
결국 상호는 효은을 한 대 때렸다가, 부대원들이 몰려와 둘을 떼어놓는 와중에 효은이 뱉은 침까지 한 방 얻어맞았다.
거기서 더는 참지 못한 상호가 효은을 때려눕힐 작정으로 달려들었지만, 눈에 불을 켠 예경에게 역으로 제압당하고 말았다.
상호의 속에서 무언가가 확 치밀었다.
“누나, 왜 내 편은 안 들어줘요? 다 봤잖아요. 걔가 애미없네 애비없네 욕하는 거……. 근데 왜 내 편만 안 들어줘요? 왜 그런 거예요? 제발 말을 좀 해줘 봐요…….”
“나는 늘 네 편이야.”
예경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만 지금의 네 편이 아닐 뿐이지.”
“그건 또 뭔 소리예요…….”
“네가 후회하지 않게 미래의 네 편을 들어주는 거야. 너 효은이랑 척져서 네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그치만 걔가……!”
“그냥 씩 웃어버려.”
예경이 씩 웃었다.
“누나가 항상 보여주잖아. 곤란하면 그냥 웃어버려. 효은이가 널 자꾸 건드려도…… 한 번 씩 웃어. 그러면 오히려 효은이가 무안해질걸.”
“걔는 그냥 제가 화날 때까지 깐죽댄다고요…….”
“그럼 더 웃어.”
웃음이 더 환해졌다.
상호는 그런 웃음을 지을 줄 몰랐다. 전쟁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어 본 적이 없었다.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런 그에게 다시 알려주기 위해서 예경이 자꾸 웃는 것일지도 몰랐다.
“……알았어요.”
상호는 예경의 품에 머리를 박았다.
“노력…… 해볼게요.”
“응.”
예경도 그를 꼭 안았다.
“그래야 내 제자지.”
둘은 그렇게 서로를 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니 마음속의 응어리도 다 녹아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상호는 예경의 품에서 느껴지는 뭉근한 체취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아주 오래 있으면.
서서히 가슴속이 간질거리는 게, 웃음 짓는 법이 기억날 것도 같았다.
‘……웃는다, 라.’
한번 그래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그날 밤.
옷을 다 갈아입고 이불 밖으로 나온 상호에게 효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꽂혔지만, 그는 무념무상한 표정으로 무시했다.
‘역시 웃는 건 잘 안 되네.’
저런 표정으로 꼬라보는데 거기다 대고 웃을 사람은 변태밖에 없을 것이다. 상호는 변태가 못 되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가 벗은 옷을 정리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던 민정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생활관 하나 빈대.”
“응?”
침낭에 들어가 있던 예경이 고개를 들었다. 침낭의 둥그런 구멍으로 얼굴만 보이는 모습이 꼭 애벌레 같았다.
“아아, 나랑 상호랑 쓰라구?”
“응. 대장님이 그러래. 그동안 자리가 안 났는데 기지장님이 만들어 주셨나 봐.”
“아싸~.”
애벌레처럼 몸을 꼬물거리며 기뻐하는 예경을 보고 효은이 어리둥절해했다.
그러나 고개를 두어 번 갸웃거리기만 할 뿐,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다. 상호는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겨보다가 예경의 곁에 누워 침낭을 입기 시작했다.
예경이 그의 곁에 꼬물꼬물 다가붙으며 말했다.
“얼른 자자. 언니~. 불 꺼줘~.”
“으응, 스킨만 바를게.”
“응~.”
머잖아 생활관의 불이 꺼졌고, 상호는 예경의 품에 기대어 잠을 청했다.
은은한 꽃향기와 뜨뜻한 살 냄새에 취할 때쯤, 잠이 문을 열고 그를 받아들여 주었다.
* * *
“……으음.”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무언가 판때기 같은 것이 그를 들어 어딘가로 옮기고 있었다.
‘뭐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볼을 대고 누워있는 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올 뿐.
그는 곧 자신의 머리가 이불로 덮여 있다는 사실과, 그가 누워 있는 바닥이 이불로 꽁꽁 동여맨 효은의 성력 방어막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년이?’
어디 갖다 버리기라도 하려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만 손이 그를 굴려 밀어냈다. 판때기에서 데굴데굴 구른 상호는 곧 푹신한 어딘가에 안착했다.
침대인 것 같았다.
누워있던 예경의 침대가 아닌, 다른 침대.
‘뭘 하려고…….’
상호는 곤히 자는 척했다. 이불 밖에서 느껴지는 효은의 인기척에 집중하면서.
곧 그의 머리에서 이불이 걷어졌다.
“…….”
효은이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꼭 가위눌릴 때 귀신이 쳐다보는 느낌이다. 상호는 은근히 솟아나는 식은땀을 느끼며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목에서 나는 소리가 그렇게 천둥 같을 수 없었다.
스륵……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의 방향을 보아 아마 아래로 흘러내렸을 것이다. 상호는 그 소리의 위치와 방향을 파악하다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미친년이 옷은 왜 벗나.
‘어?’
별안간 가냘픈 몸이 침낭 안으로 들어왔다.
한 침낭에 사람은 둘. 본디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지만 아직 체구가 작은 둘이라 어떻게든 들어가긴 했다. 아주 조금의 빈틈도 없이 딱 달라붙게 되었을 뿐.
꼭 몸이 뒤섞일 것 같다.
이쯤 되니 도저히 자는 척을 할 수가 없었다.
“……야.”
상호는 코앞에 있는 효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옷 하나 걸치지 않은 맨 어깨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뭐 하냐?”
“야.”
효은의 표독한 눈에 물기가 비쳤다.
“나 외로워.”
“……뭐?”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뭔 소리냐. 상호는 얼이 빠져서 반응이 늦어 버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키스해줘.”
“뭐?”
미친 걸까. 아침엔 침을 뱉어놓고는 밤에는 자기 침을 먹으란다. 상호는 이런 상황보다 황당한 경우를 인생에 겪어본 적이 없었다.
“너 미쳤어?”
“진짜야, 병신아. 나 힘들어 죽겠다고. 외롭다고. 키스 한 번만 해보자고……. 언니 오빠들 몰래 사귀면 될 거 아냐.”
“아니……. 너 나 싫어하잖아.”
“그래서 뭐.”
효은의 눈이 번득였다.
“싫어하면 사귀면 안 돼?”
“…….”
미친 게 맞는 모양이었다.
상호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해서. 사실 이런 미친 상황에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했지만.
‘얘 설마…….’
아직 예경과의 관계를 전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설마…….’
방을 옮기는 이유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는 혹시나 싶어 효은에게 물었다.
“야, 너.”
“뭐.”
“내가 방 왜 옮기는지 알아?”
그 말에 효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너 진짜 나 싫어?”
“아니, 야, 잠깐만…….”
“왜 몰라? 너 왜 그래?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서 그렇게 자꾸 얼굴 들이대고 가슴 두근거리게 한 거 아니야? 그래놓고 왜 내가 들이대면 안 받아? X발새꺄?”
“너 나 싫다며! 야, 싫다는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난 너 싫은데 니가 날 좋아하잖아!”
“…….”
상호의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언제부터 이 바보가 착각하게 된 걸까. 들이댄 적이 있었나. 무언가 착각하게 만들 만한 계기가 있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없었다.
그는 결론을 내렸다.
‘전쟁하다 돌았나 보다.’
그게 제일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야, 야. 일단 침낭에서 나가 봐.”
“니가 멋대로 날 좋아하잖아! 나는 너 싫어! 근데 니가 날 좋아하잖아!”
“개소리 하지 말고 조용히 좀 해!”
지금 예경과 민정이 일어나면 큰일 난다. 상호는 황급히 효은의 입을 틀어막았다.
효은이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손을 깨물었다.
“악! 야, 너 X발 진짜……!”
“사귀자고, 개새꺄! 그게 그렇게 어려워? 솔직히 너도 좋잖아! 매일 변태 같은 눈으로 나랑 민정이 언니 훔쳐보잖아! 다 알거든?! 다 해준다고! 내가 니 변태 같은 생각 다 해줄 테니까 키스 한 번만 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난 우리 누나 애인이라고!”
“……어?”
그 말에 효은이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을 지었다.
“뭐? 너 그거야? 너……, 너 진짜 그거야?”
“근친 아냐. 친남매 아니라고. 거짓말하고 입대한 거야.”
“……뭐?”
상호는 효은의 떨리는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나도 백상호가 아니라 강상호야. 누나는 백예경, 나는 강상호. 이제 알겠어? 내가 누구랑 사귀고 있는지?”
“……거짓말.”
“믿든 말든 알아서 해. 니가 그걸 믿든 말든, 난 너 좋아할 이유가 없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누나라고. 만약 이게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런 거짓말을 지어낼 만큼 널 싫어한다고. 넌 아니라고.”
상호의 말에 효은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너무 매몰찼을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침의 일이 아직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상호는 효은을 밀어내려다가, 움찔하며 손을 거뒀다.
밀어낼수록 눈에 더 잘 들어와서.
“빨리 옷이나 입어.”
“……너.”
효은은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 아니었어?”
“뭐가?”
“내가 좋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어?”
“그렇다니까.”
상호는 답답해서 눈살을 찌푸렸다.
“널 좋아하면 내가 왜 싸우는데?”
“그치만 너…….”
“다 니 착각이야. 니가 왜 그렇게 착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난 그런 적 없어. 너 꼬시려고 하거나 그런 적 없다고.”
“……야.”
“뭐.”
“너 나 안 예뻐?”
효은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상호는 그제서야 효은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았다. 하얀 머리카락, 하얀 눈동자. 눈썹까지도 서리가 내린 듯 하얗고,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맑았다. 모든 색소가 결핍된 것처럼. 심지어 피마저도 하얄 것처럼.
굳이 그런 요소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저 평범한 머리색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아마 효은은 예뻤을 터였다.
그러나 상호에게는 아니었다.
“어.”
그게 둘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기에 좋았다.
그의 대답에 효은이 무너질 듯한 표정이 되었다.
“……진짜야?”
“니가 예쁜지 아닌지는 몰라. 남들한텐 예쁠 수도 있겠지. 근데 나는 아냐. 나한테는 너, 별로 매력 없어.”
“…….”
확인사살.
효은은 시선을 점점 아래로 떨궜다.
“……그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꼭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이.
“그런…… 거였구나.”
“그래.”
“너는…….”
효은의 시선이 옆 침대에 누워있는 예경을 향했다.
효은은 예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쪼가리 하나 없는 새하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상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언니이이이이!”
울음을 터트렸다.
“언니! 언니! 얘 봐! 언니이이이!”
“……야, 야! 갑자기 왜 X랄이야!”
“꺅! 꺅! 언니! 으헝헝헝…….”
“으응……?”
예경과 민정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침낭과 한 몸이 된 채로.
둘 다 잠이 덜 깨어 눈앞이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 X발……!’
지금 당장 침낭에서 빠져나와 이년을 떼어내야 한다. 상호는 이를 갈며 허겁지겁 침낭을 벗고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효은이 그의 몸을 다리로 얽매고 있었다.
“언니이이이!”
“이 미친년이……!”
이런 인간을 대체 왜 좋아하겠는가.
지 혼자 착각해 놓고서는 사람을 담그려 한다. 상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해서라도 벗어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하필이면 그때 생활관에 불이 들어왔다.
“상…….”
전등 스위치에 손을 올린 민정이 그들을 바라보며 떠듬거렸다.
“상호……야?”
“…….”
상호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밑에 깔린, 발가벗은 효은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린 채.
“……아니.”
누가 봐도 개새끼는 그였다.
“아니…… 이건, 그러니까…….”
“상호야…….”
예경이 멍하니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야…….”
“잠깐만, 누나, 누나. 제발 내 말 좀…….”
“언니이이이이!”
효은이 그의 말을 가로막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얘가 막 나 덮쳐! 막 나랑 안 사귀면 그냥 강제로 하겠대! 그러면서 막, 막 때리구……!”
“야, 내가 언제! 누나, 이거 다 거짓말이예요. 진짜…….”
하지만 예경의 눈동자에는 혼란만이 가득했다. 상호는 그 모습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나…….”
“그치만 상호야……. 효은이 옷은?”
“얘가 벗은 거예요. 얘가 나 침대로 끌고 와서 사귀자고 했어요. 진짜……, 진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애원해도, 예경과 민정은 그를 믿어주는 눈빛이 아니었다.
상호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
“누나, 진짜라구요, 진짜라구요……. 이번만은 내 말 좀 믿어줘요……. 안 믿으면 나 진짜 자살할 거예요…….”
“나한테도 그랬어! 안 대주면 자살한대! 그래서 죽으라 그랬더니 내 옷 막 벗기구……!”
“넌 안 닥쳐?! 양심도 없냐?! 누나, 나 제발 한 번만 믿어달라고요, 진짜…….”
상호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손을 싹싹 빌었다.
“진짜라구요…….”
“…….”
예경과 민정의 눈이 마주쳤다.
* * *
“이야…….”
재훈이 낄낄거리며 상호의 등을 두드렸다.
“여자에 미친개가 맞았구나!”
“……아니라고!”
상호는 뒤집히려는 눈깔을 간신히 다잡고 쏘아붙였다.
“그 개년이 다 지어낸 거라니까!”
“에이, 그렇겠지. 그렇겠지~. 근데 상호야.”
“뭐.”
“좋았냐?”
“……!”
칼을 뽑으려는 상호를 도현이 칼 손잡이를 눌러 막았다.
“상호야, 상호야. 우리까지 패진 마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그치만 민정이랑 예경이도 봤다잖아, 네가 효은이 덮치는 거……. 효은이가 너 깜빵 안 보낸 걸로 감사해야지.”
“아아아아아악!”
분을 이기지 못한 상호는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았다.
덮친 건 효은인데. 덮쳐진 건 자신인데. 대체 왜 세상 사람들은 그의 말을 쥐뿔도 들어주지 않는지.
눈에서 눈물이 철철 흘렀다.
‘하필 그때 불이 켜져서…….’
죽을 것 같다. 정말로.
그런 그의 속도 모르고 대원들은 왁자하게 웃었다.
“그래서 상호 이제 우리랑 지내냐?”
“그렇다는데?”
“남자 됐네, 백상호. 아니 뭐였지? 강상호랬나?”
“열여섯 살이 아직도 누나랑 자면 어떡하냐, 임마. 이게 맞지.”
“아니 누나가 아니라니까. 애인이라니까. 몇 번을 말하는데 못 알아들어.”
“뭐라고? 누나랑 잔 게 아니었어?”
“또 까먹고 저러네. 치맨갑다. 에휴…….”
“야, 상호야. 진짜냐? 예경이랑 그렇고 그런 거야?”
“…….”
상호는 말도 못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그 후로 그는 효은과 말도 섞지 않았다.
상처를 치료할 때나 옷 벗어라 바지 내려라, 알았다 싫다 짧게 말할 뿐.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예경과의 오해를 푸는 데도 아주 긴 시간이 걸렸었고.
‘다시 생각해도 내가 잡혀 살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은데. 상호는 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따지기는 너무 늦었지.’
그는 입맛을 다시고 나빛이 들고 있는 통신장비를 들여다보았다.
지도에 표시된 붉은 점이 파란 점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다 왔나 봐요~.”
“그러게.”
“이쪽인가요? 이쪽? 이쪽?”
나빛이 통신장비를 부산스럽게 돌리며 방향을 맞추다가, 굳이 움직일 필요 없는 제 몸까지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그런 나빛의 곁에서 세희가 중얼거렸다.
“이쪽이야.”
“응?”
세희는 통신장비도 보지 않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런 세희의 주변에는 실처럼 자아낸 내공이 넓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상호가 선보였을 때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상호는 세희를 보고 살짝 웃었다.
“느껴져?”
“네. 부협회장 아저씨 내공인 것 같아요.”
“그쪽으로 가보자.”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났다.
무언가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 몸을 숨기고, 아주 빠른 속도로.
세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뭔가 오는데요.”
“으응.”
상호는 쓰게 웃기만 했다.
“오고 있네.”
그 순간 머리 위 나무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세희는 검을 뽑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소녀를 발견하고 몸을 움찔했다.
“……언니?”
“므앙!”
다혜가 세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으, 아으으아, 느아…….”
“그럭저럭. 언니도 잘 지냈나 보네.”
“아으아으.”
어찌나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지 머리가 두 개로 나뉘어 보일 지경이었다.
곧 도현과 해련, 은율과 여자 수호부대원이 수풀을 헤치고 그들에게 달려왔다.
“강 선생~.”
“선생님.”
“응. 은율이 안녕. 교장선생님도…….”
상호는 손을 흔들고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다들 상호 일행과 차림새가 똑같았다. 도현은 안대를 하고 검을 찼고, 해련은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검을 차지 않았다. 다혜는 계속 뿔과 꼬리를 드러낸 채고, 은율은 땋은 머리를 붙였고, 수호부대원은 지윤처럼 머리가 짧고 피부가 갈색이었다.
“제법 비슷하게 꾸몄구만. 근데…….”
상호의 시선이 은율을 향했다.
“위험하진 않았어?”
“네. 잘 도망쳐 다녔어요.”
“다행이다.”
상호의 말에 은율이 살짝 웃었다.
그때 지윤이 은율의 붙임머리를 잡아당기며 피식 웃었다.
“이기 머고. 짭세희가.”
“나도 해볼래~.”
“니는 머리 하얘가 안 된다.”
“우잉…….”
상호는 떠들썩해진 아이들을 뒤로하고 도현을 마주했다. 도현은 영 불편했는지 안대를 옆으로 비껴쓰고 있었다.
도현이 아이들 몰래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기야?”
“아니, 좀 더 가야 돼.”
곁에서 듣던 해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어디 말하는 거예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좀 그래요.”
상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살짝 내저었다.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장소. 도현은 물론이고 그를 제외한 저승부대원 모두가 알지 못하는 장소.
아니, 딱 한 명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었다.
‘아직 있을지 모르겠네.’
그래도 가서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상호는 생각을 정리하고 걸음을 옮기며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얘들아, 시간 없다. 얼른 출발하자.”
* * *
“쌤. 쌤.”
“응?”
옆을 돌아보니 태화가 초조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변이라도 마려운 걸까. 상호는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태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우리 어디 가는 거야?”
“가면 알려 줄 거야. 지금은 안 돼.”
“잠깐만, 잠깐만.”
태화가 그의 손을 잡았다.
왜인지 잔뜩 긴장해 있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한다. 상호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일이야? 말을 해 봐.”
“나도 지금은 안 돼……. 우리 왜 이쪽으로 가는 거야? 이 방향에 뭐 있어?”
“그게…….”
바로 뒤에서 지윤이 따라오고 있다. 그는 지윤을 흘끗하고 다시 태화에게 속삭였다.
“왜 그러는 건데. 또 이상한 소리 들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태화도 뒤에서 걸어오는 아이들을 힐끔했다.
그 시선의 끝이 꼭 지윤을 향한 것 같다. 상호는 오크의 움집에서 태화가 지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화야.”
“응.”
“너 혹시…….”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그들에게 와락 어깨동무를 했다.
“뭔 야그를 그래 몰래 합니꺼?”
“……으응, 그냥.”
상호는 지윤의 뺨을 콕콕 찔렀다. 깜짝 놀란 속마음을 감추려고 씩 웃어 보이며.
“태화가 볼일 좀 보고 싶대.”
“또예? 이 가스나 물을 을마나 처묵는 기고?”
지윤이 종아리를 툭툭 차자 태화가 눈을 흘기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어째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몰라, 밥팅아.”
“어쨌든…….”
상호는 태화의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둘이 잠깐 갔다 올게.”
“쌤이 가시게예? 안 됩니더. 마, 세희야. 쌤이랑 태화랑 둘이 싸러 간댄다…….”
“아니, 아니…….”
태화와 단둘이 가려는 것을 세희가 알면 귀찮아진다. 그는 아이들에게 돌아가려는 지윤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냥 빨리 갔다 올게. 애들이랑 천천히 가고 있어.”
“안 되는디…….”
지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얼른 싸고 오이소.”
“으응.”
그는 태화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듯이 일행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실상은 볼일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아이들과 거리를 둔 후에는 걸음을 늦추고 태화를 돌아보았다.
“태화야.”
“응.”
“혹시 그거…… 지윤이랑 관련된 거야?”
“……응.”
태화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태화가 이런 반응을 보일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상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태화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실이 보여?”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나는…… 걔한테 실이 하나 더 있길래, 동쪽에…… 미국 쪽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는가 보다 했거든.”
“……응.”
“그런데…… 쌤을 찾았는데, 쌤한테도 실이 하나 더 있는 거야.”
“…….”
“그 실이…… 멀리 있으면 평행해지고, 가까이 있으면 모이잖아……. 근데 그게 한곳으로 모이고 있는 거야, 쌤하고 걔한테만 있는 실이…….”
붉고 검은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오늘 보니까…… 부협회장 아저씨한테도 그 실이 있었어.”
“…….”
“이거 어떻게 말해?”
가느다란 목소리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걘 아빠가 죽은 줄 알고 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말하면……. 그거, 말해줘도 되는 거야? 나는 잘 몰라…….”
“나도 모르겠어.”
그도 지금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성철이 살아 있다니. 창에 찔린 걸 분명히 봤는데. 쓰러져서 미동도 하지 않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왔는데.
살아 있다면 당연히 기뻐할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태가 정상일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상호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숲을 노려보았다.
“우리끼리…… 먼저 확인해봐야 될 것 같네.”
“확인하고 나면……?”
태화가 쭈뼛거리며 그의 곁에 다가붙었다.
“먼저 말 안 해도 돼? 말 안 했다고 화내는 거 아니야……?”
“책임은 내가 질게. 화내면 나 팔아.”
“지윤이는 괜찮은 거야……?”
“좋든 싫든 어차피 진실은 알아야 해. 그리고…….”
그는 태화의 등을 토닥였다.
“지윤이도 그렇게 약한 애 아니니까.”
“……응.”
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가서 형하고 애들한테 잠깐 멈춰서 쉬라고 하자. 그리고 우리 둘이서 다시 찾는 거야.”
“응.”
둘은 서둘러 날고 달렸다. 그들의 일행이 성철이 있는 곳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기 전에 붙잡기 위해서.
* * *
“저기야.”
태화가 평야에 덩그러니 놓인 바위를 가리켰다.
상호는 이 지역을 알았다. 그가 성철과 함께 작전을 나갔던 강가와, 몬스터들에게 쫓기다 성철이 쓰러졌던 산비탈. 그 사이에서 몬스터들과 격전을 치렀던 평야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태화를 데리고 바위로 걸어갔다.
그의 키보다 약간 작은 바위였다.
“이 바위…… 라고?”
“응.”
태화가 바위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거 맞아. 이 바위야.”
“진짜?”
“응. 이 바위에 실이 연결되어 있는데…….”
“……뭐지?”
상호는 당황하며 바위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람이 갇혀 있다고 하기에도 지나치게 작다. 질감도 어째 요상하고. 코끼리 피부에 자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은 느낌.
‘……응?’
문득 바위의 형태가 눈에 띄었다.
뭔가 위쪽이 둥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양쪽엔 울룩불룩한 원기둥이 달린 것 같기도 하고.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널찍한데 반대쪽은 뭔가 요철이 많고.
꼭 사람이 웅크린 형태 같았다.
‘설마…….’
상호가 당황하며 바위를 더듬어 보려는 순간.
웅크려 있던 바위가 몸을 일으키더니, 바위 깊은 곳에서부터 사람의 말이 흘러나왔다.
“……누가 왔나 했더니.”
친숙한, 그러나 너무 오래되어 생소하기도 한, 굵직하고 쾌활한 목소리.
바위는 몸에 묻은 조그만 돌들을 털어내고는 상호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 귀여운 막내가 왔구만 그래.”
상호는 성철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