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487. 침식
쿠르르……
머리 위에서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세희는 눅눅한 매트리스 위에 쪼그려 앉은 채로 검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크아아…….”
“쿠울…….”
곁에서 꼭 붙어 자는 친구들의 숨소리가 시간차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갈아 공간을 울렸다.
아마도 식당이 있는 상가였을 것이다. 썩을 것은 썩고 썩지 않는 것만 남은 지금에도 이 공간에 어떤 삶이 있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무로 만든 판자나, 굴러다니는 냄비, 컵이나 식기 같은 잡동사니들을 통해서.
머리 위에서 땅이 다시 울렸다.
쿠르르, 쿠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담임은 그녀들에게 자고 있으라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친구들을 깨워서 담임을 돕든 도망치든 하는 게 맞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태화의 상태가 아직 좋지 않아서.
“으…….”
“…….”
세희는 침음하는 태화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지금 깨워서 나간다고 해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까. 오히려 짐만 늘어나는 건 아닐까. 상호에겐 상호의 계획이 있을 텐데, 괜히 어그러지게 만드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이럴 때 예경의 영혼이 있었다면.
‘왔다갔다 하시면서 말이라도 전해 주셨을 텐데.’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예경은 지금 없고,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기다려야겠지.’
평소대로라면 그게 맞았다. 상호가 당할 리는 없으니까.
그러나 왠지 모르게 피어오르는 불안한 감정이, 오늘따라 담임을 믿기 힘들게 했다.
쿠르르……
천장이 또 울렸다.
‘피해야겠네.’
어차피 이곳에는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세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지윤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 * *
우두둑
검은 팔이 하늘을 날았다.
상호는 팔을 뜯어낸 악마를 던져 버리고 야성의 악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적사자는 코앞까지 짓쳐든 상호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콰앙
마나의 폭발이 둘을 밀쳐냈다.
그러나 폭발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둘의 검과 발톱은 이미 수차례를 맞붙어 있었다. 칼날을 할퀴는 발톱의 끝에서 주홍색 불똥이 마구 튀었다.
그 불똥 사이로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약해졌군.”
적사자의 말에 상호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네놈도 알고 있을 텐데.”
시야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반대편으로 빼고 그 무언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삭……
작은 돌멩이.
겨우 작은 돌멩이. 상호가 당황한 순간 적사자의 발톱이 눈앞으로 날아들었다.
“……크윽!”
퍼억
간신히 팔을 들어 막았지만, 뼈가 저리는 충격은 어찌할 수 없었다.
뒤로 밀려나 자세를 바로잡는 상호에게 적사자가 목에서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지금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것 같군.”
“…….”
“네놈과 싸우고 있는 건 나다. 나한테만 집중해라. 그게 네놈들이 말하는 예의 아닌가?”
“그런 말은 니 친구들부터 치우고 하지?”
상호는 손을 들어 옆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강검 다섯 개가 쉴 새 없이 날아다니며 신비의 악마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신비의 악마가 악에 받쳐 영혼으로 소리쳤다.
‘적사자! 태평하게 잡담하지 말고 빨리 공격하십시오!’
‘닥쳐라, 천족수. 누가 놀고 있는 줄 아냐?’
‘지금 놀고 있잖습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놈의 공격을 부담하고 있는데……!’
‘알았다, 알았어.’
적사자는 혀를 차고 상호를 공격해 들어갔다.
휘두르는 발톱 하나하나에 산도 갈라버릴 만큼의 살기와 마나가 담겨 있었다.
카가각……
‘……쳇.’
상호는 놈의 발톱을 검의 옆면으로 막아내고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놈의 말이 맞았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과거의 기억과 그녀의 목소리 때문에.
칼끝이 자꾸만 흔들렸다.
‘일단은…….’
놈들을 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악마들은 아직 아이들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아이들도 아마 그가 악마와 싸우고 있는 줄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분명 밖으로 뛰쳐나왔을 테니까.
양쪽이 모두 서로의 존재를 모르게 해야 아이들이 안전해질 수 있었다.
‘이놈부터.’
상호는 강검을 더 만들어 신비의 악마를 향해 날렸다.
퍼버버벅
십여 개의 강검이 악마의 몸을 꿰뚫었다.
촉수들이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맹렬하게 몸부림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호는 강검을 조종해서 놈의 몸을 들어 먼 산을 향해 던져버렸다.
그리고 놈을 따라 몸을 날렸다.
“이놈!”
예상대로, 적사자는 그를 따라 뛰어올랐다.
과연 다른 녀석은 어떨까. 상호는 신비의 악마를 쫓아 쏜살같이 날아가며 뒤를 내려다보았다.
악마들이 무더기로 그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이네.’
그는 안심하고 신비의 악마를 붙잡아 바위산에 힘껏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격렬하게 적의를 드러냈지만, 상호는 무시하고 강검을 손으로 잡아 놈에게 꽂아 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대체 넌 구멍이 어디냐? 촉수들 중에서 찾아야 되는 거냐? ……쳇.”
적사자의 앞발이 상호가 있었던 허공을 갈랐다.
상호는 뒤로 물러나 악마들을 마주했다. 아이들과 거리를 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이제 그가 악마들과 거리를 둘 차례였다.
이놈들을 어떻게든 따돌려야 하는데.
‘태화가 없으니, 죽이기는 무리고…….’
지배의 악마가 있으니, 쓰러뜨려도 금방 일어나 쫓아올 것이다.
또 여기서 지나치게 힘을 썼다가는 마신이 기회를 노리고 정말로 찾아와 버릴 수도 있으니. 약한 모습도 보이면 안 되었다.
그러므로 최선의 방법은, 먼 곳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지난번처럼 잠깐 들른 척을 하면…….’
다시 한반도로 돌아가는 척을 하면 될 것이다. 상호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서쪽으로 뛰려 했다.
그때 한 악마가 입을 열었다.
“귀하는 왜 혼자서 여기까지 온 겁니까?”
“너희가 알 건 없지.”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거짓말을 술술 지어냈다.
“그래도 뭐, 이제 돌아갈 참이야. 목적은 다 이뤘거든.”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뭐, 제가 더 궁금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군요.”
악마의 눈이 빛났다.
“귀하는 지난번에도 혼자서 우릴 찾아왔었지요. 우리의 계획을 막기 위해서……. 또 실제로 막았고.”
“그랬지.”
“그땐 귀하에게 이유가 있었습니다. 땅이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골렘의 핵을 부숴야 했죠. 그렇기에 골렘의 핵이 있는 곳으로 왔고, 핵을 부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는 아무것도 없지요.”
악마가 그를 가리켰다.
“귀하가 여기 와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굳이 이곳에? 산 자는 아무도 없고, 우리의 흉계도 없고, 원혼만 가득한 이곳에? 나는 없다고 봅니다. 귀하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목적이 있을 리 없지요.”
“맘대로 생각해.”
상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요사이에 거짓말이 많이 늘었던 그였다.
“난 상관없으니까. 너희가 모른다면 나야 좋은 일이고…….”
“귀하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던 겁니다.”
악마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어딘지는 모릅니다.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귀하가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 그럼에도 돌아가려 한다는 사실. 목적을 이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지요.”
“…….”
“귀하는 우릴 유인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들 중의 몇 놈이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도시로부터 멀어지도록……. 저곳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귀하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입니까? 악마의 눈? 귀여운 아이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요.”
“……흥미롭네.”
“한번 수색해 봐도 괜찮겠습니까?”
악마는 구태여 물었다. 그를 떠보는 듯이.
당연하게도, 상호는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해보든가. 나야 뭐, 너희가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반가운 일이라서.”
“그렇습니까.”
지배의 악마가 킬킬 웃었다.
“참으로 필사적이군요.”
“…….”
더는 들어줄 수가 없다. 상호는 검을 휘둘러 강기를 내뿜었다.
폭포처럼 쏟아진 기운이 악마들을 삽시간에 휩쓸었다.
콰아아……
검푸른 파도가 지나간 후에는 모든 것이 쓰러져 있었다. 나무도, 악마도.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적사자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강검이 신비의 악마를 찌르고 또 찌르기 시작했다.
“네 친구는 엉뚱한 곳을 찾으러 간 모양인데.”
상호는 검을 들어 야성의 악마를 겨눴다.
“이러면 네가 바라던 일대일인가?”
“충분하지.”
적사자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잔소리꾼 둘이 없으니 좋군. 악마의 눈도 없고 말이야. 그럼 어디 한번…… 네가 죽을 때까지 놀아 보자고.”
“……쯧.”
그의 검에 검푸른 기운이 휘몰아쳤다.
* * *
“아──.”
여섯 쌍의 발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아! X발! 밥이다!”
“거기 아저씨! 밥 뭐예요?”
“제육이요.”
“우와아아악!”
일곱 남정네들이 병영식당으로 와르르 몰려 들어갔다.
현관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민정은 옆에 선 예경을 돌아보았다.
“좋으면서 왜 욕을 하는 걸까?”
그 말에 예경이 쓰게 웃었다.
“우리 상호도 기분 좋으면 욕해.”
“…….”
“그치, 상호야. 상호도 너무 기분 좋으면 욕하지~.”
“……아니.”
상호는 얼굴을 붉히며 눈길을 피했다.
민정은 그와 예경을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곧 머리를 쓸어내리며 샤워장 쪽으로 향했다.
“난 씻기부터 할래.”
“나도.”
효은도 민정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상호와 예경, 명욱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명욱이 먼저 걸음을 떼어 지휘통제실을 향했다.
“알아서들 쉬어라. 난 보고하러 갈 테니.”
“네.”
그렇게 현관에는 둘만 남았다.
예경이 상호와 눈을 마주치며 어깨를 슬금슬금 주물렀다.
“어떻게 할래?”
“씻어야죠.”
배가 고파도 그게 맞았다.
“그래야 여자들 밥 먹을 때 생활관이 비니까.”
“상호는 이럴 때만 똑똑해지네~.”
“……그거 칭찬 아니지 않아요?”
“괜찮아~. 누나도 그래~.”
둘의 걸음은 이미 샤워장을 향하고 있었다.
남자 샤워장과 여자 샤워장이 나눠지는 곳 앞에서, 예경이 빙긋 웃으며 상호의 뺨을 집었다.
“씻고 생활관으로 와?”
“네.”
그는 그렇게 대답하고 샤워장으로 들어갔다.
* * *
여자 생활관은 남자 생활관과 거리가 꽤 있었다.
그래서 상호가 복도를 지나 여자 생활관 쪽으로 걸어갈 때는, 이 기지 소속 헌터들의 묘한 눈빛과 저승부대 남자 부대원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 했다.
옆을 지나던 도현이 상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야, 상호야. 밥 다 먹었냐?”
“아니.”
“얼른 가서 먹어라. 다 식는다.”
도현은 그렇게 말하고 부대원들을 따라 남자 생활관으로 걸어갔다.
부대원들끼리 하는 대화가 상호의 귀에 닿았다.
“상호는 오늘도 누나랑 자냐?”
“그런가 봐요.”
“짜식, 다 커놓고 여자들이랑 말이야……. 에휴, 나도 열 살만 어렸어도…….”
“어리면 뭐해, 형. 상호처럼 잘생겨야지.”
“얌마, 나도 어릴 땐 멀쩡했어!”
“상호만큼?”
“그건 글쎄……. 그래도 너는 이겨, 임마.”
“아닌 것 같은데?”
“이 새끼가…….”
“하하하!”
상호는 대원들의 왁자한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여자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침대는 세 개에 관물대는 네 개. TV와 탁자는 하나씩. 침대에는 이곳에서 머무르는 동안 입을 생활복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아직 여자들은 샤워를 마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래도 씻는다.’
상호도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씻는 게 좋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지지고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나 오래 샤워를 했다가는 몸이 도가니처럼 흐물흐물해지고 말 터였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TV를 켰다.
‘……편하네.’
편했다.
그들은 이 기지에 속하지 않은 특수부대. 이 기지는 이 지역을 방어할 만큼의 인원이 상주하고 있었고,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저승부대가 출동해야 할 일은 없었다.
그들은 최대한 빨리 회복하고 다시 출발해야 했기에.
상호는 침대에 엎드려 멍하니 TV를 보았다.
‘재밌는 게 없네.’
뭔가 재밌는 걸 보고 싶은데,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뉴스밖에 없었다. 가끔 보이는 것은 영화나 옛날 예능의 재방송.
그나마 그거라도 볼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저 아저씨는 죽었나, 살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예능을 보고 있는데, 생활관 문이 열리고 효은과 민정이 들어왔다.
그를 발견한 효은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야, 나와.”
“왜 또. 뭐.”
“내 자리야. 누구 맘대로 TV 앞자리에 앉으래?”
“…….”
개같은 년. 상호는 군말 없이 일어나 옆 침대에 누웠다.
“옷 갈아입을 거니까 방에서 꺼져!”
“……이 X발, 그럴 거면 한 번에 말해.”
“왜 내가 말하는 것까지 니 맘대로 해야 하는데?”
“이게 진짜…….”
박치기를 할 듯 가까워지는 둘의 사이에 민정이 끼어들었다.
“근데 너희, 팬티도 벗어주는 사이면서 왜 옷 갈아입는 건 안 돼?”
“그런 사이 아니라고.”
“그런 사이 아니라고요.”
둘이 한목소리로 답하자 민정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지만, 그녀는 그저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그래, 뭐. 너희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아니라니까!”
역시 한목소리.
진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민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 밥 먹었어?”
“아뇨, 아직. 저희 누나랑 먹으려고요.”
“상호는 정말 누나 잘 따르네. 나도 상호 같은 동생 있었으면…… 아니, 상호가 동생이 아니라서 다행인가?”
“……글쎄요.”
상호는 모르는 척 눈길을 피했다.
“밥 먹을 거면 먼저 드세요. 누나 오래 걸리니까.”
“으응. 그럴게. 근데 상호야.”
“네?”
“존댓말 안 해도 돼. 말 놔.”
“……네.”
그가 조그맣게 대답하자 효은이 눈썹을 치켰다.
“야, 니 웃긴다? 언니들은 누나 대접 꼬박꼬박 하면서. 왜 나한테만 그 지랄이야?”
“닌 좀 닥쳐.”
“개새끼…….”
효은은 콧방귀를 뀌고는 민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언니, 빨리 가자. 나 저 새끼랑 밥 같이 못 먹어.”
“응, 그래. 머리만 말리구.”
둘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는 생활관을 나섰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되어 TV를 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경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생활관으로 들어왔다.
예경이 상호뿐인 생활관을 보고 웃었다.
“딱 맞춰 온 거야?”
“네.”
상호는 옆으로 물러나 예경이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예경이 곁에 앉자 꽃향기가 났다. 당연히 샴푸 냄새겠지만, 상호에게는 어딘가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인공적인 새큼함이 없고, 뭔가 자연스러운 향기. 사실 꽃향기를 일부러 맡아본 적은 없지만.
TV를 보던 둘의 눈이 어느 순간 슬그머니 서로를 향했다.
“…….”
상호는 말없이 예경의 눈을 바라보았다.
꼭 호수와 같았다. 잔잔하면서도 넓은 것이. 몸을 기울이면 풍덩 빠질 것처럼, 촉촉한 물기를 가득 머금은 눈망울이.
그는 그 호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으음.”
예경이 그의 몸에 밀려 침대에 널브러졌다.
이제는 예사였다.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런데도 상호는 예경과 몸이 닿을 때마다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이 닿아도, 가슴이 닿아도, 입술이 닿아도.
그는 그에게 깔린 예경을 내려다보다가 입술에 입술을 가져갔다.
쪽
한 번 더.
……쪽
또 한 번 더.
세 번째에 입술을 떼자 그를 바라보던 예경이 배시시 웃으며 양손으로 그의 두 뺨을 감쌌다.
“상호야.”
“네.”
“상호야…….”
상호는 대답 대신 입을 맞췄다.
조금 더 깊게. 예경의 허리가 튀어오르도록. 그 아래에 손을 넣고 끌어당기며, 그녀를 꽉 부둥켜안았다.
예경도 다리를 들어 상호에게 얽는 순간.
생활관 문이 벌컥 열렸다.
“……아.”
화들짝 놀라 돌아본 문가에는, 민정이 문고리에 손을 얹은 채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이런 기억은…….’
상호는 바위에 처박힌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좀 더 여유로울 때 보고 싶은데.’
감상에 빠지기에는 때가 좋지 않았다.
그를 내던졌던 야성의 악마가 눈앞에 착지했다. 놈의 상태도 멀쩡하진 않았다. 눈은 쥐어터지고, 입가에는 피가 흐르고.
그러나 악마에게 그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상호는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왜 집중을 못 하는 거냐?”
적사자는 그렇게 물으며 상호에게 앞발을 휘둘렀다.
상호가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하자 누워 있던 바위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겨우 이 정도가 아닐 텐데!”
이어진 포효와 공격.
상호는 검을 힘겹게 들어 놈의 앞발을 막았다.
‘……젠장.’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소라면 적사자와의 일대일은 문제가 없었을 텐데. 지금은 그마저도 버거운데다가 적사자에게 저 멀리 던져진 탓에 신비의 악마를 찌르던 강검도 흩어져 버렸다. 곧 놈이 가세하러 올 터.
태화가 없을 때 놈이 도착하면 크게 성가셔진다.
살고 싶으면 도망쳐야 했다.
‘그치만…….’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지배의 악마가 아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돌아와도 남았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아이들이 이미 도망쳤겠거니 하고 그도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만큼의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좀 더 버텨야 했다.
“……윽.”
상호는 이를 악물고 검을 힘껏 움켜쥐었다.
* * *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민정이 비록 입이 싼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호와 예경이 남매가 아니란 사실은 그의 입장에서는 들키기 싫은 비밀이었다. 당장 저승부대를 따라온 이유도, 생활관을 같이 쓰는 이유도 둘이 남매란 이유로 각각 명욱과 민정이 허락해 준 건데.
‘어떡하냐…….’
상호는 한숨을 푹푹 쉬며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생활관에는 이미 효은과 예경이 누워서 자고 있었다. 민정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도 오랫동안 땅바닥에서 잔지라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그 누나가 또 봤다간…….’
한 번 들키고 나니, 뭔가 곁에서 자기도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민정의 침대를 쓸 순 없고. 효은과 같이 잘 수는 더더욱 없고. 선택지가 없었던 상호는 예경이 덮은 담요를 들추고 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예경은 이미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피곤하긴 하네.’
곧 상호의 눈도 스르르 감겼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상호야.”
“……으음.”
“일어나 봐.”
눈을 뜨니 민정이 침대 옆에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곁에서 자던 예경은 어딜 갔는지 사라진 채였다.
“누나는……?”
“효은이랑 황금마차 갔어.”
민정이 그의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게 했다.
상호는 그의 옆에 앉는 민정을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뭔가 이야기를 하자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주제는 당연히, 아까 그 일이겠지만.
‘뭐라고 변명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민정이 입을 열었다.
“상호야.”
“……네.”
“존댓말 안 해도 된다니까. 그리고 혼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편하게 있어, 편하게.”
“응…….”
그래도 불편했다. 민정은 예경보다도 더 어른 같아서.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민정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상호야.”
“응.”
“누나랑 많이 친해?”
“……?”
상호는 잠시 멍했다가 기회임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응.”
“언제부터?”
“어……어릴 때부터.”
“예경이가 먼저 그랬어?”
“아니, 내가……. 내가 먼저 하자고 했어.”
민정이 그의 손을 잡고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러면 안 돼, 상호야……. 알고 있어?”
“알아…….”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는 거야.”
가족이 아닐 거란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었다.
이 누나는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상호는 당황 섞인 쾌재를 부르며 민정의 눈을 피했다.
“나는, 그냥 누나가 좋아서…….”
“가족끼리 사랑하는 건 다르게 표현해야 하는 거야. 예경이가 아무리 예뻐도……. 오늘 너희 그러는 모습, 다른 사람들이 보면 크게 오해한단 말이야.”
“……응.”
“앞으론 하면 안 돼. 알았지?”
“응.”
안 들키면 장땡이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정은 그제서야 웃으며 상호의 손을 놓아주었다.
“상호는 황금마차 안 가? 누나가 사줄게.”
“아니, 괜찮아. 별로 안 먹고 싶어.”
“그럼 누나 먹는 거 옆에서 구경해줘.”
“그건 뭔…….”
“가자~.”
“……끄응.”
상호는 민정의 손에 이끌려 생활관 밖으로 나갔다.
* * *
그날 밤.
잘 시간이 되자 민정이 TV를 끄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상호랑 잘게.”
“……응?”
그 말에 예경도, 효은도, 상호도 어안이 벙벙했다.
사전에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았는데. 상호는 진땀을 흘리며 민정을 부르려다가 예경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질겁했다.
“아니, 누나! 아니야!”
“상호야?”
“아냐, 아냐. 나, 나, 내가 자자는 말 안 했어. 그치, 민정 누나…….”
“으응, 뭐 그렇지. 그래도 괜찮지?”
민정이 씩 웃었다.
“상호도 언제까지고 누나 품에만 있을 순 없잖아.”
“그래도…….”
“전우인데 뭐 어때. 이리 와. 이리 와. 오늘은 누나 말고 나랑 자.”
민정이 이불을 들추고 침대를 탁탁 두드렸다.
상호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예경의 눈치를 보았다. 민정은 아마 악의 없이 남매를 떼어놓으려는 생각이겠지만, 예경은 지금 이 상황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예경이 상호를 바라보며 혀로 입술을 쓱 훑었다.
살짝 빡친 표정으로.
“……나.”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나는, 그냥 우리 누나랑 잘…….”
“어허~.”
민정의 마법이 상호를 옭아매었다.
“……켁!”
“안 돼, 안 돼. 언제까지 누나랑 잘 거야? 예경이도 언제까지 동생 뒤치다꺼리 할 거야? 이제 놓아줘야지~.”
“아니, 아니…….”
상호는 필사적으로 버르적거렸지만, 염동마법을 이기지 못하고 민정의 이불 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그를 쳐다보는 예경의 눈에 조금씩 한기가 들어찼다.
하지만 입은 빙긋 웃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언니랑 자.”
“누나…….”
“상호는 좋겠네~. 언니 같은 스타일 좋아하잖아~. 그치?”
“아니…….”
뭐라 변명하려는 그의 입을 민정의 손이 틀어막았다.
“자, 이제 잡담 그만하고~. 잡시다~.”
“으읍……!”
“잘 자~. 상호 민정이 언니랑 잘 자~. 효은이도~.”
“쿠울…….”
“얜 벌써 자네.”
그렇게 불이 꺼졌다.
그냥 빨리 자는 게 좋으리라. 괜히 뒤척이는 것보다는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상호는 몸에 착 달라붙어 느껴지는 민정의 기척을 무시하고 애써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민정은 그를 그대로 재울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상호야.”
민정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상호야, 상호야.”
“응.”
“상호는 진짜 기분 좋아도 욕해?”
“……그럴 리가.”
그는 붉어진 얼굴을 이불로 가렸다.
예경이 말한 게 무슨 뜻인지, 민정은 알지 못한다.
“그래?”
……라고 믿고 있는데, 민정이 씩 웃었다.
“누나도 들어보고 싶네. 상호가 기분 좋을 때 욕하는 거…….”
“…….”
“들려 줄 거야?”
“……아마 못 들을걸.”
예경이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상호는 한숨을 푹 쉬고 몸을 돌렸다.
“졸리다. 나 잘게.”
“으응. 상호도.”
“누나도 잘 자.”
어둠이 고요해졌다.
그러나 상호는 잠에 쉬이 들지 못했다. 내일 아침 예경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 되어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
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들키지 않게.
그래도 이미 일어난 일이고, 민정은 아직 그와 예경이 남매라고 믿는 듯했다. 조금 다른 종류의 오해가 생기긴 했지만.
아마 문제가 더 생기진 않을 것이다.
또 들키지만 않는다면.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진 시간을 벌었다.
더 고민해봐야 나아질 건 없을 것이다. 그냥 잠이나 자는 게 좋으리라. 상호는 오늘의 마지막 한숨을 내뱉고 눈을 감았다.
먼 훗날, 어떤 일이 있을지는 꿈에도 모른 채.
* * *
‘시간은…….’
상호는 검을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좀 벌었나.’
주변에는 무수히 많은 악마들이 강검에 꿰뚫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가 내공을 거두자 강검이 사라졌다. 그러나 악마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지배의 악마가 이곳에 없다는 증거였다.
그 말은, 아직 지배의 악마가 아이들을 찾고 있단 뜻이고.
아이들이 이미 도망쳤을 확률이 높단 뜻이었다.
‘그놈이 오는 것까지 확인하고 싶지만…….’
상호는 단전을 부여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공을 전부 끌어모아서 한순간에 꺼낸 탓에 기혈의 타격이 컸다. 단전이 욱신거리고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오장육부가 뒤집히고 심장은 특히나 더 터질 것 같았다.
이미 한계였다.
도망칠 힘이 남긴 했을까,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그래도…….’
살아서 아이들과 합류해야 한다. 그 일념으로 상호는 날뛰는 기혈을 다스렸다.
쓰러진 악마들 사이에서 적사자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거 봐라.”
적사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집중하니까 되잖냐, 네놈…….”
“…….”
대꾸할 기력도 없다. 상호는 놈에게 검을 겨누고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적사자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도망치는 거냐?”
“…….”
목적은 다 이뤘다고 말했을 텐데. 물론 그건 지배의 악마에게 했던 거짓말이지만.
상호는 말없이 다리에 내공을 흘려보냈다.
“이놈!”
적사자가 그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적사자도 그동안 타격을 입었던 터라 속도가 이전만 못했다. 상호는 달려드는 놈의 얼굴을 짓밟고.
퍼억
반동을 이용해 뒤로 뛰어올랐다.
그런 후 경공을 펼쳐 하늘로 솟구치자, 땅바닥에 처박힌 적사자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이 쥐새끼 같은……!”
하지만 상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적사자가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땐, 상호는 이미 저 멀리 산 너머로 날아간 후였다.
적사자는 상호가 날아간 하늘을 이를 갈며 올려다보다가, 제 분에 이기지 못해 귀가 터져라 포효를 내질렀다.
크와아악……
메아리는 돌아왔지만, 적수는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