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여고의 남선생-486화 (486/501)

<486화>

486. 저주받은 땅

산에 슬슬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아르게스가 한반도에 뻗은 가지는 동쪽으로 갈수록 점점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동쪽을 향하는 상호의 걸음도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가 손끝을 아리게 했다.

“푸엣취!”

성철이 코를 쓱 문질렀다.

“에이, 염병. 감기 걸렸나 보다. 효은아, 감기는 성력으로 어떻게 못 하냐?”

“못해요.”

“쩝…….”

부대는 쭉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모든 게 거대했다. 산도 높고, 나무도 크고, 강도 넓고. 산의 머리가 희끗해진 이유도 이곳이 북쪽이어서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산이 높기 때문이었다.

산 아래는 울창한 숲. 상호와 부대원들은 숲속을 걷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갑니까?”

“가보면 안다.”

“아잇, 지도 좀 같이 봐요. 혼자 보지 말고…….”

“보면 아냐? 모르는 땅인데.”

명욱이 나침반과 지도를 들여다보며 핀잔을 날렸다.

“주변이나 잘 경계해.”

“아아──, 알겠슴다, 알겠슴다……. 어?”

재훈이 봉으로 어깨를 두드리다가 흠칫했다.

“대장님, 저거…….”

“응?”

“저거 송전탑 아니에요?”

봉이 가리킨 곳은 산 중턱.

굵고 검은 줄로 뒤엉킨, 앙상한 철골 탑이 기우뚱하게 박혀 있었다.

“나도 그렇게 보이는데.”

“송전탑이 왜 있어?”

“저 뒤에 건물 같은 것도 보이는 것 같은데…….”

“대장님?”

혼란스러워하는 대원들 사이에서 명욱만이 태연했다.

“송전탑 맞다. 건물도 맞고.”

“네? 대장님은 왜 안 놀라요? 저게 뭔데요?”

“가보면 알아.”

“맨날 가보면 안대……. 근데 대장님은 어떻게 알아요?”

“가보면 안다니까.”

“에잇, 진짜.”

대원들은 툴툴거리는 재훈을 무시하고 송전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푸엣취!”

지윤이 코를 쓱 문질렀다.

“아이, 콧물이 와 이래 나오노.”

“지윤이 감기야? 성력 좀 쬘래?”

“아이, 됐다 마. 그거 안 된다 아이가. 근디 저거 머꼬?”

지윤이 가리킨 땅바닥에는 무언가 조그만 것이 파묻혀 있었다. 흙이 잔뜩 묻었지만 아직 광택이 남은, 흰 부분도 있고 투명한 부분도 있는 플라스틱 재질의 물건.

“이건…….”

세희는 뜯어진 페트병을 들어 올렸다.

“일본어네요.”

“거의 다 왔나 보다.”

상호는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라보았다.

검은 줄이 휘감긴 앙상한 철탑. 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더 기울어진 듯도 했다.

등에 업힌 태화가 물었다.

“저기가 일본이야?”

“일본이었지.”

아르게스에서 가지처럼 뻗어 나온 땅에 관통당한 일본 북부. 개벽 초기의 지각 변동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난 채였다.

저 송전탑이 있는 산 너머에는 부서진 도시가 아르게스의 산지와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오늘은 저기서 자자. 잘 찾아보면 침대도 있을지 몰라.”

“잘 찾아보면 과자랑 주스 같은 것도 있는 거 아냐?”

“다 썩었지, 임마. 그리고 몬스터들이 냄새 맡고 뜯어먹기도 하고.”

“우씨…….”

상호는 태화를 고쳐 업고 가볍게 경공을 펼쳤다.

나빛을 업은 지윤과 가방을 멘 세희가 그 뒤를 따랐다. 낙엽을 밟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게 제법 잠행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머지않아 송전탑이 있는 산을 넘을 수 있었다.

“……어라.”

산 너머를 본 태화의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울퉁불퉁한 땅을 따라 도로가 부서져 있고, 그 너머엔 전봇대가 비뚤게 비뚤게 몇 개씩 엇갈려 박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너머엔.

주저앉은 건물들과, 그 사이 백골이 나뒹굴고 있었다.

“……으.”

나빛이 몸을 떨었다.

죽은 지 오래되어 개도 찾지 않는 뼈다귀. 살점 하나 남지 않고 깨끗하게 발라 먹은 백골이 수십 구, 수백 개가 어지러이 깔린 땅.

상호는 태연하게 그 사이를 걸어갔다.

“빨리 가자. 밥 먹어야지.”

“……네.”

아이들은 쭈뼛쭈뼛 몸을 떨며 그를 따랐다.

* * *

“꺼져!”

개를 닮은 몬스터들이 봉을 얻어맞고는 깨갱거리며 달아났다.

재훈은 파먹힌 시체를 내려다보며 비위가 상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다 썩은 걸 먹고 있네, 누렁이 새끼…….”

“얼마나 됐을까요?”

“반년은 됐겠지.”

명욱이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일본이면…… 5분의 1쯤 왔다.”

“네? 아직도요?”

“온 만큼 동북쪽으로 가고, 거기서 남쪽으로 꺾어서 온 만큼의 세 배쯤 가야지. 거기가 그라운드 제로야.”

“그럼 거기까지 가면 따뜻해져요?”

“아닐걸. 지대가 높아서.”

중심부로 갈수록 높아지는 대륙.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폭탄이 터진 것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땅. 저승부대의 최종 목표는 그곳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번 임무는 여기까지지만.”

“어, 돌아가요? 드디어?”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 돌아간다. 보고는 해야지. 가다가 죽으면 지도에 메모는 왜 했냐. 아니면 넌 그냥 계속 가볼래?”

“에헤이, 무슨 그런 무서운 농담을……. 돌아가죠, 돌아가야죠. 아, 돌아가면 진짜 라면하고 김치만 삼시세끼……, 응?”

신바람이 난 듯 경쾌하게 발을 놀리던 재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대장님.”

“어.”

“방금 보셨어요?”

“봤지.”

명욱은 지도를 집어넣고 무너진 건물 옆 골목을 노려보았다. 방금 그 안에서 무언가가 쓱 지나간 참이었다.

사지가 달리고 두 발로 걷는, 너무도 사람을 닮은 그림자가.

“생존자가 있는 모양이다. 수색해.”

* * *

“누나.”

상호는 예경과 나란히 걸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지 않아요?”

“응? 뭐가?”

“생존자가 있을 리가 없는데……. 윽!”

금이 간 도로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한 그를 예경이 덥석 붙잡았다.

“상호는 은근 덜렁이네~.”

“……끄응, 어쨌든 그렇잖아요. 생존자가 있다 해도 지금까지 여기 남아있을 리가 없고, 우리를 피할 리도 없고……. 이상하잖아요?”

“그러네.”

예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만 뭐, 확인은 해야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상하다는 거예요.”

상호는 입맛을 다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부서진 도시. 상호가 살던 곳도 지각 변동으로 수많은 건물이 무너졌었지만, 이곳은 아예 바닥이 뒤집어져서는 건물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나마 형체라도 유지한 건 석조 건물뿐. 목조 건물은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목재 사이로 조그만 손이 삐져나온 게 보였다.

“…….”

상호는 입맛이 씁쓸해져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보았으니 예경도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묻어는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 손을 돌아보는데.

“어?”

손이 조금 움직여 있었다.

움직이는 순간을 본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 걷다가 돌아보았기에 각도도 조금 달랐다. 그러나 분명히, 손의 모양이 달라졌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상호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누나.”

“응?”

“저 손, 방금 움직였어요.”

예경이 걸음을 멈추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한참을 그대로 있어도, 손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예경은 긴장을 풀고 상호를 바라보았다.

“상호야? 잘못 본 거 아니야?”

“아니, 분명…….”

“벌레가 지나가거나 한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지만.”

뭔가 꺼림칙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저 손이 있는 곳을 굳이 파헤쳐 볼 생각은 없었는지라, 상호는 찝찝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문득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런데 누나.”

“응?”

“사람 몸이란 게…… 반년 동안 저렇게 안 썩을 수가 있어요? 근육도 관절도 썩어서, 진작에 떨어졌어야 할 텐데…….”

“추워서 덜 썩은 거 아닐까?”

“아닌 거 같은데…….”

상호가 머리를 긁적이자 예경이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뭔가 있는지도 모르지. 사람 몸엔 아직 신기한 게 많잖아?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 뭔가 있을지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어딨어요.”

“상호 똑똑해? 의사야?”

“그건 아니지만……. 알 만큼은 알죠. 사람은 언젠간 썩어요.”

“상호 사람 몸 잘 알아? 그래서 누나 몸도 잘 아는 거야?”

“…….”

“어쩐지, 처음치곤 너무 잘 알더라구~.”

그때 무너진 건물 옆에서 무언가가 슬금슬금 나타났다.

보랏빛 멍이 든, 사람을 닮은 무언가가. 다리를 질질 끌며 넓은 길로 걸어 나왔다.

상호는 그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나? 저거…….”

“응?”

예경이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무언가가 둘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콰직

“아잇…….”

지윤이 질겁을 하며 손을 털어냈다.

손에 묻은 살점과 체액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그중에는 뇌로 추정되는 분홍색 조각도 있었다.

“이기 다 머꼬, 드러버 죽겄네 진짜…….”

“너 이제 좀비됨.”

“닥치라 마. 쌤예. 이거 뭡니꺼? 사람 아입니꺼?”

“사람 맞아.”

상호는 검에 묻은 살점을 털고 말을 이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그대로 죽어있질 못해.”

“여기라 카믄…… 일본 말입니꺼?”

“그건 모르겠다.”

땅에 무슨 저주라도 걸렸는지, 이곳에서 죽은 사람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 방황하는 시체가 되었다.

“여기만 그런 건지, 아르게스 전부가 그런 건지는 나도 잘 몰라. 다만 하필 여기만 그럴 가능성보다는…… 아르게스 전부가 그럴 가능성이 더 높겠지.”

상호의 말을 들은 지윤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그라믄…….”

지윤이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상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그 이야기를 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렸다.

길을 계속 걸으려는데 옆에서 태화가 덜덜 떠는 게 보였다.

“태화야?”

“……으.”

태화가 팔짱을 끼고 몸을 움츠렸다.

“쌔, 쌤……. 쌤은 안 추워?”

“아니, 이럴 정도는 아닌데……. 너 어디 아파?”

“모르겠어, 너무 추워…….”

몸을 떠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감기일까. 아니면 식중독으로 생긴 오한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아르게스에 와서 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상호는 태화를 곁에 붙이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빨리 따뜻하게 해줘야겠다. 지하가 있는 건물 찾아보자.”

“네.”

그와 아이들은 서둘러 주변을 수색해 나갔다.

* * *

다행히 덜 무너진 지하를 찾을 수 있었다.

주워온 침대의 먼지를 털고, 위에 우비를 깔고, 그 위에 태화를 눕히고 불을 조그맣게 피웠다. 공간이 넓어서 연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잠을 잘 때는 꺼야겠지만.

상호는 아직도 덜덜 떠는 태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나아지는 것 같아?”

“추운 건 덜한데…….”

태화가 얼굴을 찡그렸다.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주변이?”

주변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말없이 태화를 바라보고 있을 뿐.

상호는 당황해서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걸까.

“쌤은 안 들려? 사람……. 사람이 너무 많아…….”

“뭐가?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태화야, 내 말 들려?”

“나한테 소리치지 마…….”

태화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못 알아들어……. 못 알아듣겠다구……. 나한테 소리치지 말라니까……. 소용없다고…….”

“…….”

대체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 상호는 멍하니 태화를 바라보다가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태화 잘 보고 있어. 계속 주변 경계하고.”

“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호는 지하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주변은 한없이 고요했지만, 이제는 누가 아우성을 치고 있는지 확신하고 있었다.

뽑은 검에 초혼강기가 타올랐다.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면…….’

남김없이 불로 태워버리면 된다.

그는 땅을 박차고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 * *

“으아…….”

예경이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잤네.”

“그러게요.”

상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지난밤. 살아 움직이는 시체를 죽이고 잘 만한 곳을 찾아 주변 건물들을 뒤지다가 숙박시설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해 잠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예경이 두꺼운 솜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이리저리 굴렀다.

“상호 잘 잤어?”

“네.”

“오늘은 부대로 돌아가네~.”

“그러게요.”

“상호 뭐가 제일 먹고 싶어?”

“누나요.”

“꺅!”

예경이 거북처럼 이불 속으로 머리를 숨겼다.

“어떡해! 어떡해! 상호가 변태가 됐어!”

“누나 앞에서야 몇 번이고 될 수 있죠.”

“그치만 효은이도 노리고 있잖아~.”

“……그거 다 오해라니까!”

“오예겠지이~. 민정이 언니도 응큼한 눈으로 보던데에~.”

“제발 제자를 쓰레기로 만들지 말아 주세요…….”

머잖아 잠에서 완전히 깬 그들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부대원들 몇몇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고, 명욱이 지도에 뭔가를 끼적이고 있었다.

명욱의 시선이 민정을 향했다.

“민정. 마법이 아닌 게 확실해?”

“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럼 주술인가? 영주. 네가 보기엔……. 영주. 듣고 있나?”

“네? ……아아.”

영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

“귓병인가?”

“아닙니다. 주술적인 거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욱은 고개를 기웃하다가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상호, 예경. 일어났나?”

“예.”

“네.”

“효은이만 일어나면 되겠군. 바로 출발할 수 있게 미리미리 준비해. 어차피 돌아갈 거니까 언제 출발하든 상관은 없지만…… 다들 1분이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을 거 아냐? 알아서들 해.”

“넵!”

대답하는 대원들 사이에서 상호가 손을 들었다.

“대장님.”

“응?”

“걔 지금 어디 있는데요?”

“…….”

명욱과 예경의 시선이 마주쳤다.

“……저기, 두 번째 방에 있다.”

“넵.”

상호는 짧게 대답하고 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이어 뭔가 부러지는 소리와 소년의 고성, 소녀의 비명이 문을 뚫고 튀어나왔다.

“야, 이년아. 일어나! 불침번도 똑바로 안 서는 새끼가 늦잠까지 쳐자면 어쩌라는 건데!”

“꺄악! 꺅! 너 뭐야! 안 나가?! 야, 이불 놔! 놓으라고 했어! 나 이불 밑에 알몸이야! 변태새꺄!”

“지랄하네, 빨리 이불 내놔! 아니면 니가 밖으로 나오든가!”

“아 씨, 춥다고! 꺼져 진짜! 대장 아저씨! 민정이 언니! 예경이 언니! 이 미친놈이 나 덮쳐!”

“야!”

우지끈 쾅

그 소리를 들은 대원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입맛을 다셨다.

“모닝 키스가 격렬하네.”

“젊은 게 좋아. 그쵸?”

“얌마, 왜 날 보면서 말하냐? 늙었다고 먹이는 거야?”

“어쨌든 빨리 출발하겠네~.”

“좋은 게 좋은 거지.”

“…….”

예경은 곤란한 듯 웃었다.

* * *

“……으.”

상호는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자꾸만 옛 기억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현실의 모든 감각을 밀어내고, 꿈보다 더 선명하게.

느려터진 시체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되진 않았지만.

크아아……

퍼억

“……쳇.”

그는 건물의 잔해 속에서 기어나오는 시체에 강검을 박았다. 시체는 곧 재도 남기지 않고 불타 사라졌다.

시체에서 뭔가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나한테도 들리는 건가?’

아니면 그냥 환청일까.

상호는 죽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시체들을 하나씩 찾아 불태워 나갔다.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목소리와 꿈을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이 지역에서는 더 이상 움직이는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효과가 있을는지…….’

이게 원인이 맞았을까. 아직은 알지 못한다.

돌아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으리라. 상호는 몸을 돌려 아이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잠들었어요.”

세희가 곁에 누운 태화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라고 횡설수설하다가 갑자기 픽 잠들었어요. 지금은 조용한 거 보면 점점 나아지는 것 같긴 한데…….”

“으음.”

상호는 태화의 몸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이전보다는 확실히 더 나아진 듯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원혼들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더 잡아야 되겠네. 너흰 불침번 정하고 자.”

“제가 잡을 테니까 선생님이 주무세요. 선생님 어제 불침번 섰잖아요.”

“아니, 안 돼.”

그는 단호하게 손을 내젓고 문가로 향했다.

“여긴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런데도 내가 모르는 게 더 있을지도 모르지. 절대 단독행동은 하지 마.”

“……네.”

세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어기지는 않을 터. 상호는 나빛과 지윤을 한 번씩 돌아보고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잘 자고 있어. 다녀올게.”

“네에…….”

“다녀오이소.”

등 뒤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 * *

화르륵……

몇 마리, 아니 몇 명째가 되었을까.

구태여 세지는 않았지만 어림잡아 세 자리는 되었으리라. 그러나 그마저도 이 땅에서 죽은 사람들의 총합에 비하면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상호는 그 사실을 알았고, 검을 멈추지 않았다.

“……윽.”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 눈앞의 골목에 하얀 머리 소녀가 스쳐 지나갔다.

나빛보다 조금 더 키가 크고, 눈빛이 표독한 소녀.

‘미치겠네.’

이미 미쳤는지도 모른다. 상호는 이마를 짚고 잠시 검을 쉬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검을 찬 중년인이 그를 등지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미친 게 맞군.’

그는 고개를 툭 떨궜다.

다시 고개를 들면 무엇이 보일까. 어쩐지 두려우면서도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놓아주지 못한 기억과 감정이 눈앞에 나타나 줄까봐.

그 어느 때보다도 고되고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상호야…….’

흐릿한 목소리 사이로 현실의 육성이 끼어들었다.

“정말 숨어들어오는 것 하나는 쥐새끼처럼 잘하는군요.”

익숙한 목소리.

눈을 들어 보니 시커멓게 뒤틀린 시체가 하나 서 있었다.

“귀하가 벌써 여기까지 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원혼들이 난리를 치지만 않았다면 쭉 몰랐겠지요. 먼젓번엔 인사를 드리지 못했지만…… 오늘은 특별히,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너.”

상호는 몽롱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누나를 봉인한 거…… 너 맞지?”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처음에 약속했지.”

그의 검이 지배의 악마의 얼굴을 겨눴다.

“네가 어디 있든, 반드시 찾아내서 죽일 거라고…….”

“그 약속을 지키러 온 겁니까?”

시체가 실소하며 엄지로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갈기가 붉은 사자 수인과 하얀 백의를 입은 촉수 덩어리가 수많은 악마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쉽게 생각하셨습니다. 여긴 우리 땅이지요. 귀하는 그 뜻을 알기에는 주술적으로 너무 멍청하지만……. 곧 몸으로 깨닫게 될 겁니다.”

상호는 피식 웃었다.

“너흰 여기 오면 안 됐어.”

검에서 검푸른 강기가 솟았다.

“너흰 차라리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내가 확신을 가지진 못했을 텐데…… 너희가 굳이 찾아오는 바람에, 확실하게 알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희 신님께서 오질 않았잖아.”

그는 이제 대놓고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너희 땅인데, 너희 신님은 안 왔다. 그 말은 내가 너희 땅에서 너희 신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이잖아. 그러면 안 됐어. 나는 이제 확실히 알아버렸다.”

한 자루 칼. 한 사람의 몸.

거기서 쏟아지는 기운이 어찌 이토록 클 수 있을까. 지배의 악마의 마음속에 한 자락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저자의 기운에 압도당한 것은 마나나 영혼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백. 기세.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명료한 마음 때문.

“……그렇습니까.”

지배의 악마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허나 그분이 오시지 않는 이유는……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잘도 지어내는구만.”

“그분은 지금도 우리의 눈으로 귀하를 보고 계십니다.”

상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

“그분께는 귀하가 여기 있든, 그분 코앞에 있든 다 똑같습니다.”

지배의 악마의 곁으로 악마들이 줄지어 섰다.

“언제든지 우리의 눈으로 귀하를 보실 수 있고, 언제든지 문을 열어 이곳에 오실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그저 항상 완벽한 것을 추구하시는 분이라…… 조금 더 안전한 길을 선호하는 것뿐이지요.”

“아니, 뭔 말을 하나 했더니…… 결국 겁이 났다는 걸 번드르르하게 포장한 거잖아.”

상호는 코웃음을 치고 검을 휘둘렀다.

화르륵……

악마에게 빙의당한 시체가 불타 사라졌다.

“속이는 데에는 재능이 없구만. 하긴 그건 네놈 친구 특기였지. 그 녀석 정도가 아니면 날 속일 생각은 말았어야 했는데. 안타깝게 됐네.”

“안타깝긴 하겠지요.”

얼굴 없는 악마들 중 하나의 얼굴이 갈라지며 입이 드러났다.

“본인이 죽는데 안타깝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희가 안타깝게 됐다고, 임마. 사람 말을 덜 배웠네.”

상호는 검지를 까딱였다.

“뭐 인사는 이쯤 하면 됐고…… 시작할까. 너희 땅에 뭐 대단한 게 있길래 그렇게 자신이 있는지…… 한번 보여줘 보라고.”

“그러지요.”

악마도 웃었다.

“보여드리겠습니다. 우리도 찾아온 이유가 있다는 걸……. 우리의 셈이 맞을지, 귀하의 셈이 맞을지,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그 말을 끝으로 악마의 입이 닫히고, 악마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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