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490. 해지
『하나만 묻자.』
상호는 주먹을 내리며 말했다.
주먹에는 오크의 검붉은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네가 진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드카노스는 그의 앞에 반쯤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얻어맞은 얼굴은 퉁퉁 붓고, 코와 입술에선 피가 흘렀다.
『산중에 쓰러진 나를 어떻게 찾아냈으며……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왜 구했고, 구했으면서 왜 다시 결투를 건 거냐?』
“…….”
『말이 안 되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상호는 검을 옆으로 던져버리고 드카노스의 도끼도 발로 차버렸다.
『하나쯤은 속 시원히 말해주지 그래.』
『동생이 영혼을 볼 수 있다.』
드카노스가 무릎을 짚고 일어났다.
『그 아이가 영혼과 영혼 사이의 실을 볼 수 있어서…… 우리 땅에 들어온 널 보고 찾아간 거다. 널 살리러 간 건 아니었어.』
『그런데 살렸잖아.』
『전사니까.』
『그런데 죽을 걸 알면서도 결투를 걸었지.』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분명 상호의 실력을 알고 있을 텐데. 심지어 드카노스는 지금도 어릴 적 상호의 경지를 따라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투를 걸었다는 건, 명백한.
『죽어야 할 명분이 필요했나?』
자살행위.
상호는 주변의 구경꾼들이 들을 수 없게 목소리를 낮췄다.
『족장이 죽어야 할 일이 대체 뭐지?』
『……네가 알 필요는 없다.』
드카노스가 상호의 멱살을 잡고 밀어붙였다.
거대한 오크의 몸은 체술을 거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상호는 그의 목을 조르려 드는 드카노스의 손을 막아내고 손바닥에 내공을 담아 장력을 날렸다.
퍼억
드카노스의 명치에 손바닥 모양의 자국이 찍혔다.
하지만 드카노스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상호의 팔을 붙잡아 힘을 겨루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거리에서 드카노스가 나직이 말했다.
『꼬맹이.』
『뭐.』
『날 죽여라.』
상호가 움찔하자 드카노스가 그를 더욱 몰아붙였다.
『이대로라면 우리 부족은 어차피 멸족한다.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전사를 길러 내도…… 신의 사자들이 전부 데려가겠지. 전사가 없는 부족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내 손으로 끝내 달라고?』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주황색 눈동자가 멀리 떨어진 도끼를 흘끗했다.
『이 부족을 묶어두는 족장만 죽는다면…….』
『네가 이끌면 되잖아?』
『선조를 버린 족장은 버림받게 되어 있다. 그 누구도 믿어주지 않아. 나는 이 땅에서 죽고, 부족은 다른 땅에서 살아가는 거다.』
그게 그놈의 명예라는 건가. 상호는 이 오크라는 종족이 얼마나 멍청한 종족인지 다시금 떠올렸다.
그래도 드카노스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네가 죽어도 네 부족원들은 이 땅을 떠나지 않을 거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네놈이 뭘 안다고…….』
『정말 그렇게 믿는 거냐?』
『뭐?』
『너만 죽으면 부족이 새출발을 할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냐?』
“…….”
드카노스의 눈동자에 혼란이 깃드는 순간을, 상호는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아직도 모르는 건가?』
『뭘 말이냐?』
『네 아버지의 일…….』
상호의 팔이 드카노스의 손을 점점 밀어내기 시작했다.
『네 아버지를 죽인 자가 우리라고……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거냐?』
『무슨……!』
드카노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현혹하지 마라! 네놈도 그런 놈이었나?』
『눈이 있으면 진실을 봐라, 드카노스.』
『진실? 네놈들이 족장을 죽이지 않았나? 이제와서 발뺌하는 거냐?!』
『이거 안 되겠구만.』
상호는 고개를 뒤로 당겼다.
『잠깐 과거로 보내주지.』
박치기가 드카노스의 이마에 작렬했다.
* * *
“족장은 외교에 관심이 있더라.”
명욱이 잎으로 만든 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같은 종족끼리도 떨어져 지내길래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쪽 세상이 많이 궁금한가봐.”
“휴전 이야기는 잘 됐어요?”
“그건 자기들이 어떻게 할 수 없다더라.”
그 말에 대원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윗선에 누가 있나 보죠?”
“신탁을 받는 사제가 있는 모양이야. 그 사제가 신의 뜻이라면서 전쟁을 시키는 거지. 뭐 말도 못하는 몬스터들이 똘똘 뭉쳐서 몰려오는 꼴을 보면 정말로 신이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명욱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족장이 우리 말을 듣기는 하니까. 설득을 해 볼 수는 있겠지.”
“자기들 신보다 우리 말을 더 잘 들을까요?”
“족장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민정이, 네가 보기엔 어땠어?”
“똑똑해 보여요.”
민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가 이 마을을 쓸어버릴 만큼 강한 것까지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영주, 너는?”
영주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다가도 계속 뜸만 들일 뿐.
그 모습을 본 명욱은 눈을 끔뻑였다.
“뭐 문제라도 있나?”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서. 대장님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이젠 익숙하다. 명욱은 선문답을 들어도 잠깐 고개를 기웃하고는 어깨를 들썩이고 문가로 향했다.
“벌써 밥때네. 한 명 따라와라. 그리고 진구, 칼 좀 빌리자.”
* * *
『왜 가만히 두는 겁니까?』
“…….”
『인간이 어떤 족속인지 잊었습니까?』
또 시작된 잔소리. 발라쿠른은 눈을 감았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아우, 노르고른의 질책을 피해서.
『숨쉬듯이 거짓말을 하는 족속입니다. 왜 저놈들의 말을 듣는 겁니까? 또 속으려고? 또 배신당하려고? 선조들이 피 흘려 얻은 깨달음을 어째서 족장님은…….』
『하늘을 봐라, 노르고른.』
발라쿠른의 진중한 목소리에서는 노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선조들이 알려준 별자리가 모두 새것으로 바뀌었다. 여긴 다른 땅이야. 다른 땅에는 다른 인간이 사는 거다.』
『아니, 다 똑같습니다. 평화를 말하는 놈들은 다 똑같습니다. 웃는 얼굴로 다가와 자는 사이에 칼침을 놓는 놈들입니다. 왜 놈들을 죽이지 않는 겁니까? 왜 놈들에게 사냥을 해서 스스로 먹으라고 한 겁니까? 놈들이 우리 음식을 먹을 때 독을 탔다면…….』
그 말에 발라쿠른이 눈을 떠 노르고른을 빤히 바라보았다. 바로 네가 그럴 줄 알고 그리했다는 듯이.
노르고른은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위협적으로 낮췄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
『한 끼 식사면 충분합니다.』
『난 독을 모른다. 주술사인 너나 알겠지.』
발라쿠른은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오크는 배신하지 않는다, 노르고른. 더는 이 일을 꺼내지 마라.』
『하나만 대답해 보십시오.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겁니까?』
『딱히 없다.』
『그럼 왜 안 죽이는 겁니까?』
『손님이니까.』
『……신께서.』
그늘진 눈에서 주홍빛이 번득였다.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겁니다.』
『…….』
발라쿠른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더는 할 말이 없는 듯.
노르고른은 그런 형을 말없이 노려보다가 조용히 집을 빠져나왔다.
‘……당신이 자초한 일이다.’
그의 걸음이 숲을 향했다.
* * *
“여기서 목을 긁는 거야.”
민정은 나뭇가지로 땅에 글씨를 썼다. 오크어의 발음을 최대한 한글로 옮긴 것이었다.
“그르르르~ 하듯이. 소리의 차이로 힘을 가진 주체가 달라지는 거지. 예를 들어, 나 사슴 사냥했다에서 나를 긁으면서 말하면 내가 사슴을 사냥했다가 되는 거고, 사슴을 긁으면 내가 사슴에게 사냥당했다가 되는 거야.”
“X같네.”
상호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 그냥 안 배울래.”
“익숙해지면 안 어려워. 자, 봐봐. 상호야. 이제 명사가 아니라 동사를 긁게 되면…….”
“쟤는 안 배우잖아!”
상호의 손가락이 효은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효은은 들은 체도 않고 누워서 빈둥대고만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작은 부석으로 손톱을 관리하면서.
효은이 그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야. 내 핑계 대지 말고 공부나 똑바로 해.”
“아니 너는 안 배우는데 왜 나는 배워야 하냐고! 말이 돼?!”
“니가 안 볼 때 다 배우고 있어, 등신아. 너 코르르캉캉이 뭔 뜻인지 알아?”
“……아니.”
“븅신. 공부나 똑바로 해.”
효은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손톱에 집중했다.
정말로 그가 안 볼 때 나름대로 배우고 있었던 걸까. 상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민정을 돌아보았다가 민정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진실을 깨달았다.
“……누나.”
“응? 푸후훗…….”
“저거 X랄이지? 저런 말 없지?”
“글쎄, 어떨까? 배우다 보면 알게 되겠지?”
“……끄응.”
상호는 이마를 짚고 민정이 바닥에 쓴 글씨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움집 문이 걷히고 소년 오크가 들어와 무어라 말을 했다.
“족장이 부른다는데.”
민정은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명욱은 도현을 데리고 사냥을 나간 상태.
전우조가 한 명은 있어야 하는데.
“누가 같이 갈래?”
“내가 갈게.”
마침 앉아있기 지겨웠던 터다. 상호는 민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나 갔다 올게.”
“으응.”
예경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움집을 나선 상호는 민정과 함께 소년 오크를 따라 족장의 나무집으로 향했다. 거리가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족장이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너희 족장은 어디 갔지?』
상호는 아직 오크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눈만 끔뻑였지만, 어차피 소통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민정이 손짓을 섞으며 대답했다.
『사냥하러 가셨어요.』
『그런가.』
족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가 듣고 족장에게 말을 전해라.』
『네.』
『먹는 것을 조심히 해라.』
상호는 눈을 끔뻑였다.
언뜻 듣긴 했는데 자신의 해석이 맞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서 세워놓고는 갑자기 식단 걱정은 왜 해주나.
민정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음식……을요?』
『부족 내에 독을 쓸 줄 아는 오크가 한 명 있다.』
『……그 오크가 저흴 싫어하나요?』
『아주 싫어하지. 그러니 누가 먹을 것을 주더라도 믿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위험한…… 부족원인가 보네요.』
민정은 입을 가리고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족장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저희 족장님께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세요.』
『너희가 독이 든 음식을 피하고 나면…….』
족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말해도 소용없겠군. 그냥 한 가지만 기억해라.』
『예.』
『오크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
멀뚱히 서 있는 민정과 상호에게 족장이 손을 내저었다.
『그것만 알고 우리를 대하면 너희도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얼마나 걸리든 간에 결국에는…….』
『명심하겠습니다.』
『가도 좋다.』
민정은 오크의 방식으로 예를 갖추고 족장의 앞에서 물러났고, 상호는 멀뚱히 서 있다가 민정을 따라 나갔다.
그가 문을 닫으려는데 뭔가가 눈에 띄었다.
‘……응?’
족장의 잔잔한 눈빛.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체념한 것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어딘가 슬퍼 보인다는 것.
그러나 상호는 끝내 그 눈빛의 뜻을 짐작하지는 못했다.
‘두고 보면 되겠지.’
그는 그렇게 여기고 문을 닫았다.
* * *
다음 날 아침, 족장은 명욱의 칼에 찔린 채로 발견되었다.
* * *
『그리고 네놈들은 도망쳤다!』
드카노스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너희가 떳떳하다면 어째서 도망친 거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대체 뭘 모른다는 거냐?!』
『흔한 이야기야.』
상호는 얼굴로 날아드는 드카노스의 팔을 쳐냈다.
『인간에게는 정말…… 정말 흔한 이야기다, 드카노스. 그렇지만 오크에겐 아니겠지.』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눈이 있으면 보라고, 임마. 저놈들이 아직도 구경꾼으로 보이냐?』
그 말에 드카노스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경꾼들 사이로 언뜻 기다란 막대 같은 것이 보였다. 투창. 그리고 활.
평범한 구경꾼들 속에, 모든 방향에 전사들이 골고루 숨어 있었다.
“…….”
결투는 일대일. 타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드카노스는 그제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누가 저들에게 명령을 내렸는가.
『그러면…….』
적어도 인간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건, 누구란 말이냐?』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상호의 말이 드카노스의 심장을 찔렀다.
『족장의 집에 들어가도 의심받지 않을 자,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자, 독을 아는 자……. 그런 자가 많으냐? 너희 부족에?』
『……왜 결투 전에 말하지 않았지?』
『말로 했으면 믿었을까? 이렇게 두 눈으로 보여줘도 의심하는 중인데. 그리고…… 원인은 우리가 맞긴 하니까.』
상호는 드카노스를 밀어내고 마주 섰다.
『난 원래 오크어를 배울 생각은 없었다.』
“…….”
『그때도 더럽게 못했어. 우리말이랑 너무 다르거든, 너희 말은……. 그렇지만 네 아버지를 보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양옆으로 뻗은 그의 손에 검과 도끼가 날아들었다.
『네 아버지 덕분에 확실히 알았다. 오크가 어떤 종족이고, 자기 부족의 장래를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 종족인지……. 지금 네 모습을 보니, 꼭 그 아비에 그 아들이구만 그래.』
“…….”
드카노스는 상호가 건네는 도끼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배신자가 보이나?』
그 말에 눈이 트이는 듯했다.
드카노스는 도끼를 덥석 잡고 돌아섰다. 그의 주황색 눈동자 속에서는 분노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노르고른.』
도끼를 쥔 손에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앞으로 나와라.』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 오크가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등이 구부정한 오크.
드카노스의 도끼가 노르고른을 가리켰다.
『아버지를 죽인 게 당신인가?』
『…….』
『당신의 형을 죽였느냐고 물었다.』
노르고른의 그늘진 눈에 스산한 빛이 비쳤다.
『아니오.』
하지만 드카노스도 이제 알 수 있었다. 노르고른이 거짓말을 하는 오크임을.
드카노스의 온몸에 힘줄이 솟았다.
『그게 신의 뜻이냐?』
『신은 있지만 신탁은 없소, 족장.』
노르고른이 손을 들어 올리자 구경꾼들 사이에 숨어있던 전사들이 활과 투창을 들어 올렸다.
드카노스는 콧김을 뿜으며 눈을 부라렸다.
『무슨 소리냐?』
『다 주술사들의 거짓말이란 뜻이오. 신의 사자가 우리를 찾긴 하지만 내 머리에 신탁이 직접 꽂히는 건 아니라오. 그냥 족장의 혈족에게 발언권과 견제력을 주려는 선조들의 거짓말이지.』
드카노스의 입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네놈.』
『주술을 믿소, 족장? 그거 다 거짓말이외다. 이전 세계의 인간들이 제가 주인이라며 온 땅을 정복하려 들었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소. 애초에 신이 수많은 오크 부족 하나하나에게 명령을 내린다니, 개가 웃을 일이지…….』
노르고른은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웃다가 웃음을 싹 거뒀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오.』
노르고른의 손가락이 드카노스와 상호를 겨눴다.
『내 거짓말은 내 부족을 위해서 있소. 언제나 그랬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 이것도 그렇고……. 이게 족장을 위해서도 좋소. 형님도 아들이 보고 싶겠지.』
『이 새끼……!』
휘익
노르고른의 입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오크 전사들이 상호와 드카노스를 향해 창을 던지고 활을 쏘았다.
후욱……
수천 겹의 바람소리가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제 함정에 남을 끌어들일 순 없다거나, 신성한 결투에 타인이 끼어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그래서 순전히,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드카노스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상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퍼억
그리고 다소 거칠게 몸을 내리눌러 그 위를 감쌌다.
어차피 그는 죽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가 죽어야 부족원이 부족을 버리고 새로운 부족으로 태어날 테니. 노르고른이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는 않겠지만, 진짜 주술사인 여동생이라면 새 부족을 이끌어줄 것이라 믿었다.
그는 눈을 감고 창날과 화살촉을 기다렸다.
‘…….’
기다렸는데.
‘……음?’
도통 오지를 않는다.
즉사를 한 건가. 이미 조상들의 영혼세계에 도착한 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수백 개의 창과 화살이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처음 내 스승이 널 살렸고…….』
밑에 깔린 상호가 드카노스째로 몸을 들어 일어났다.
『그다음 네 아버지가 우리 부족을 살렸고…… 그저께는 네가 날 살렸으니, 이제 내가 널 살려줄 차례군.』
상호는 손가락을 딱 튕겼다.
허공에 붙잡혀 있던 창과 화살이 일시에 부러졌다. 단 한 순간에. 전사들이 들고 있던 활과 투창기까지도.
와지직……
아름드리 나무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 드카노스는 얼이 빠진 채로 상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른 오크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너…….』
『수준 맞춰 싸우기도 힘들구만.』
상호는 허공섭물로 노르고른을 붙들었다.
보이지 않는 힘이 몸을 들어 올리자 노르고른이 당황하며 팔다리를 버르적거렸지만, 결국 의미 없는 발버둥이 될 뿐이었다.
『윽……!』
『오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댄다.』
곧 노르고른이 드카노스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너희 아버지가 그러더라고.』
『음.』
드카노스는 상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을 하면 오크가 아니지.』
『네놈들……!』
『할 말이 있으면 맘껏 해봐.』
입을 못 열게 만들기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상호는 뒷짐을 지고 피식 웃었다.
『아마 없을걸?』
“……!”
그 말대로 노르고른은 무어라 따지고 싶은 듯 입을 열면서도, 할 말이 없어 벙긋거리기만 하게 될 뿐이었다.
상호는 드카노스의 어깨를 툭 쳤다.
『끝내자고.』
『좋지.』
드카노스의 도끼가 높이 치켜졌다.
* * *
『……그래서.』
드카노스가 나뭇잎 잔에 담긴 음료를 마셨다.
『우리 신을 죽이러 간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신이란 개념이랑 좀 다르긴 한데.』
상호도 약차를 홀짝였다. 아까 먹은 것보단 많이 연했다.
『지금 너희한테 명령을 내리는 놈인 건 확실해.』
『신을 죽일 수 있나?』
『신이랑 좀 다르다니까. 그리고 그놈은 날 겁내더라고.』
그럼 죽일 수 있는 거 아니겠냐, 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드카노스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한가?』
『……아마도.』
『아마도란 단어는 확실하지 않을 때 쓰는 거다.』
『알아 임마. 오크어 제대로 배웠다고.』
상호는 혀를 차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그놈을 죽이러 가야 하는데…… 부탁이 하나 있어.』
『뭐든 말만 해라. 가능한 건 다 들어주지.』
『내 제자들을 찾아야 돼.』
『……아하.』
드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의 도움이 필요하다?』
『맞아. 가능한가?』
『충분히 가능하지. 바로 떠날 건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지금 당장도 좋고……. 돌아올 땐 내가 없을 테니, 동생 혼자 걸어오게 둘 셈이 아니라면 너도 같이 가야겠지.』
『바로 준비하겠다.』
상호는 드카노스의 흔쾌한 대답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
“뺙.”
“……끄륵?”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발음이 새어 버렸다.
너무도 익숙한 아기새 소리. 그는 얼이 빠져서 입을 떡 벌린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짚으로 만든 천장 위에서 뺙뺙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냐?』
드카노스도 의아한 표정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둘이 올려다보는 바로 그곳에서 곧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조그만 황금색 아기새가 뿅 하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뺙?”
“…….”
한 오크와 한 인간. 그리고 한 아기새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상호의 머릿속이 멍해졌다.
‘설마…….’
그때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드카노스는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도끼를 집었다.
『전투태세다. 같이 가보겠나?』
『……잠깐만, 잠깐만.』
상호도 황급히 검을 챙겼다.
『내가 먼저 가볼게.』
『음?』
『설명할 시간 없어. 알아서 와.』
돌풍과 함께 상호의 모습이 사라졌다.
족장의 집 문을 박차고 나와 하늘로 솟은 상호는 빠르게 마을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남쪽에서 한 무리의 오크가 무언가와 대치중이었다.
‘역시나…….’
상호는 쏜살같이 그곳을 향해 날았다. 아이들이 사고를 치기 전에 말리기 위해서.
곧 아이들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야, X발새끼들아. 선생님 어딨어! 내놔!”
“마, 세희야. 진정해라 임마. 쌤 살아 있다 아이가. 괜찮을 기다.”
“선생님, 선생님…….”
“질질 짜지 좀 마, 밥팅아!”
세희가 검을 붕붕 휘두르고는 있었지만, 지윤과 나빛이 말려서 사달이 나지는 않은 듯했다.
상호는 아이들이 반가워서, 또 무사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워서 눈물이 핑 돌았지만, 한편으로는 눈에 핏발을 세운 세희가 무서워서 오줌보가 살짝 졸아들었다.
‘나한테 화를 내진 않겠지……?’
그래야 할 텐데.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이들과 오크들 사이에 착지했다.
그를 발견한 나빛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쌤?”
“쌤예!”
태화와 나빛과 지윤이 그를 향해 와락 달려들었다. 눈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왜 이딴 데 있는데! 걱정했잖아! 죽어!”
“미안, 미안…….”
“왜 우리 떼놓고 혼자 가신 거예요……. 무서웠단 말이에요……. 책임져요……. 저 흰머리 났어요…….”
“진짜 미안…….”
“오크놈덜이 노예로 부리는 줄 알았다 아임니꺼…….”
“아냐, 아냐. 괜찮아. 잘 지냈어. 너흰 괜찮아?”
“네에…….”
“그럼 됐어.”
상호는 쓰게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다만 그의 품에 뛰어들지 않은 아이가 한 명 남아 있어서, 그의 목덜미와 등골은 땀구멍을 오므려가며 바쁘게 살기를 탐지하는 중이었다.
‘……으음.’
눈이라도 마주쳤다가는 심장이 멈출 것 같다.
그래도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 상호는 아이들의 등을 토닥이다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어라?’
상호의 심장이 순간 멈췄다.
“선생님…….”
세희가 세상 흐무러진 얼굴로 울고 있어서.
“왜…… 왜 못 돌아오고 이런 데 계셨던 거예요…….”
“……미안.”
“다 죽이고…… 나도 죽어야 하는 줄 알았잖아요…….”
“…….”
“책임지세요…….”
그가 손짓하자 세희도 비틀비틀 걸어와 그의 품에 안겼다.
상호는 훌쩍이는 세희의 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어르듯이 몸을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쉬지 않고 미안하단 말을 속삭이며.
일부러 아이들 힘들라고 낙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없이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책임질게. 책임져야지. 세희 울렸으면 책임져야지…….”
“이제 절대 헤어지지 마요…….”
“그럴게, 그럴게.”
그렇게 씩 웃어보이는데, 나빛이 갑자기 황금색 각목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
“응?”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들어온 변화구에 상호는 폭포처럼 진땀을 흘렸다.
세희 쪽이 아니었던 걸까.
“왜, 나빛아……?”
“저는 왜 안 책임지세요……?”
나빛의 말똥말똥한 회색 눈동자에 순수한 광기가 비쳤다.
“제가 세희보다 더 많이 울었는데…….”
“책임져야지! 책임져야지, 나빛이도 당연히 책임져야지, 응…….”
“눈물은 눈물로 갚아야 해요…….”
“……응?”
“선생님도 좀 울어보세요…….”
각목이 상호의 정강이로 날아들었다.
상호는 황급히 점프해서 그 각목을 피하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짜냈지만, 이미 두 번째 각목이 그의 엉덩이로 날아들고 있었다.
“아야야! 아야, 나빛아, 선생님도 이제 눈물 날 것 같아…….”
“울어서 진심을 증명해보세요…….”
“악! 아, 나왔다! 눈물! 눈물! 나빛아, 여기 눈물…….”
“선생님은 눈이 하나잖아요…….”
“……응?”
허공에 수십 개의 각목이 나타났다.
“두 배로 흘리셔야죠…….”
“…….”
그게 대체 무슨 논리냐고 따질 새도 없이, 허공에 수많은 각목들이 나타나 상호를 구타했다.
“……으아아악!”
“피하지 마세요…….”
“나빛아, 제발…….”
“각목이 창으로 변할 수도 있어요…….”
“제발…….”
그렇게 구타를 당하는 상호의 주변에서는, 어느새 도착한 드카노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상호와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