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91화 (491/501)

<491화>

491. 당신의 기억

“응?”

태화가 눈을 끔뻑였다.

“묵고 간다구?”

“응.”

“그럼 내일 출발해?”

“아니.”

상호는 누운 채로 육포를 질겅이며 답했다.

“은호 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뭐어?”

태화와 아이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고 있었던 상호는 아이들이 뭐라 물을 새도 없이 물 흐르듯 말을 이었다.

“너희도 여기까지 오느라 지쳤잖아.”

“……그건 그치.”

“닷새 만에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빡빡해. 가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이번처럼 시간이 끌렸다가는 훨씬 상황이 위험해져. 만약 아무 일 없이 도착했다 하더라도 놈을 하루 만에 죽이지 못하면…… 나는 은호가 되고, 놈이 우릴 모두 죽이게 되겠지.”

그러므로 이곳에서 미리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나중의 큰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나았다.

“이게 가장 안전한 길이야. 노숙하면서 돌아다니는 것보단 낫잖아. 악마들도 우리가 여기 숨은 줄은 모를 거고.”

“근데…….”

태화가 움집 바깥을 가리켰다.

“믿어도 돼? 저놈들?”

“응.”

드카노스는 그의 실력을 알고 있고 서로의 신뢰도 있으니. 부족이 망하고 싶은 게 아니고서야 그들을 배신하지는 않을 터였다. 은호에 대한 내용은 숨겨야겠지만.

상호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되도록이면 움집 밖에 나가지 마. 하늘에서 보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밥은 오크들한테 달라고 하고…… 나갈 일이 있으면 밤에 나가자.”

“그럼 우리 그동안 뭐해?”

“……글쎄.”

그냥 작전을 짠 건데 굳이 뭘 하고 지낼 것인지까지 계획을 해야겠나.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태화를 바라보았다.

“할 게 뭐 있겠어. 그냥 우리끼리 있어야지…….”

“그치?”

태화가 입술을 핥았다.

“대부분 나라는 만 18살부터 성인이래.”

“…….”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할까.

익숙한 감각이 등골을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우린 한국인이잖아.”

“그러니까 대부분의 나라는 만 18세부터는 베이비메이킹을 적극적으로 허락한다는 거지.”

“속인주의 가르쳐 줬잖아, 임마. 수업때 뭐 했어!”

“그리고 난 생일이 지났어!”

“야!”

상호는 와락 달려드는 태화를 밀어내다가, 세희와 지윤이 전투복의 지퍼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소리쳤다.

“얘들아……? 잠깐만……!”

“할 기 차암 마땅찮긴 하네예.”

“은호 되려면 며칠 남으셨어요?”

“나흘…… 닷새…… 그쯤…….”

“그럼 그동안 뭐 하시게요?”

“……우리 짝짜꿍이나 할까? 세희 다혜랑 많이 했잖아, 응……?”

“짝짓기요?”

“…….”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는 나빛까지 뺨을 붉히며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상호는 나빛이 다가오는 만큼 옆으로 물러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은호 될 때까지 어떻게 버티지…….’

아니, 은호가 되고 나면 더 위험할지도.

빌어먹을 저주 때문에 제대로 되는 게 없다. 그는 마신이란 놈을 기필코 씹어먹으리라 다짐하며 아이들을 피해 움집 안을 빙빙 돌았다.

* * *

『호.』

『어.』

『제자라고 하지 않았나?』

『애들?』

『그렇다.』

수풀 속에 숨어 있던 상호의 미간이 조금 찡그려졌다.

『어, 제자야. 갑자기 왜?』

『인간은 짝짓기도 스승이 가르치나?』

『……아니.』

『그럼 대체 온종일 집 안에서 뭘 하는 건가?』

『몰라도 돼.』

밤하늘엔 어느새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둘이 숨어 있는 곳은 부락에서 떨어진 숲. 또 혼자 나갔다가 낙오될 거냐며 칼집을 휘두르는 세희를 피해 도망치다시피 사냥을 나온 참이었다.

상호는 수풀 뒤에 엎드린 드카노스를 돌아보며 한숨을 쉬었다.

『혼자 와도 충분하다니까. 너희 몫까지 다 잡아다 줄게.』

『일하지 않은 자는 먹을 자격도 없다.』

『답답해 죽겠네 정말…….』

『물어볼 게 있기도 하고.』

『뭐. 애들이랑 짝짓기했냐고? 잘 들어, 인간한테는 미성년자란 개념이 있는데…….』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다.』

드카노스는 수풀 옆을 지나가는 조그만 토끼를 흘끗하고 말을 이었다.

『먼저 이걸 물어봐야겠군. 혹시 우리가 있던 세상의 인간들을 알고 있나?』

『글쎄…….』

그가 아는 건 베르멜로에게 들었던 아주 단편적인 내용뿐.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끔뻑였다.

『그쪽 세계에도 엄청 강한 전사가 있었는데, 배신당해서 독살당했다 정도?』

『원하던 답은 아니지만 거기서도 드러나긴 하는군.』

드카노스가 혀를 찼다.

『내가 물은 건 전체 인간의 인간성에 대해서였다. 짐작했겠지만 이전 세계의 인간들은 배신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다. 한때는 우리가 인간과 종전 협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인간의 배신으로 다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다시는 인간을 믿지 않게 되었지.』

『……음.』

『우리뿐만이 아니라 고블린들도, 다른 모든 지성을 가진 종족들도 인간에게 땅을 빼앗기고 재산을 약탈당했다. 그래놓고 우리가 복수하러 쳐들어가면 우리가 잘못했다는 둥, 자기들은 정당방위라는 둥……. 깨끗한 척은 다 했지. 더 무서운 건, 그걸 진짜로 믿은 놈들이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한다.』

상호는 고개를 기웃했다. 드카노스의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너도 이전 세계 인간은 본 적 없는 거 아냐?』

『그렇지. 내가 태어났을 땐 이미 모든 인간이 사라진 후였다. 다 아버지와 장로들에게 들은 거지.』

드카노스가 어깨를 들썩이고 물었다.

『이쪽 세상의 인간들은 어떤가?』

『……음.』

상호의 머릿속에 교과서로 언뜻언뜻 봤던 세계사가 떠올렸다.

원주민과 개척자의 충돌, 제국과 식민지, 인종에 대한 학살과 차별. 그 모든 것이 오크에게는 더 심하게 적용될 것임을 초등학생도 알 수 있을 터였다.

『크게 다르진 않아.』

『그래?』

『오히려 심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나는 역사는 잘 모르지만.』

『그런가.』

드카노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오크와 인간의 교류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안 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는데.』

『하는데?』

『우리 족장과 너희 족장이 생각한 바가 있겠지.』

명욱과 발라쿠른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호는 자신보단 아마 그 둘이 옳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태로는 동등한 외교를 할 수 없어. 혹시 지난번 전투 때 있었나?』

『전투?』

『악마들이랑 우리 땅으로 몰려왔을 때 말이야.』

『아아, 전사를 싹 차출해갔을 때인가 보군. 나는 부족을 지키고 있었다.』

『그때 오크가 많이 모였거든. 몇십만, 몇백만 정도……. 그만큼의 군이 한데 모여 있어야 해. 그래야 외교를 할 힘도 생기는 거지. 나라 하나 정도의 힘은 있어야 다른 나라가 말을 들을 테니까……. 근데 너희는 부족마다 다 따로 살잖아.』

『그렇지.』

『그러면 누군가가 너희 땅을 빼앗으려고 할 거야.』

사실 오크들을 한데 모아도 부족했다.

지난번 전투에서는 악마들이 크고 강한 몬스터를 모아온 탓에 현대화기의 위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크들뿐이라면, 총과 칼이 먹히기는 하는 오크들뿐이라면 그 수가 아무리 많아도 현대화기를 쓰는 인간군을 이길 수 없을 터였다. 오르커드를 대동해 헌터를 배제시킨다 해도.

총과 폭탄, 그리고 상호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살상무기들. 비록 오크가 총 몇 대 정도는 버틸 수 있다 해도, 인간은 금방 수많은 오크를 한 방에 보내버릴 병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놀랍도록 가볍고, 놀랍도록 간편한 모습으로.

『너희가 강해져야 해.』

상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 같이 모여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필사적으로 궁리해야 한다고. 안 그래도 지금 전사들이 다 죽어 나가서 힘들다며.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야지, 안 그러면 망한다.』

『호.』

『응?』

『너는 인간 사이에서 위치가 어떻게 되지?』

드카노스의 물음에 상호의 시선이 한 번 빙글 떠돌았다.

『위치……라. 그냥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선생…… 정도?』

『네가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아닌가?』

『맞을걸?』

『네가 싸우지 말라고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모두가 네 명령을 따르지는 않는 건가?』

『누구한테 명령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야.』

『그럼 됐다.』

드카노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전사를 예우하지 않는 사회는 패망하기 마련이니까.』

『그 전에 너희가 패망하게 생겼다고, 임마. 이대로는 안 된다니까…….』

상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작전이 끝나면 널 도와줄 형편이 못 돼.』

『쉬려는 건가?』

『……쉬는 거지.』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내 제자들이 너흴 도울 수도 있겠지만…… 너무 바라진 마.』

『그거야 당연한 일이다. 생존은 스스로 하는 것이니…….』

드카노스는 그렇게 말하고 작은 창을 던졌다.

수풀 너머를 지나가던 사슴을 닮은 몬스터가 옆구리에 창을 맞고 쓰러졌다.

『그래서 스스로 사냥을 하는 거고.』

『……그렇구만.』

그렇지만 저것 하나로 부족 모두를 먹일 수는 없을 것이다.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수풀을 헤치며 나아갔다.

* * *

부락으로 돌아왔을 땐 상호와 아이들이 묵는 움집이 흙을 토해내고 있었다.

‘……?’

또 뭔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상호는 엄습하는 불안감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움집으로 들어섰다. 어깨에는 드카노스에게 배분받은 사슴 다리가 들려 있었다.

“얘들……아?”

“아, 쌤예.”

지윤이 금색 삽을 늘어뜨리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오셨심꺼.”

“뭐 하고 있어?”

“보믄 알잖아예.”

아이들은 흙투성이가 되어 움집 바닥을 파내고 있었다.

땅을 파는 거야 보면 알겠지만 왜 땅을 파는지는 알 턱이 없다. 상호는 다시 기계처럼 흙을 파내 밖으로 던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진땀을 흘렸다.

“그러니까 뭘 하려는 건데…….”

“목욕탕이요~.”

“……목욕탕?”

“네!”

나빛이 꾀죄죄한 얼굴로 웃었다.

“때 한번 싹~ 벗겨내려구요~.”

“그래, 뭐 너희가 하겠다면야…….”

딱히 안 될 건 없으니까. 상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나빛의 성력 삽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바닥을 파냈는데.

“자!”

태화가 검은 결정을 와르르 쏟아냈다.

“타일 공사야!”

“욕조는 성력으로 만들 거 아니었어……?”

“목욕한 다음에도 여기서 지내야 하잖아! 땅바닥에서 지내기 싫어. 쌤이 이거 평평하게 깎아. 공사는 우리가 할게.”

“으응…….”

그렇게 팔자에도 없던 타일 깎는 선생이 되었다.

평평하게 깎은 타일을 오밀조밀하게 붙이고, 틈이 있으면 흙으로 메워서 열을 가해 굳히고. 그렇게 공사를 끝내니 그럭저럭 널찍한 공간이 생겼다.

상호는 손을 털고 일어나 문가로 향했다.

“됐지? 다 씻고 불러.”

“어디 가세요?”

“……응?”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의 손에 있던 삽이 각목으로 바뀌어 있었다.

세희가 각목을 살짝 까딱이며 눈을 빛냈다.

“안 씻으시려구요?”

“……너희 끝나면 씻지.”

“여기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선생님 씻으시는 동안 저희는 밖에서 가만히 있으라구요?”

“그런 건 아니고……. 나는 금방 씻지…….”

그 말에 나빛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가 열심히 만든 건데…….”

“……응?”

“잠깐 쓰고 마시게요……?”

“…….”

“오래 써 주세요…….”

“잠깐만, 잠깐만.”

이제 보니 이 구덩이가 욕탕이 아니라 함정이다. 상호는 아이들이 자신을 위한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손바닥을 들었다.

“같이…… 씻자고?”

“엉.”

태화가 태연하게 눈을 끔뻑였다.

“뭐 어때, 우리끼린데.”

“안 돼, 임마. 안 씻어. 너희나 빨리 씻고 자.”

“어어? 안 씻으면 같이 안 자준다!”

“그런다고 내가 씻겠냐!”

“더러운 선생님은 싫어요…….”

“나빛아, 그러니까 선생님은 나중에 따로…….”

“쌤예.”

“응?”

지윤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은호 되고 후회허지 말고 지금 곱기 씻으이소.”

“…….”

“아직도 그걸 모르믄 우짭니꺼.”

그 말이 옳다. 나중에 더 큰 화를 당하지 않으려면.

상호는 눈 딱 감고 전투복의 지퍼를 내렸다.

* * *

“으아~.”

참방참방. 발장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원~하다~.”

“…….”

“쌤~. 이거 봐봐~.”

“시끄러.”

상호는 정좌한 채로 아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물이 유난히 맑았다. 미네랄이 가득한 온천수가 아니라 마법으로 만든 순수한 물이라서. 심지어 욕조를 성력으로 만든 탓에 물속이 온통 환했다.

덕분에 몸이 너무 잘 보였다.

그의 몸도, 아이들의 몸도.

‘X부럴…….’

조금 더 벽 쪽으로 다가앉는데, 뒤에서 아이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옷 숨겼어?”

“당근이제. 절대 못 찾는디.”

“…….”

나무꾼이 선녀 옷 훔치는 건 알아도 선녀들이 나무꾼 옷을 훔칠 줄이야.

상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발의 때를 문질렀다.

‘개운하긴 하네…….’

땀이 뻘뻘 흐를 정도로 뒈지게 싸우고, 골병이 들 정도로 빗속에 쓰러져 있다가, 또 약초 넣은 진흙에 온몸을 둘러싸이고, 모래바람 부는 결투장에서 이리저리 뒹군 후라 뜨거운 물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배수구와 물 마법진 덕에 환수 설비는 완벽. 몸에서 씻겨 내려간 때와 먼지는 탕을 떠돌지 않고 모두 배수구로 흘러들었다.

‘많이도 나온다.’

그렇게 발을 계속 문지르는데.

“야, 큰 거 온다. 쌤 시동 건다.”

“뭘 걸어 임마! 씨…….”

“그럼 뭘 그렇게 만지작거려?”

“발이야, 발. 에휴…….”

상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다가 움찔하며 고개를 원래대로 돌렸다.

“빨리 씻고 자자, 얘들아. 오랜만에 목욕해서 좋은 건 알겠는데…….”

“선생님~.”

나빛이 헤헤 웃으며 그에게 물장난을 쳤다.

“이거 보세요. 꾸꾸 동동 떠다니는 거. 엄청 귀여워요~.”

“뺙.”

“……으응, 그래.”

“보세요~. 우리 꾸꾸 헤엄도 잘 쳐요~.”

“뺙!”

“알고 있어…….”

당연히 돌아볼 순 없었다.

상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수면에 비친 자신을 마주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은호가 될 때까지 시간이 남긴 했지만,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며 기다리고 있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작전을 성공시킬 가능성을 아주 조금이라도 끌어올려야 했다.

그는 욕조 밖에 놓인 가방에서 허공섭물로 통신장비를 꺼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내가 은호가 된 날을 어떻게 버티느냐.’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히 이곳에 쥐죽은 듯 처박혀 있는 것이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상호는 프로그램을 열어 메세지를 전송했다.

-형

머잖아 답장이 도착했다.

-상호냐? 괜찮은 거야?

-어떻게 잘 됐지

-애들은 만났고?

같이 씻고 있다는 말은 차마 보낼 수 없었다.

-다 잘 있어

-근데 형 계획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아

-계획을?

상호는 도현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된 것, 또 앞으로도 이런 일이 더 있을지 모른다는 것, 마신 근처에서 은호가 되는 것보다는 여기서 일찍 겪고 가는 게 낫다는 것. 거기에 덤으로 드카노스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야기를 다 전해들은 도현이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오크 마을에 숨어있겠다 이거지?

-응

-그것만으론 불안하니까 증원을 보내달라는 거고?

-굳이 증원이 아니라도 뭐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달라고

-음...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답장이 도착했다.

-가짜 부대를 만들어서 굴리는 게 어때?

답장을 본 상호의 눈이 멍청히 끔뻑거렸다.

‘가짜 부대?’

-뭔데 그게

-너희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로 부대를 만드는 거야. 마침 여기 머리 하얀 분 있고 머리에 뿔 나는 애도 있고... 나 안대 쓰고 은율이인가 걔한테 땋은머리 붙이고, 머리 짧은 무예가 한 명만 구하면 될 것 같은데?

‘……흠.’

상호는 도현의 말을 듣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마침 해련의 강기는 금색. 해련이 성창처럼 강검을 만들면 악마놈들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터였다. 얼굴을 정확히 마주치는 상황만 만들지 않는다면.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문제는.

-형이랑 교장선생님이랑 다혜가 다 오면 거기는 누가 지키는데?

-지켜야 하나? 그놈들 너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을걸? 아마 여기는 신경 쓰지도 못할 거다. 그놈 은근히 겁 많은 거 알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놈들이 미친 척하고 쳐들어오면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상호는 이게 맞는지 영 확신이 서질 않았다.

-보험은 있어야 할 거 아냐

-보험이라........

평소보다 긴 침묵 끝에 답이 돌아왔다.

-딱 한 명 적임자가 있긴 한데

-있다고?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해련과 다혜 말고 악마를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이가 대체 누가 있는지.

-누나 봉인된 거 까먹은 건 아니지?

-당연하지 임마

-그럼 누구? 누가 있는데?

-그 악마 여자애 있잖아

상호의 머릿속이 순간 멍해졌다.

‘설마…….’

-베르멜로?? 걔를 쓴다고?

-걔라도 써야지?

-아니 걔는...

배신을 두 번씩이나 때린 악마인데.

그러나 상호는 곧 깨달았다. 정말로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투에서 이것저것 따질 여유는 없다는 것을.

다만 한 가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은.

-걘 좀 심각하게 약한데...

-그러냐? 그래도 명색이 대악마인데...

-대악마들은 마신 상태 따라 강해진다니까 걔도 강해졌을지도 모르지. 근데... 한 번 싸워본 내가 보기에는... 걔는 그냥 전투를 못해

-그런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수호부대원들도 있으니 믿어보는 수밖에...

가짜 부대를 쓰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듯싶었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고생해라

-그래

그는 통신장치를 끄고 가방에 넣었다.

국경의 방어가 취약해진다는 점만 제외하면 속임수용 부대를 운용하는 것도 꽤나 좋아 보였다. 제대로만 된다면 은호가 됐을 때를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제대로만 된다면.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상호는 한숨을 쉬고 머리까지 푹 물에 담갔다.

* * *

“상호야, 상호야.”

“네?”

“저기 저분 있잖아.”

상호는 예경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머리 희끗한 여인이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저 할머니요?”

“할머니인가? 되게 젊어 보였는데.”

“머리가 하얀데…….”

“아냐, 한 마흔쯤 되시는 것 같애. 되게 관리 잘 한…….”

“그래요?”

그에게는 딱히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 한 달 만에 복귀한 부대에서의 첫 끼가 무엇인가.

그런데 예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저분 있잖아, 전에도 봤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연세가 많아 보였거든?”

“그래요?”

“응. 그땐 쉰쯤 되어 보였는데. 어째 점점 젊어지시는 것 같아.”

“그럴 린 없겠죠.”

“아냐, 어쩌면 진짜로 젊어지고 계신지도 몰라. 마나가 몸을 회춘시킨다든가……. 상호야, 상호는 누나가 몇 년 젊어졌으면 좋겠어?”

“누나는 그대로가 좋아요.”

“지금이 제일 큰 것 같아?”

“…….”

시선을 피하는 상호의 머리를 예경이 키득거리며 쓰다듬었다.

“난 상호가 열 살쯤 어려졌으면 좋겠어~.”

“그건 범죄예요.”

“꼬마 상호 한 번쯤 보고 싶단 말야~.”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둘은 조금 앞서 있는 대원들을 따라 병영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에 붙어있는 메뉴표가 눈에 띄었다. 성철이 메뉴표를 쓱 훑다가 오늘의 메뉴를 보고는 환하게 반색을 했다.

“이야, 꽃게탕이라는데?”

“아니 형, 아직도 짬밥에 기대를 해요? 와이프 요리 잘한다던 거 다 뻥이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임마. 난 짬밥이고 집밥이고 안 가려. ……어라?”

식당으로 들어선 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밥은 쥐꼬리만큼 남았고, 꽃게탕은 건더기 하나 없이 국물만 쥐 오줌만큼 남았고. 다른 반찬도 대부분 털리고 그나마 김치만이 유일하게 12인분을 넘게 남아 있었다.

명욱이 주걱으로 밥솥을 닥닥 긁으며 입맛을 다셨다.

“라면이나 먹자.”

“에이, 간만에 시원한 거 먹나 했는데……. 그런데 대장님, 저희 온다고 말 안 한 거예요?”

“아니, 계획대로 딱 맞춰 왔는데.”

“그럼 밥이 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다들 조금씩만 더 먹어도 남는 게 없겠…….”

순간 국 담는 통이 허공을 날았다.

콰당탕

“이 X발, 급양관 나와!”

“…….”

상호의 사자후에 효은을 제외한 대원들 모두가 진땀을 흘렸다.

“미친개 하나, 미친개 하나…….”

“예경. 빨리 말려라.”

“지금은 저도 못 말리는데……. 소리 좀 더 치고 나면 좀 가라앉을 거예요.”

“뭐해? 빨리 가서 라면 끓여! 배고파서 눈깔 돌아갔잖아!”

대원들이 뭐라 하던 상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주방 안쪽에서 튀어나오는 조리병들을 노려보며 도끼눈을 떴다. 허튼 소리를 하면 도끼로 골통을 쪼개버릴 것처럼.

“급양관 어딨어.”

“지, 지금 데리러 갔습니다.”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상호보단 많았다. 하지만 상호는 그딴 건 신경 쓰지 않고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이 X발, 배식 누가 했는데?”

“저희가…….”

“왜 안 남았는데?”

“오늘 오시는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급양관이 말 안 한 거지?”

“저희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급양관 X빨 언제 오는 거야!”

콰당탕, 이번엔 반찬통이 바닥을 굴렀다.

“야, 니들 꿍쳐놓은 거 있지.”

“없습니다.”

“없어?”

“요즘 보급이 잘 안 돼서, 수량이 빡빡하게 들어와서…….”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호는 어딘가에라도 X랄을 해야 했다. 편하게 침대에서 자고 부대 밥 먹는 새끼들이 뭐가 모자라서 남의 밥까지 다 처먹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명욱이 상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상호, 진정해라.”

“…….”

“조리병들은 죄 없다. 안 그래도 백여 명 식사 준비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하지만 상호는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어 명욱의 손을 떨어냈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이 감탄했다.

“오우야…….”

“미친개는 괜히 미친개가 아니야.”

“효은이 어떡하냐. 상호 사람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상호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지만, 부대원들에게 화를 낼 순 없어 꾹꾹 눌러 참았다.

그때 민정이 상호의 반대쪽 어깨를 토닥였다.

“라면 먹자, 상호야. 응? 꽃게탕은 누나가 휴가 때 사줄게.”

“…….”

상호는 민정의 손은 뿌리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대원들이 또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야……. 사람 차별하네.”

“보통 미친개가 아니라 여자한테 미친 개였구나.”

“정확히는 누나한테 미친 개지……. 연상한테.”

“효은아, 어떡하냐? 상호는 민정이가 데려가려는갑다.”

“뒤질래요?”

“미친개가 또 있네…….”

상호의 꽉 쥔 주먹에서 혈관이 솟았다.

바로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식당 문이 열렸다.

끼이익……

상호는 그 즉시 김치를 한 무더기 집어 문가를 향해 던졌다. 들어서는 이의 얼굴이 있을 높이를 향해.

철퍽

김치는 그 위치에 정확히 명중했다.

하얀 머리에 튀긴 빨간 김칫국. 고운 피부에 묻은 빨간 김칫국. 군복으로 흘러내리는 빨간 김칫국. 온통 김칫국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에서 희끗한 눈썹이 끔뻑이며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으흠…….”

여인은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 대장님?”

“예, 이 소령님.”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그게…….”

명욱은 뒤를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김치를 던진 범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어서.

대신에 효은이 왼손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뻘건 김칫국이 묻은 왼손을.

“…….”

“…….”

모두가 침묵한 와중에 효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개새끼가…….”

여인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곤란한 듯 웃었다.

“저 애가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예. 다른 아이가 한 겁니다.”

“아이요? 몇 살인데요?”

“열여섯입니다. 중학교 3학년.”

“어머, 어머. 완전 애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다 닦은 여인이 주방으로 향했다.

“밥이 없는 거지? 내가 지어 줄게요.”

“꽃게탕이 아니면 또 한바탕 뒤집을 것 같습니다.”

“으음, 그런가? 내 손맛으로는 안 되나?”

“음식을 가리는 녀석은 아닌데…….”

“일단 해 보죠 뭐.”

여인은 그렇게 주방으로 들어갔다.

명욱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예경. 상호가 또 뒤엎지 않게 해라.”

“그건 제 맘대로 되는 건 아니어서…….”

“그런 건가?”

“네.”

“……으음.”

한숨을 쉬는 명욱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진 것 같았다.

* * *

“먹을 만 해?”

“…….”

상호는 시선을 삐딱하게 세우고 밥을 우물거렸다.

나물만 한 무더기 쌓여있기에 또 한바탕 뒤집으려 했는데, 예경의 부탁에 꾹 참고 한입 먹어보니까 의외로 썩 맛이 좋았다.

그래도 괘씸한 건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저냥.”

“다행이네~.”

예경이 씩 웃으며 밥을 한 술 떴다.

“상호 그래서 휴가 때 민정이 언니랑 꽃게탕 먹으러 갈 거야?”

“……아뇨.”

“왜애? 가도 괜찮은데~.”

“나 꽃게탕 싫어해요.”

“응? 근데 방금은…….”

“갑자기 싫어졌어요.”

“그치만…….”

상호는 예경의 손을 잡아 예경의 입에 숟가락을 집어넣었다. 더는 말을 하지 못하게.

그리고 그의 식판에 집중해 착실히 밥을 지워나갔다.

‘나물이 왜 이리 맛있지…….’

이게 손맛인가.

짬밥 만드는 조리병의 손맛이 이 정도일 줄이야. 상호는 고개를 자꾸 갸웃거리며 주방을 흘끔했다.

그래도 조리병이라고 양을 적게 한 만큼 맛을 뽑는 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조리병은 멀쩡하구만, 급양관이 문제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식당 문이 열리고 또 군복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체격이 건장하고 눈빛이 드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군인.

상호는 그녀가 급양관이라는 것을 깨닫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식판을 엎었다.

“야, 급양관!”

“아이고 상호야, 제발 밥 좀 먹자……!”

“예경아, 이거 다 네 잘못이다. 네가 어릴 때 안 잡고 오냐오냐 키우니까 이 사단이 난 거 아냐…….”

“아하하…….”

“웃을 일이 아니야……!”

“아하하하…….”

“에휴…….”

나물이 허공을 날아가도 예경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 * *

‘이건 몰랐던 내용인데.’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그는 그때의 그 나물이 누구의 작품인지 몰랐다. 그저 조리병이 했겠거니 지레짐작했을 뿐. 해련의 얼굴에 김치를 던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불려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으니까.

아마도 예경의 기억일 터.

‘누나가 보여주는 건 확정인데…….’

이 기억을 보여주는 이유가 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렇지만 심상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예경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나저나…….’

그 흰머리 아줌마에게 또 이렇게 도움을 받는구나. 상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통신장비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에는 그의 부대의 현재 위치, 그리고 가짜 부대가 악마들을 유인할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교장선생님한테는 진짜로 도움만 받네.’

갚을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시간이 허락지 않는다.

‘내 시간이 더 짧을 줄 알았겠나…….’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운명의 방향과 끝은 알겠는데,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말을 해주지 않는 예경과 겹쳐 답답한 마음을 들게 했다.

그러나 때가 오면 다 알게 될 것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누나.’

그의 손가락에 초혼강기가 촛불처럼 조그맣게 피어오르고.

까만 눈동자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뭐가 더 있는 거예요……?’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쩝.’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긴 했다.

상호는 눈을 감고 귀는 연 채로, 언제든 깰 수 있게 선잠을 청하며 다시금 과거로 빠져들었다.

스승이 무엇을 전하려 하는지 스스로 알아내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