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485. 점진
“오늘은 여기까지군.”
명욱이 메모를 마치고 지도를 접었다.
“내일도 오늘처럼 진행한다. 다들 수고했다. 숙영지 찾고 자자.”
“예.”
모두가 피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숙영지로 정해진 곳은 산 끝자락의 거대한 바위 뒤편이었다. 조금 더 숨기 좋은 곳을 찾기에는 12명은 너무 많았다.
탐색하는 동안 잡아놨던 식량을 구워 먹고, 민정의 물 마법으로 간단한 세면세족을 마치고, 이제 불침번을 정할 시간.
명욱이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열두 명이니 하루에 여섯 명씩 돌리면 되겠지. 초번은 효은. 그다음이 상호. 도현, 성철, 나, 경준으로 한다. 불만이 있어도 참아라. 순번은 계속 돌릴 거니까.”
다들 군말 없이 저마다 자리를 잡고 누웠다. 효은만 빼고.
그러나 상호는 효은이 불침번을 서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인간은 보나마나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꾸벅꾸벅 졸고 말 거라서.
그와 예경의 귀한 목숨을 저딴 무책임한 인간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X발, 잠을 못 자겠네…….’
그래서 눕기만 하고 눈은 뜬 상태였다. 효은을 등지고, 귀를 활짝 연 채.
그때 곁에 누운 예경이 그의 볼을 문질렀다.
“상호 왜 안 자?”
“……그냥, 잠이 잘 안 와서.”
상호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예경의 눈꺼풀을 검지로 지그시 내리눌렀다.
“누나는 얼른 자요. 불침번도 아니잖아요.”
“그럴까…….”
예경은 곧 고른 숨을 쉬며 잠에 빠졌다.
다른 대원들도 끼리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하나둘 잦아들었다. 상호와 효은을 빼고는 모두 잠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호는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하필 다음 순번이네, X바…….’
지금 자봤자 몇십 분밖에 못 잔다. 차라리 잠을 안 자는 게 덜 피곤할지도 몰랐다.
그냥 계속 깨어 있자. 상호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속으로 효은을 씹어대는데, 갑자기 효은이 서 있던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뭐여.’
걸음이 지척까지 다다르자 상호는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괜히 깨어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곁에 효은이 쪼그려 앉는 게 느껴졌다.
‘뭐 하는 건지…….’
설마 잘 때 성창으로 찔러버리려는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년이다. 불안해진 상호는 슬그머니 눈을 떠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쪼그려 앉은 효은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 자네.”
“뭐.”
“왜 안 자냐?”
“내가 언제 자든 뭔 상관이야.”
“안 잘 거면 나랑 놀아주든가.”
“꺼져, 이제 잘 거야.”
그는 콧방귀를 뀌고 돌아누웠다.
그렇게 깨어 있을 거라 결심했지만, 무심코 깜빡 졸아 버린 게 몇 분이 되었을까.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효은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야.”
“또 뭐.”
“니 차례야, 멍청아. 일어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믿을 수 없었던 상호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일어나 효은의 손목을 잡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진짜네.’
딱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02시 00분.
5분쯤, 아니 10분은 더 일찍 깨울 줄 알았는데. 웬일로 이 인간이 시간 약속을 지킬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몰랐다.
그는 효은의 손목시계를 끌렀다.
“잠깐 빌린다.”
“X나 자연스럽네. 소매치기였냐?”
“잠이나 자.”
효은은 그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누웠고, 상호는 일어나서 검을 잡은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자꾸 하품이 나왔다.
‘졸려 뒤지겠네…….’
총을 잡았을 때도 많이 서봤고, 검을 잡은 후로도 가끔 섰었지만, 그래도 이 피곤함만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두 시간씩 섰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는 먹을 수 있는 풀을 하나 찾아 질겅이며 한 시간을 버텼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째가 되어 있었다. 다음 순번은 도현. 상호는 자고 있는 대원들 사이에서 도현을 찾아 걸어다녔다.
그런데 효은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야.”
“넌 왜 안 자고 있냐?”
“나 화장실 좀 같이 가줘.”
“……화장실?”
상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까 안 가고 뭐했어?”
“마려워진 거지, 등신아.”
“니가 애냐? 혼자 못 가?”
“애는 니가 애지 새꺄. 그래, 무섭다. 어쩔래? 싫으면 가지 말던가. 근데 니 자다 일어나면 온몸이 젖어있을 수도 있어.”
“미친년……. 기다려봐.”
불침번은 있어야 하니까. 그는 도현을 찾아 어깨를 흔들었다.
“형. 형.”
“……으음.”
“형 차례예요. 일어나요.”
“응……? 벌써? 아직 안 된 것 같은데…….”
“맞다니까요. 저 쟤 화장실 따라가야 되니까 얼른 일어나요.”
“이상하다…….”
도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끔뻑였지만, 상호는 그를 내버려두고 효은과 함께 숙영지를 벗어났다.
조금 멀리 왔다 싶었을 때. 효은이 나무 뒤에 자리를 잡았고, 상호는 고개를 돌렸다.
“빨리 싸.”
“좀 떨어져, 등신아.”
“지가 데려와 놓고…….”
이럴 거면 데려오지를 말든가. 그는 이를 갈며 효은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수녀복 걷어 올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그만 물소리가 들렸다.
‘오래도 싼다, X팔…….’
그런 생각을 하며, 오만 쌍욕으로 효은을 씹어대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어?’
상호는 흠칫하며 그 방향을 돌아보았다.
숙영지는 오른쪽. 진동이 느껴진 곳은 왼쪽. 효은이 있는 곳도 왼쪽.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가 있었지만, 분명하게 무언가가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
상호는 다급히 효은에게 다가가 입을 틀어막았다.
“읍……!”
쪼그려 앉은 효은이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지만, 상호는 효은이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팔까지 꽉 부둥켰다.
“가만히 있어.”
“으웅! 욱! 우웁!”
“가만히 있으라고!”
상호가 윽박지르자 효은의 버둥거림이 잦아들었다.
잘고 얕은 진동을 보아 아마도 몬스터 무리. 무리가 아니라면 발이 수백 개 달린 거대괴수. 어느 쪽이든 이 야밤에 싸우기는 귀찮은 상대였다.
사실, 부대원들을 다 깨우면 잡아 죽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겠지만, 솔직히, 아주 솔직히, 상호는 제발 잠을 좀 자고 싶었다.
지금 저놈을 맞닥뜨렸다간 잠을 못 잔다.
‘제발 조용히 꺼져…….’
상호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효은의 입을 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 효은이 몸을 덜덜 떠는 게 느껴졌다.
‘추운가?’
입 밖으로 내었다간 병신 취급받았을 테지만, 상호는 그걸 알 리가 없었던 데다가 입 밖으로 낼 상황도 아니었다.
앞에서 쪼르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덜 쌌었나…….’
진동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설마 들킨 걸까.
‘……젠장.’
그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나무 위, 숲속의 좁은 밤하늘 끝자락에서 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구름인지, 혹은 그림자인지 구별할 방법은 없었지만,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만은 그 그림자에게 얼마만큼의 무게가 있는지 여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다행히 방향은 그들을 조금 빗겨나가는 중이었다.
‘……휴우.’
그래도 긴장을 풀지는 않았다.
효은도 이제는 진동을 느꼈는지, 몸의 떨림을 멈추고 상호에게 가만히 안겨만 있었다.
이윽고 놈의 그림자가 하늘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상호는 효은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푸하.”
효은이 숨을 몰아쉬다가 빽 소리쳤다.
“깜짝 놀랐잖아, 미친 새끼야!”
“뭐 어떡하라고. 시간이 없는데.”
“말로 하면 덧나?! 이 변태 새끼야, 싸고 있는데 그렇게……!”
“난 애새끼라 그런 거 모르겠는데?”
지가 평소에 해왔던 말이면서. 그는 어깨를 들썩이고 혀를 찼다.
“찌린내는 오지게 나더라. 다 쌌으면 빨리 꺼져. 나도 좀 싸고 가게.”
“개새끼…….”
효은은 그를 노려보고 일어나서 나무에 등을 기댔다.
“빨리 싸.”
“굳이 기다린다고?”
“빨리 싸라고! 등신아, 그냥 나 먼저 간다?!”
“난 상관없는데?”
“……빨리 싸!”
혼자 가기가 무서운 모양이었다.
숙영지까지 멀면 얼마나 멀다고. 상호는 툴툴거리며 지퍼를 내렸다.
한바탕 쏟아내고 돌아서는데 효은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야!”
“뭐 병신아. 그나마 애새끼가 아닌 구석이 있긴 있었네.”
“아니, 진짜 미친년이……!”
그걸 다 보고 있었을 줄이야. 상호는 새빨개진 얼굴로 황급히 지퍼를 올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패고 싶었으나,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그랬다가는 결백을 증명할 수가 없어서 간신히 참았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머리끄덩이를 휘어잡고 있었지만.
‘진짜 씨, 녹음기를 들고 다녀야 되는데…….’
그는 이를 갈며 효은을 째려보고 숙영지로 걸음을 옮겼다.
숙영지에 도착하니 그와 효은을 발견한 도현이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상호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지 못한 채 예경의 곁을 찾아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효은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야, 야…….”
“뭐이 씨…….”
대체 또 무슨 용건으로 잠을 못 자게 할 셈이냐. 상호는 욕을 일발 장전하고 효은을 돌아보았다가, 효은이 다리를 배배꼬며 당황하고 있는 것을 보고 덩달아 당황했다.
얘가 왜 이러나.
“뭔데?”
“나, 나 속옷 떨어뜨렸나 봐…….”
“뭐?”
상호는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끔뻑였다.
“그걸 왜 떨어뜨려?”
“니가 덮쳐서 그렇잖아, 등신아!”
“조용히 해! 사람들 다 깨잖아, 미친년아!”
“너 때문이잖아! 니가 가져와!”
아주 생떼를 쓴다.
니가 가라고 해도 절대 갈 리가 없다. 상호는 벌레 씹은 표정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
‘진짜 씨, 저거 언제 한번 조져야지…….’
그런 그의 등에 대고 효은이 쏘아붙였다.
“깨끗이 빨아와. 흙 묻은 거 들고 오지 말고.”
“…….”
지금 조지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 * *
‘어휴…….’
살다살다 여자 속옷을 빨게 될 줄이야. 그것도 예경이 아닌 다른 여자의 것을.
상호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숙영지로 돌아왔다.
‘진짜 뒤지게 패야 하는데…….’
속옷을 주워오라 한 것도 빡치는데 빨아오게까지 시키다니. 덕분에 1km 넘게 떨어진 강을 찾아가 빡빡 빨고 왔다.
그를 본 도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완전 잡혀 사는구나.”
“……그런 거 아니거든요.”
상호는 톡 쏘아붙이고 효은을 찾았다.
효은은 이미 바닥에 누워 곤히 자는 중이었다.
‘이 년이 진짜…….’
빨아오라고 시켰으면 적어도 기다리기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설마 입히기까지 하라는 걸까. 그는 홧김에 속옷을 효은의 얼굴에 집어던질 뻔했다.
‘……X팔.’
더 소란피우지 말고 빨리 자는 게 나을 듯했다.
상호는 효은의 속옷을 찝찝한 눈길으로 쳐다보다가 주머니에 대충 밀어 넣었다. 내일 아침에 몰래 주든가, 안 받아가면 그냥 버려 버리면 될 일이라 생각하며.
그러고 예경의 곁에 누워 잠을 자려는데.
손목에 찬 효은의 시계에 생각이 닿았다.
‘……응?’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도현을 향해 달려갔다.
“……형, 형.”
“응?”
“시계 있어요?”
“있지.”
도현이 손목을 내밀었다.
상호도 손목을 들어 효은의 시계와 도현의 시계를 확인했다. 둘 다 디지털 시계였다. 그러나 표시된 시각은 달랐다.
도현의 시계 03시 31분.
효은의 시계 03시 46분.
‘…….’
도현의 시계보다 15분 빠른 효은의 시계.
그리고 그가 깨어난 시각. 02시 00분.
‘……아.’
상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 * *
“야이 X발년아아아아!”
새들이 숲 위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너 X발 진짜……, 야, 뒤질래? 야, 눈 피하지 마. 야!”
“상호야, 뭔데? 무슨 일인데…….”
“야!”
칼을 빼든 상호를 예경이 붙잡았다.
지난밤, 효은의 시계가 15분 빨랐다는 것을 확인한 뒤. 화가 나도 잠은 자야 한단 생각에 억지로 누워 잠을 청했지만, 속에서 천불이 나는 통에 도저히 잠들지를 못하고 밤새 애를 끓였다. 덕분에 상호의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효은은 본 척도 안 하고는 하얀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새침하게 쓸어 넘겼다.
“흥.”
“흥? 야, 이리 와. 이리 오라고. 누나 진짜 이거 놔요, 쫌!”
“상호야.”
예경이 그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왜 그래, 응? 말을 해봐.”
“아니 쟤가……, 아니…….”
상호는 예경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말을 똑바로 하고 싶은데 흥분을 해서 그런지 잘 되지가 않았다.
“쟤가 불침번 서라고 깨우는데, 저는 쟤 시계 보고 제때 깨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쟤가 시계를 15분 뒤로 땡겨놔서……. 나는 두 시 정각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한 시 45분에 깨운 거였다고요……. 그리고, 그리고…….”
둘을 지켜보던 명욱이 효은을 바라보았다.
“효은. 진짜냐?”
“아니요?”
효은이 코웃음을 쳤다.
“다 지가 지어낸 거예요.”
“지랄 마! 너 이 X발……!”
“증거 있어?”
“……뭐?”
상호의 몸이 굳었다.
“……증거? 야, 너 지금 니가 사기를 쳐놓고…… 뭐? 증거?”
“그래, 증거. 중딩한텐 어렵냐? 증거 몰라?”
“아니 씨……. 아, 그래.”
증거라면 당연히 있다. 무엇보다 확실한 물증이.
상호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풀어 효은의 눈앞에 흔들었다.
“야, 이거. 이게 있잖아. 안 보여? 다른 사람들 시계보다 훨씬 빠르잖아! 대장님, 이거 함 보세요. 대장님 시계랑 비교해 보…….”
“그걸 니가 안 바꿨다는 증거 있어?”
“……뭐?”
말문이 턱 막혔다.
세상에 그런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상호는 어이가 없어 다리에 힘이 탁 풀릴 것만 같았다.
“무, 뭐……어?”
“증거 있냐고. 없잖아. 너 진짜 생떼 오지게 쓴다. 애냐?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야?”
“야……, 야.”
덜덜 떨리는 상호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뒤를 돌아보니 예경이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 애매모호한 웃음.
상호는 그게 꼭 자신을 의심하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누나…….”
“상호야. 효은이가 진짜 그랬어?”
“다 진짜예요, 나 거짓말 안 해요…….”
그 말에 예경이 명욱을 돌아보았다.
“거짓말 아닌 것 같아요.”
“……흠.”
그때 도현이 명욱의 옆에 끼어들었다.
“잠깐만, 잠깐만. 대장님.”
“응?”
“잠시 저랑 이야기 좀…….”
명욱은 도현에게 이끌려 모두에게서 멀어졌다.
상호는 명욱의 귀에 속삭이는 도현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도현도 지난밤 효은의 시계 때문에 15분 일찍 일어난 사람.
즉 효은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형이라면…….’
이제는 그의 결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상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역시나, 도현의 말을 들은 명욱은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진실은 언젠간 밝혀지고, 하늘은 악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호는 그를 향해 다가오는 도현과 명욱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맞이했다가.
“거 보세요, 대장님. 제가 뭐라…….”
“상호. 효은이랑 그런 사이였나?”
“……고으에?”
혀가 꼬여버렸다.
이건 또 무슨 염병의 시작인가. 상호는 얼이 빠져서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도현과 명욱을 바라보았다.
“어으……, 어……. 뭐라굽쇼?”
“도현이가 다 말해줬다. 안 숨겨도 돼.”
“아니 그니까 그게 무슨…….”
명욱이 주변의 대원들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상호 너, 불침번 끝나고 효은이랑 어디 갔다 왔다며.”
“네.”
“도현이가 다 들었댄다. 빨리 싸라느니, 너 먼저 가라느니……. 이해한다. 너흰 나이가 비슷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뭐요?”
이게 뭔 소리야. 상호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그건…… 소변 보고 온 거예요!”
“우리도 알 거 다 안다, 상호야. 너희가 애도 아니고 다 컸는데 왜 소변을 같이 보러 가겠냐. 다 안다, 다 알아.”
“아니 X발! 아니라니까!”
개가 되어 버릴 것만 같다. 아니, 게가 되어 버릴 것도 같다. 상호는 바각바각 게거품을 물며 뒷목을 잡고 비틀거렸다.
“쟤가 무섭다고 같이 가달라 해서 같이 가줬고! 그러다 나도 마려워서 좀 쌌고! 그냥 그게 끝이에요! 아무 짓도 안했다니까!”
“아, 알았다. 그러니까 그냥 잠깐 불장난한 거라 이거지? 알았다, 알았다. 나랑 도현이만 알고 있을게.”
명욱은 니 마음 다 이해한다는 듯 상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게 상호의 속을 더 새까맣게 불태우는지는 모른 채.
“아니……, 아니! 쟤한테 한 번 물어봐요! 확인해 보라고요, 절대 아니라고 할 테니까! 그럼 되잖아!”
“그야 효은이는 여자잖냐. 여자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부끄러워할 게 당연하지. 우리끼린 안 숨겨도 된다. 남자 아니냐, 백상호.”
“느아아아아아악!”
이 병신 같은 부대에 더는 있을 수가 없다. 상호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예경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예경이 쓰디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호야.”
“……누나?”
“상호는 좀 더 어린 누나가 좋았구나…….”
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니 누나! 누나까지 왜 그러는 거예요! 진짜 아니라니까!”
“그래도 누나는 상호 사랑해…….”
“나도 누나밖에 없다니까요……. 제발 좀 알아줘요…….”
상호는 질질 흐르는 눈물 콧물을 닦기 위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마침 무언가 보드라운 천 쪼가리가 있었다.
“크응…….”
상호는 그 천 쪼가리에 코를 풀었다.
그런데 천의 모양이 어째 이상했다. 삼각형인 듯도 하고. 양쪽에 구멍 같은 게 있기도 하고.
그는 그 천 쪼가리로 코를 문지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거…… 설마…….’
그를 바라보던 예경도.
그를 향해 다가오던 명욱과 도현도.
먼발치서 쳐다보던 민정과 대원들도, 새침하게 등을 돌리고 있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그를 돌아본 효은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굳었다.
‘……아.’
상호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쌤!”
다급한 목소리.
상호는 태화의 목소리를 듣는 즉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의식적으로 붙잡은 검의 감각이 뒤늦게 뇌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그 어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왜.”
“시간 다 됐엉. 이제 쌤이 불침번이야.”
“얌마, 그걸 그렇게 절박하게……. 끄응.”
마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려다 주변에서 끙끙대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다들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중이었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어디 아파?”
“자…….”
“자고 있었는데, 선생님이…….”
“……아.”
그러고 보니 팔베개를 해주고 있었는데.
상호는 다급히 아이들의 혈을 눌러 잠들게 했다.
“우웅…….”
다행히 아이들은 금세 다시 잠들었다. 다시 일어나면 기억에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옆에서 태화가 그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쌤, 쌤.”
“응?”
“나 잘 때까지 팔 줘.”
“……그래, 그래.”
어차피 혈 누를 건데 뭐. 상호는 다시 누워서 팔을 옆으로 뻗었다.
태화는 하품을 하고 그의 팔에 머리를 누였다.
“혈 누르지 마.”
“왜.”
“이대로 자는 게 좋아. 어차피 졸리구…….”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그러겠다면야. 그는 팔을 내어준 채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꿈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런 적도 있었지…….’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있었던 일.
그 일 이후로 상호는 반쯤 미쳐버렸고, 그나마 사람의 마음은 남겨둔 채 당분간 작전에만 집중했지만, 효은과의 ‘그 일’이 일어난 이후로는 그마저도 포기하고 개가 되어버렸다.
‘잘 생각해보니 이렇게 잡혀 살 이유는 없었던 것 같기도…….’
그러면 뭐 어쩔 것인가. 이겨먹을 수가 없는데.
어차피 이제는 다 지난 일이다. 상호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돌려 자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지금에만 집중해야지.’
지금은 지금의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그는 잠이 다 깨어 말똥말똥한 눈으로 불침번을 서며 밤을 지새웠다.
* * *
“푸우…….”
가칠가칠한 손이 물에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나빛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진짜.”
“헤헤헤…….”
“내 물은?! 내 불은?!”
“그건 내가 구할 수 있어.”
“편애! 죽어!”
태화가 소리치며 검은 불꽃의 화력을 확 올렸다.
불꽃의 위쪽에는 성력으로 만든 대야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태화가 마법으로 만든 물이 담겨 있었다. 세수를 마친 상호는 손을 탈탈 털고 뒤로 물러났다.
“됐다. 쓸 사람 써.”
“네~.”
“야, 야. 물 버리지 마. 그거 다 먹는 거야!”
“……뭘 먹어!”
“아이, 이게 다 엑기스라니까! 몸에 좋은 게 다~ 우러난 거야! 강상호 육수라고, 강상호 육수. 버섯 뚜껑 물처럼…….”
“선생님, 진짜예요? 이거 몸에 좋은 거예요?”
“진짜겠니……!”
상호가 나빛에게서 황급히 대야를 뺏어 쏟는데, 동굴 입구로 지윤과 세희가 걸어 들어왔다.
지윤이 배를 긁으며 태화를 쳐다보았다.
“마. 비데 이리 온나.”
“내가 무슨 비데야!”
태화의 눈에서 불꽃이 확 타올랐다.
“쌤! 뭐라고 좀 해봐! 이년들이 날 화장실로 알잖아! 세수 시켜줘, 샤워 시켜줘, 이젠 비데까지 하래!”
“태화야, 나 양치하게 물 좀.”
“아아아아아악! 쌤까지 그럴 거야?! 쌤도 그럴 거야?! 쌤도 이제 나 세면대로 쓰고, 샤워기로 쓰고, 비데로 쓰고 변기로 쓸 거야?! 그런 거야?!”
“물이나 달라고, 임마.”
“마려우면 대충 뚜껑 열고 싸고! 다 싸면 닫아버리고 돌아설 거냐고오오!”
“됐다 임마. 안 하고 말지.”
“자!”
태화의 손가락 끝에서 물총이 쏘아졌다.
세수와 양치를 마친 상호와 아이들은 동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입구에 걸어놨던 우비를 개고, 가방을 메고, 생선 찌꺼기와 세숫물 등을 화염 마법으로 싹 태워버렸다.
그런 뒤 바닷물을 한 바가지 퍼서 바닥에 뿌렸다.
‘냄새로 찾지는 못하겠지.’
바다를 통해 돌아서 왔다는 사실은 최대한 늦게 알려질수록 좋았다.
이제 다시 출발해야 할 때. 상호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와서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어제 말한 대로 하루종일 걸을 거야.”
“네.”
“태화랑 나빛이는 걷다가 힘들면 말해. 업어줄 테니까.”
“힘들엉.”
“힘들어요.”
“…….”
괜히 말했다.
둘을 외면하고 걸음을 옮기는 상호의 등으로 태화와 나빛이 달려들었다.
“이리와! 업어줘!”
“업어줘요~.”
“너희 가방을 나 줘. 세희야, 지윤아. 한 명씩 업어라.”
“네. 야, 이리와.”
“아 싫어! 닌 뼈밖에 없어서 아프단 말야! 니가 내 가방 들어. 쌤! 아이씨, 이리 오라고오!”
“업어줘요~.”
“에휴…….”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숲과 산이 우거진 곳을 향해 나아갔다.