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화>
488. 침강
달리고 또 달렸다.
내공이 바닥나도 두 다리로 달렸다. 놈들이 기척을 읽을 수 없는 곳까지. 다리가 아프고, 심장이 아픈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상호는 숨을 헐떡이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허억, 헉…….”
폐가 뒤집어져서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무언가로부터 이렇게 열심히 도망쳐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예경을 만난 이후로는. 항상 함께 싸우고, 도망친 적이 없었다. 마신을 눈앞에 두고도 맞서 싸웠던 그인데.
오늘만큼 나약함을 느낀 적은, 결코 많지 않았다.
“후우…….”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 땅에서의 기억이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그의 사고를 침범해 들어왔다.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심지어는 그의 것이 아닌 기억까지.
땅을 짚고 있는 손의 감각이 점차 희미해졌다.
‘대체…….’
지금은 안 되는데.
‘왜…….’
그는 정신을 잃고 완전히 쓰러져 버렸다.
* * *
다시 일본 북부.
“여기서부터는 진짜 아르게스 본토다.”
명욱이 나뭇가지로 지도를 짚었다.
“방식은 지난번과 같아. 3조로 나눠서 2개조가 전진하고 지원조는 천천히 따라온다. 민정, 도현. 지도 꺼내봐.”
“네.”
둘은 지도를 꺼내 들었다.
“경로를 그려줄 테니 그대로 따라와. 산맥과 강의 사이니까 크게 벗어날 일은 없을 거다. 무전기도 꺼내봐.”
“네.”
“좋아. 넣어도 돼.”
명욱이 지도에 표시를 마치자 민정과 도현은 지도를 갈무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무전기도 함께.
“여기는 산이 훨씬 크다. 무전이 잘 안 터질 거야. 무슨 일이 생기면 무전을 기다리지 말고 지원조 쪽으로 붙어라. 지원조는 무슨 일이 생기면…….”
명욱은 말하다 말고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조를 다시 짜야겠군. 예경, 상호. 너희가 지원조로 간다. 너희 둘이 효은이랑 영주 지키고 있어.”
“네.”
“예경이나 영주……. 지도 볼 줄 아나?”
“제가 볼 줄 압니다.”
영주가 손을 들었다.
명욱은 고개를 끄덕이고 민정에게 손짓했다.
“민정. 지도 영주한테 줘. 그리고 이제 북쪽조에 나, 민정, 진구, 태현. 남쪽조에 도현, 성철, 재훈, 경준이 간다. 확인했지?”
“예.”
“출발하자.”
그들은 조끼리 모여서 각자 북동쪽으로, 남동쪽으로, 그 사이로 향했다.
* * *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자꾸 한곳에서만 그런 소리가 나니 암만 생각해도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효은을 돌아보았다.
바스락……
손에 초코바가 들려 있었다.
아직 포장을 까진 않았다. 그러나 상호가 아는 제품이었고, 경험을 통해 그 맛을 알고 있었다. 바삭하게 튀긴 과자와 견과류가 들어간 초콜릿 바.
저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끄응.’
평소라면 그깟 초코바 하나쯤이라며 무시했을 텐데. 야전에서 지내다 보니 저 초코바 하나가 무척이나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야생엔 달콤한 것도, 고소한 것도, 기름진 것도 있지만, 달콤하고 고소하면서 기름진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일과 벌레와 고기를 섞는다고 초코바의 맛이 나는 건 아니니까.
찌직
효은이 포장을 찢는 소리가 상호의 고막을 긁적였다. 짜증날 정도로 선명하게.
결국은, 참지 못했다.
“야.”
“엉?”
“한입만.”
그 말에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줄 것 같냐?”
“좀 줘, X바. 누나라면서 혼자 처먹지 말고.”
“이럴 때만 누나냐? 쪼꼬바에 눈 돌아간 거 보니 애는 앤가봐?”
효은은 코웃음을 치고는 초코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안 줘, 븅신아.”
그럴 줄 알았다. 상호는 기대를 접고 돌아서서 영주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효은이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야.”
“뭐.”
“먹고 싶냐?”
“…….”
“누나라고 불러봐.”
겨우 초코바 하나.
자존심을 팔기에는 너무 싼 값이었다.
“누나.”
그렇지만 뭐, 자존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끌어 봤자 그게 더 효은이 원하는 바일 테니.
상호의 즉답에 오히려 효은이 당황했다.
“……다시 해봐.”
“누나.”
“계속 그렇게 부를 거야?”
“어, 누나.”
“앞으로도 누나 대접 하는 거다?”
“어.”
“……자.”
효은이 그의 입 앞에 초코바를 들이밀었다.
이미 한 번 베어 문 초코바. 상호는 그 끈적한 단면을 잠시 쳐다보다가 한 입 크게 뜯었다.
딱 손톱만큼만 남기고.
“야! 개새꺄! 누가 다 처먹으래!”
효은이 붉으락푸르락해도 상호는 먼 산을 보면서 딴청을 피웠다. 어차피 입에 든 초코바 때문에 말을 할 수 없었기도 했고.
그런 그의 정강이를 효은이 걷어찼다.
“뒤질래?! 야!”
“쩝쩝…….”
“언니! 언니! 이 새끼 좀 봐! 이거 한 입 먹는다면서 다 먹었어! 완전 거지새끼야! 집에서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야!”
“……야, 우리 누나한테 할 말이냐!”
“언니!”
효은은 뒤쪽에 있는 예경에게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저기 가봤자 여자들한테 따만 당할 것이다. 요즘은 예경이 효은의 편만 들어주고 있기도 했고. 상호는 그녀들을, 정확히는 효은을 흘겨보다가 영주가 있는 앞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영주는 앞만 보고 걷는 중이었다.
‘……?’
지도는 안 보나.
상호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영주의 옆에서 영주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눈길을 눈치챘는지, 영주가 상호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왜?”
“형 지도 안 봐?”
“난 안 봐도 돼.”
“왜?”
“가운데만 따라가면 되니까.”
또 알 수 없는 소리. 상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영주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뭘 물어봐도 제대로 알려주는 법이 없고. 선문답 같은 말만 두어 마디 해줄 뿐이었다.
그래서 상호도 영주에게는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시답잖은 질문으로 잡담이나 걸 뿐이었다.
“형은 무기 뭐 안 배웠어?”
“배울 필요가 없지.”
“왜?”
“무기 없이도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
잡담도 잘 되지 않았다.
상호는 한숨을 작게 쉬고 입에 남은 초콜릿을 음미하다가, 영주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끔뻑였다.
“뭐야, 왜.”
“뭔지 안 물어봐?”
“……뭐가? 뭐를?”
“무기 없이 이기는 방법.”
문득 영주가 굉장히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뭔데.”
“구멍으로 몰아넣는 거야.”
영주가 양손으로 허공에 선을 그렸다. 깔때기처럼 가운데로 점점 몰려드는 선.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벽을 치고, 그물을 치고…… 불도 꺼 버리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그리고 구멍으로 조금씩 몰아넣는 거야. 덫을 놓은 구멍으로.”
영주의 손이 깔때기의 가운데를 통과했다.
“그러면 쥐는 여기 부딪히고, 저기 부딪히고, 자기가 어디에 부딪히는지도 모른 채 서서히 구멍을 향하게 되는 거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언젠가는. 그 구멍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
“그러면 너는, 그 구멍 뒤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지.”
영주가 손뼉을 짝 쳤다.
상호는 그 내용은 이해를 했지만, 현실에 적용할 만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벽도 그물도 없으면?”
“찾으면 다 있다. 시야가 좁으면 못 찾는 거지.”
“그럼 형은 누구랑 싸우든 이길 자신 있어?”
“그럼.”
“나랑 지금 싸워도?”
“넌 그럴 녀석이 못 돼.”
영주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내가 이길 거야.”
“뭐야, 그게.”
상호는 혀를 차고 다시 경계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땅 아래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어?”
뒤를 돌아보니 예경과 효은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둥글게 물결치는 흙바닥.
상호는 그걸 보는 즉시 땅을 박찼다.
“누나!”
흙이 폭포처럼 비산해 올랐다.
* * *
“……윽.”
상호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번에는 무리가 지나쳤을까. 내공이 바닥난 상태에서 한 번 더 끌어내 도망치느라 몸이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기혈도, 근육도.
조금씩 내리는 부슬비가 몸을 차갑게 식혔다.
‘움직여야…….’
상호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공도 쓸 수가 없다. 이래서는 그냥 은호가 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몬스터를 만나면 찍소리도 못 하고 죽어야 했다.
그렇지만 일어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제발…….’
아이들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이 위험에 처했든, 무사하든 빨리 찾아야 했다. 예정된 7일 중에 이미 이틀이 지났다.
넉넉하게 계산해서 은호가 되는 게 지금으로부터 8일 후라고 해도, 아이들을 찾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찾을 것인가.
‘헤어진 곳에서 만나는 게 보통이지만…….’
지금은 악마들이 도시를 주시하고 있을 터.
그러니 그 방법은 제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다면.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서…… 통신장비로 연락을…….’
그러나 아이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면.
어떠한 사정이 있어 통신장비를 쓰지 못한다면.
‘……X발.’
그렇게 따지기만 하면 대체 어떡하란 말인가. 상호는 스스로에게 이를 부득부득 갈며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당장은 아이들이 무사한지도 알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망할…….’
상호는 주먹으로 땅을 내리치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그저 밀려오는 과거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밖에는.
‘……젠장.’
젖어가는 몸이 차갑다. 뼈가 시릴 만큼.
그는 진창이 된 흙바닥에 얼굴을 박고 눈을 감았다.
* * *
쿠웅……
둔중한 소리와 함께 온 땅이 울렸다.
‘……으?’
그 소리가 옆에서 났다는 걸 알아차린 효은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다.
분명 아래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뭐지……? 어라?’
뭔가 몸이 둥실 떠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
효은은 살며시 눈을 떠 주변을 둘러보려다가 코앞에 있는 상호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힉……!”
“뭘 놀라고 지랄이야.”
상호는 품에 안아 들은 효은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구해줬더니 사람 얼굴 보고 기겁하기나 하고.
“그렇게 내가 X같이 생겼냐?”
“…….”
효은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상호의 가슴팍을 밀쳐서 땅에 내려섰다.
그러고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을 해대며, 처음 둔중한 소리가 났던 방향을 돌아보았다.
“……뭐야.”
거대한 무언가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체절이 있고, 비늘이 있다. 다리는 확실히 없고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뱀처럼 대가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거머리나 지렁이처럼 몸에 입만 달린 꼴인 듯했다.
문제는 지나치게 컸다.
몸의 두께만 해도 비행기 몸통의 두 배는 되었다.
“이거…… 뭐야?”
“몬스터.”
상호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곧 공중으로 피했던 예경이 그의 곁에 착지했다.
“상호야, 영주는?”
“……아.”
상호는 뒤를 돌아보았다가 영주가 바위 뒤에 숨어있는 것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저기 있네.”
“효은이랑 영주 지키고 있어.”
“저거 잡게?”
몬스터는 똬리를 튼 채 움직이지 않았다.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그들을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호는 놈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잡을 필요 없어 보이는데.”
“저게 한국으로 가면 위험하니까. 지금 잡는 게 좋아. 땅 아래로 움직여서 도시까지 가면 큰일나잖아.”
예경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상호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하늘 높이 솟구친 예경이 검에 하늘색 강기를 두르고 놈을 향해 휘두르는 중이었다.
푸확……
놈의 목으로 추정되는 위치에서 피로 추정되는 불투명한 액체가 솟구쳤다.
그렇지만 상황은 오히려 안 좋아졌다. 그동안 그들을 무시하던 몬스터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성대하게 알려 버렸으니.
몬스터는 공격을 받았는데도 발광하지 않고 차분하게, 똬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나무가 부러져 밀려나는 중이었다.
‘……진짜 더럽게 크네.’
상호는 놈의 몸을 피해 효은을 안아 들고 뛰었다.
“야, 야! 어딜 만져!”
“참나, 엉덩이에 뭐 주물러지는 것도 없구만…….”
“뒤질래!”
효은이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바위 뒤에 아직도 영주가 숨어 있는 게 보였다. 바위와 괴물과의 거리는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상호는 영주를 향해 달려가며 버럭 소리쳤다.
“형! 뛰어!”
“여긴 안전해.”
“뭔 개소리야! 밟혀 뒤지기 싫으면 뛰라고!”
“알았다, 알았어.”
영주는 입맛을 다시고 뛰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예경이 홀로 거대한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지렁이를 닮은 괴물은 행동이 굼떴지만, 일격에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너무도 거대했다.
예경이 검을 움켜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흐읍!”
검에서 하늘색 강기가 확 솟았다.
강기의 길이는 괴물의 몸통의 반 정도. 그 정도로도 놈의 몸의 중심부에 있는 신경을 끊기는 충분할 터였다. 상호는 효은을 내려주고 예경을 도우러 달려가려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괴물의 살은 딱히 단단하지 않았다.
촤아악
하늘색 궤적이 괴물을 갈랐다.
예상대로 몸이 전부 끊기진 않았다. 반쯤 잘린 괴물의 몸에서 체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괴물이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자 주변의 모든 것이 박살이 났다. 영주가 숨어 있었던 바위까지도.
“형, 저거 봐! 있었으면 뒤질 뻔했잖아!”
“그러게 말이다.”
“아니 그러게 말이다가 아니라!”
사람이 양심이 없으면 이렇게 태평해지는구나. 답답했던 상호는 가슴을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예경이 괴물의 위에 착지할 때까지.
쿠우우……
곧 괴물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예경은 허공에 칼을 휘둘러 체액을 털어내고 납도했다. 딱히 힘든 기색도 없이. 가벼운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상호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괜찮아?”
“으응, 독은 없는 것 같네.”
예경이 씩 웃었다.
“이걸 저녁으로 먹기에는…… 좀 그런가?”
“……일단 저는 안 먹을래요.”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지자 상호는 다시 존대를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지렁이 같은 놈을 먹기는 좀…….”
“그치? 나도 이놈은 무리라고 생각했어.”
“차라리 벌레를 먹죠.”
마침 나무도 다 까놨겠다, 먹는다면 나무 속에 사는 벌레 쪽이 지렁이 괴물보단 맛이 훨씬 좋을 터였다.
괴물을 둘러보던 상호와 예경에게 효은과 영주가 다가왔다.
“죽었어?”
“야, 오지 마.”
상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효은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직 안 죽었으면 어쩌려고. 뒤로 꺼져.”
“죽었잖아?”
“그건 모르는 거라고. 죽은 척일 수도 있고. 죽어서도 움직이는 놈도 있…….”
그 순간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효은이 상호의 품으로 폴짝 뛰어 안겨들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야! 니가 그런 말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아니 씨, 이게 왜 나 때문이야……. 형! 튀어!”
그들은 다시 뒤로 뛰기 시작했다.
상호는 이번에는 효은을 안전한 곳에 내려두고 검을 뽑았다. 벌레 괴물은 채 잘리지 못한 몸뚱이의 양쪽을 따로따로 움직이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예경이 검을 다시 뽑으며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상호는 가볍게 뛰어서 그녀의 곁에 착지했다.
“머리란 게 딱히 없나 본데요.”
“그러게. 둘 다 움직이네. 근데 그럼 또 자르면 또 움직이나?”
“그럴 거 같은데요.”
괴물의 단면은 어느새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다.
만약 이놈들이 살아난 게 맞다면, 또 각자가 원래 크기만큼 회복할 수 있다면. 예경이 말한 대로 도시까지 간다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피해가 생길 것이다.
“어떻게 죽이죠?”
“음…….”
예경이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대답했다.
“썰다 보면 되지 않을까?”
“……그게 뭐예요.”
하지만 상호도 검을 들어 자세를 잡고 있었다.
“제가 오른쪽 맡을게요.”
“그래. 상호가 오른쪽. 내가 왼쪽.”
두 사람의 검에서 각기 다른 색의 강기가 피어오르고.
“갈까?”
“네.”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 * *
그때는 둘이서 못 하는 게 없었다.
함께 싸우면 절대로 지지 않았다.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이고, 베이지 않는 것을 베고. 산보다 큰 괴물도 수천 번을 베어 결국에는 이겨낼 수 있었다.
예경만 있다면.
‘……윽.’
간헐적으로 심장에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내공이 꺼내질 줄 알았는데, 내공은커녕 몸도 움직이질 않는다.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는 몸이 이제는 꿈쩍도 할 수 없을 만큼 얼어 있었다.
부슬비의 감각도 점차 흐릿해져 갔다.
‘지금 자면 죽는다.’
상호는 밀려오는 졸음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
‘적어도 비는 피해야…….’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 해봐도 움직이질 않고.
그는 결국 멍한 눈으로 눈앞의 나무뿌리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라고……?’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서 아이들을 찾아야 하는데.
이제는 지칠 대로 지쳐 버렸다.
‘……하.’
늙어 죽기를 바라진 않았지만, 빗속에 쓰러져 죽을 줄이야.
상호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내고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보았지만, 이미 그의 몸에는 쌀 한 톨 들어 올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누나.’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궂네요.’
눈을 감기 직전, 시야에 초록색 인영 두 개가 스쳤다.
* * *
“어떡해……?”
나빛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철철 흘렀다.
“우리 어떡해……?”
“…….”
“우리 선생님 어떻게 찾아? 선생님도 우리 찾을 방법이 없잖아…….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선생님도 돌아오시지 않을까……?”
“…….”
세희가 확답할 수는 없는 내용이었다.
세희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바위에 기댄 지윤의 옆에서 태화가 몸을 웅크려 자는 중이었다.
‘잠탱이…….’
그래도 도시를 벗어난 후로는 잠꼬대를 하지도,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그 사실이 세희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넷은 어느 산골짜기의 절벽 아래 숨어 있었다. 건물 지하를 빠져나오다가 악마에게 들키긴 했지만, 다행히 조무래기들뿐이라 추격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발각되기까지는 시간 문제.
상호와 빨리 합류하지 않으면 위험했다.
“아마 돌아가는 길에도 악마가 깔려 있을 거야.”
세희는 나빛의 가방을 열었다.
“돌아간다면 바다로 돌아가야겠지. 근데 만약 선생님이 우리가 필요한 상황이시라면?”
“그럼 어떡해? 선생님 상황을 모르잖아…….”
“물어봐야지.”
작전을 해 본 경험자에게.
가방에 들어갔다 나온 손에는 마법공학 통신장비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한테 물어보자.”
세희는 장비의 전원을 켰다.
장비를 다루는 게 처음이었지만 헤맬 일은 없었다. 딱 봐도 알아볼 수 있게 한글로 다 적혀 있었기에. 가늘고 흰 손가락이 화면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도현 아저씨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무슨 일이야?
-저 세흰데요, 저희가 악마들이랑 싸우다가 선생님이랑 헤어졌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기서 선생님을 찾아야 할지 거기로 돌아가야 할지...
-자세히 말해 봐
세희는 최대한 상세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부서진 도시에 도착한 것, 태화가 아파한 것, 상호가 건물 밖으로 나갔던 것, 밖에서 전투가 일어났던 것, 나와보니 상호는 없고 악마만 있어서 악마를 피해 도시에서 빠져나왔던 것.
이야기를 모두 전하자 곧 다시 답장이 왔다.
-상호가 너희한테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어?
-다녀올 테니 자고 있으라고 하셨어요
-지하에서?
-네
-하필 지하네. 지하는 포위되기 쉬운데...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도현의 문자가 이어졌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마지막으로 만난 곳으로 가서 상호가 남긴 흔적이 있나 확인하라고 했을 거야. 흔적이 없으면 네가 남기는 거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 하겠지.
-네. 악마가 기다리고 있겠죠...
-지하라 포위되기도 쉽고 말이야. 그 방법은 안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너희가 여기로 오는 것도 딱히 좋진 않아 보이네
-그럼 어떻게...
-이츠키를 거기로 데려갈까?
‘……아.’
이츠키. 세희는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이츠키가 온다면 상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제일 나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이츠키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 태화의 눈에 생각이 미쳤다.
-아니에요
-응?
-안 데려와도 될 것 같아요 잠시만요
세희는 통신장비를 내려놓고 태화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런 상황에도 속 편히 자고 있는 걸 보니 은근히 속이 끓었다. 물론 태화는 건물 지하에서부터 쭉 자고 있었던 탓에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어나, 등신아!”
“……으?! 으아? 어?”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눈 떠! 얼마나 잤으면 눈곱이 이렇게 붙어! 빨리 눈 떠!”
“아 왜! 왜 그러는데! 야, 눈썹 뽑지 마! 뒤질래?!”
“눈 똑바로 뜨고 선생님이나 빨리 찾아!”
“어?”
그 말에 태화의 눈이 번쩍 뜨였다.
한쪽은 빨갛고, 한쪽은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들에 의문의 빛이 스쳤다.
“뭐야? 쌤 어딨어?”
“밖에 나가셨다가 악마들한테 쫓기신 거 같아. 빨리 찾아야 돼. 너 이츠키 눈 받았잖아. 빨리 선생님 실 좀 찾아 봐!”
“어어…….”
태화는 당황해서 허공을 더듬거리다가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어……. 뭐지? 이건가? 이건가? 헷갈리네…….”
“잠시만.”
세희는 다시 통신장비를 켜서 지도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지도의 한쪽에는 나침반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쪽 동쪽인데?”
“엉.”
“한국은 서쪽이잖아. 동쪽에 우리 아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이잖아.”
“그치……?”
“근데 왜 헷갈려?”
“두 개야…….”
“뭐?”
얘가 잠이 덜 깼나.
그 방향에 자신들이 아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눈살을 찌푸리는 세희의 귀에 지윤의 목소리가 닿았다.
“그거 아비 아이가?”
“……아.”
이츠키와 나디아와 동시에 국제교류를 왔던 미국 학생, 아비게일.
세희는 침음하며 이마를 짚었다.
“방향이 비슷해? 헷갈려?”
“구분은 할 수 있는데…….”
태화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지도 줘 봐. 이거 미국 지도도 나오지?”
“어.”
“걔 어디 산다고 했더라?”
“거기 학굔 한 곳에 몰맀다 했디.”
지윤이 아르게스와 미국 땅의 접점을 가리켰다.
“여그다, 여그.”
“그러면…….”
태화가 통신장비를 이리저리 돌렸다. 무언가의 각도를 맞추는 듯이.
그러다가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아, 이게 걔다. 그럼 이게 쌤이네.”
“확실해?”
“아마도?”
그때 나빛이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아비가 어디 여행 간 거면 어떡해……? 멀리 있는 집에 돌아갔다든가……. 헌터 실습이라든가…….”
“아냐,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
태화가 아르게스와 미국 사이를 쿡쿡 찔렀다.
“이 방향이랑 선이 딱 맞는다고. 니 말대로면 진짜 재수없게 쌤이 이 방향에 있다는 건데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냐?”
“그치만 우리 재수 없었던 적 많잖아…….”
그 말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단 1퍼센트의 확률도 방심할 수 없다. 세희는 나빛의 말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세희는 눈을 감았다.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은 왜 감을까, 아이들이 황당해하며 세희를 불렀다.
“세희 뭐해?”
“명상하냐?”
“머리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는갑다.”
“……조금만 조용히 해줘.”
집중해야 하니까. 세희는 숨을 고르고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다.
몸이 닿거나, 내공이 연결되거나, 감정이 격하게 끓어오를 때마다 통했던 마음.
바로 지금 그게 필요했다.
‘쓰읍…….’
그렇게 최대한 집중하고 있는데, 친구들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텔레파시야?”
“세상에 그런 기 으데 있노. 하이고, 세희도 맛이 가부렀구마…….”
“나도 해볼게. 선생님이랑은 내가 더 잘 통할 거야…….”
“…….”
어째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호의 마음을 느낄 수는 없었다. 거리가 너무 먼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정신을 잃은 상태일지도 몰랐다.
‘……끄응.’
이건 안 되는구나. 세희는 포기하고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그때 나빛의 머리에서 혁구가 포르르 날아올랐다.
“어?”
“꾸꾸야?”
나빛이 위를 올려다보며 혁구를 불렀지만, 혁구는 그대로 날아 어딘가를 향하기 시작했다.
나빛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따라가 보자!”
“쟤 어디 가는데? 뭘 믿고 쟬 따라가? 따라가면 뭐 해바라기 밭이라도 나오는 거 아냐?”
“마. 꾸꾸 가는 방향하고 니 본 실하고 방향 같나?”
“……방향은 같은데.”
그 말을 들은 세희는 재빨리 통신장비를 가방에 넣었다.
“꾸꾸도 사람 잘 찾는 것 같아. 따라가자.”
“아이씨, 저 치킨련 믿으면 안 되는데…….”
“어차피 니가 본 실 중에 하나 골라서 따라가야 했어. 꾸꾸가 고른 데로 가보자고.”
“씁……. 어쩔 수 없네.”
태화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식량 가방을 챙겼고, 세희도 장비가 든 가방을 등에 메었다.
지윤이 나빛을 업으며 말했다.
“꽉 잡으래이.”
“응.”
나빛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지윤이 땅을 박찼고.
아이들은 경공으로, 마법으로 날아서 혁구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