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489. 결자
몸이 뜨거웠다.
처음에는 둔하고 흐릿하게 느껴졌던 감각은, 의식이 선명해짐에 따라 견디기 힘들 만큼 날카롭게 피부를 찔렀다.
따끔하기도 하고, 화끈하기도 하고. 온몸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헉.”
상호는 숨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어두운 시야 속에 수많은 선이 가운데로 모이는 모습. 그게 짚으로 만든 천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짚 사이로 언뜻언뜻 바깥의 빛이 비쳤다.
‘뭐야.’
짚으로 만든 움집. 그는 몸을 일으켜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대체 어디인가.
분명 빗속에 쓰러졌었는데.
‘이게 무슨…….’
문득 몸이 다시 화끈거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몸이 길게 찢은 가죽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피부와 가죽 사이에는 무언가 축축한 진흙 같은 것이 덧발라진 채였다.
상호는 혼란스러워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뭐지……?’
그때 움집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키가 아주 크고 몸집이 우람한 사내. 아랫입술 뒤로는 엄니 두 개가 위를 향해 삐져나와 있고, 피부는 회색빛이 도는 초록색. 그 위로 그려진 단순한 모양의 붉은 문신.
오크.
‘……!’
상호는 반사적으로 검을 찾아 허리 근처에 손을 짚었으나, 잡히는 것은 흙뿐이었다.
오크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그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튼튼하고 큰 나뭇잎 여럿을 둥글게 접어 만든 물그릇.
『오래도 자는군.』
굵은 목소리가 움집 안을 둔탁하게 울렸다.
상호가 알고 있는 부족의 오크어였다.
『……혹시.』
그런 오크어로 인간인 그에게 굳이 말을 걸었다는 것은.
『날 아나?』
『알지.』
오크의 눈동자는 주황색이었다.
『저승부족의 꼬맹이. 키가 줄었군.』
오크어에는 집단을 표현하는 말이 부족밖에 없다. 상호는 키가 줄었다는 말을 통해 오크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네놈이 무식하게 커진 거지…….』
그는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흙과 가죽붕대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물건들은?』
오크가 대답 대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움집의 문이 열리고 다른 오크가 들어와 바닥에 상호의 전투복과 검을 던졌다. 그 오크가 다시 밖으로 나가자 주황색 눈의 오크가 입을 열었다.
『다 빨아 놨다.』
전투복은 모래투성이였다.
오크들은 물이 아니라 모래로 빨래를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상호는 투덜대면서도 따지고 들진 않았다.
그는 몸에 감긴 가죽을 풀어내며 물었다.
『이건 뭐야?』
『약초와 진흙이다. 체온을 알맞게 유지하는 데에 탁월한 효능이 있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게 말이야.』
『다음부터 이럴 일이 있다면 좀 약하게 하지 그래. 인간은 너희보다 피부가 얇다고.』
『전사라면 그 정도는 버텨라.』
“……쳇.”
가죽과 진흙을 다 떨어내고,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 입고, 검을 허리에 차고.
나갈 준비를 마친 그에게 오크가 물었다.
『배고픈가?』
『식사라도 차려주게?』
『멧돼지로 만든 육포가 있지.』
『그거라도 줘봐.』
곧 오크가 휘파람을 불었고, 또 오크가 와서 그의 앞에 나뭇잎 뭉치를 던졌다.
안에 든 것은 말라비틀어진 육포 몇 조각. 상호는 육포를 질겅이며 나뭇잎 그릇에 든 물을 들이켰다.
“……푸우웁!”
미친 듯이 썼다.
입에도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린다. 상호는 그제서야 오크가 처음에 들고 왔던 물이 약초를 우린 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몸에 뿌리려고 가져왔다는 것도.
그는 콜록거리며 이를 갈았다.
『물도 가져와야 할 거 아냐!』
『그 물은 마셔도 된다. 뭐 바르기만 해도 유난을 떠는 꼴을 보니 인간의 내장으론 버티기 힘들 것 같군.』
“하…….”
상호는 그릇을 내던지고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좀 욱신거리긴 하지만, 내공은 조금 돌아와 있었다. 단전이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몸을 추스르고 나니 작전에 생각이 미쳤다.
『날 데려온 지 얼마나 지났지?』
『오늘이 네가 여기 온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그러니까, 어제 하루 종일 쓰러져 있었다는 말이지?』
『그래.』
작전을 시작한 지 5일째가 되는 날.
나흘 안에 마신을 잡으러 가야 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출발해도 쉽지 않은 거리인데, 아이들까지 곁에 없으니.
아이들부터 빨리 찾아야 한다.
그는 비틀거리며 입구로 걸어갔다.
『잘 먹고 간다.』
『가는 건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짚으로 만든 문을 걷자마자 상호의 발치에 도끼가 박혔다.
퍼억
“…….”
상호는 문 옆에 서 있는 오크를 노려보았다. 오크의 기준으로도 키가 크고, 등이 굽고, 조금 마른 오크.
각도를 보니 그를 노린 것은 아니고 앞길을 막은 것 같았다.
『이건…….』
상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황색 눈의 오크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지?』
『오크는 모두 전사다.』
그를 지나쳐 간 오크가 땅에 박힌 도끼를 잡았다.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자를 죽이는 건 오크의 수치다.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으니, 더 필요한 건 없겠지. 이제 그 대가를 치러라.』
“…….”
상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지금 여기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크가 도끼를 들어 어깨에 걸쳤다.
『내 이름은 드카노스, 너희가 죽였던 발라쿠른의 아들이다. 저승부족의 이름 모를 꼬맹이. 따라와 내 도끼를 받아라.』
『……그래.』
평소였다면 개소리 취급하고 아이들을 찾으러 도망갔겠지만, 빚을 진 건 인정해야 했다. 빗속에 쓰러져 있었다면 죽었을 테니.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크의 앞을 턱짓했다.
『구경꾼이 필요하면 빨리 모아. 시간 없으니까. 그리고 내 이름은 강상호다.』
『카웅산 호그, 따라와 내 도끼를…….』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안내를 해, 임마.』
둘은 움집들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 * *
아르게스 땅을 처음 밟은 지도 벌써 두 달째.
저승부대는 이제 아르게스 서부에 대한 기록을 상당히 많이 기록해 놓았다. 땅이 워낙 넓은 탓에 아직 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분명히 그들만의 안전한 루트를 조금씩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산맥 너머 시커먼 땅, 최심부 그라운드 제로를 향해서.
그날도 동쪽을 향해 전진하던 중이었다.
“야.”
효은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풀을 헤치며 걷던 상호는 짜증이 넘치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나 화장실.”
“니가 화장실이라고?”
“뭐래, 미친 변태새끼.”
“화장실도 없는 곳에서 화장실이라고 하면 니가 화장실인 거지 이 화장실년아.”
“뭐래, 머리에 변태같은 생각밖에 없는 게. 대충 알아먹어.”
상호는 앞서가는 재훈과 진구를 불렀다.
“형.”
“응?”
“얘 또 싼대.”
“……야!”
효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싼다는 것을 싼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할 것인가. 대신 싼다고 말해달라는 것인가. 하지만 상호는 그렇게 융통성 있는 인간이 못 되었다. 특히 효은에게는.
그는 효은의 종아리를 툭툭 차며 말했다.
“갔다 올게. 야, 빨리 가.”
“오빠, 이거 들었지? 얘 아직도 누나라고 안 하는 거 대장 아저씨한테…….”
“누나. 빨리 싸러 가자고요, X팔.”
“오빠! 얘 욕했어!”
“그래그래, 얼른 갔다 와라.”
상호와 효은은 손을 흔드는 대원들에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어느 정도 멀리 왔을 때, 상호는 쪼그려 앉는 효은과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섰다.
“빨리 싸.”
“말 시키지 마.”
쪼르르 소리가 들렸다.
폭포에 빗대는 건 식상한데, 뭔가 좀 더 개같은 표현이 없을까. 상호는 어떤 말을 해야 효은이 치를 떨지 고민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너 오줌싸면서 초코바 먹냐?”
“뭔 개소리야, 갑자기.”
그 말에 상호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잠깐 끊어.”
쪼르르 소리가 멈췄다.
바스락 소리가 들린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상호는 숨을 죽이고 귀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대화가 이미 들렸을지도.’
놈들도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혹은, 그가 헛것을 들었거나.
‘낙엽 같진 않았는데…….’
숨는 걸 보니 무언가 있더라도 그들보다 약한 동물일 것이다. 상호는 혀를 찼다.
“됐어. 싸.”
“……야.”
효은이 치를 떨며 말했다.
“너 장난친 거지.”
“아니야, 등신아. 진짜로 뭐 있었어.”
“너…… 나중에 봐.”
“진짜라고! 멍청아, 안 믿을 거면 나는 왜 데려…… 에휴, 됐다. 빨리 싸기나 해.”
“보채지 마!”
상호는 마무리가 끝날 때까지 효은을 기다리며 귀를 기울였지만, 그 바스락 소리는 다신 들리지 않았다.
* * *
“경로에 부락이 있다.”
명욱이 지도를 짚었다.
“규모가 상당해. 오크인지 리자드맨인지는 알 수 없지만…… 타격하면 한반도로 가는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거다.”
도현이 명욱의 눈치를 살폈다.
“기습하는 건가요?”
“그래야겠지.”
조금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상황. 조금 비겁하고 구차한 것 따위는 사람의 목숨에 비할 바 못 되었다. 도현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도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코앞이네요?”
“내일 정찰할 거다. 언제 기습할지는 상황을 봐야겠지. 놈들이 주행성인지 야행성인지 모르니까.”
하늘에서는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명욱은 지도를 접고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묵는다. 둘씩 짝지어서 식량 구해 와.”
“넵.”
대원들은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 * *
“뭐 보이는 게 없네.”
예경이 한탄하며 나무를 긁적였다.
“오늘 저녁밥도 벌레인가~.”
“강에서 뭔가 잡아오긴 하겠죠.”
“매운탕 먹고 싶어~.”
“휴가 가면 먹죠. 다다음 주까지 참아봐요.”
상호는 그렇게 대답하며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칠 수 없다. 산딸기 하나라도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열심히 수풀을 헤집어도 먹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점심에 벌레를 먹어서 저녁은 다른 걸 좀 먹고 싶은데.
‘이 버섯 먹어도 되는 건가…….’
아쉬운 마음에 나무둥치에 난 버섯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는데, 어딘가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낮에 들었던 소리와 똑같았다.
“누나.”
상호는 검을 뽑았다.
“미행이 있는 것 같아요.”
“응?”
예경이 눈을 깜작였다.
“미행?”
“네.”
“난 못 느꼈는데…….”
“살의가 없거나…….”
미행 실력이 상당할지도.
상호는 검을 든 채로 소리가 들렸던 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아직 살피지 않았던 수풀이었다.
검이 수풀을 걷어냈다.
“…….”
초록색의 인간형 몬스터 둘이 웅크려 있었다.
오크. 한쪽은 수컷, 한쪽은 암컷. 둘 다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았다. 인간 기준으로 십 대 초반 정도. 입고 있는 가죽과 피부에 그려진 붉은 문양이 야생과 문명 사이의 어딘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주황색 눈동자 두 쌍과 까만 눈동자 하나가 서로를 마주하는 동안.
그 사이로 칼이 들려 올라갔다.
“상호야.”
고운 손이 그 검을 덥석 잡았다.
“안 돼. 어린애들이잖아.”
“죽여야죠.”
상호는 놈들을 향해 눈을 번득였다.
“몬스터잖아요.”
“그럼 몬스터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도 뭐라 할 수 없게 돼.”
예경은 그의 검을 굳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먹으려고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나쁜 짓이야, 상호야. 그러면 안 돼.”
“이놈들이 자라서 사람을 죽일 텐데요.”
“그럼 그때 막자. 우리가 같이.”
“…….”
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놈들 그냥 놔주지는 못하겠는데요. 우릴 미행하고 있었잖아요. 놔주면 마을에다가 우리 존재를 알릴 게 뻔한데…….”
“일단은 대장님한테 데려가자.”
예경은 상호의 검을 내려 칼집에 넣게 했다.
그리고는 두 어린 오크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해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올래?”
“……크륵.”
“아차, 사람 말을 모르지. 으음, 이걸 어쩐다…….”
난색을 짓던 예경이 손짓 발짓으로 뜻을 전했다.
그 몸짓을 이해했을까. 수컷 오크와 암컷 오크는 서로를 돌아보며 머뭇거리다가, 곧 예경을 마주하고 가만히 섰다.
“준비가 된 것 같네.”
예경이 씩 웃었다.
“가자, 대장님한테.”
* * *
“……그래서.”
열두 명의 부대원 한가운데에 오크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데려왔다고?”
“네.”
예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을 죽일 순 없잖아요.”
“……이해는 한다만.”
명욱의 시선이 상호를 흘끗했다.
“그래, 어린아이를 죽이는 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지. 그치만 데려가서 뭐 하게? 눈앞에서 마을을 부수는 걸 보여주게?”
“……어라?”
예경의 눈동자가 팽팽 돌았다.
“그건 좀……. 그러려고 한 건…….”
“죽이는 게 낫다. 내 생각은 그래.”
명욱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조용히 처리하고 오마.”
“대장님.”
“응?”
옆을 돌아보니 영주가 손을 들고 있었다.
“죽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왜?”
“이 땅의 주인이니까요. 죽이면 땅이 화낼 겁니다.”
“…….”
명욱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자 영주가 부연했다.
“우리도 우리 땅에 들어오는 몬스터들을 고깝게 여기지 않습니까?”
“그렇지.”
“이 땅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내려면 이 땅의 주인에게 초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게 오크라고?”
“네.”
“…….”
부대원들의 눈이 핑핑 돌았다. 영주의 말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초대……는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우리가 얘들이 사는 마을에 초대를 받아야 해.”
“어떻게?”
“그건 얘들이 정해야지.”
영주는 오크들을 턱짓하고 명욱을 보았다.
“만약 우리가 초대를 받는다면, 그 초대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절대로 공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놈들이 먼저 공격하면, 그때는 반격해야겠지.”
“그래서도 안 됩니다.”
“…….”
반격도 안 된다. 그 말에 명욱도, 부대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가면 뭐 하는데?”
“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워야지. 초대받은 자는 초대한 이를 이해하려 노력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례한 약탈자일 뿐이니까.”
“놈들이 우릴 환영할까?”
“그건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영주는 알 수 없는 말을 마치고 오크를 향해 돌아섰다.
“등을 맡기고 자기엔 아직 신뢰가 부족하겠지. 이 친구가 데려다주는 마을에서 자야겠네.”
영주는 그들을 향해 출발하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오크들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들이 마을에 해가 되진 않을지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 걱정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신하는 수준.
그들의 경계심을 읽은 영주가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겁을 좀 많이 먹은 것 같은데.”
그 말에 예경이 눈을 깜작이다가 상호를 돌아보았다.
“상호야, 네가 칼 들이밀어서 그런 거 아냐?”
“……그거야 그렇겠죠.”
“네가 화해해야 할 것 같은데.”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들은 분명 적군. 오크들은 이미 몇 번이고 한반도를 침공해 피해를 입힌 적이 있었다. 이 녀석들의 부족이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만, 종족이 같은데 부족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를까.
다 똑같은 놈들. 똑같은 족속.
그래서 검을 내리치려 했던 게 딱히 미안하지 않았다.
‘화해는 개뿔…….’
그런데 어째 무언가가 어깨를 내리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경과 명욱의 무언의 압박. 빨리 하지 않으면 한 대 쥐어박힐 듯한 느낌이 뒤쪽에서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
상호는 결국 손을 내밀었다.
오크는 그 살구색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초록색 손을 들어 상호와 손을 맞잡았다.
“된 것 같네.”
예경이 씩 웃었다.
“그럼 이제 초대받은 건가?”
“아마도.”
영주가 다시 오크들에게 출발하라는 손짓을 하자, 두 오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명욱이 그 뒤를 따르며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따라간다. 주변 경계하는 거 잊지 마.”
“넵.”
작지만 한목소리로 뭉친 대답이 뒤를 이었고.
그들은 오크들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 * *
『인구가 많이 줄었군.』
상호는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지난번 전투 때문인가?』
『한몫했지.』
드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광산에 끌려가고, 뭔지도 모르겠는 걸 지키라고 시키고……. 신의 사자들이 툭하면 부족원들을 데려갔다. 이제 노련한 전사는 몇 없지.』
『너희도 고생이군.』
상호는 혀를 찼다.
부락 중심에는 움집 말고도 나무를 이용해 지은 집이 많았다. 야생보단 조금 더 명확하게 문명에 가까운 풍경. 하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생기는 10년 전보다 훨씬 졸아든 채였다.
지나쳐가는 오크들이 상호를 대놓고 쳐다보았다.
『아직도 미워하고 있구만.』
『환대를 바란 건가?』
『아니.』
상호는 쓰게 웃었다.
『우리가 죽인 건 분명하니까.』
드카노스가 말없이 어느 목책의 문을 열었다.
목책 안에는 잔디 한 포기 없이 황량한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꽤나 넓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 마을의 오크를 모아 가운데에 둥그런 싸움터만 남기고 빼곡하게 채울 수 있었겠지만, 수가 줄어든 지금은 반의반을 겨우 넘길 만큼 한산했다.
상호는 드카노스를 따라 가운데로 걸어갔다.
『규칙은 간단하다.』
드카노스가 상호의 주변을 둥글게 걸었다.
땅에 끌린 도끼가 상호를 중심으로 원을 그렸다.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 그게 유일한 규칙이다.』
『……너.』
상호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정말로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어느 도끼가 더 단단한지는 부딪쳐 봐야 아는 법이지.』
원이 닫히자 드카노스가 도끼를 들었다.
모양은 투박하지만 문양은 복잡한 도끼. 오랜 세월을 지나왔는지 칭칭 묶인 가죽에는 때가 탔고, 손잡이의 끝은 점점 갈라지고 있었다.
아마 드카노스의 나이보다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칼을 뽑아라, 꼬맹이.』
도끼날에 누른 기운이 맺혔다.
* * *
“살짝…….”
재훈이 어색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후회되려고 하는데, 영주야.”
“공격하면 안 돼.”
“아니, 알아, 알아. 그만 말해.”
수많은 오크들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도끼, 창, 활. 셋 중 하나도 들지 않은 이는 저승부대가 데려온 어린 오크 둘뿐이었다.
그중에서 도끼를 든 늙은 오크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딱 봐도 우두머리처럼 생긴 오크였다.
“크륵.”
두툼한 입술 사이에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긴 한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명욱은 부대원들을 돌아보았다가 오크를 향해 다가섰다.
부대원들은 손을 뻗었고, 부족원들은 무기를 뻗었다.
“대장님?”
“크륵…….”
명욱과 늙은 오크는 각자의 소속원들을 막았다.
이윽고 둘이 마주 서자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둘은 가만히 서로의 기색을 탐색했다. 야생에서 마주친 두 동물이 언어 없이도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처럼.
상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믿을 만한 놈들이 아냐.’
짐승 같은 종족이다.
전투만 시작되면 미쳐 날뛰는 종족. 죽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 전투기계와 같은 종족. 그런 종족이 과연 초대나 환영이라는 개념을 알고는 있을지, 상호는 의문을 거두지 못했다.
곧 오크가 도끼를 들어 올렸다.
“대장님!”
대원들이 무기를 잡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무기를 움켜쥔 모두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아?”
오크가 명욱에게 도끼의 손잡이를 내밀고 있었다.
그 손잡이를 빤히 내려다보던 명욱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우뚱하다가 영주를 돌아보았다. 이게 맞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영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명욱은 오크의 도끼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허리에서 풀어 오크에게 건넸다.
“크륵.”
오크도 그의 검을 받아들었다.
둘이 무기를 교환하자 늙은 오크와 오크들 모두가 돌아서서 마을로 향하기 시작했다. 도끼를 든 명욱은 멀뚱히 서 있다가 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
“도끼를 그냥 준 건 아니겠죠. 꽤 귀한 거 같은데.”
“통행증? 뭐 그런 건가?”
“일단 따라가 보자.”
대원들은 우르르 몰려 오크들을 따라갔다.
상호는 예경과 함께 나란히 걷다가 무언가 거슬리는 것을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나.”
“응?”
“방금 봤어요?”
“뭐를?”
“아뇨, 못 봤으면 됐어요.”
그는 보았다. 오크들 중 한 마리가 그들을 향해 못마땅한 눈빛을 보낸 것을.
키가 크고, 등이 굽고, 조금 마른 오크.
우두머리의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측근이거나 혈족인 듯했다.
‘…….’
아직 믿기는 이르다.
상호는 눈빛을 날카롭게 갈며 걸음을 옮겼다.
* * *
‘생각보단…….’
상호는 고기를 질겅이며 생각했다.
‘대접이 나쁘진 않네.’
그의 앞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장대에 꿰여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사람 밥보다는 못하지만 벌레보단 훨씬 낫다. 옆에 있는 대원들도 고기를 뜯으며 꽤나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야, 이놈 살이 잘 올랐는데…….”
“이 녀석들이 키우는 건가?”
“김치만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네.”
“민정아, 우리 김치 한 통만 들고 다니면 안 될까? 너 마법 있잖아.”
“내가 김치냉장고야?”
첫 식사는 그렇게 무탈하게 끝났다.
오크들도 저마다 움집으로, 나무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나 아무래도 잘 준비를 하는 듯싶었다. 부대원들은 오크 족장이 그들에게 내어준 움집을 흘끗하고 서로를 돌아보았다.
“불침번은 서야겠죠?”
“당연하지. 놀러 왔냐?”
“찔렀으면 진작에 찔렀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서야지.”
명욱이 대원들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재훈, 도현, 영주, 민정. 두 시간씩 선다. 자다가 화장실 가고 싶으면 한 명 깨워서 가고. 초대를 받긴 했지만 너무 마음 놓고 지내진 않도록 해라.”
“넵.”
“자자.”
대원들은 바닥에 깔린 나뭇잎 위에 몸을 뉘었다.
* * *
조용한 일주일이 흘러갔다.
오크들은 상호의 예상과는 달랐다. 생각보다 점잖고, 생각보다 똑똑했다.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는 무례하고 멍청하긴 했지만. 딱 한 가지만은 인간보다 나았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
더 정확히는, 절대로 뒤통수를 치지 않는다는 것.
“아무리 봐도…….”
재훈이 조그만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하며 입맛을 다셨다.
“이놈들, 거짓말만 할 줄 알았어도 멍청한 줄 몰랐을 텐데.”
“그게 이 녀석들의 명예인 거지. 자존심, 자긍심…….”
도현은 어깨를 두드리며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또 모르지. 민정이랑 대장님 없는 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오크들이랑 이야기해본 건 그 둘밖에 없잖아.”
“민정이도 대단하다. 걘 어떻게 오크 말을 금세 알아듣냐?”
“학교에서 암호 해독 배우다 왔대. 막 DNA 해독하고 그랬다는데. 그래서 마법도 잘하나…….”
“천재야 천재. 결혼할 놈은 인생 폈네.”
둘의 시선이 동시에 상호를 향했다.
칼을 손질하던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둘에게 역정을 냈다.
“뭐.”
“아니, 그냥. 근데 상호 너 요즘도 가끔 민정이랑 자냐?”
“……난 우리 누나 옆에서만 자.”
“중증이네, 임마. 누나 좀 놓아 줘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민정과 명욱이 움집 안으로 들어왔다. 명욱이 부대원들을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밥은 우리가 알아서 먹는다.”
“엑!”
“엑은 뭐가 엑이냐. 주는 것도 없이 받아먹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손님으로 남을 수는 없지.”
“손님이 아니면 뭔데요?”
“외교관.”
명욱이 민정을 턱짓했다.
“다들 오크어 잘 배워 둬. 오크어는 부족마다 사투리가 심해서 다른 곳에 가면 못 쓴다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여기 정도면 충분히 인간에게 편견 없는 곳인 것 같으니, 앞으로 계속 교류할 가치는 있겠지.”
“넵.”
대답하는 대원들 사이로 민정이 걸어와 상호의 옆에 앉았다.
상호의 입이 조금씩 튀어나오는 것을 본 민정이 쓰게 웃었다.
“배우기 싫어?”
“공부가 좋은 사람이 어딨어.”
“누난 좋은데. 오크어도 배워보면 재밌어. 진짜 다른 세상의 언어잖아. 사람들 말이랑 얼마나 비슷한지 찾다 보면…….”
“알아서 뭐해, 써먹을 데도 없구만…….”
“에이, 알아두면 다 쓸모가 있지.”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의 오크어란 것은 영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발음하기도 어렵고, 그냥 듣기에도 거슬리고. 아무래도 인간의 발성기관에 맞춰진 언어가 아니다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특히나 목소리가 얇은 인간 여자의 경우에는.
“갸르락크아뚜악!”
……이렇게, 꼭 새끼 고양이과 같은 어린 짐승이 목을 긁는 소리가 되어 버릴 뿐이었다.
상호는 그를 향해 달려드는 예경을 보고 질겁했다.
“아익, 누나! 왜 그래요, 또!”
“크아앙~!”
“그게 무슨 오크어예요, 그냥 호랑이지!”
“누나는 상호 잡아먹는 호랑이다아~, 크앙~.”
예경이 싱글벙글 웃으며 얼굴 옆으로 주먹을 까딱거렸다.
그 애교 넘치는 모습에 상호는 뭐라 화내지도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대체 뭐라고 말하는 거예요?”
“맞춰봐.”
“……힌트 없어요?”
“세 글자야.”
“세 글자…….”
그럼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상호는 뺨을 붉히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예경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
“땡! 답은 결투다야! 오늘 밤 결투다, 강상…….”
“와아아아악!”
상호의 손이 다급히 예경의 입을 막았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예경의 귀에 속삭였다.
“누나! 컨셉! 컨셉!”
“……백상호! 갸르락크아뚜악~.”
“아익, 누나! 그만 좀 해요!”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예경의 웃음만은 막을 수 없었고.
까르르 깔깔, 맑은 웃음소리가 움집 안을 가득 채웠다.
* * *
『결투다.』
드카노스가 도끼를 들었다.
상호는 그 도끼를 노려보며 검을 뽑았다. 아주 느릿하게. 마치 드카노스의 인내심을 시험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이윽고 검이 다 뽑히는 순간, 드카노스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상호가 서 있었던 자리에 도끼가 내리찍혔다.
도끼날의 크기는 인간 남자의 몸통만 했다. 굳이 날을 세우지 않아도 어지간한 동물은 피떡으로 만들어 죽일 수 있을 듯했다.
맞추기만 한다면.
그러나 상호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후웅……
상호가 서 있던 허공을 도끼가 갈랐다.
상호는 딱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채였다. 그의 눈동자는 굳이 도끼를 주시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으로, 그때 자신이 죽이려 했었던 어린 오크를 바라볼 뿐이었다.
쐐액……
또 헛손질.
연이은 실패에 열이 오른 드카노스가 양손으로 도끼를 꽉 움켜잡았다.
“……크라아악!”
휘두른 도끼에서 날카로운 마나가 뻗어 나갔다.
하지만 그 또한 상호가 이미 지나온 경지. 상호는 검으로 마나를 맞받아치고 검에 강기를 둘렀다.
그러나 드카노스의 도끼를 차마 베지는 못했다.
『뭐냐.』
그 낌새를 알아차린 드카노스가 눈을 번득였다.
『장난치지 마라!』
『몸이 다 안 나았어.』
상호는 입맛을 다셨다.
『원래도 상태가 좋지 않았거든. 집중이 잘 안 돼서 말이야.』
“크으……!”
드카노스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었다.
그래도 느렸다. 많이 느렸다. 비록 상호의 컨디션이 평소보다 훨씬 나빠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상호는 동체시력만 가지고도 드카노스의 공격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특별한 보법이나 내공의 보조 없이도.
그는 내리쳐지는 도끼를 피하고 도끼의 등을 밟았다.
“크……!”
드카노스가 진땀을 흘리며 용을 썼지만, 도끼는 땅에 박힌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호는 천근추를 계속 유지하며 물었다.
『꼭 한쪽이 죽어야만 하겠나?』
『그래.』
드카노스의 주황색 눈이 타오르듯 빛났다.
『자비를 베풀 생각은 마라.』
『우린 보통 반대로 말하는데…….』
『망설이지 마라. 무얼 망설이나? 너희는 족장을 죽였고, 나는 그 족장의 아들이다. 이미 한 번 해본 일을 망설이는 이유가 무어냐?』
“…….”
상호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눈빛으로 드카노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뿐.
한 점 부끄럼 없이 무고한 자의 눈빛이었다.
그 모습을 본 드카노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도끼를 놓았다.
『싸워라, 배신자!』
초록색 주먹이 상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 * *
움집 안은 영 답답했다.
크기는 컸다. 원래 몸집 큰 오크들이 지내던 곳이니까. 높이는 당연히 높았고, 넓이도 열두 명이 지내기에 썩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문이 하나도 없어서 환기가 잘 안 된다는 점과, 파낸 흙의 습기가 그대로 올라온다는 점이 문제였다.
‘시원하구만…….’
밖으로 나온 상호는 한껏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익숙해진 오크 마을의 풍경. 오크들도 인간과 지내는 것이 익숙해졌는지 더는 유난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타인의 관심을 싫어하는 상호에게는 지내기가 한결 편안해진 셈이었다.
바깥 공기를 마시며 경치를 둘러보는데, 움집에서 예경이 걸어 나왔다.
“상호야~.”
“아, 네.”
“아내?”
“…….”
“막 이래~.”
예경이 웃었다.
가끔 느껴지는 세대 차이가 감당이 되지 않는다. 상호는 한숨을 쉬고 예경의 손을 잡았다.
“뭐 해야 할 거 있어요?”
“아니~.”
“그럼 같이 걸어요.”
둘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냥 경치 구경. 오크어를 조금씩 배워가고는 있지만 둘 다 실력이 좋지 않아 스쳐가는 오크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상호는 어느 움집 안에 버섯이 핀 나무가 빼곡하게 박힌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얘들도 농사라는 걸 하나 보네요.”
“그런가 봐.”
예경이 상호가 보는 움집을 기웃거리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똑똑해, 얘네들.”
더 걷다 보니 이번엔 족장의 나무집이 보였다.
나무집에서는 언뜻언뜻 고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쇠를 긁는 듯이 거슬리는 소리. 상호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누구 목소리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족장의 집을 지나가려 했다.
그때 족장의 집 문이 벌컥 열리더니, 키가 큰 오크가 잔뜩 성을 내며 걸어 나왔다. 코에서 뿜는 뜨거운 콧김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등이 굽고, 몸이 마른 오크.
상호는 그 오크가 지난번 그들에게 못마땅한 눈길을 보냈었던 자라는 걸 깨달았다.
‘저놈…….’
그는 오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지만, 오크는 그들 방향으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있는 힘껏 발을 쿵쿵 구르면서.
상호는 그 오크의 등에 족장과 같은 문양이 붉게 그려진 것을 보았다.
“누나.”
“응?”
“이놈들, 우리 생각보다 많이…… 지나치게 똑똑할지도 모르겠는데요.”
뒤통수를 치는 오크가, 있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